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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요엘 예언서의 말씀 2,12-18>
12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13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14 그가 다시 후회하여 그 뒤에 복을 남겨 줄지 주 너희 하느님에게 바칠 곡식 제물과 제주를 남겨 줄지 누가 아느냐?
15 너희는 시온에서 뿔 나팔을 불어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여라.
16 백성을 모으고 회중을 거룩하게 하여라.
원로들을 불러 모으고 아이들과 젖먹이들까지 모아라.
신랑은 신방에서 나오고 신부도 그 방에서 나오게 하여라.
17 주님을 섬기는 사제들은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아뢰어라.
“주님, 당신 백성에게 동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당신의 소유를 우셋거리로, 민족들에게 이야깃거리로 넘기지 마십시오.
민족들이 서로 ‘저들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말해서야 어찌 되겠습니까?”
18 주님께서는 당신 땅에 열정을 품으시고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 5,20─6,2>
형제 여러분,
20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6,1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2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6,1-6.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를 ‘회개’로 초대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주 너희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요엘 2,13)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요엘은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단식하고 울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라.’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날을 맞이하라.’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처럼 자신의 의로움을 보이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지 말고 숨어계신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몸과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뉘우침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신앙의 빛>에서는 ‘회개’를 “주님을 향해 거듭 되돌아가는”(13항) 것으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거듭해서 기꺼이 변모되려”(13항)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회개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합니다.
수도승들은 이 지속적인 회개의 삶을 생활방식으로 채택하고 ‘제2서원’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옴’이라는 실행을 요청합니다.
곧 마음만 찢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요청합니다.
여기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요청되고, “용기를 요구”(14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로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올바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 받고자 했습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니 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이라 함은 단순히 숨기라는 말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게 행하라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행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드러나거나 말거나에 여의치 않는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느님 앞에 있는지라, 사람들이나 자신 앞에서 자유로운 것을 말합니다.
곧 ‘진실한 마음’을 말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이 당신 사랑에 씻기어지고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의로움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지 않게 하시고, 마음이 기도로 순결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고 당신 앞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축제와 절제>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요엘 예언서 2,12)
어제 저희 공동체는 약식 카니발 행사를 했습니다.
갓 들어온 형제들 중에는 수도원에서 카니발 행사를 한다고 하니 그런 것을 왜 수도원에서 하냐고 의아해하며 그 뜻을 묻었습니다.
사람들은 카니발 하면 삼바 축제와 같이 떠들썩한 축제를 떠올리지요.
그래서 일반 사전을 찾아보니 이런 식의 정의가 있었습니다.
“주로 서양에서, 가장행렬 등이 있는 떠들썩한 행사나 축제”
“난장판의 축제 분위기, 큰 잔치판; (경기 등의) 대회”
조금은 부정적인 느낌의 떠들썩한 축제라는 것인데, 그러나 카니발의 본래 의미는 사순절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면 40일 간 고기를 비롯한 음식의 절제를 하고 여러 가지 고행과 극기를 하면서 즐거운 것들은 피하게 되기에, 사순절을 시작하기 전 며칠을 마음껏 먹고 즐기던 축제이지요.
그래서 그 이름도 라틴어의 고기를 뜻하는 Caro(Carnis)와 마지막 인사를 뜻하는 Vale가 합쳐진 말로서, 이제 ‘고기는 안녕’ 또는 ‘고기는 그만’이라는 뜻입니다.
Caro와 Valens(맘껏)가 합쳐진 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아무튼 두 말 다 고기를 뜻하는 Caro가 들어갑니다.
고기를 마지막으로 맘껏 먹건 고기는 이제 그만이건 다 사순절에는 고기를 끊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덩어리 고기를 끊는 것보다 육의 정신(Carnis Spiritus)을 끊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육의 정신을 끊음으로써 욕정(欲情)을 열정(熱情)으로 바꿔야 하겠습니다.
욕정이란 자기의 육적인 욕구들을 채우려는 것인데, 그것을 남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열정으로 바꾸는 겁니다.
열정은 영어로 Passion이라고도 하는데 이 Passion에 수난의 뜻도 있으니, 열정이란 누구를 위해 또는 무엇을 위해 고통을 감수할 정도로 크고 강한 내적 힘인 거지요.
둘째로, 육의 정신을 끊음으로써 우리는 욕망을 갈망으로 바꾸고, 더 나아가 갈망을 열망으로 바꿔야겠습니다.
욕망이란 이 세상 것들을 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욕망에는 육체의 욕망이 있고, 야망이라고도 하는 출세와 성공의 욕망 등이 있는데, 이런 바람들을 하느님과 영원에 대한 갈망으로 바꾸고, 바라는 것이 바뀔 뿐 아니라 바라는 것을 이루려는 열망으로 바꾸는 겁니다.
셋째로, 육의 정신을 끊음으로써 우리는 육정(肉情)을 애정(愛情)으로 바꿔야 하겠습니다.
