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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베드로 1서의 말씀 1,3-9>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4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5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6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9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복음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17-27>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오늘 복음에서 어떤 부자 청년은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마르 10,17)
이 질문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고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하지만 부자 청년의 이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 을 것’이라고 여기는 데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혹 우리도 그렇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당신의 사랑이요, 당신의 선물입니다.
또한 타인과는 무관한 ‘자신의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을 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르 10,21)
이 대답은 그를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그의 실상이 드러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영생을 위해 율법을 지켜왔고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율법을 지켰으나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안했습니다.
곧 사랑을 행하지는 안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기 자신의 결백을 넘어서 오히려 자기 나눔과 선을 실행하라 하십니다.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라 하십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 바로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길이라 하십니다.
한편 이어지는 제자들의 의혹, 곧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르 10,26)라는 의문은 앞의 부자 청년의 질문과는 달리,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구원에 대한 의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마르 10,27)
이는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입니다.
결코 자기 자신의 행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결코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으로는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 선사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어디로부터 떠나왔느냐?'보다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느냐?' 입니다.
사실 , 제자들은 이미 떠나온 이들입니다.
그러나 떠나왔다고 해서 반드시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집과 고향을 떠나온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
(마르 10,21)
그렇습니다.
이제는 이미 떠나온 자기마저 버려야 할 일입니다.
사실 수도자인 우리는 이미 집과 부모를 떠나왔지만, 떠나온 자신을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떠나왔다면, 오늘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느라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신변 안전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넘기고 주님께 속한 주님의 소유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마르 10,21)
주님!
약하지 않으려함이 제게는 부족함입니다.
부족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부족함입니다.
약할 줄을 알고 부족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하고 부족한지라 당신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떠나감, 향해감, 따라감>
오늘 부자 청년과 주님과의 대화 결과는 어찌보면 상당히 엇박자입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주님의 답은 당신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따르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할 것이 뭔지 물는 청년에게 할 것은 달리 없고 그저 당신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한가지 부족했던 것은 주님을 따름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할 것을 물었을 때 주님께서 해야 할 것을 말씀 아니 한 것은 아니고, 십계명의 일부를 지키라고 그에게 하셨지요.
그런데 그 십계명의 일부가 바로 이웃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제4계명에서부터 제10계명까지, 그러니까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에서부터 살인이나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이나 횡령하지 말고 횡령하지 말라는 것까지.
우선 이런 이웃 사랑에 관한 것을 잘 실천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그가 잘 실천해왔던 것이고 그래서 주님도 그런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한가지가 부족했고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십계명의 하느님 사랑 부분인데
문제는 그것을 십계명 그대로 말씀하지 않고 비틀어서 말씀하신 겁니다.
만일 십계명 그대로 한분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며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셨으면 그는 그것도 다 잘 지켰다고 했을 텐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그대로 말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비틀어 말씀하신 거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당신을 따를 때 그것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라는 말씀이었고, 그럴 때 주님을 따라 하늘의 하느님께 갈 수 있으며, 그럴 때 영원한 생명을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많이 얘기하는 만유 위에 하느님 사랑이요 하느님 나라 사랑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들과 이웃 사랑은 이 세상 사는 동안에만 필요한 것이고, 이웃 사랑을 십계명대로 잘 실천할 때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필요한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시작할 수는 있지만 완성할 수는 없고,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끌고 하늘로 오르셔야 하며 끌고 오르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인데, 우리는 부자 청년처럼 하늘로 오르는 것을 마다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제가 수없이 얘기한 것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감'이 필요합니다.
'떠나감’
'향해감’
'따라감’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로 가되 반드시 주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주님은 그 길을 잘 아실 뿐 아니라 당신이 바로 그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로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시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생활공간도 컨테이너로 꾸민 한 칸의 방이 전부입니다.
그 방은 주방이고 침실이며 기도방입니다.
어렵게 살고 계시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평일 미사참례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봉투 하나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난방 기름을 절약하고 쓰고 싶은 것을 절제하여 모은 돈이라고 하시며 꼭 필요한 곳에 써 달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적어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가져오신 돈은 제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과부의 헌금을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한 가지를 선택할 시점이 옵니다.
그리고 선택합니다.
