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사구참선과 활구참선이 있다.
사구참선은
죽을 사(死)자, 사구참선(死句參禪)은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참선.
이리저리 더듬어 들어가고 이리저리 알아들어가는 참선. 이러헌 참선은 삿된 참선이요 죽은 참선이라
점점 육도윤회 할... 하는 업식만 조장할 뿐이고 영원히
깨달을 기약이 없는 것이다.
활구참선
이론으로 따지지 아니하고 알아들어가지 아니하고
더듬어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못 화두일념으로 꽉 맥혀서 어째서 조주는 무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 뭣고 화두’를 허신 분은 ‘이 뭣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꽉 맥혀서 염념불망으로 화두를 관조해나가.
앉어서나, 서서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걸어갈 때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염념부절
생각 생각이 끊어지... 끊어짐이 없이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꽉 맥힌 상태에서
화두를 들어나가는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이여.
가슴이 답답하고 공부가 되아 가는지 안 되아 가는지
알 수... 답답헌 그 상태가 바로 공부가 옳게 되아 가는
상태다.
어떠헌 동기 정든 사람이 죽은, 죽는 그러헌 일을 당해가지고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무상에 복받쳐 발심을
했다거나, 어떠헌 도반이, 같이 공부하는 도반이 확철대오하는 그러헌 광경을 보고
나는 어찌 여태 같이 공부를 했건만 깨닫지 못했던가!
거기에서 분발심이 되아가지고 그러헌 동기를 가졌거나, 이러헌 특수한 동기가 있어서 발심을 헌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리 분심을 내고 의단을 가질랴고 해도 화두 들 때,
들을 때만 잠깐 있다가 금방 비시시 분심이 꺼져버리고
아무리 이를 악물고 척량골을 바로 세우고 용기를
내봤자 금방 비그르 꺼져버리고,
앉았을 때 들렸던 화두가 서서 다섯 걸음도 못가서
화두가 달아나버리고, 화두가 들린다고는 해도 그렇게
간절하게 의심이 일어나지를 않고,
이렇게 애를 쓴다고는, 쓰고 있건마는 공부가 맹렬허지를 못해서 그 애를 닳고 몸부림을 치고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는 것은 분명 이것은 주작인 것입니다.
지어서 허는 것이여.
그러나
특수한 동기가 있어서 자, 들지를 안해도 저절로 들러.
들어지는 사람은 그거야 천재일우로 그 참 다행한 일이 아닐 수가 없지마는,
그렇게 아니 된 마당에는 억지로라도 지어서라도 화두를 들 수밲에는 없어.
지어서라도 들고 또 들고 그리고 또 들고 또 들고
허다보며는 그것이 습관이 되아서 습관이 되며는
체질화가 되고 체질화가 되며는 헐랴고 안해도 되아진
단계가 반드시 오는 것이다 그 말이여.
삼천 년을 두고 내려오면서 우리의 선배들이,
선각자들이 어떠헌 동기가 있어서 단시일내에 확철대오한 그러헌 도인들도 계셨지마는
그러헌 특수한 동기를 갖지 못해서
억지로 억지로 지어서 들고 또 들고 일 년이태 삼 년내지 십 년 또는 일생동안을 그렇게 애를 쓰는 가운데에
마침내 대도를 성취하신 선각자들도 적지 아니
계셨습니다.
하루 이틀에 안 된다고 해서, 한 철, 두 철에 안 된다고
해서, 일 년 이태에 안 된다고 해서 우리는 퇴태심을 내서는 ㅇ아니되는것입니다
고인의 말씀에
빠른 시일 내에 대도를 성취했다고 해서 꼭 좋아할 것도 없고, 그 수행기간이 오래 걸려서 애를 쓰고 있는 과정
이라고 해서 번뇌심을 낼 것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냐?
견성을 빨리 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도업이 그날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여.
깨달은 뒤에 정말 참으로 닦아가야 할 보림공부가
남아있기 때문에 일찍 수월허게 견성을 헌 분은 그 보림 과정이 참으로 공력이 드는 것이고, 시간이 필요헌 것이고,
견성허는, 헐 때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렸고
애를 많이 쓴 사람은 그 대신 보림 기간이 단축이 되고
훨씬 수월허기 때문에, 일찍 깨닫고 오랜 시간을 보림을 하나 또는 애를 쓰고 오랜 시간에 수행 끝에 깨달은
사람은 보림 기간이 단축이 되는 것이나
결과적으론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다못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 수행할 뿐이지, 빨리 깨닫기를 바래고 마음을 가져서 빨리 깨닫기를 기닫...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허는 것을 간곡히 말씀을 허셨습니다.
공부는 꼭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허는 가운데에 더욱 철저히 마음을 단속해야만
깨달음의 경지에 빨리 도달헐 수 있고
보림공부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말씀을
허셨습니다.
참선을
좌선이라고 하고 주로 가부좌를 하고 반가부좌를 허면서 정진에 애를 쓰는 이유는,
앉어서 공부험으로 해서 득력허기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득력허기에 수월헌 점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 이후로 오늘날까지 될 수 있으면 앉어서 정진을 해왔기는 했지마는,
앉어서 공부를 익히는 것은 행동허는 가운데에 공부가 잘되기 위해서 기본자세로서 공부를 허는 것뿐이지
공부는 앉어서야만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조용한 자리에서 앉어서만 익힌 공부는
행동하는 가운데에 자칫하면 도망 가버리기가 쉽고,
주로 행동하는 가운데에, 어묵동정가운데에 공부를
익히고 적극적인 자세로 공부를 익힌 사람은
어떠한 시끄러운 경계를 닥친다 하더라도 조끔도
그 시끄러운 것으로 인해서 장, 방해를 받지를 않고
조용한 경계를 만나며는 공부가 저절로 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용헌것만 취하지를 말 것이며
시끄럽다고 짜증을 내지 말고, 조용헌 경계를 만나며는 조용헌 가운데에서 더욱 열심히 정진하고
시끄러운 경지를 만나며는 시끄러운 가운데에도 역력히 화두를 들어서 적극적인 가운데에 정진을 다져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첫댓글 일체 중생 참 나를 깨달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 나기를 발원합니다 _()_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