육정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처럼 사적인 사랑을 얘기한다면, 애정이란 라틴말로 Caritas(애정, 애덕)라고도 하는
조금 더 공적이고 보편적인 인류애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어제 저희는 카니발을 하면서 짧은 영적 독서를 읽고 선배 형제로부터 카니발의 영적 의미에 대해서 청해들었습니다.
그 형제님께서 아주 재치 있게 그 의미를 정리해주셨는데 축제란 절제와 늘 함께 있는 것이며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맨날 빈둥빈둥 노는 사람에게는 쉼이 없고 열심히 일을 한 사람에게 쉼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듯, 우리의 삶은 늘 축제적이어야 하지만 늘 절제할 수 있어야 축제가 저급하지 않고 영적 품위를 지닐 수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기쁨을 준비하라>
부활의 기쁨을 준비하는 사순절입니다.
사순이라는 말은 40일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중대한 사건을 두고 그를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간 재를 지켰고, 엘리야도 호렙산에 갈 때 천사가 주는 음식만 먹으며 40일을 걸었으며,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전 40일 동안 단식과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인 부활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 40일간의 기간을 정하여 기도와 희생으로 재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 은총의 시기에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제한된 미사와 재의 예식을 거행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조속히 장엄한 미사를 함께 거행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부활의 영광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몸소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기쁨이 큰 만큼 거기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자선과 기도, 단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자신에 대한 절제와 극기의 상징입니다.
그냥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단식을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 순간부터 배고픈 이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돕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내가 허기져봐야 굶주린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단식을 통해 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기도는 내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써 하느님과 통교하게 됩니다.
마치 전등이 발전기와 연결됨으로써 빛을 발하듯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시켜 줍니다(구엔 반 투안 대주교).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
사실 기도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 살려면 호흡을 하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왜 호흡을 해야 합니까?
하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으면 이미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자선은 단식과 기도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풀어야 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또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누가 보든 그렇지 않든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입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리면 열매는 천국에서 넘치도록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저함이 없이 베푸십시오.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자선을 통해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기도와 단식, 그리고 자선은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 나 자신과의 관계를 말해 줍니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다른 것이 불완전해집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재의 수요일을 맞으면서 기도하고 단식을 지켰는가?
그렇게 하셨다면 그 희생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려고 마음먹었는가?
사실 아침을 굶고 나니 배가 고파요.
그래서 점심을 평소보다 더 많이 잡수셨어요.
그렇게 한다면 알맹이가 빠진 것이지요.
평소에는 굶어도 굶었다는 생각도 없이 지나치는데 사순절이 되면 유난히 배가 고파 옵니다.
마음을 먹고 무엇인가 하려고 할 때 유혹의 빌미는 항상 생기게 마련입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해요.
그러면서 하루 세 끼 식사는 꼭 챙겨 드시려고 하거든요.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바빠서 제 길을 걷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분의 소리를 알아듣기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선은 베풀면 베풀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쉽고 아까운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시면 하실수록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나중에 한꺼번에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시는 분은 평생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일상생활의 작은 일에서부터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떠야 합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외적인 기도와 단식, 자선에 앞서 마음의 단식과 자선, 그리고 기도에도 소홀함이 없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은혜로운 때, 구원의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누군가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소진한다>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머리에 재를 뿌리며 삶의 유한함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위해 재가 되어가고 있는가를 묵상합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든 다 재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특별히 위선자들처럼 남에게 잘 보이려고 살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위선자’인 그리스어는 무대에서 남에게 박수를 받으려고 공연하는 사람을 칭하는 단어였습니다.
남의 기대에 따라 살면 삶을 허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들은 남의 시선을 위해 평생을 살다 재가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많은 철학자는 남의 기대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며 살라고 권합니다.
남의 시선의 노예가 되기보다 차라리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라는 말입니다.
더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람은 다 누군가의 욕망을 성취시켜주며 삽니다.
나를 위해 살라는 말은 자아를 위해 살라는 말입니다.
자아는 생존을 위해 삽니다.
곧 나의 욕망을 채워주는 삶은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삶입니다.
우리는 분명 누군가의 욕망을 채워주며 삽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살아서도 안 되고 남을 위해 살아서도 안 됩니다.
내가 욕망을 채워주며 사는 그 대상이 내가 재가 되면서까지 그 욕망을 채워줄 가치가 있는 대상인지 분명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튜브 ‘멘탈케어’란 심리학 채널에 ‘연수익 1,300억 찍고 느낀, 돈이 자유를 주지 않는 이유’란 박진영 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박진영 씨는 처음 성인이 되어 꾼 꿈이 20억을 버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20억을 은행에 넣어두면 그 이자로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1990년대에 20억이면 상당히 큰돈이었습니다.
연대 지질학과를 다니던 박진영은 지금 전공으로는 큰돈을 벌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뒤늦게 음악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음악성보다는 비닐을 입고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은 혁신적인 모습을 보여 관객에게 호감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이런 퍼포먼스가 잘 먹혀 2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초고속으로 지금의 JYP 엔터테인먼트를 차리는 데 성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그토록 꿈꿨던 20억을 얻는 데도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운 JYP는 현재 시가 총액 2조 원에 달합니다.