이때야말로 그 사람의 진면목을 봅니다.
가치를 어디에 두고 선택한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 최선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차선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적인 계산이 깔려있다는 것을 본인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른 것은 다 잘 지켰는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는 하나가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의 보화 때문에 하늘의 보물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사실 천상의 보물을 우리 내면의 보물로 삼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준비로 집도 장만하고 값비싼 보석을 비롯하여 혼수품을 다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정적으로 배우자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였는데 그 대상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값진 보석이라도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가치를 잃은 것입니다.
영생을 희망하면서도 그것을 위해 다른 모두를 포기할 수 없다면 결국, 아름다운 보석을 창고에 방치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한 하나를 채워서 하늘의 보물을 차지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일상 안에서 나에게 부족한 하나는 무엇일까?
자존심일 수 있고 체면일 수도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일 수 있고 명예나 지배하는 마음, 자식에 대한 애착일 수도 있으며 남보다 더 많이 배웠다는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시기 질투의 마음이나 눈먼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허영의 우상숭배, 교만의 우상숭배, 돈의 우상숭배에서 지켜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방해하는 '안락함의 문화와 일시성의 매혹'이 강한 이 시대에 부족한 하나를 채울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 하나는, 구원은 내가 충실히 덕을 쌓아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비로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내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말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을 용기 있게 믿음으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분명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이 함께할 것입니다.
자선이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부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거듭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예수님의 말씀, 언뜻 생각하면 부자들을 강력히 질타하고 경고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위 말씀은 반대로 부자들을 격려하고 도와주며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인도하는 사랑의 말씀이 분명합니다.
평생토록 노력하고 또 노력한 끝에 엄청난 부를 축척한 부자들 가운데 참으로 불행한 부자들을 자주 봅니다.
혼자 혹은 가족들 전체가 펑펑 써도 백 년 이상 쓸 엄청난 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신이 영원히 살 것으로 여깁니다.
남은 세월은 길어 봐야 십 년, 이십 년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 막대한 재산에 영원히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으려니 생각합니다.
그 막대한 재산 십분의 일만 쪼개서 극도의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 쫄쫄 굶주리는 이웃들, 쓸쓸하고 외롭게 죽어가고 있는 청년들 위해 관대하게 희사 좀 한다면 참 좋으련만, 죽었다 깨어나도 단 1도 그런 마음이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아까운 재산 남겨두고 가려니 어디 눈이나 제대로 감기겠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자라고 다 같지 않습니다.
참으로 관대하고 너그러운 부자들을 만납니다.
부를 축척하기까지 겪었던 힘든 시절의 고통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료 인간을 향한 측은지심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합니다.
가련한 사람 만나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자자손손 축복하실 부자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든 부자를 다 한꺼번에 싸잡아 경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자들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하루하루 근면 성실하고 정직하게 재산을 모은 부자들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축복과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부정한 방법으로 태산같이 재산을 축적하지만 땡전 한 푼도 나눌 줄 모르는 부자들, 자신의 재물을 일종의 권력으로 여기면서 없는 사람들을 내리누르고 경멸하고 갑질을 일삼는 부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부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초강력 경고 메시지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알렉산더의 클레멘스 교부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은 재산을 지니기만 하면 그것을 무절제하게 사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신앙을 지니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부자들을 절망 속에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재산이 많다 하더라도 그 힘센 마력으로부터 돌아서서 주님만을 찾으며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은 재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 말씀 앞에 부자들께서는 절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부자로서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는 길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면 됩니다.
고민과 성찰 끝에 도출해낸 결론에 따라 관대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면 됩니다.
저는 사목자로 살아가면서 참으로 멋진 부자들을 많이 만납니다.
최선을 다해 맡은 일에 충실합니다.
남들 다 가는 해외 여행 한번 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모으고 또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기부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그분들의 삶 앞에 참으로 큰 부끄러움과 동시에 큰 존경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부자의 모습입니다.
