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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나라 茶 문화(1) 스크랩 중국차의 역사 불교가 중국 차문화(茶文化)에 미친 영향
촌안(村顔) 추천 0 조회 199 07.12.18 03:13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불교가 중국 차문화(茶文化)에 미친 영향

 

글쓴이: 촌안(村顔) 박영환

(현, 중국사천대학 객좌교수, 동국대학 강사)

 

 

 

목   차

 

 

 

 

 

 

    서 언(序言)

    一. 선승(禪僧) 차풍(茶風)의 형성

    二. 불교 사원경제 중의 차(茶)의 위치

    三. 불교사원에서 최초로 생산된 중국의 명차(名茶)

    四. 불교사원 내의 다문화 - 사원차(寺院茶)

    결어(結語)


서 언(序言)

불교가 외래문화로서 중국에 최초로 전래된 시기에는 궁중(宮中)이나 귀족들의 자손번창과 국가안녕 및 자신들의 복을 추구하는 기복적인 불교가 성행하였다. 불인(佛人)들이 최초로 차를 마신 시기는 대략 진(晉:AD,265-420년)나라 때부터로 볼 수 있다.  당시에 불교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마취시키는 통치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이후 중국의 불교는 중국역대왕조들의 통치수단으로 즐겨 이용되었다. 이것은 오히려 중국불교 발전의 원동력으로써 서로 다른 여러 종파를 출현시키게 된다.

특히, 선종불교의 원통(圓通)사상은 중국의 토착문화와 원만하게 조화, 융화되어 당대 다문화(茶文化)를 급속히 발전시킴은 물론 단박에 차풍(茶風)을 중국전역으로 확산 유행시키는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불교의 청정(淸靜)사상은 중국의 다문화 속에 깊이 녹아내려 당시의 다인들은 음차생활을 통해 자신과 산수, 자연이 한 몸이 되어 자신들의 내면의 아름다운 운율과 정신을 풀어내고자 소망하였다. 아울러 “다도(茶道)”란 두 글자를 선승(禪僧) 교연(皎然)이 최초로 사용하면서부터 중국의 음차문화는 일반적 기예(技藝)로부터 고도의 정신적 경지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이론(異論)의 여지가 아직 남아있긴 하지만, 대체로 “교연(皎然)”과 “봉연(封演)”의 두 가지설로 압축되고 있다.


一. 선승(禪僧) 차풍(茶風)의 형성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승(禪僧)들의 차풍(茶風)이 형성된 시기는 대략 위진남북조 시대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몇몇 기록들이 육우의《다경》에서 인용되어있다. 석도설(釋道說)의《속명승전(續名僧傳)》에는 “송나라(南朝) 석법요(釋法瑤)의 성은 양(楊)씨요, 하동(河東)사람이다. 원가(元嘉:424년-451년) 연간에 강을 건너서 심대진(沈台眞)을 만나 무강(武康)의 소산사(小山寺)에 돌아가라는 청을 받았다. 수레를 매달아서 드리울 나이에 마시는 차를 먹이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이어서 인용된 《송록(宋錄)》에는 “신안왕(新安王)인 자란(子鸞)과 예장왕(豫章王)인 자상(子尙)이 팔공산의 담제도인(曇濟道人)을 참예하였다. 도인이 차를 베풀자 자상이 이를 맛보고 이르기를, ‘이것은 감로(甘露)요 어찌 차(茶)라고 하리까?”라고 하였다. 이러한 문헌의 기록(남조 송나라 때의 기록)들은 대략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미 승려들 사이에서 음차풍습이 널리 형성되었음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二. 불교 사원경제 중의 차(茶)의 위치

중국불교는 동한(東漢)초기부터 광범위하게 전파되기 시작하여 수당(隋唐)과 성당(盛唐)에 이르자 그 전성기를 누리면서 중국 전역에는 매우 많은 불교사원들이 건립되기에 이른다. 이에 사원경제도 따라서 급속히 발전하게 되는데, 차(茶)는 바로 사원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게 된다. 이로써 중국차는 당대(唐代)에 이르자 이미 전성기를 이루고 있던 선종불교의 발전을 기초로 삼아 더욱 급속히 흥성, 발전하게 된다.