여기서 박진영이 보유한 지분은 15~20%입니다.
한 해 1300억이 이익을 창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행복이 오래 갔을까요?
금방 무너져내렸습니다.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먹고 살 정도는 있어야 하지만 그 이상의 돈으로 행복해질 수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박진영 씨는 돈이 있는데도 왜 행복하지 못한지를 생각했습니다.
돈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누구도 내가 돈을 많이 갖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물론 부모님이나 가족은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족 때문에 조금이나마 덜 허탈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박진영 씨는 이제 행복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명예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자기 만족을 위해 살아왔지만 아무도 만족해주지 못할 때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이 타인이 원하는 것과 일치할 때 옵니다.
그러니 타인이 원하는 것을 내가 추구해 주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 내가 인생의 목표를 잘못 세웠구나!’
그래서 새로운 꿈을 꿉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뒤늦게 찾는 것은 명예였습니다.
그래서 그도 목표를 ‘내 분야에서 최고가 되자’라는 ‘명예’로 바꿨습니다.
동양인 최초로 자신이 작곡한 곡을 빌보드 차트에 올리겠다는 꿈을 꾼 것입니다.
그리고 2004년 그는 기적적으로 자신이 작곡한 곡 ‘The love you need’를 빌보드 4위까지 진입시킵니다.
세계적 명성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행복을 느낄 줄 알았는데 또 무너져내렸다고 합니다.
처음엔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힘들고 벅찬데 살아있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다가 또 어느 순간에 좌표가 무너졌습니다.
박진영 씨는 ‘왜 목표를 이루고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고민을 하다가 그때 깨달은 게, 내 꿈이 잘못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꿈은 이루어지면 ‘허무’하고 안 이루어지면 ‘슬픈’ 목표에요.
답이 아니에요.”
그는 꿈이라는 것에서 ‘무엇을 위해’가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은 ‘왜 태어났을까?’로 연결됩니다.
진화론으로는 이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진화론이 주는 삶의 의미는 생존인데, 우리는 살아남는 목적만으로는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분명히 나를 만든 존재가 있을 것이고 그 존재가 나에게 바라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한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목표를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이유를 찾아야만 합니다.
“돈을 벌어보니까 한 3분의 1은 행복해지더라는 거죠.
그다음에 명예와 사랑을 받으니까 훨씬 더 행복해요.
그런데 또 허무해지기 시작하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남을 도와야 한다’라고 해서 도왔더니, 꽤 많이 행복해지더라고요.
근데 점점 느끼는 것은 아무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남에게 다 주더라도 결국은 세상과 인간을 누가 왜 만들었는지 모르면 결국은 끊임없이 쓸쓸하고 혼란스럽고….”
아기는 처음에 자기 자신을 만족시킵니다.
그거면 그만입니다.
젖을 주는 엄마에게 고맙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동물 수준의 행복입니다.
아이는 차차 깨달아갑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누군가의 기대를 채워주는 것이 행복임을. 그래서 부모가 바라는 대로 행동합니다.
그런 삶은 나를 소진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나를 창조한 이를 위해 내가 소진되는 것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나를 다시 만들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나자렛에서 목수 생활을 하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찾으신 것이 바로 이 삶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처럼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순의 진정한 의미는 내가 누구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며 사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자아를 충족시켜줘 봐야 남에게 피해만 주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짐승이 아닌 이상 나의 삶의 목표가 이웃도 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나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복도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기대는 유한합니다.
그리고 보답도 유한합니다.
내가 재가 되었을 때 그들이 나에게 무엇을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피노키오는 나무토막 아이가 온전한 인간이 되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피노키오는 자신을 창조한 아버지가 아니라 늑대와 서커스 구경꾼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당나귀가 되어갑니다.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나를 창조한 분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의 욕망을 채워주며 사는 게 인생이라면, 나는 나를 창조하신 분의 욕망을 채워주며 사는 게 가장 안전합니다.
그분은 다시 나를 재에서 부활시켜 새로운 나를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사실 창조주는 나를 무(無)에서 창조하셨으니 재에서 재창조하는 것은 일도 아니십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때 정말 행복한 이유는 부모를 자신의 ‘존재 이유’라 믿기 때문입니다.
사춘기가 지나면 더는 부모가 존재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나를 존재하게 만드신 분이 계시고 나는 그분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며 살아가겠다는 것.
이것은 선택입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느꼈던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진정한 창조자로 선택하고 그분의 기쁨을 나의 뜻으로 삼을 때 어린아이의 행복을 회복합니다.
사순은 머리에 재를 뿌리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생각하고, 누구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며 살 것인지 선택하는 시기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재의 수요일만 되면 존경하는 왕신부님 생각이 납니다.
아흔을 훌쩍 넘기셨지만, 아직도 쌩쌩하시고, 총기가 흘러넘칩니다.
