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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사랑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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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인테리어 스크랩 India 가장아름다운 동양의 진주 아그라
석공 추천 0 조회 84 11.04.06 09: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Taj Mahal. 1631-1653쿠르람(Khurram)은 무굴제국의 4대 황제인 자항기르(Jahangir:1605-1628)의 셋째 아들로서 페르
시아로부터 망명한 귀족 출신 아사푸칸의 딸 뭄타즈 마할(Mumtaz Mahal)과 결혼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항기르 황제
의 왕비 누르마할(Nur Mahal)의 오빠로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막후 세력이었다. 마침 황제가 죽자 네아들 중 자신의
사위인 쿠르람이 황제에 오르도록 힘썼다. 그 결과 쿠르람은 1627년 황제에 오르게 되고 황제가 되자 이름을 샤자한
(Shah Jahan:`세계의 왕’이란 의미)이라 고쳤다. 무굴 제국의 황제는 전통적으로 각 종교로부터 한 사람의 왕비를 선발하
도록 되어 있다. 그는 각 종교로부터 선발된 왕비가 공식적으로 있었지만 오직 뭄타즈 마할만을 사랑했다. 샤자한은 등극
한 후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국정을 펴 나갔다. 외부로는 계속해서 영토를 넓혀갔고 내부적으로는
각종 산업을 일으켜 부를 축적해 나갔다. 뭄타즈 마할은 아름다움과 지혜를 함께 지닌 여자로서 늘 샤자한의 곁에서 국정
을 도왔다. 샤자한은 어렵고 힘든 국정일수록 늘 부인과 의논하였으며 그럴 때마다 부인의 조언은 늘 훌륭한 결과를 가져
왔다. 샤자한은 뭄타즈 마할을 신뢰하게 되었고 부인에 대한 사랑은 깊어만 갔다. 뭄타즈 마할은 대제국의 왕비로서 원한
다면 무엇이든지 향유할 수 있었지만 왕비는 늘 절약하고 사치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간을 내어 고아를 보살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어 국민들로부터 늘 존경을 받았다. 1630년 샤자한은 부르한푸르(Burhanpur:남쪽 데칸고원지역)
지방을 정복하기 위하여 원정을 떠났다. 이때 뭄타즈 마할은 8남 6녀 중 14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고 샤자한이 가는데
로 항상 동행하였던 그녀는 출산일이 얼마 남아있지 않은 때였지만 함께 여행길에 나섰다. 샤자한은 이번 전쟁터는 거리
도 멀고 힘들어 만류할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결국은 왕비와 동행하게 되었다. 샤자한은 부
르한푸르에 도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14번째 아이의 출산소식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때 건강한 공주의 출산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산모에 대한 소식은 없었다. 샤자한은 전령을 보냈으나 그 전령마저도 돌아오지 않았다. 제2, 제
3의 전령을 계속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자정까지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었다. 샤자한은 몸소 왕비의 숙
소로 가려고 준비하였다. 이때 전령이 돌아왔다. “왕비께서는 건강하십니다. 단지 피곤해 할 따름입니다.” 샤자한은 당장
왕비의 숙소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왕비가 쉴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하여 다음 날 아침에 가기로 하였다. 몇 시간 후 잠
에서 깨어났을 때 뭄타즈 마할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왔다. 그는 즉시 옷을 입고 야전 천막을 뛰쳐나와 왕비의 숙소로 뛰
어갔다. 왕비의 옆에는 의사 몇 명이 있었고 왕비의 마지막 생명은 꺼져가고 있었다. 황제가 방으로 들어오자 방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밖으로 나갔고 샤자한과 뭄타즈 마할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왕비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유언을 남겼고
해뜨기 얼마 전 뭄타즈 마할은 죽고 말았다. 이날이 1631년 6월 8일이었다. “아름답고 순결했던 우리들의 사랑을 상징할