부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지나가는 재물보다 주님의 계명을 더 추구한다면, 주님께서는 부자들을 결코 구원의 대열에서 제외시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자들의 구원을 가로막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거듭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낙타가 바늘귀로>
오늘 복음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은 “특별히 실천해야 할 율법이 무엇입니까?” 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특별히 실천해야 하는 율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자주 토론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라는 말씀은 당신에 대한 그의 태도를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존경한다는 표시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은 아니었고, 그냥 ‘랍비’ 가운데 한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불렀는데, 당시에는 ‘선하신...’이라는 호칭은 하느님께만 사용하던 호칭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너는 나를 사람으로만 생각하면서 왜 그런 호칭을 사용하느냐?”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 사람이 달려왔다는 것은 예수님을 꼭 만나고 싶어 했다는 뜻일 뿐이고, ‘절박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특별히 실천해야 할 율법이나 계명은 따로 없다.
네가 알고 있는 십계명을 잘 실천하면 된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는 말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켜 왔다는 그의 말을 인정하셨다는 뜻이고, 또 그가 위선자가 아니고 진실하고 경건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의 십계명 실천에는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크다는 것, 그것이 그의 부족한 점입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은 “나의 제자가 되어라.”, 즉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르 10,15)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는 어린이 같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재물의 힘으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사람의 힘으로는 들어갈 수 없고,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고 자비입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고, 자기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현세의 재물, 그 두 가지를 모두 차지할 수는 없다는 것 때문에 울상이 되어서 슬퍼하며 떠났는데, 그가 재물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포기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는 평생의 숙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뒷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재물에 대한 그의 애착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입니다.
이 말에는 예수님을 믿기가 싫어서 떠난 것은 아니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는 경건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우이웃 돕기도 잘했을 것입니다.
(물론 재산이 축나지 않는 범위에서.)
그러나 재산을 전부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는 너무나도 실천하기가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앞의 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마르 9,41)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마실 물 한 잔’의 선행으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 것 같은데, 왜 꼭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만 하는가?
잘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모순되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소유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않으면 ‘물 한 잔’을 주는 것도 아까워하게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모든 것을 버렸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람마다 모든 것을 버린 시점이 달랐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어떤 결정적인 시간이 왔을 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도록 평소에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아도, 어차피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모든 것을 놓아두고 떠나야 합니다(1티모 6,7).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사도들과 같은 급의 제자로 삼고 싶어서 사도들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요구를 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어떻든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것은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그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면 바늘귀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낙타가 됩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낙타라고 해도, 회개하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변화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꾸준히 실천하면 누구나 바늘귀 같은 하느님 나라의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 부자는 구원받을 수 없는가?>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옛 사막 스승들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질문입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잘 보면 잘못된 질문임을 깨닫습니다.
‘무엇을 해서(to do)’가 구원이 아니라 ‘무엇이 되어야(to be)’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인 이웃사랑의 계명을 다 지켰는데도 가슴의 허기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부자입니다.
예나 이제나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는 구도자들의 궁극의 관심사입니다.
부자의 문제점을 정확히 진단한 주님의 정확한 충격적인 처방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어려운 요구입니다.
과연 주님의 이 말씀에 응답할 부자가 얼마나 되겠는지요!
참으로 재물의 환상, 우상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이처럼 힘듭니다.
정말 세상의 보물은 가짜요 하늘의 보물이 진짜인데 부자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정말 부자는 많은 재물을 지닌자가 아니라 최소한의 소유로 만족한 자입니다.
이래야 재물욕의 탐욕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부자는 주님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어 주님을 떠나 자기의 길을 갔고 이후의 반응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지지만 아마도 부자의 내적 각성(覺醒)에 부단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후에 주님을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분명 예전의 부자와는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한계를 알아 더욱 겸손해졌을 것이며 부단히 나름대로 구원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점입가경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부자는 구원받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아니 불가능하다는 말씀에 거듭 놀란 제자들의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너무나 당연한 절박한 반응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이 우리에게는 참 다정한 위로가 됩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한 마디로 하느님께는 부자의 구원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분명 가난하다 하여 무조건 하느님 나라 입성의 구원도 아닐 것이며, 부자라 하여 무조건 하느님 나라 입성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유로부터의 자유가 그 관건입니다.
가난한 자가 부자들에 대한 증오와 불만으로 가득하다면, 부자가 소유의 노예가 되어 참으로 빈자들을 무시하고 인색하다면 하느님 나라의 구원은 힘들 것입니다.