송해 선생님 저리 가라입니다.
언젠가 재의 수요일 미사 주례가 왕신부님이었습니다.
형제들의 이마에 바를 재를 손수 준비하셨습니다.
미사 참석하는 형제들 숫자가 열 명 남짓밖에 되지 않기에 조금만 준비해도 좋을 텐데, 엄청 많이 준비하셨습니다. 거기다 물까지 듬뿍 부었습니다.
저 같으면 재를 머리 위에 살짝 얹어주고 마는데, 왕신부님께서는 형제들 이마에 엄청 큰 십자가를 그어주셨습니다.
형제들은 뚝뚝 떨어지는 잿물을 보며 이게 뭐냐며 얼굴을 찡그리는데, 신부님께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형제에게까지 진한 십자가를 그어주신 신부님께서 그 형제에게 재가 담긴 접시를 건넸습니다.
그 형제는 남아있는 재를 모조리 끌어모아 신부님의 이마에 초대형 십자가를 그어드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형제들은 재의 수요일이라 웃으면 안 되는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거울을 보신 신부님께서는 너무 좋아하셨는데, 저녁기도 때까지 이마의 십자가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참 대단한 신심가이십니다.
또다시 재의 수요일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사용했던 종려나무 가지를 태워 얻은 재를 머리에 얹습니다.
재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타고 남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 무가치한 것, 허무한 것, 보잘것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를 머리에 얹을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쳐야겠습니다.
“본래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먼지요, 티끌, 무(無)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토록 보잘것없는 제게 큰 은총을 베푸셔서 생명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지금 저는 여기 서 있지만, 주님의 흘러넘치는 자비가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과거도 저는 흙이었지만, 지금도 흙과 다름없는 존재요, 언젠가 반드시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신심 깊은 유다인들은 속죄 행위를 요란스럽게 실시했습니다.
일단 식음전폐, 다시 말해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씻지도 않았습니다.
일도 손에서 놓았습니다.
평상복을 벗고 거친 삼베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속죄의 재물로 짐승을 잡았습니다.
엄청난 양의 재를 만들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들이부었습니다.
그것도 양에 안 차 가슴을 치면서 통곡을 하고 옷까지 찢었습니다.
더 웃기는 것은 잘못은 인간들이 저질러놓고, 아무런 죄도 없는 가축들까지도 속죄 행위에 강제로 동참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요란스럽고 과장된 속죄 행위 대신 다른 방법을 쓰라고 가르치십니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분, 분노와 역정에 더디신 분, 주 너의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너라.”
(요엘 예언서 2장 12~13절)
결국 주님께로의 유턴, 다시 말해서 회개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아울러 주님께서는 우리가 새롭게 맞이한 이 사순 시기, 어떤 모습으로 자선을 베풀고, 기도하고, 단식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주 명쾌하게 세 가지 지침을 내려주고 계십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마태오 복음 6장 3절)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마태오 복음 6장 6절)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마태오 복음 6장 17~18절)
예수님께서 주신 세 가지 지침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하느님 앞에 애써 꾸미려 하지도 말고, 굳이 감추려 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라는 것입니다.
결국 위선자가 아니라 안과 밖, 말씀과 삶, 기도와 활동이 일치되는 진실된 신앙인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먼지로 돌아가지 마라>
‘재의 수요일’에 사제는 사람들의 머리에 재를 얹어 주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또는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허무하게 먼지로 돌아가는 인생을 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인생을 향해서 나아가라.”, 즉 먼지로 돌아가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시편 90,3-5)
하느님은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할 수도 있고, 당신처럼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줄 수도 있는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니 먼지처럼 허무하게 끝나고 싶지 않다면, 즉 영원한 존재가 되고 싶다면, 회개하고, 믿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다시 깨우치고, 새롭게 다짐하는 날이 ‘재의 수요일’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인생’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에 영원히 살면서도 그 인생이 ‘한숨, 고생, 고통’뿐이라면, 안 죽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영원한 지옥’입니다.
“하느님 없는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인생’은 하느님의 생명력이 충만한 인생, 하느님과 함께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인생입니다(묵시 21,3ㅁ-4).
‘하느님의 생명력’이 내 안에 충만해지게 하려면, ‘온 마음’과 ‘온 삶’으로 그 생명력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로는 그 생명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에 회개하지 않고, 그래서 ‘마음’과 ‘삶’에 변화가 없다면,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은 아무 의미 없는 형식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을 싫어하신 것은 그들이 겉으로만(형식적으로만) 잘하는 척을 하고 실제로는 아무 변화가 없는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재의 수요일’마다 듣게 되는 복음 말씀은 위선자들의 거짓 신앙생활을 꾸짖는 말씀이기도 하고, 그런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훈계이기도 하고, 진실한 신앙생활로 하느님의 생명력을 제대로 받아들여서, 먼지로 돌아가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라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마태 6,1-2)
위선자들의 자선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선이 아니라 ‘거짓 자선’입니다.