고대 중국의 사찰들은 차를 중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차의 생산과 선전 및 차 연구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에는 오직 사찰만이 차를 연구하는 최상의 조건을 구비하고 부단히 차의 품질을 향상, 발전시켜왔다. 왜냐하면 사찰들은 모두 일정한 농지를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승려 대부분이 일반 백성들의 노동에 참가하지 않아 비교적 여유가 많았으며 틈만 나면 문화적 활동의 일환으로 채다(採茶)와 제다(製茶)를 궁리하는 한편 품다(品茶)의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고 더 나아가 차와 관련된 저술과 시작(詩作)활동을 함으로써 누구보다 다문화 보급과 선전에 선구적 역할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고로 중국에는 “자고로 유명사찰에는 명차가 난다(自古名寺出名茶)”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당송(唐宋) 때에는 불교사원에서 대규모의 차연(茶宴)을 자주 거행하였다. 당시의 차연(茶宴)에서는 주로 불경과 다도를 이야기하고 시를 짓고 읊기도 하였다. 특히 불교의 청규(淸規)와 경전과 불리(佛理)의 변론 그리고 각자의 인생관 등을 모두 하나로 어우러졌다. 이것은 다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민간차례(民間茶禮)의 형성에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조정의 차의(茶儀)가 형식이 복잡하고 따라하기 어려운 반면에 불교 선원(禪院)의 차례는 그 형식이 요점적이고 간결하여 일반백성들이 쉽게 다가가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송(唐宋)시기는 불교가 성행하였고, 이 시기의 불교사원에는 반드시 차가 있었다. 교육을 할 때에도 반드시 차가 있었고, 참선을 함에도 반드시 차는 필수품으로 따라다녔다. ―불교에서는 본래 참선수행 중에는 일체의 간식을 금지하고 있으나 수행자들의 졸음을 방지하기 위해 오직 차를 마시는 것만은 허락되었다.(唯許飮茶)― 특히 중국 남방에서는 거의 모든 사원 주변에서 차를 직접 심고 재배한 흔적이 속속히 발견되어 그야말로 당시 승려들의 차를 기호(嗜好)하는 정도가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


三. 불교사원에서 최초로 생산된 중국의 명차(名茶)

중국의 역대 명차 중에서는 불교사원에서 최초로 심고 재배하고 창조해 낸 차들이 아주 많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각종 고문헌(古文獻) 이나 중국의 민간전설 중에서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중국 사천성(四川省) 아안(雅安) 몽산(또는 蒙頂山)에서 생산되는 “몽산차(蒙山茶)”는 “선차(仙茶)”라고도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한(漢)나라 때 감로사(甘露寺)의 보혜선사(普慧禪師)가 직접 심었다고 전한다. 그 품질이 매우 우수하여 황제에게 바치는 공차(貢茶)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또한, 현재 중국의 명차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복건(福建) 무이산(武夷山)에서 생산되는 “무이암차(武夷岩茶) ”는 오룡차(烏龍茶)로도 불려지는데 이 차는 사찰에서 제다(製茶)한 것을 최고 정품으로 치고 있다. 특히, 무이암차는 승려들이 직접 채다(採茶)하였는데 그 채적(採摘)하는 절기(節氣)에 따라 각각 “수성미(壽星眉)”와 “연자심(蓮子心)” 그리고 “봉미용수(鳳尾龍須)” 등 세 종류의 명차로 구분된다. 북송 때에는 강소성 동정산(洞庭山) 수월원(水月院)의 산승이 직접 채다(採茶)하여 제다(製茶)한 “수월차(水月茶)”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벽라춘(碧螺春)이다. 또한 명나라 융경(隆慶:1567-1572년) 연간에는 승려들이 대방(大方)하게 차를 제다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차의 제다가 매우 정묘(精妙)하여 이내 곧 세상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차를 가리켜 “대방차(大方茶)”라 불렀으며, 현재 환남차구(皖南茶區)에서 생산되고 있는 둔녹차(屯綠茶)의 전신이 된다.    


