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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종위원장님의 카톡에서]
🌷20년의 봉급과 맞바꾼
세가지 삶의 지혜🌷
어느산속에
가난한 농부와 아내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살고 있던 가난한 농부가
집을 떠나 다른 마을에 가서
돈을 벌어오기로 했습니다.
예전 우리네 머슴살이와
같은 것입니다.
아내곁을 떠나기 전
농부와 아내는 서로를 향한
믿음을 지키자고 굳게
약속 했습니다.
집을 떠난 농부는 이십일을 걸려
어느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부잣집에서 20년을 일하기로 했습니다.
농부는 주인에게 20년 동안
자신의 월급을 저축해 두기를 부탁했습니다.
드디어 20년이 차서
농부는 주인에게 자신의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둘 중에 한가지를 선택 하라는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20년간 번 돈을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세가지 삶의 지혜를
들을 것인가 -?
선택 하라는 것입니다.
이틀동안 고민한 농부는 20년간
번 돈대신 세가지 삶의 지혜를
듣기로 했습니다.
주인은 미소를 지으며 조목조목
세가지 삶의 지혜를 말해
주었습니다.
“첫째로, 인생에서 지름길을
택하지 말게-,
그러면 대가를 크게 치르고
큰 손해를 볼수도 있네.“
“둘째로, 과하게 호기심을
가지지 말게-,
과한 호기심은 다칠수도 있다네.”
“셋째로, 화가 났을 때 절대로 무언가를 결정하지 말게-,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후회를
하게 된다네.“
주인은 그에게
빵 세 덩어리를 주며 말했습니다.
“첫번째와 두번째의 빵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먹고,
세번째 빵은 집에서 먹게나 !”
농부는
주인에게 감사해 하며
길을 떠났습니다.
첫째 날에 그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는 여행자를 만났습니다.
농부는 대답했습니다.
“20년의 노동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20일이나 걸린답니다.
“여행자가 말했습니다.
“제가 5일밖에 걸리지 않는
더 빠른 지름길로 안내해 주겠습니다.”
농부는 지름길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주인이 해줬던
첫번째 조언이 떠올랐습니다.
농부는 지름길 대신
긴 여정을 선택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상강도의
공격을 피할수 있었습니다.
밤이 되어 농부는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룻밤을 머물기로
했습니다.
그가 잠을 자고 있을 때
큰 울음소리가 그를 깨웠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궁금해져서
그는 일어나서 문을 조금
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해줬던
두번째 조언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집주인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호랑이가 밤에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모두 문을 단단히
잠그고 있었지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농부는 20일이 걸려 집에 도착했습니다.
집에는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부푼 마음으로 그는
창문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집 안을 들여다 보는 순간
기쁨이 충격과 분노로
변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다른 남자를
껴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증오가 그의 마음을 지배했고
그는 달려가서 둘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인이 말해준
세번째 조언을 기억했고
자신을 억제 했습니다.
그날 밤 그는 헛간에서 잠을 잤습니다.
해가 떠오르자 그는 마음을
진정하고 생각 했습니다.
"주인에게 돌아가서
일을 다시 구하고 아내와
그의 애인을 죽이지 말자".
하지만 돌아가기 전에 아내에게
자신은 항상 믿음을 잃지 않았다고
말하기로 했습니다.
그가 문을 두드렸을 때
아내는 문을 열고 그의 품에
안겨 왔습니다.
그는 아내를 거칠게 밀어내며
슬프게 말했습니다.
“나는 항상 믿음을 가졌는데
당신은 나를 배신했어-!”
“아니에요-!”
아내가 강하게 머리를
저었습니다.
“나는 어젯밤에
당신과 한 남자가 함께 있는것을
보았단 말이요-!”
농부가 말했습니다.
아내가 대답 했습니다.
“그 남자는 우리 아들이에요-!”
“당신이 떠날 때
저는 임신 중이었고 우리 아들은
스무살이 되었어요-!”
그 말을 들은 농부는 아내를
꼬-옥 껴안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부부와 아들은
마지막 남은 빵을 먹기 위해
마주 앉았습니다.
농부가 빵을 자르니
그 속에는 그가 20년 동안
번 돈과 이자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습니다.🙌🏼
🌷🎶😂🌷🎶😅🌷🎶😂
감동을 주는 지혜의 글이다.
우리는 이런 지혜의 이야기를
읽으며 여기까지 왔다.
상황에 따라 감정을 조율하는
농부의 대응이 가슴을 조리게 했다.
누구나 감정을
다스리는게 쉽지 않다.
얼마나 각박한 세상인가,
우리들 앞에는 화(禍)낼 일만
늘어나고 있다.
여기 이 삶의 지혜가
모든이의 양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건강 하시고
늘- 행복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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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군 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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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멈추는 날 남는 것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이 있습니다.
2006년 1월에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군의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떠나간 후에 그의 생애를 비로소 발견하기 시작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책
[그 청년 바보의사]입니다.
어느 군의관이 유행성출혈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갑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스토리는 그의 장례식부터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는 영락교회 청년부 출신이었는데
한경직 목사님의 장례식 이후로 가장 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온 장례식이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의사가 죽었는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을까?’