물론 위선자들도 실제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고 그 돈이 실제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긴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자선으로 인정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참 사랑’에는 ‘나’는 없고 ‘너’만 있습니다.
만일에 ‘너’는 없고 ‘나’만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흉내 내는 일입니다.
사랑 없는 자선은 자선이 아니라 자선을 흉내 내는 일이 될 뿐입니다.
실제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더라도.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마태 6,5)
위선자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척’을 하는 ‘연기’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이더라도 연기는 연기일 뿐입니다.
자기의 신심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런 연기를 하는 것은 ‘거짓 기도’를 하는 것이고, ‘죄’입니다.
위선자들의 ‘거짓 기도’는 하느님께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마태 6,16)
단식의 경우에, 위선자들도 실제로 밥을 굶긴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마음도 없고, 사랑도 없이, 자기의 신심을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단식은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헛일’일 뿐입니다.
위선자들은 마음에 없는 단식을 하기 때문에 단식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충분히 먹거나 단식이 끝난 후에 양껏 먹기도 합니다.
그 경우에 그것은 단식이 아니라 먹는 시간을 조금 바꾼 일입니다.
자선이든지, 기도든지, 단식이든지 간에 ‘거짓 신심 행위’로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고, 그런 일은 진실 자체이신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위선자들이 자기의 신심을 자랑하려고 하면 할수록 죄만 커집니다.
자기의 신심 행위가 위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고 계속 그렇게 하는 위선자는 사실상 마귀의 유혹에 완전히 넘어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것보다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위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는데, 바로 그 칭찬과 존경이 우리를 위선자로 만드는 유혹이 됩니다.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을 좋아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그 유혹에 빠지게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 위선자로 바뀌게 됩니다.
‘아무도 모르게’ 신심 행위를 하라는 예수님 말씀은(마태 6,3-4.6.17-18) 그 유혹에 빠지는 위험을 피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칭찬하는 사람’이 유혹하려는 의도로 칭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본의 아니게 유혹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칭찬하는 쪽에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은혜로운 영적훈련 사순시기 - 회개, 기도, 단식, 자선>
올해같이 사순시기가 절박하게 기다려지기는 난생 처음입니다.
광야의 외딴곳 사순시기에 고요히 머물며 쉬고 싶은 알게 모르게 지친 영혼의 갈망 때문일 것입니다.
인생 광야여정 중 영육이 고단한 이들에게 오아시스와 같은 사순시기는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하느님의 축복 선물인지요!
하느님의 사랑은 어김없이 교회의 사순 전례를 통해 표현됩니다.
기후 위기, 코로나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불평등의 심화, 대량 소비, 불타고 있는 공동의 집인 지구, 나라의 명운(命運)이 달린 3월 9일 대선 걱정에 참으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맞이하는 오늘부터의 은총의 영적훈련 사순시기입니다.
3월 성 요셉 성월이 함께 함이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됩니다.
아무도 죽음을, 세월을 이길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늙게 되고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런 섭리입니다.
참으로 강론 주제로 많이도 사용됐던 '인생 여정'이란 말마디입니다.
요즘 세상을 떠나는 지인들이나 유명인사들을 보면 90을 넘는 일이 드뭅니다.
치매나 노환등으로 힘겨운 노년을 맞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참으로 살아 온 날들보다 오늘부터 살아갈 하루하루의 날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
(성규4,47)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말마디입니다.
하느님 또한 회개한 영혼의 과거는 묻지 않습니다.
불문에 붙입니다.
하루하루 선물의 날들을 깨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살면 됩니다.
죽음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됩니다.
산대로 죽습니다.
저의 살 날은 헤아려 보니 90세 전후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생각하니 15년 안팎입니다.
지난 2월26일 89세로 타계한 영원한 자유인이자 이 시대의 지성인 이어령 선생의 아름다운 죽음도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길다 싶지만 사순시기 첫날 재의 수요일 미사 강론에 그대로 인용하고 싶습니다.
이어령 선생의 호출을 받고 찾았던 김지수 문화전문기자의 글입니다.
-“이보게, 좀비 영화가 유행하니, 이젠 내가 좀비야, 숨만 붙어 있잖아(웃음).”
“더 이상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네. 자네가 글로 내 사회적 죽음을 공표해주게.”
“글로 써주게, 사람들에게 너무 아름다웠다고, 정말 고마웠다고.”-
정말 얼마나 아름다운 임종어 유언인지요!
너무 아름답고 고마웠던 인생이라니!
기사 사진은 한밤중에 찾아와 이어령 선생의 손을 붙잡고 울음을 참고 온힘을 다해 노래하는 가수 장사익의 모습이 역시 아름다운 감동이었습니다.
이어 계속되는 기사입니다.
-
살아온 대로 죽는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그는 그가 말하고 쓴대로 시간을 쓰고 완벽하게 연출해갔다.
항암 치료를 일체 거부했고, 치료약을 먹지 않았다.
그의 곁에서 선생의 손발이 되어 밀도 높은 밤낮을 함께 했던 지인들은 말했다.