수 있는 영원한 기념비를 세워주세요…” 전해지는 이 말을 뭄타즈 마할이 했는지의 사실 여부는 확실히 증명되고 있지 않
다. 샤자한이 끔직히 사랑했던 뭄타즈 마할은 가고 없었다. 국장 기간은 2년이었고 이 기간에는 음주, 가무가 일체 금지되
었다. 모든 여자들은 화장은 물론이려니와 보석 등을 치장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화려한 옷마저도 입을 수 없었다. 샤자한
은 40여 일 간 거의 식음을 전폐하고 술로서 슬픔을 달랬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슬픔이 얼마나 진했는지 40여 일이 지난
후에는 노인처럼 머리는 백발이 되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고 전해진다. 6개월 후 뭄타즈 마할의 시신은 수도인 아그
라로 돌아왔다. 우선 자무나강변 정원에 가매장을 한 후 묘를 세울 계획에 착수하였다. 묘는 페르시아인 우스타드 이사
(Ustad Jsa)의 설계에 따라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무굴 제국의 1년 예산이 2억 루피였는데 샤자한은 1년 예산의 오분의
일인 4천만 루피를 투입하여 22년 간에 걸쳐 매일 2만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건물을 완성시켰다. 대제국의 왕비에 걸맞는
무덤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사랑의 징표로서 거의 광기에 가까운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것이다. 왕비의 묘를 짓기 위해서는
무굴 제국에 대한 식민지로부터 엄청난 양의 헌납이 있었지만 그래도 많은 양을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중국으로부터
1600kg의 진주, 600kg의 에메랄드와 5,000개의 보석을, 이집트로부터는 수정을, 히말라야로부터는 흑대리석 및 43종의
보석에 가까운 정교한 원석 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자재를 수입하였다. 한편 자체적으로 궁전에 있는 2개의
금관, 3개의 은관, 금으로 된 의자 5개, 은으로 된 의자 10개, 금접시 10만개, 은접시 10만개 등 수많은 보물이 타지마할
을 건축하는데 아낌없이 투입되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금과 은같은 것은 보통 쇠붙이처럼 사용되었고, 보석들은 마치
돌처럼 사용되었다고 한다. 무굴제국은 국교가 이슬람교였기 때문에 타지마할 역시 이슬람 양식으로 설계되었고 마크라나
(Makrana) 대리석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더 한층 돋보인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마크라나는 최고로 손꼽히는 대리석의 하
나이다. 새벽에는 물안개 사이로 어슴프레 보이는 은은한 색조를 띄는 타지마할은 한낮에는 눈부실 정도로 현란하고 찬란
한 빛을 발하며, 달빛 아래에서는 차가운 느낌마저 감도는 파아란 빛을 발한다. 또한 타지마할의 외벽 대리석에는 각종 꽃
무늬에 귀중한 보석들을 상감으로 박아 놓았기 때문에 색깔의 변화는 한층 더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입구에는
적사암으로 된 무케두아르 문이 8층 높이로 우뚝 서 있다. 문 입구에는 코란 89장 알파즈르(Alfajr:여명)가 아랍문자로 새
겨져 있다. 「오, 잠든 영혼이여 주에게로 돌아가라. 그와 함께 평화롭고, 그는 너와 함께 평화로우리라. 그러니 그의 종들
중 하나가 되라. 그리고 그의 품안으로 들어가라」 이 글씨는 위로 올라갈수록 크게 씌어져 있어 아래부분이나 윗부분의
글씨 크기가 똑같아 보이며 이것은 착시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타지 마할을 구성하고 있는 전정(前庭), 중앙 정원, 기단(基
壇)의 크기는 630m?22m(약 61,500평)로서 세계의 무덤 중에서 가장 넓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타지마할의 전체적인
조감도는 남북으로 직사각형 모양인데 묘는 북쪽에 자리잡고 있고 묘 뒷편은 자무나강이 흐르고 있다. 무케두아르 출입문
에서 북쪽의 묘를 보면 일직선상으로 분수가 도열하고 있어 수면에 타지마할이 대칭되도록 하였고 강 저편에서 보면 강물
에 되비치어 그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정원은 각 부분이 작은 모양의 ‘田’자 모양을 하고
있고 이것이 전체적으로 커다란 ‘田’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입구와 묘 중앙에는 커다란 대형 분수가 자리잡고 있어 전과
후의 중심을 잡고 있다. 묘는 320m?05m 규모가 7m 높이의 기단 가장 중앙에 자리잡고 있고 105m?05m의 4각 모서
