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골 지킴이
허영감은 아까부터 다리밑 그늘에 앉아 건너편 산자락 논빼미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산촌 들녘엔 지난달 이맘때 심은 벼포기들이 뿌리를 내려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허영감은 그때가 생각났다. 6.25가 끝나고 동네는 전쟁의 휴유증으로 뒤숭숭했다. 지리산에 가까운 곳이란 지정학적 이유 때문에 마을은 이념에 의하여 두갈래로 나누어졌다. 당연히 친정부쪽으로 여론이 많이 기운 것은 어쩔수 없었다.
모내기가 끝나고 초벌 논잡초 매기에 들어갈 즈음, 사람들은 더위를 피하여 마을앞 정자나무 밑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은연 중 사람들은 두갈래로 나누어졌다.
아버지는 그러한 모습이 보기가 싫다고 하셨다. 그래서 더위를 무릅쓰고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자그만한 산판을 일구어 물을 끌여들여 논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에 둘어갔다. 허영감의 어린 눈에도 할아버지의 그러한 행동은 무모함에 가까워 보였다.
"아버지! 다른집 어버지들은 그늘에서 쉬시는데 안힘드세요?"
"빌어먹을...매미 새끼처럼 쳐묵꼬 나무밑에서 떠들고 있으면 뭐할끼고?"
아버지의 가슴속은 빨찌산 토벌작전에 경찰의 보조요원으로 차출되어 나갔다가 전사한 작은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으로 꽉차 있으셨을 것이라고 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의 작업은 현실로 다가갔다. 도랑의 물을 막아 수로를 내고, 차츰차츰 메마른 훍속으로 물기가 채워져갔다. 만들어진 논빼미는 100여평은 됨직했다.
"올해는 늦었고, 내년엘랑 모를 심겠구먼..."
"허가야! 누워서 뭔 손짓을 그리 해대노?"
김영감이었다. 70중반, 인근 마을에서 이제 남은 또래는 두사람뿐이다. 혹자는 뒤꽁무니 빼다 자식따라 소끌리듯 도회로 나갔고, 한둘은 먼저 저세상으로 떠났다. 둘은 지리산골 지킴이가 되고 만 것이다.
"으음...내가 깜빡 잠이 들었었나?"
"잤다며 손짓은 왜 하는긴대?"
"참새떼가 건너편 우리 논에 떼거리로 앉아 탕을 안치나..."
"대낮부터 웬 개꿈이고? 그리고 어찌 그게 네논이고? 저식놈땜에 팔아치웠다 안캤나? 인제 모심은지 한달밖에 안됐구만. 참! 며느리가 아프다더만 우에됐노?"
"...암이란다. 가슴이 어쨌다나...그래서 논도 팔아묵었고, 내 맴이 이리 뒤숭숭한거 아이가. 즈거 엄마도 안그랬나."
"큰일이구마. 예전시 우리네 부모님들은 영문도 모리고 가셨더랬는데. 아는게 병이라. 그래도 야야 너무 낙심마라. 요즘은 의술이 좋다안카나."
"인명 재천인데 우짤끼고? 주막집에 먹걸리나 한사발 하제이?"
"벌씨부터? 허긴 밥때 다 되었것다야."
화정골은 산도 높지만 골도 깊었다. 남동쪽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이고, 돌아 앉은 마을이다. 겨울엔 지리산 골바람이 드세어 머물기를 거부하지만, 여름엔 어느해부터인가 피서객들이 하나 둘 찾아들었다.
산자락엔 몇몇 산장이 생겨났고, 계곡을 지켜선 마을은 그들이 거쳐가는 초소와 같았다.
주막집 그늘막엔 등산복 차림의 50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서너명이 자리를 잡았다. 등산이란 개념보다는 야외모임 정도란 느낌이 들었다. 조금전 자신들이 보았던 산수국꽃을 말하며 볼수록 아름답다고 했다.
그녀들의 대화가 본격화 시작되었다. 네개의 스피크들이 부지런히 작동되었다. 아이들과 남편 애기, 친구에 이어 건강 이야기로 번져갔다.
갈수록 가관이었다. 그늘막을 전세낸듯, 대북 확성기를 가동한듯...아마도 이 산마을에 살거나 오가는 사람치곤 잘난넘 없고, 감히 자신들의 대화를 막아서지 못할 것이란 자신감 충만에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엔 어느 제약회사의 건강식품이 좋더라는 둥 광고대행까지 해댔다.
허영감은 자신의 며느리도 저 나이 또래일 것이란 생각을 했다. 처음 아들이 며느리를 집에 데려왔을때 도시 생활만 한 며느리는 모든걸 매우 낯설어 했다. 그러나 공손하고 말없이 배우려는 자세에 선듯 결혼을 허락했었다. 그러한 며느리는 자리에 눕고 말았다.
허영감은 여인네들의 숨넘어 가듯 깔깔거림이 역겹게 느껴졌다. 곁에는 아버지같은 노인들이 있고, 외에도 서너명 손님들이 밥을 먹는데 왜 저리도 남을 의식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전적으로 여성을 탓만도 아니었다. 예로부터 여성은 말하기를 좋아해 남성보다 3배나 말을 많이 한다고 했다. 전문가에 따르면 여성은 하루 평균 2만단어를 말하는 반면 남성은 7000단어를 말하고 있는데, 대화의 목적은 남성은 문제해결, 여성은 나눔과 공감에 있다고 하였으니...
아무튼 허영감은 그녀들의 대화를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 저..."
아까부터 낌새를 알아챈 김영감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쳤다.
"허가야! 요즘 젊은 것들한테 말 잘못하면 봉변 당한데이. 못들은체 하거라."
"입으로 계속 씨부리고, 밥은 똥구멍으로 묵는다냐?"
짙은 한줄기 구름이 산마을을 덮었다. 어디서 날아 왔는지 고추잠자리 몇마리가 마당위를 돌았고, 시샘하듯 골바람이 시원하게 불어댔다.
허영감은 습관적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며느리가 입원을 한후로 아들에게서 오는 전화때문이었다. 이제 팔아줄 재산도 없는데...
술이 거나해지자 김영감은 힐끗할끗 옆테이블의 젊은 여인들을 훔쳐보았고, 허영감은 얼굴에 윤기 흐르는 살찐 그녀들의 모습에 대비되는 며느리의 병약함이 자꾸만 안스러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녀들의 대화는 쉴새없이 계속되었다.
"00엄마야! 니 전원생활 하고 싶다며? 이 동네로 오면 좋겠네."
"뭐라카노? 시골도 시골 나름이지. 내가 이런 냄새나고 지저분한 촌구석에 어찌 살꺼고?"
"여기가 어때서? 공기좋겠다. 괜찮구마."
"니나 살아라. 오래 살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안 아파야지. 그럴려면 병원도 가깝고."
그말에 허영감은 골이 났다. 뭐 냄새나고 지저분해...말리는 김영감의 손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섰다.
"안아프면 못죽지. 뭐 냄새나고 지저분해? 그럼 그런 곳에 뭐할라고 왔는교? 듣자하니..."
순간 모두가 숨죽인 듯 잠잠해졌다. 대장인 듯한 여자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들 계신 것도 생각 못하고..."
불어온 골바람이 고추잠자리들을 밀어냈고, 마을을 덮었던 구름은 동녘하늘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24.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