“선생님을 존경해요.”
일반인들이 멀리서 바치는 ‘존경의 찬사’와는 사뭇 결이 달랐다.
선생은 병원 중환자실에 갇히지 않고,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집에서 햇살을 쬐며 삶쪽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은 것은 책이었다.
“3월이면 나는 없을 거야.”
3월을 며칠 앞두고, 그렇게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선생은 떠났다.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잖아. 탄생의 그 자리로 가는 거라네.
죽음은 어둠의 골짜기가 아니야. 세계의 끝, 어스름 황혼이 아니지. 눈부시게 환한 대낮이지요.
맞아. 5월에 핀 장미처럼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대낮이지. 장미밭 한복판에 죽음이 있어. 세계의 한복판에. 생의 화려한 한 가운데. 고향이지.
그 말이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요?
어둠이 아니라 빛이라서 그렇지. 밤이 아니라 대낮이라서 그렇지.”
2월26일 정오 경, 환한 대낮에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선생은 죽음과 따뜻하게 포옹하며 자신의 말을 완성했다.
-
참으로 남은 이들에게 감동적인 최고의 선물인 선종의 죽음을 선물하고 아버지의 본향집으로 귀가한 이어령 선생입니다.
은총의 특별 영적훈련 사순시기입니다.
일년 영적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사순시기입니다.
참으로 나이에 관계 없이 모두가 주님의 영적 훈련병이 되어 광야의 영적훈련장에서 영혼과 육신을 자발적 기쁨으로 단련해야 할 절호의 시기입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머리에 재를 얹을 때 주신 주님의 화두같은 말씀이 사순시기 우리의 겸손을 북돋웁니다.
흙(humus)에 어원을 둔 사람(homo)이요 겸손(humilitas)임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흙같이 겸손해야 참으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베네딕도 규칙 중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 전장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무려 1500년 역사를 지닌 사순절에 관한 영적 고전같은 가르침입니다.
“수도자의 생활은 언제나 사순절을 지키는 것과 같아야 하겠지만, 이러한 덕을 가진 사람이 적기 때문에, 이 사순절 동안에 모든 이들은 자신의 생활을 온전히 순결하게 보존하며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악습들을 멀리 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의 섬김의 분량에 어떤 것을 이 시기에 더 늘일 것이니, 곧 특별한 기도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절제이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기쁨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과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각자는 자신이 바치고자 하는 것을 자기 아빠스에게 알려서 그의 기도와 동의를 얻어 실행할 것이니, 영적 아버지의 허락없이 하는 일은 주제 넘은 짓이고 헛된 영광이라고 여겨지며 아무런 공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아빠스의 동의를 얻어 행해져야 한다.”
참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감동스럽고 아름다운 사순절 수행을 위한 영적 대가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입니다.
어찌보면 계속 마스크를 쓰고 지내는 코로나 시대에 맞이하는 사순시기는 전적인 회개와 절제, 극기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주목할 것은 부활절을 기다리는 성령의 기쁨, 영적 기쁨으로, 허영이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밝고 명랑하게 사순절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기쁨이란 말마디도 73장의 긴 규칙서중 오직 여기서만 단 2회 나온다는 사실이 참 각별한 느낌입니다.
사순시기는 무엇보다 회개의 시기입니다.
요엘서 말씀대로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찟는,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전적인 영적혁명과 같은 회개만이 살길입니다.
특히 생태적 회개는 발에 떨어진 불처럼 절박합니다.
어머니 지구가 병들어 죽으면 우리 인류도 같이 죽기 때문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개인은 물론 거족적인, 거국적인, 공동체적인 회개의 실행을 촉구하는 요엘 예언자입니다.
회개를 통한 하느님과 화해, 이웃과의 화해, 자연과의 화해요, 분열과 갈등에서 화합과 일치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매일 평생 회개해야 하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감동적 권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 주었다."
바로 지금이 매우 은혜로운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바로 오늘 여기가 회개의 자리요, 오늘 지금이 매우 은혜로운 구원의 때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실천은 구체적이라야 합니다.
참으로 전통적인 회개의 실천적 수행인 기도, 자선, 단식에 충실해야 할 사순시기입니다.
이 모두는 자기 과시의 허영과 교만의 수행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감춰진 수행일 때 빛납니다.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 개방과 일치요, 자선을 통한 이웃과 개방과 일치이며, 단식을 통한 참나와의 개방과 일치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에 기도요, 이웃과의 관계 회복에 자선이요, 나와의 관계 회복에 단식입니다.
8개 악덕 중 첫 자리에 있는 탐식입니다.
탐식-음욕-물욕-분노-슬픔-나태-허영-교만의 순서입니다.
모든 악덕의 뿌리에 탐식이 있습니다.
탐식을 단식으로 바꿔 말씀을 배곺아 하는 욕구로 바꾸는 것입니다.