말 그대로 회개의 은총이 절대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회개의 은총으로 참으로 재물의 소유로부터 자유로울 때, 최소한의 의식주로 만족하며 이웃에 자선을 베푸는 자비로운 부자라면 하느님 나라의 구원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지족(知足)할 수 있다면 구원입니다.
사실 우리가 잘 나서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입니다.
사실 잘 나서 구원 받기로 하면 세상에 구원받을 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은총이 없으면 아무리 똑똑해도 탐욕의 유혹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따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오늘 복음의 부자에게만 이런 극단적인 처방이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우선적인 일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라’, ‘나를 믿으라’ 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장은 모두 버리고 나눈 후 주님을 따르지는 못할지라도, 제 삶의 자리에서 하루하루 날마다 제 할 수 있는 만큼 사랑으로 비우고 나누며 주님을 따른다면 부자도 가난한 자도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하느님의 회개 은총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선적으로 할 일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계명 조항을 지키는 일이 나무만 보는 경우라면 주님을 따르는 일은 주님의 시야를 지니고 숲을 보는 경우입니다.
계명 준수로 만족함이 유치원 수준의 믿음이라면 주님을 따르는 일은 대학원 수준의 믿음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은총이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고 주님을 따르게 할 것이며, 더불어 소유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점점 사랑의 나눔과 비움도 함께 할 것입니다.
참으로 최고의 보물인 주님을 사랑하여 모실 때 세상 재물로부터 자유로울 것입니다.
주님 보물 앞에는 세상 재물도 빛을 잃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이 깊어질수록 세상 것들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제1독서의 베드로가 이의 모범입니다.
희망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베드로입니다.
참으로 이런 참희망이신 하느님을 모실 때 자유롭고 행복하고 내적으로 부유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궁극의 답을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줍니다.
하느님 은총의 선물인 구원의 희망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주님을 사랑하여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희망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도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런 깨달음의 선물 앞에 세상 재물은 얼마나 덧없고 초라해 보이는지요!
저절로 빛을 잃습니다.
사실 건강 잃고, 또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면 이런 세상 재물들은 아무 쓸모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무지의 탐욕으로 인해 헛것들의 우상에 빠져 살아가는 얼빠진 대부분 부자들입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는 천둥같은 말씀도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백배, 이탈의 사랑으로 더욱 주님을 따르게 합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초대교회 교우들의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견주어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왜소하고 약하고 오염된 난장이 믿음이요, 희망이요, 사랑이요, 감사요, 기쁨인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께 열렬하고 한결같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둘 때 저절로 세상 탐욕으로부터 이탈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합니다.
참으로 사랑으로 나누고 비우며 주님을 따라 홀가분하게 초연한 삶을 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
(2코린 8,9)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세상의 한다하는 사람들이 영생의 불로초를 구하고자 하지요.
영생을 얻고자 종교에 귀의하기도 하고 용하다는 사람에게 재산을 다 갖다 바치기도 합니다.
명약이란 명약을 다 찾아 헤매고 몸에 좋은 음식이라면 인기만점입니다.
'어떤 사람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마르 10,17)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에 대해 여쭙습니다.
그의 열망과 겸손이 느껴집니다.
"선하신 스승님!"
그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에는 그의 바람이 들어 있습니다.
그가 바라는 '영원한 생명'은 그도 잘 알다시피 '받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계명 준수처럼 자기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기에, 그걸 주실 수 있는 분이 선하다면 청하기도 훨씬 쉬울 것이니까요.
하느님 한분만이 선하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는 길을 가르쳐 줄 뿐이고 하느님이 그것을 주실 거라는 뜻이겠지요.
그는 두루두루 갖춘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느님 경외나 종교적 실천은 물론 세속적 재물까지 어느 한 부분 모자람이 없는 듯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부족한 부분, 곧 그의 결핍을 찾아내십니다.
그의 부족함은 바로 '빈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에 빈 곳이 곧 하느님의 자리인데 인간적 능력과 의지, 재물로 꽉꽉 들어차서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비움, 없음'이 없는 존재에게는 하느님께 내드릴 자리가 없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르 10,21)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그를 겁주거나 시험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심으로 "그를 사랑스럽게", 대견하게 여기시며 그가 바라마지않는 영원한 생명을 받는 가장 확실한 팁을 주신 것입니다.