리에 뾰족탑(Minaret)을 세워 묘의 돔을 호위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타지마할의 Keep Dome(Main Dome)은 내경
(內徑)의 지름이 19m, 외경(外徑)이 10m이며 높이는 27m로서 기부(基部)의 40m를 더하면 무려 67m의 높이를 가지고
있다.묘는 8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벽면은 각종 꽃을 양각으로 그려놓았고 내부의 벽면은 상감으로 처리하여 각종 보석을
박아 놓아 호화로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뭄타즈 마할의 관이 있는 방문은 은을 녹여 만들었고, 관의 꽃무늬는 보석과
진주로써 상감법으로 처리하였다. 벽에는 은으로 만든 촛대, 금으로 만든 등이 일정한 거리에 설치되어 있고, 복도에는 페
르시아산 최상급 카페트를 깔았으며 방마다 향수함이 있어 은은한 향기가 떠나질 않았다. 이러한 아름다운 무덤이 축성될
수 있었던 것은 무굴제국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부유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샤자한의 뛰어난 통치력을 의미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샤자한은 22년 동안 무덤 건설에만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국정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국가 재정은
어려워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하들도 간언을 하였지만 국정은 돌보지 않은 채 오직 타지마할의 건축에만 전념할 뿐
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네명의 아들은 왕권을 놓고 골육상쟁을 벌였다. 그리고 아우랑제브(Auran-zeb:1659-1707)가 3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아그라성에다 유폐 시킨 후 왕위에 올랐다. 이제 샤자한은 사랑하는 부인을 위해 왕위도 빼앗긴
채 대리석으로 된 방에 갇히게 되었다. 뭄타즈 마할과 사랑을 속삭이며 행복을 나누었던 하얀 대리석 방이 감옥으로 변하
고 만 것이다. 샤자한의 하루 일과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코란을 읽고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자무나강
변 정자에 앉아 강 저편의 타지마할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뭄타즈 마할과의 아름다웠던 사랑을 회상하며 눈물짓는 것이
었다. 한 여인을 위하여 왕위도, 남은 여생도 그렇게 송두리째 바친 남자가 역사상에 또 있었을까. 동서를 막론하고 고금
을 통털어도 이런 세기의 사랑은 없을 것이다. 감옥에 유폐된지 8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러한 생활은 반복되었다.
이렇게 사무치게 부인을 그리던 샤자한도 이제는 모든 기력을 상실한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이었다. 1666년 1월 22일 새
벽, 샤자한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내가 죽거든 나를 자무나강의 배에 실어 타지마할 뭄타즈 마할
의 곁에 묻어다오”라는 짤막한 유언을 남긴 채… 그의 곁에는 14번째 마지막 자식인 딸 자하나라만이 있었을 뿐이었고 그
녀의 슬피 울부짖는 호곡(號哭)만이 자무나 강 저편의 타지마할로 울려 펴져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샤자한의 시신은 그의
유언대로 자무나강의 배에 실려 타지마할로 옮겨졌고 뭄타즈 마할 곁에 안장되었다. 완성된 후 4백여 년이 흘렀지만 타지
마할의 아름다운 자태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타지마할의 돔을 멀리서 바라보면 커다란 진주덩어리가 별들 사이에 매달
린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타지마할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도 포함되어 있고 인간이 창조한 가장 위대한 5대 건축물
(피라밋, 성소피아 사원, 파르테논 신전, 성베드로 성당)에도 포함되어 있다

[ 일출 바로 직후의 타지마할 ]

 

 

 

[ 타지마할의 뾰족탑 ]

 

 [ 타지마할 지하 묘소에 안치된 몸타즈 마할의 관 ]

 

 [ 나티마할 지하 묘소의 문 ]

 

[ 자무나강에서 본 타지마할 ]

 

 

 

 [ 타지마할 벽면의 꽃문양 ]

 

 [ 아그라성 정자에서 보이는 타지마할의 모습 ]

 

[ 타지마할 묘에서 본 무케두아르의 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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