찾아온 사람끼리도 서로를 모릅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청년 의사의 영정사진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청년의사가 근무하던 병원 앞에서 구두를 닦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구두 닦을 일이 없으면서도 괜히 와서
구두를 닦고 필요없이 돈을 더 많이 주고 내 손을 만지면서
‘할아버지, 춥지 않습니까? 식사는 하셨어요?
할아버지!
외로우시면 하나님 믿으세요.
하나님이 할아버지를 사랑하시거든요.’
그러면서 예수님을 소개해주고 나를 붙들고 기도해주었습니다.”
영정사진 앞에서 오열하던 한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의사가 근무하는 병원의 세탁부입니다.
내가 세탁카트를 끌고 갈 때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었지만
이 청년의사는 나를 지나치는 법이 없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아주머니, 천천히 하셔도 돼요. 요즘 얼굴이 안 좋으시네요.
어디 아프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약도 갖다주고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었습니다.”
근무하던 병원에 어린 환자가 입원했는데
그 환자가 퇴원하면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환자는 집안사정 때문에 몰래 퇴원해버렸습니다.
차트를 찾아서 그 어린 환자가 살고 있는 지방의 집을 확인한 다음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선물 꾸러미를 사들고
지방까지 갔다 오는 바보 같은 의사였습니다.
병원에서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환자의 곁을 떠날 수 없다고
다른 의사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면서까지
환자들의 곁을 지키던 바보같은 의사였습니다.
그가 쓰는 이메일의 마지막에는 항상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스티그마 안수현.”
자신이 예수님의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랑의 흔적을 갖고 살기 원했던 그 청년은 예수님처럼 33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난 후에 그의 삶의 소식이 지금도
소리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인생은 이처럼 마지막 순간에 그가 살아왔던 삶의 무게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숨이 멈추는 그 순간 우리의 가슴에서 고동이 멈추는 그 순간 어떻게 살았느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살았느냐 하는 것만이 남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다면
이제 그의 심장과 그의 복음을 가지고 어떤 영향을 남기고 가시겠습니까?
그것을 고민하십시다
세상을 바꿔라!
예수의 심장으로!,
이 글에 가슴이 뭉클하여
여기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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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은 멈추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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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길지만 끝까지 읽으면 마음의 양식이 될것 같습니다.
☆ 맹자(孟子)
고자장(告子章)
맹자(孟子)
고자장(告子章)은
고자(告子)라는 학자와 인성(人性)에 관하여 나눈 대화를 기록한 글이다.
그 내용이 하도 감동적이라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귀양살이를 할 때 벽에 붙여놓고 주야로 읽어 마음을 다스렸다는 유명한 글이다.
“하늘은 누구에게 큰일을 맡기려 할 때는 4가지 어려움을 준다고 한다.
첫째는 정신적 고통을 주고,
둘째는 육체적 고통을 주고,
셋째는 경제적 고통을 주고,
넷째는 하는 일 마다 어렵게 한다고 한다.”
天將降大任於斯人也
(천장강대임어사인야)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려고 하면
必先勞其心志
(필선노기심지)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苦其筋骨
(고기근골)
근육과 뼈를 깎는 고통을 주고
餓其體膚
(아기체부)
몸을 굶주리게 하고
窮乏其身行
(궁핍기신행)
생활은 빈궁에 빠뜨려
拂亂其所爲
(불란기소위)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하느니라.
是故動心忍性
(시고동심인성)
그 이유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 참을성을
기르게 하기 위함이며
增益其所不能
(증익기소불능)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그 어떤 사명도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
사회주의 중국에 시장경제를 도입해 부자 나라로
탄생시킨 덩샤오핑도 고난의 시절 맹자의 고자장을
마음에 담아 쉼 없이 암송했다고 한다.
대약진 운동 실패 후, 정권 유지에 불안을 느낀 마오쩌둥은 부인인 강청을 필두로한 사인방과
홍위병을 앞세워 정적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극좌파식 난동을 벌인다.
당시 개혁 세력으로 주목받던 덩샤오핑은
졸지에 모든 권력을 잃고 유배지에 갇힌다.
대학생이던 그의 아들은 홍위병 학우들에게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고문을 받다가
창문에서 뛰어내려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산다.
덩샤오핑은 고자장을 보며 아픔을 견디고
때를 기다렸다고 한다.
정치적인 탄압과 고난은 인간세상의 본질이다.
다산 정약용은 1801년 11월 겨울,
서학 죄인이라는 종교적인 이유로 쫓겨나
전남 강진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한다.
추사 김정희의 인생도 기구했다.
정치 패권 싸움의 희생양으로 고문을 받고
두 차례나 귀양을 산다.
1849년 제주도 유배에서 9년 만에 풀려났지만
정치적 모함을 받아 2년 후 다시,
북청으로 유배 길에 올랐다.
고전문헌가 석남한 선생에 따르면
다산이 유배지인 전남 강진에 도착했을 때
주민들은 너나 없이 벌벌 떨며
문을 걸어 잠그고 외면했다고 한다.