그동안 그가 애써 노력해 성공적으로 이룩하고 쌓아온 것을 '다 필요없다.'고 부정하고 폄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태까지 계명도 잘 지키고 일도 열심히 하며 충실히 채워왔으니, 이제는 다른 차원의 채움을 시작하도록 초대하시는 겁니다.
비우고 버리고 나누는 것이 흔히 생각하듯 상실이나 실패, 낭비가 아니라 하늘 나라의 새로운 질서이고 영원한 생명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불쌍하게도 그 사람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마르 10,22)갑니다.
처음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을 때의 열정과 겸손의 불씨는 사그라지고, 절망과 슬픔으로 처음보다 더 못한 상태가 되어 발길을 돌리는 그의 축 쳐진 어깨가 보이는 듯합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성향상 제도나 조직에 잘 적응하고 주어진 규범에 이의 없이 순종하며 세상 질서에 별 의문 없이 따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어느 선까지 무탈하게 성공 가능한, 말하자면 꽤 운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룰 수 있는 최고치가 바로 복음 속 "어떤 사람"이 도달한 위치가 아닐까 합니다.
이제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제법 누리는 중이고 특별히 더 바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이제는 초월을 꿈꾸어 봅니다.
영원한 생명은 그가 그동안 이룬 것을 바탕으로 손을 뻗어봄직한 보물입니다.
쟁취하고픈 또 다른 재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그의 존재 안에 빈 자리가 나야 하늘 나라의 질서가 들어갈 공간이 생깁니다.
비워야 하는 그것이 그에게는 재물이었지만, 누구에게는 명예일 수 있고 누구에게는 관계나 인맥이기도 하고 또 누구에게는 권력이기도 합니다.
그간의 그의 노고를 비웃거나 억지로 내놓게 하려는 강요가 아니라, 그게 영원한 생명의 원리이기에 그렇게 안내하셨을 뿐입니다.
복음 속 그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그의 체념에 공감이 가고 마음도 불편해진다면,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는 예수님의 말씀에 희망을 걸어 봅시다.
혹 그 사람과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덕과 재물이 사실상 제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았으면 그리 될 수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면, 그동안 이를 가능하게 하신 하느님께서 다음 스텝도 가능하게 해 주실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아직 버리고 비우고 나눌 준비가 되지 않아 뒤돌아서거나 미적거리더라도, 그럴 자유까지 허락하시는 하느님께서 언젠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사람의 것이 온전히 비워지고 하느님의 것으로 온전히 채워지는 구원의 때가 올해에도 어김없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이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분"(집회 17,24)이시니까요.
그런데 그 "때"를 너무 길게 잡고 방심하지는 말아야겠지요.
"죽은 이에게서는 찬양이 그치는 법"(집회 17,28)이고, 통렬한 후회밖에 남지 않을 테니까요.
그 "때" 역시 우리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대견해하시며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시네요.
"너에게 한 가지가 딱 부족하구나. 그것만 있으면 너는 깨달음을 얻어 하늘 나라를 얻을 수 있을 텐데..."
그게 도대체 뭘까 물어봅니다.
벗님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는지요?
예수님은 그에게 이제 버려보라고 하시네요.
비워보라고 하시네요.
나눠보라고 하시네요.
놓아보라고 하시네요.
맞아요!
채우고 쌓고 지키기에만 최선을 다했지만 자유가 없네요.
평화가 없네요.
참 기쁨이 없네요.
하늘 나라는 자유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입니다.
채우기와 쌓기와 지키기만으로는 진정한 하느님 나라를 만끽할 수가 없습니다.
비우기와 버리기, 놓기와 나누기가 필요합니다.
쉽지 않지요.
용기가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벗님은 무엇을 내려놓으실래요?
무엇을 버리실래요?
무엇을 나누실래요?
어떤 길을 택하시겠어요?
현세의 삶으로 만족한다면 채움의 길로 가고 영생을 희구한다면 비움의 길을 택하라고 하시네요.
현명한 선택으로 영생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눈이 내리는 것은 자연현상입니다.
