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86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이 강산 낙화유수’]
이 강산 낙화유수
당신 손때 묻은 담요를 접고 홍단, 청단패 쥐고서 일어났어요. 어제처럼 민화투 소일하다 당신이 불쑥 생각나서요. 담벼락 옆에 선 애처로운 자목련 나무에다 화투 두 장 걸어놨어요. 세월이 덧없다고 풍진을 툭툭 터시던 당신에게 청실 홍실 쌍매듭 진 꽃가마를 그려 넣었어요. 이 강산 낙화유수 구성지게 부른 노래가 오늘도 담장 밖 아이들 술래잡길 멈추게 했어요. 자목련 꽃잎이 질 때, 진작 알아보긴 했었어요. 이 강산에 하얗게 흐르는 설운 강물을.
(2003 . 4 . 23)
*‘이 강산 낙화유수’ ~ 가수 남인수가 부른 대중가요. 동네 오래된 골목길을 지나다가, 이 노래를 늘 나직이 부르던 이제는 고인이 된 이웃집 할머니가 떠오르고.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이 강산 낙화유수」는 통속적 삶의 기호인 '화투'와 '대중가요'를 시적 오브제로 끌어올려, 생의 애달픔과 미련, 그리고 부재(不在)의 그리움을 압축적으로 그려낸 매우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산문시입니다.
1. 일상적 기호(화투)의 정서적 승화
이 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화투’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도구가 그리움과 위로의 매개체로 변모하는 과정입니다.
⚫손때 묻은 담요와 화투패 : '민화투 소일'은 고인이 된 이웃 할머니의 쓸쓸했던 노년과 일상을 상징합니다. 시인은 그 손때 묻은 유품(혹은 기억)을 접다가 문득 떠오른 그리움을 화투패로 구체화합니다.
⚫자목련에 걸어놓은 화투 두 장 : ‘홍단’과 ‘청단’은 단순한 게임의 패가 아니라, 고인의 넋에 바치는 시인의 작은 헌화(獻花)이자 색채적 은유입니다.
청실 홍실 쌍매듭 진 꽃가마: 풍진 세월을 툭툭 털어내던 고인에게 시인은 화투패의 '홍'과 '청'을 이어붙여 꽃가마를 그려줍니다. 이는 이승에서 고단했을 할머니의 삶을 위로하고, 저승으로 가는 길만큼은 화려하고 고이 가길 바라는 원혼(慰魂)의 주술적 연민을 보여줍니다.
2. 청각과 시각의 감각적 교차
시의 후반부는 시각적·청각적 이미지가 겹쳐지며 아련한 서정성을 극대화합니다.
⚫노래와 아이들의 멈춤 : “이 강산 낙화유수”라는 가요는 세월의 무상함과 한(恨)을 담은 노래입니다. 그 구성진 노랫소리가 "담장 밖 아이들의 술래잡길 멈추게 했다"는 표현은, 고인의 노래가 가진 깊은 울림이 시간과 세대를 넘어서 동네 전체를 잠깐 멈춰 세울 만큼 강렬한 정서적 무게를 지녔음을 시적으로 포착한 부분입니다.
⚫자목련과 설운 강물 : 화투의 붉고 푸른 색채는 자목련의 보랏빛/흰빛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떨어지는 꽃잎(낙화)과 하얗게 흐르는 설운 강물(유수)로 확산됩니다.
**꽃잎이 지는 순간(낙화)**과 **흐르는 강물(유수)**은 가요 제목 「낙화유수」와 완벽히 상응하며,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세월의 흐름'을 하얗고 애달픈 시각적 잔상으로 완성합니다.
3. 총 평
한기홍 시인의 「이 강산 낙화유수」는 거창하고 거룩한 언어로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동네 골목길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민화투, 낡은 담요, 자목련, 그리고 흘러간 대중가요라는 가장 서민적이고 친근한 소재들을 엮어 한 존재의 부재가 남긴 깊은 궤적을 읊조립니다.
소박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정조, 시각과 청각이 절묘하게 얽힌 완성도 높은 이미지 기용을 통해, 통속성 속에 숨겨진 삶의 숭고함과 애상을 훌륭하게 건져올린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