다산은 주막집 할머니의 배려로
초가집 골방을 얻어 유배 생활을 시작한다.
4년 동안 기거한 방의 이름은 사의재(四宜齋)다.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이다.
첫째, 맑은 생각.
둘째, 엄숙한 용모.
세째, 과묵한 말씨.
다섯째, 신중한 행동이다.
대학과 중용이 강조한 신독(愼獨)의 자세다.
자기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간다는 생활자세다.
여기서 바로 경세유표(經世遺表)가 집필됐다
다산은 현지 적응이 비교적 빠른 편이었다.
"이제야 겨를이 났다."며 공부에 의욕을 보였고
타인과 만남이 허용되지 않자
공놀이 하던 아이들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 소년이 바로 첫 제자 황상이다.
다산은 배움에 귀천이 없다며
강진의 아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다산은 유배지를 다섯 번 옮겨가며
경세유표, 목민심서,흠흠신서 등
무려 오백권의 방대한 저술을 완성했다.
다산이 발탁하고 키워 낸 다양한 제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생께서는 귀양살이 이십년 동안 날마다
먹을 갈고 글씨를 쓰는 일로
복사뼈에 구멍이 났다. -다산 제자 황상- 》
추사 김정희는 더 가혹한 형벌을 받는다.
위리안치 ,
즉 집둘레에 탱자가시 치는 것과
절도안치
즉, 육지에서 먼 섬 유배 두 가지다.
유복하게 살아온 추사에게 제주 생활은
음식부터 그 모든 것이 고통스러웠다.
가족들과 오간 편지를 보면
고급스런 먹거리를 요구하며 투정을 부리는
인간적인 모습도 나온다.
추사는 제주의 험한 생활환경에서
실제로 잔병치레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거친 삶이 추사를 단련시켰는지 모른다.
통역관이던 추사의 제자 이상적은 연경에
다녀올 때 마다 최신 서적을 구해 보내주었다.
유배당해 힘이 없는 자신에게 쏟는 의리에
추사는 감격한다.
그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
바로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歲寒圖)다.
“겨울이 온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라는 논어의 구절에서
그림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세한도는 한겨울 꽁꽁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도
꿋꿋한 소나무와 잣나무의 모습을
깡마른 붓질로 극도로 간략하게 표현해
고아한 작가의 내면 세계를 담아냈다.
단독자로 외롭고 고독하게 지내야 했던 추사는
10년 간 두 차례 유배 생활중에
패러다임을 바꾸는 서체 혁명을 성취한다.
당시 조선은 중국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의 서풍이 대유행하고 있었다.
추사는 싸움닭이라는 별명 처럼
왕희지를 추종하는 서예가를 호되게 비판한다.
석남한 선생은 추사에게 주어진 고통스런
'고립의 시간'이 역설적이지만 독특하고
개성이 넘치는 새로운 서체 창조의
바탕이 됐다고 분석한다.
주류의식의 기본 경험 위에 새롭게 유입된
비주류 의식이 들어와 뒤섞이면서
혼돈 속에서 창조성이 발현된 것은 아닐까.
《 심심해서 쓰고 화가 나서 쓰고
쓰고 싶어 쓰고 마음 달래려고 쓰고...
나의 글씨는 비록 말할 만한 것은 못되지만
70년 동안에 10개의 벼루를 갈아
구멍을 내었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 추사 김정희- 》
나는 상상력을 아무리 발휘해도
두 분이 겪었을 심적인 고통과 고독감의
언저리에도 근접하지 못한다.
시공을 넘어 마음이 심란하고 아려올 뿐이다.
두 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각하고 숨을 쉬는 매 순간마다,
담벼락을 벗하여 마주보고 대화하는
절대 고독 속에 빠져서 살았을 것이다.
김현승 시인은
<고독>이란 자신을 자신의 밖에서
들여다보는 일로,
영혼의 먼 끝으로 본다.
만약 다산과 추사가 이 시대에 환생한다면
시어와 시어 사이에 십리 안개가 몽롱한,
어렵기 그지없는 이 시를 단박에
가슴으로 시원하게 읽어 내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나의 시(詩)는.
-김현승의 '절대고독'- 》
맹자 고자장이 가르친 것 처럼
시인이 '무한의 눈물 끝'으로 표현하듯이,
인간은 극한까지 가는 절대 고독과 고통을 통해
위대한 업적을 성취하는가 보다.
종교를 탄압했던 조선사회의 미성숙과
반대파를 쇠망치로 탄압하는 당파 싸움이 없었다면
역설적으로 인간세상에서 거대한 사상과 예술의 성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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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탭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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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나의 시(詩)는.
-김현승의 '절대고독'- 》
맹자 고자장이 가르친 것 처럼
시인이 '무한의 눈물 끝'으로 표현하듯이,
인간은 극한까지 가는 절대 고독과 고통을 통해
위대한 업적을 성취하는가 보다.
종교를 탄압했던 조선사회의 미성숙과
반대파를 쇠망치로 탄압하는 당파 싸움이 없었다면
역설적으로 인간세상에서 거대한 사상과 예술의 성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