이외에도 절강성 운화현(云和縣) 혜명사(惠明寺)의 “혜명차(惠明茶)” , 보타산(普陀山)의 “불차(佛茶)”, 황산(黃山)의 “운무차(云霧茶)”, 운남성 대리(大理) 감통사의 “감통차(感通茶)”, 절강성 천태산(天台山) 방광사(方廣寺)의 “나한공차(羅漢供茶)”, 항주 법경사(法鏡寺)의 “향림차(香林茶)” 등은 모두 불교사원에서 최초로 생산된 중국의 명차들이다.  


四. 불교사원 내의 다문화 - 사원차(寺院茶)

중국의 불교사원에서는 차를 심고 재배하고 만드는 기술이 독특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음차에서부터 다도에 이르기까지도 매우 연구적이었다. 사찰 안에는 “차당(茶堂)”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선승들은 전문적인 불교교리에 대한 각자의 변론을 펼치기도 하고, 또 속가의 시주들을 초대하여 대접하기도 하며 차향을 음미하고 차를 품미(品味)하였다. 법당 안에는 “차고(茶鼓)”가 있어 승려들에게 음차소집을 알릴 때 두드리는 북으로 사용하였다. 이 밖에도 사원 안에는 “다두(茶頭) ”가 설치되어 있어 전문으로 물을 끓이고 차를 달이며 손님에게 차를 내어 대접하였다. 아울러 사원의 문 앞 일주문 밖까지 약간명의 시차승(施茶僧)을 보내어 사람들에게 차를 대접하도록 하였다.

사원에서 직접 생산을 하거나 혹은 외부에서 반입된 차든 간에 사원 내에서 마시는 차를 모두 “사원차(寺院茶)”라고하며 대략 그 용도는 “부처님께 차를 공양하는 것”과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 차를 마시는 것” 등의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이와 관련된 《만구지(蛮甌志)》의 기록을 보면 “각림원(覺林院)의 승인들은 중등차를 손님에게 접대하고 자신은 하등차를 마시며 상등의 차는 부처님께 공양한다. (覺林院的僧人待客中等茶、自奉以下等茶、供佛以上等茶)”고 기록하고 있다.

“사원차”는 불교의 규범에 의해 다시 몇 가지 명목으로 구분되어지는데 예를 들어 매일 불전(佛前)과 당전(堂前) 그리고 영전(靈前)에 차탕(茶湯)을 공양하는 “전다(奠茶)”, 수계를 받은 서열에 의해 차를 마시는 “계석차(戒腊茶)”, 탁발하여 시주해 온 “화차(化茶)” 등으로 구분되어진다.

중국의 많은 불문성지(佛門聖地)와 명산대찰 주변에는 대부분 차나무가 심어져있고, 승려들이 직접 찻잎을 따고 만들어 왔으며 이러한 관습은 오래도록 이어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불교 승려들의 오랜 음차습관은 무수한 고령의 승려들의 장수비결과도 결코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결어(結語)

중국다문화에 담긴 총체적 사상을 한마디로 일축하면 중국인들은 차문화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며 타인과의 화목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반면 불교정신에서 강조한 것은 “고적(孤寂)함”이다. 이렇게 완전히 상이한 성격을 띠면서도 서로 함께 조화를 이루어 있었던 것은 역시 중국 선종불교의 원통사상이 중국의 토착문화와 잘 조화하고 융화한 덕분일 것이다.

어쨌든 차를 심고 재배하기, 음차습속의 확산과 다연(茶宴)의 형식, 다문화의 대외적인 전파와 보급 등의 모든 분야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차에 미친 공헌은 실로 지대하다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차와 불교의 불가분의 관계에서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사상이 탄생한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불암산 자락에서 촌안(村顔) 박영환 합장>

출처: 季刊《茶談》200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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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7.01.14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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