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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중심으로 반경 1km이내에는 서울 시내는 물론 전국 어디에도 쉽게 갈 수 있는 철도역이나 지하철역이 있어 불편이란 없다. 문명의 이기가 대신해주니 언제나 발은 한가롭다. 대형시장·빌딩·쇼핑몰과 소형 철물공장이 산재돼 있고, 사방으로 둘러싼 큰 도로와 가까이 있는 철로 때문에 항상 많은 사람과 자동차, 열차들로 북적거린다. 소음도 꽤 많고 공기도 그다지 쾌적하지 않다. 과거 영등포역 주변은 고달픈 농촌의 삶을 뒤로하고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의 집합소였다. 그들은 이곳의 공업지대에서 삶을 일구었다. 지금은 도시 재개발로 공장터가 아파트로 변했고, 주상복합 건물, 대형빌딩과 쇼핑몰로 바뀌어 지고 있다.
집 앞에는 예전에 큰 방적 공장이 있던 장소로 이제는 IT업체들이 입주해 있는 대형 사무용 빌딩이 들어 서 있다. 바로 그 옆에는 1960년대부터 자리를 잡은 소형 철물공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한 때 800여 곳이 넘는 소규모 공장들이 밀집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지만,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많은 공장들이 서울 외곽으로 빠져나가 지금은 140여 곳이 명맥을 유지하며 온갖 철 구조물들을 만들어 낸다. 철물공장 오른쪽으로는 1940년대 초에 조성된 ‘영단주택단지’가 있다. 이곳은 일제 시기에 땅을 빼앗기고 도시로 이동했던 농민들과 도시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500여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선 이 마을은 소규모 공장이나 식당 등으로 바뀌었지만 옛 모습은 여전하다. 조성당시의 원형이 잘 남아 있어 보존이냐 개발이냐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는 곳이다.
문래동 철물공장 단지는 ‘문래창작촌’이라는 예술마을과 한 울타리에서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다. 공장 주변 110곳에 160여명의 예술가들이 하루 종일 들려오는 소음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장인의 기계가 만들어낸 철물과 창작자의 예술품이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풍경이 공존하는 이색적인 섬 같은 동네이다.
이곳에는 2003년부터 예술가들이 알음알음 찾아와 보금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대학로나 홍익대 일대의 비싼 임대료를 피해 옮겨온 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면서 자연스럽게 창작촌이 만들어 졌다. 회화, 조각, 사진 등 시각예술을 비롯해 춤, 마임, 굿 등 공연예술과 문화기획, 예술비평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예술인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녹슬고 낡은 삭막한 공장지대에 예술의 꽃이 피어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공존이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겠다. 문래 예술공간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재개발의 압력을 문화 창조력으로 막아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것이다.
집 뒤에는 영등포에서 제일 높은 주상복합 건물과 청과시장, 그리고 대형 건물을 짓다 만 황량한 빈 터가 있다. 주상복합 건물내의 상가는 주변 대형 쇼핑몰의 난립으로 거의 텅텅 비어 있다. 텅빈 공간에서는 파격세일이라는 큼지막한 광고물을 내걸고 의류 등을 팔고 있으나 손님은 간혹 눈에 띌 정도이다. 주로 서민들이 안정적 수입이나 노후를 대비하여 빚을 내어 분양받았다는 말을 들으니 안쓰러운 생각만 든다. 공급 과잉으로 ‘호시절은 갔다’고 하는데, 이 건물을 볼 때마다 부동산 투자가 만들어낸 ‘바벨탑의 저주’를 생각하게 된다. 이곳에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초고층빌딩이나 대형 복합건물이 장래에 우리 경제에 거품을 조장하여 화근 덩어리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는 듯하다.
청과시장은 100m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대형쇼핑몰인 이마트, 홈플러스와 싸우며 버티고 있다. 골목 상권이 죽어가는 현실 속에서 청과시장은 산지와 직거래를 통해 싼 가격으로 소비자들에게 농산물을 공급하는데서 경쟁우위를 차지하려 한다. 청과시장은 한 밤중에 농산물 거래가 시작되는데 전쟁터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한가하기 그지없다. 대부분의 물량은 새벽녘에 도매로 풀려나가고, 대낮에는 소량으로 구매하는 일반 소비자들이 주 고객이다. 그럼에도 가격은 그다지 싸지 않다. 여기에서 거래되는 농산물이 우리 이웃에서 온 것인지, 농약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안전한 먹을거리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청과시장도 머지않아 재개발될 예정이라니. 이 곳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궁금하다. 또 하나의 무미건조한 상징물이 나오지나 않을까.
청과시장 옆으로 난 고가차도를 건너면 소위 ‘몰족’이 즐겨찾는다는 현대식 대형 복합 쇼핑몰이 들어서 있다. 쇼핑몰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젊은 여성들이 유리 창가에서 남성들을 유혹하고 있는, 영등포의 역사와 함께한 사창가가 있다. 경인로를 건너 영등포역 근처에는 노숙자들의 쉼터와 쪽방촌도 있다. 사람의 얼굴과 동물의 몸을 가진 인면수신(人面獸身)의 그로테스크한 장면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인간의 역사가 그러한 걸 어찌하겠는가. 쇼핑몰에는 재래시장과 영세서점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대형 마트와 대형서점, 소비자의 인정욕구를 부추기는 명품점이 있다. 쇼핑몰에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지갑을 열지 않고는 못 배겨내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에서 절약의 미덕을 쉽게 잊어버린다.
내가 사는 곳은 대도시의 문제도 고스란히 안고 있지만, 희망의 싹도 자라고 있다. 서울에서 문래동의 동격(洞格)은 어느 정도나 될까. 영세업체를 고사시키는 거대한 상점, 사상누각의 탐욕의 탑, 화려한 소비문화와 우리 사회에서 처절하게 소외된 인생이 함께 있다. 물론 우리 사회의 계층 상승 욕망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좋은 학교’는 없는 것 같다. 산업화와 탈산업화, 속물스러움과 고상함, 천박과 세련을 오가는, 서울에서 가장 복잡미묘한 성격을 갖고 있는 동네이다.
그럼에도 역동적 삶과 창조적 상상력이 공존한다. 철공소 골목은 악조건 속에서도 새로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 낯선 풍경이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일상적 삶을 반대의 시각에서 뒤집어 보게 한다. 문래동은 ‘디자인’을 한답시고 겉멋을 부리는 것과는 달리 다양한 인간이 살아 숨쉬는 활기찬 동네이다. 무위자연의 도를 깨치지 못하더라도 상상력의 발원지로서, 온갖 인간 군상이 만들어내는 조화와 부조화속에서 소요하며 큰 뜻을 품을 수 있는 곳이다. 굳이 깨끗하게 정돈된 도심을 찾아 배회할 필요가 있겠는가. 자신이 어디에 사는지를 제대로 안다면 동격(洞格)의 높낮이를 따져 무엇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