단식을 통해 성욕과 물욕의 자제요, 절약된 것은 자선으로 나눔으로 인색의 병도 치유됩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
참 평범한 말마디가 겸손이 결여된 헛된 수행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켜 줍니다.
참으로 단식과 자선을 가능하게 하는 뿌리가 간절하고 한결같은 기도입니다.
그러니 순서로 하면 기도-단식-자선입니다.
결코 우울하고 무겁고 어둔 기도-단식-자선의 수행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자발적 기쁨에 넘치는 밝은 회개의 실천적 수행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그대로 아버지 마음에 정통한 아버지와 일치된 예수님 심중을 반영합니다.
정말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와 희망, 사랑을 두지 않으면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불가의 성철 스님은 물론 종파를 초월하여 영성 대가들이 극찬했던 산상수훈에 나오는 오늘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실천적 겸손한 세가지 수행의 주님 가르침이 참 고맙습니다.
이런 이웃들에게 감쪽 같이 숨겨진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수행자들이 참 관상가요 영성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 은혜로운 영적훈련의 사순시기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회개, 기도, 단식, 자선에 집중적 실천의 수행이 절실한 시기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재의 수요일입니다.
또 어김없이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오늘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2코린 6,2)
이 영적투쟁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친히 나의 말을 들어주시겠다네요.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하시네요.
그러니 걱정말고 힘차게 시작해 봅시다.
그럼 어떻게 시작하면 될까요?
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요엘 2,13)고 하네요.
사순절이라 회개와 보속을 실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단식을 열심히 하고, 십자가의 길 등 기도도 더 열심히 하고, 이웃들에게 자선도 더 베풀어야지 결심도 합니다.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그것보다는 내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네요.
사실 회개는 참회와 보속(옷을 찢음)이 동반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회개는 아니라는 겁니다.
진정한 회개는 내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세상 사는 근심걱정과 온갖 탐욕과 욕심, 다른 사람에 대한 시기와 질투, 온갖 죄와 악습을 향해 있는 상태에서 방향을 바꾸어 하느님께로 향하라는 것입니다(마음의 찢음).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20)라는 사도의 초대가 바로 이 뜻이겠지요.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시는데 우리는 그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늘 딴 데만 쳐다보고 있기에, 이제 그만 하느님께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이겠지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우리를 짝사랑하도록(풀톤 쉰 추기경) 내버려두지 않고 같이 사랑을 나누게 되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진정한 회개가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도 친히 우리가 하는 '단식과 기도와 자선'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숨어 계시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계시는 나의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고 보여주는 것이 되게 하라(마태 6,1-6, 16-18)고 권고하십니다.
기도와 단식과 자선은 하느님 앞에 선 피조물로서 자신을 그분께 합당한 존재로 닦아나가는 매우 중요한 수덕적 실천방식들입니다.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는 기도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단식으로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자선을 통해 공동체와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기의 죄를 씻고 새롭게 출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백성들이 지켜온 이처럼 귀한 종교행위를 존중하시되, 그것이 더욱 가치로운 "마음의 봉헌"이 되는 길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 6,2)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사순절 담화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 자녀답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피조물의 선익에 이바지하고 우리가 하느님 자녀답지 않게 살게 될 때 그릇된 욕망에 빠져 죄의 노예가 됨을 지적하시면서, 그 죄로 인해 하느님의 동산을 황무지로 만들고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는 엄청난 파괴력을 확산시켜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교황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피조물은 하느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이들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2코린 5,17)
실제로 하느님 자녀들이 나타남으로써 피조물도 파스카를 경축하며 새 하늘과 새 땅에 자신을 열 수 있습니다(묵시 21,1 참조).
파스카를 향한 여정에서, 우리는 참회와 회개와 용서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얼굴과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파스카 신비의 풍요로운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이 ‘간절한’ 기다림은 하느님 자녀들이 나타날 때 실현될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이 회개에 따르는 ‘산고’에 온전히 참여할 때에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모든 피조물은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로마 8,21)"
사순 시기는 이러한 회개의 성사적 표징입니다.
사순 시기는 그리스도인들이 개인과 가정과 사회 생활에서 무엇보다 단식과 기도와 자선을 통해 파스카 신비를 더욱 깊이 구체적으로 드러내도록 초대합니다.
단식은 타인과 모든 피조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탐욕을 채우려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우리 마음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사랑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게 해 줍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우상 숭배와 자만을 버리고 주님과 그분 자비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 줍니다.
자선은 우리가 관장할 수 없는 미래를 스스로 보장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으로 자신만을 위해 살고 모든 것을 움켜쥐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피조물과 우리 각자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계획의 기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 계획은 우리가 하느님과 우리 형제자매와 온 세상을 사랑하고 이러한 사랑 안에서 우리의 참 행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보내신 ‘사순 시기’는 그분께서 피조물의 광야로 들어가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광야를 원죄가 있기 전에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던 동산으로 복원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르 1,12-13; 이사 51,3 참조).
우리의 사순 시기도 이와 같은 길을 따르는 여정이 되어, 그리스도의 희망을 피조물에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로써 피조물은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로마 8,21)
이 은총의 시기를 헛되이 흘려보내지 맙시다!