하지만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첫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에게 내리는 눈은 하느님의 축복일 것입니다.
예술하는 사람에게 눈은 작품에 영감을 주는 선물일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눈 내린 마당은 신나는 놀이터가 될 것입니다.
적당히 내리는 눈은 제게도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10인치 이상 눈이 내리면 장난이 아닙니다.
신문사 마당의 눈을 치워야 차가 다닐 수 있습니다.
신문사 앞의 길에 쌓인 눈을 치워야 사람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습니다.
다행히 옆 본당의 신부님이 눈이 많이 내리면 눈 치우는 장비를 가져와서 마당의 눈을 치워 주시니 감사할 일입니다.
대부분의 집은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눈을 치워 놓습니다.
하지만 휴가를 갔거나, 여의치 않은 집은 눈이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믿음의 목적인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쌓인 허물과 죄를 깨끗이 치워야 합니다.
내리는 눈은 보이기 때문에 치울 수 있고, 이웃을 위해서 치워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쌓인 허물과 죄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방치하기 마련입니다.
허물과 죄로 무거워진 마음은 하느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눈을 치우기 위해서는 장비와 삽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쌍인 허물과 죄를 치우기 위해서는 10 계명이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10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은 깨끗해진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10계명은 해야 할 것이 3가지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7가지 있습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고, 주일을 지키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해야 할 계명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 하지 말고, 거짓 증언하지 말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10계명 중에 2가지가 연관된 것들이 있습니다.
이성에 대한 욕망은 간음하지 말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고 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도둑질 하지 말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두 가지는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큰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이성에 대한 욕망 때문에 충실한 부하인 우리아를 죽게 하였습니다.
아합 왕은 욕심 때문에 나봇을 죽이고 포도밭을 빼앗았습니다.
인간을 비참하게 하고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은 욕망과 욕심이 만들어낸 죄와 죽음입니다.
욕망의 덫에 걸려 넘어지는 성직자와 수도자도 있습니다.
욕심의 덫에 걸려 평생 이루어 놓은 명예가 무너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성에 대한 욕망을 품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욕망과 욕심의 유혹이 크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며칠 전에 문자를 하나 받았습니다.
‘그대의 꿈은 무엇인가요?’
저는 문자를 받으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나의 꿈은 무엇일까?’
주교가 되는 꿈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더 높은 자리, 권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게 문자를 보낸 분은 ‘자신의 꿈’은 무엇인지를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은 자라고, 이런저런 봉사를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각자의 꿈은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각자의 꿈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같은 행위를 통해서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열역학 제1법칙은 모든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영구기관’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내가 가진 꿈은 결국 내 삶이라는 에너지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불로 단련을 받는 아름다운 금을 봅니다.
아름다움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들에 감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한 시간들은 아름다운 과거가 될 것이고, 최선을 다할 시간은 희망찬 미래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 은총의 빛으로 순간을 충실하게 살면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신유빈 선수와 룩셈부르크의 니시아리안 선수의 탁구 경구였습니다.
신유빈 선수는 2004년생, 니시아리안 선수는 1963년생으로 자그마치 41살의 나이 차이였습니다.
결과는 신유빈 선수가 이겼지만, 니시아리안 선수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 젊어요.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즐기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 때문에’라는 이유를 들어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즐기는 마음을 갖는다면 포기할 이유는 없어지고 맙니다.
즉 포기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즐길 이유를 찾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많은 이가 신앙생활을 하지 못할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지루해서, 분심이 많아서, 돌 볼 가족이 있어서….
그러나 신앙생활은 즐기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에서 갖는 즐거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부자 청년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는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올바르고 독실한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에 대해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열심히 사는 그를 보며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시지요.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
인간의 윤리 생활은 하지 말라는 것을 어기지 않는 것만으로는 완전하게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완전해지려면 가진 것을 가난한 이에게 줘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 것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부자일수록 더 어렵습니다.
부자 청년도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것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재산의 풍요로움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지요.
무조건 가난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도 하느님의 창조물로 하느님께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고, ‘부’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수 요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는 생명 유지와 사랑 실천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에 대한 애착 때문에 주님께 대한 사랑을 버린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재산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걸림돌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짓는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죄를 자기 마음대로 멈추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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