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에 있는 <제임스 조이스>에서의 소회.
어느 순간, 문득 시간이 쏜 살같이 흘러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때가 있다.
유년시절에서 청춘의 시절로, 그 청춘의 시절이 가고 다시 쇠락衰落의 시절로
전이轉移해 가는 속에서, 내 감성의 깊이는 생과 사의 갈림길을 오고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시간, 내가 무無이었다가 유有이었다가 다시 무가 되는 그런 시간에
문득 펼쳐서 읽고 싶은 글 한 편이 있다.
디덜러스씨가 말했다.
“우리가 이토록 오래 살면서도 별 해로운 일은 하지도 않았다는 일은 하지도 않았다는 것 말이야.”
“하지만 좋은 일을 했잖아, 사이먼,”몸집이 작은 노인이 신중하게 말했다.
“우리가 이토록 오래 살아서 착한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다니, 하나님 덕분이야.”
스티이븐은 아버지와 그의 두 술 친구들이 지난날의 추억을 위해 축배를 들 때 카운터로 부터 세 개의 술잔이 들려 올라가는 것을 빤히 쳐다보았다.
운명, 아니 기질의 심연深淵이 그들로부터 그를 갈라놓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그들의 마음보다도 한층 더 늙은 듯싶었다. 그것은 마치 달이 보다 젊은 지구를 비추듯 그들의 갈등과 행복, 그리고 후회를 싸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들에게 약동했던 삶과 젊음은 이제 그에게 약동하지 않았다. 다른 애들과의 우정의 즐거움도, 거센 사나이의 건강한 생기도, 부모에 대한 효심도 그는 알지 못했다. 단지 차갑고 잔인하며 사랑 없는 육욕이외에 그의 영혼 속에 약동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유년시절은 죽었거나 아니면 잃어버렸고, 그와 함께 소박한 기쁨을 즐길 수 있는 영혼도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달의 불모의 폐각貝殼처럼 생의 한가운데를 부동하고 있었다.
그대가 그토록 창백함은
하늘을 오르고 땅을 굽어보며
친구도 없이 헤매임에 지쳤기 때문인가.....“(셀리의 시 달에게)
그는 셀리의 단편 몇 줄을 혼자 되풀이했다. 슬픈 인간의 헛됨과 활동의 광대한 비인간적 순환의 교차가 그의 마음을 차갑게 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의 인간적이고 헛된 비애를 잊었다.”
그의 대표작 <율리시즈>는 그의 조국 아일랜드와 영어권에서 음란물로 외면받아 1922년에야 파리에서 출판되고, 1936년에야 영국에서 출간되었다. 제임스 조이스는 37년간 망명생활을 하다가 1941년 1월 13일 취리히에서 사망했는데, 앞에 글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일부분이다.
난해하기로 소문이 자자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논문이 쓰여진 소설로 알려진 <율리시즈>, <율리시즈>를 읽은 독자보다 <율리시즈>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란 농담이 만들어진 제임스 조이스의 자취를 찾아 취리히의 <제임스 조이스>에 갔다.
하지만 제임스 조이스 문학관은 휴관이었고, <율리시즈>엔 제임스 조이스에 관한 것을 별로 찾을 수가 없고, 성냥갑과 냅킨, 그리고 메뉴판, 화장실 입구에 걸린 제임스 조이스의 사진 한 장만이
제임스 조이스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더블린에서 통째로 옮겨왔다는 가구들도, 맥주와 음료를 따르는 사람들도,
이제 제임스 조이스를 추억하거나 그의 존재를 기억하지도 못할 것 같은, 오로지 상업적으로만 이용되고 있는 <제임스 조이스>
어디 제임스 조이스 뿐일까?
누구나 그런 시절과 삶이 있을 것이다.
아직 삶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 같은 젊은 시절에,
인생을 이미 다 살아버린 것 같은 생각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안개가 피어올라
온 대지를 서서히 소리도 없이 뒤덮어 가는 것 같을 때의
무기력과 허망감, 그리고 쓸쓸함,
그것을 헛됨이라고 정의하기엔 너무 이르지만 어쩌면 늦었을지도 모르는
그 시간에 문득 새로운 희망이 움터오기를 기다리는 것,
그러면서도 가슴 한 귀퉁이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실감하는
그게 나이 들어감의 큰 슬픔이 아닐까?
“플라톤이 한 말이라고 믿지만. 미는 진리의 광휘라고 했다. 이 말은 성실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가깝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이란 지적인 것의 만족스러운 관계로 말미암아 충족되는 지성으로 관조되는 것이며, 아름다움이란 감각적인 것의 가장 만족스러운 관계로, 말미암아 충족되는 상상력으로 관조되는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내가 안달루시아의 처녀들이 하던 식으로 내 머리에 장미를 꽂거나 혹은 빨간 입술로 긍정의 뜻을 보이면 그가 무어인들의 성벽 밑에서 나에게 키스했었지. 그러면 나는 그이가 다른 남자에 못지않게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눈으로 또 해달라는 눈빛을 보이면, 그는 내게 언제까지나 또 해달라고 하겠느냐고 물었다.....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나의 두 팔을 그에게 잡아서 그가 나의 가슴의 온갖 향기를 맡을 수 있도록 나에게 끌어당기자 그의 가슴은 미친 듯이 뛰었고 나는 언제까지나 예스라고 말했지.”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고독, 정말로 고독한 것, 그런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해“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떨어져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친구마저도 갖지 않는다는 것 말이야.”
“그런 위험도 무릅쓰겠어.” 스티이븐이 말했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도 갖지 않는다는 거지. 크랜리가 말했다. ”친구 보다 더 한 사람. 인간이 지금까지 사귀어 본 가장 고귀하고 가장 진실한 친구보다 더한 사람을 갖지 못한다는 것 말이야.“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중에서
“나의 영혼은 함께 걸어간다. 형상 중의 형상이...그리하여 달이 숙직하는 밤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흑담비의 옷을 입고.” <율리시즈>
제임스 조이스를 찾을 수 없는 <제임스 조이스>에서 제임스 조이스를 얘기하고 있을 때에 만약 제임스 조이스의 영혼이 있었다면 낯선 이국 땅에서 찾아온 이국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역사는 악몽이며, 나는 거기서 깨어나려 몸부림친다.”
제임스 조이스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2023년 6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