우리가 참된 회개의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우리의 이기심과 자아도취를 뒤로하고 예수님의 파스카를 향해 돌아섭시다.
어려운 우리 형제자매들의 이웃이 되어 우리의 영적 물적 재화를 그들과 함께 나눕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의 삶 안에 실제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모든 피조물에게도 그리스도 승리가 가져다 준 변모의 힘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누구에게나 '때'가 중요합니다.
우리 각자 자기 삶만 돌아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때'를 그저 지나치거나 흘려보냈습니까!
무지해서도 그랬고 게을러서도 그랬고 두려워서도 그랬고 또 아직 탐욕이나 욕망과 결별하기 아쉬워서 모른 척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알고도, 모르고도 '때'를 놓쳐온 우리에게 사도 바오로의 입을 빌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물러서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지금!' 바로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2코린 6,2)
이 사순절에는 사람 앞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마음을 다해 설 수 있기를, 하느님께서 이미 당신 등 뒤로 던져버리신 옛 죄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기를, 숨어 계신 주님 안에 깊이 깊이 숨어 들어 겸손하신 그분과 온전히 하나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바로 지금이 그 '때'입니다.
은혜로운 사순절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함께 일하는 직원의 며느리가 한 달 반 정도 아기를 일찍 출산하였습니다.
손녀를 돌보고 온 직원이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아이의 탄생은 태어나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잉태되는 순간부터라고 하였습니다.
한 달 반 일찍 태어난 아이는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보다 모든 것이 한 달 반 정도 느렸다고 합니다.
6개월이면 몸을 뒤집을 수 있는데 아이는 7개월 반이 되어야 몸을 뒤집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같은 6개월이지만 아이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먼저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뉴욕 주는 그렇게 일찍 태어난 아이들을 위해서 전문가를 가정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부모에게 아이의 발달과정을 설명하고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합니다.
아이가 3살이 될 때가지 도움을 주며 모든 비용은 정부에서 부담한다고 합니다.
한국은 태어나면서 1살이 된다고 합니다.
이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태어나서 1년이 지나면 1살이 된다고 합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생명이 시작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조산아의 발달과정을 보면서 한국의 나이 계산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으면서 시작됩니다.
10년 정도 신학생들과 30일 피정을 하였습니다.
제게는 소중한 날들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하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고, 사랑으로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을 따를 수도 있고, 하느님을 멀리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멀리하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외면했던 죄와 허물들을 돌아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면서 고백성사를 봅니다.
세 번째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던 예수님의 공생활을 묵상합니다.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처럼 나를 불러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시는 예수님께서 나에게도 용기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네 번째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나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의 배신을 나의 삶에서도 바라봅니다.
다섯 번째는 빈 무덤을 묵상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묵상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설명해 주십니다.
함께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미사성제 안에서, 내 삶의 자리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해 살기로 다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교회는 오늘부터 40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빌라도와 결탁했던 대사제가 있습니다.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가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뿔뿔이 도망갔던 제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을 뱉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길에 함께 했던 여인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가 있습니다.
모든 슬픔을 간직한 채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았던 성모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치렀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있습니다.
2022년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처럼 40일을 지내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와 단식을 하면 좋겠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자선을 베풀면 좋겠습니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시골 마을에 수탉 두 마리가 암탉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승패가 갈렸습니다.
싸움에 진 수탉은 깊은 상처를 입고 구석에 시무룩하게 있었고, 싸움에 이긴 수탉은 승리의 기쁨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담장 위에 올라가 “꼬끼오~~”라고 큰 소리를 내지르며 자신의 승리를 알렸습니다.
이 소리를 하늘에 있던 독수리가 들었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담장 위의 수탉을 낚아채서 하늘로 날았습니다.
이제 암탉은 누구의 차지가 되었을까요?
오히려 싸움에 진 수탉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영원한 승자, 영원한 패자는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늘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특히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더욱 이 겸손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패배보다 승리 때문에 몰락하는 사람이 더 많다.”
주님께서도 직접 겸손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노력만을 선호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 겸손은 사라지고 대신 위선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 6,1)
이 복음 말씀을 묵상해 보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잘하고 나면 으레 그 보상이나 칭찬을 기다리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의로운 일을 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면?
의로운 일을 했음에도 오히려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면?
다시는 의로운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로운 일로, 세 가지 종교적인 의무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자선과 기도 그리고 단식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유다인들이 종교적인 신심으로 예부터 지켜오던 의무였습니다.
율법보다도 한 단계 위의 선행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이런 행동을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하느님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었지만,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나쁘다고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제1독서의 요엘 예언자도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요엘 2,13)라고 말씀하십니다.
겉으로 보이는 회개의 모습이 아닌, 진정으로 마음에서부터의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위선자의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의 모습이 아닌, 주님께서 보시기에 미소 지을 수 있는 자선, 기도, 단식을 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가 오늘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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