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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 북접 사령관인 ‘통령’으로 10만 혁명군을 이끌고 관군·왜군과 싸운 치열한 혁명가다. 둘째, 동학 3세 교조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해 민족종교로 만든 종교지도자다. 셋째, 일제강점기에 기미 3·1독립혁명을 주도한 독립운동의 선각자다.】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1861 ~1922)
의암 선생은 동학이 시작되던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주시 북이면 금암리에서 세금징수 담당 향리인 손의조(孫懿祖)와 그의 둘째 부인인 경주최씨 사이에 서자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초명)은 응구(應九)요, 호는 의암(義菴)이다. 가난해 정상적인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은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성격은 매우 강직했다. 어릴 적 농민 수탈, 적서(嫡庶)의 차별 등에 크게 자극을 받아 그의 가슴에는 반항아의 기질이 움트게 됐다. 1882(고종19)년 약관의 나이(21세)에 조카 손천민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해 최시형의 수제자로 연성수도(鍊性修道)했다. 1894년 갑오동학혁명 때 통령(統領)으로 북접(北接)의 혁명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과 논산에서 합세해 호남과 호서지역을 석권하고 북상해 관군을 격파하다가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이후 은산, 강경 등지로 은신하다가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썼다. 1901년에는 안경 장사로 변장해 일본을 경유,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이상헌(李祥憲)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1901년에는 동생 손병흠(孫秉欽)·이용구(李容九)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대판(大阪)에 머물렀다. 그러나 간신배들의 책동이 두려워 그해에 상하이(上海)로 가서 수개월을 지내며 미국행을 시도했으나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 박영효 등을 만나 국내 사정을 듣고 1903년 귀국했다.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해(64명) 이들을 일본에 데리고 가서 유학시킴으로 신문화 수용에 전기를 마련해 줬다. 1904년 권동진, 오세창 등과 개혁 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해 국내 조직에 착수했다. 이때 갑진개혁운동(1904)을 전개하기도 했다.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명을 확보하고 전 회원에게 단발령을 내리는 등 신생활 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이용구의 배신으로 귀국해 일진회와 무관함을 밝혔다. 또 이용구, 송병준의 매국 행위를 계기로 60여명을 출교(黜敎) 처분해 정교분리의 용단을 내리기도 했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대 교주로 취임했다. 선생은 교세 확장 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천도교 월보 발간), 보성(普成), 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해, 교육 사업에 공헌했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서울 우의동에 은퇴해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 33명의 대표로 ‘3.1 민주 혁명’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1922년 5월 19일 62세를 일기로 서거하는 것이 선생의 일생이었다.
가족관계는 배우자 홍응화(1870), 주옥경이 있고, 자녀는 손용화가 있다. 사후 선생에게 정부는 건국훈장을 추서(1962)했고,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생가터에 기념관이 건립됐다.
1. 의암의 의협심
개화의 물결이 미비하던 당시, 전통 윤리가 지배하는 구시대적 가족사회 제도 하에서 그는 서자로서 어린 시절을 천대와 수모를 톡톡히 받으면서 자랐다. 이러한 차별대우는 그에게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절실히 깨닫게 해 마음속에 절망과 울분을 품도록 했다.
선생은 한 때나마 청주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일삼아 세인들의 빈축을 샀던 적도 있었다.
이와 같이 그의 불우한 가정환경은 오히려 그에게 극기와 성장의 계기를 마련해 줬다. 그는 양반 세도의 그릇됨을 꺾고 잔반(殘班: 몰락한 양반) 등 허약자의 어려움을 도와줘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이를 실천에 옮긴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17세 때 괴산에서 수신사(修信使)가 어떤 사람의 상투를 말꼬리에 메어서 학대하는 것을 보고 마부를 덮쳐 구해준 일이나, 20세에 음성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들을 5일간이나 방치해 둔 것을 보고 즉시 염습해 후장해 준 일은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다.
또 청주 약령시에 갔다가 돈 300냥을 습득, 잃은 사람에게 기어이 찾아 준 일도 있었다. 21세 때에는 초정약수터에서 양반이 약수를 독점하고 있자, 즉시 달려들어 그들을 잡아 뒷전에 서 있던 힘없는 백성들에게 약수를 마시게 한 일 등은 젊은 그의 의협심과 정의로운 면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하지만 한때는 방황도 했고, 또 다듬어지지 않은 그의 정의지심(正義之心)은 거친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 그가 21세에 청주 대주리 서우순(徐虞淳) 접주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入道)한 후부터 인생의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됐다. 동학에 입도한 손병희는 ‘後天開關 事人如天 輔國安民(후천개관 사인여천 보국안민)’의 동학사상을 깊이 받아들여 과거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돈독한 신앙생활로 일관했다. 그러던 중 1883년 해월(海月) 최시형을 찾아가 도 닦는 법과 ‘向我設位法(향아설위법)’을 배우게 됐다. 해월과의 만남이 개혁적인 사상체계를 세우게 되는 주된 동기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개혁적인 정치 사상가
선생은 구국을 위한 방법으로 을사조약 이후 동덕여학교와 보성학교를 인수 경영해 교육진흥운동을 폈다. 그는 ‘교육을 통한 교육운동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이고 조직적일 수 있다’는 교육 구국론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또 인내천(人乃天)사상의 실천가로 ‘천도태원경(天道太元經)’ ‘삼전론(三戰論)’을 저술해 개화와 독립을 위한 개화사상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3.1민주혁명’(1919)에서 잘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손병희는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맡은 최남선에게 ‘되도록 온건하게 쓰라’고 누차 부탁했는데, 그 결과 최남선이 당초에 쓴 선언서의 초안이 많이 부드럽게 수정했다고 생각된다.
그 예가 공약 3장에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부사구 바로 다음에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라는 온건한 동사로 끝맺고 있다. 일본 도쿄에서 시작한 ‘2.8독립선언서’는 그 문맥이 과격하고 투쟁 노선에서도 ‘영원한 혈전을 선언한다’는 식의 폭력적인 방법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3.1운동의 투쟁 방법은 평화적, 비폭력적인 극히 온건한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선생은 어디까지나 만세운동으로 끝내기를 희망했고, 그 길만이 쉽사리 독립을 얻는 길이라는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생의 사상적인 배경 가운데서 민족대표 33명은 2월 28일 밤 서울 재동에 있는 손병희 선생 댁에서 모임을 갖고 결의를 새롭게 하는 동시에 선언식의 장소와 절차 등을 마지막으로 결정했다. 물론 민족대표 손병희는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될 새로운 국가의 정체는 당연히 ‘공화정’이라고 소신을 밝혔으며, 그 결과 상해임시정부는 실제로 공화정을 체제로 채택한 것이다.
또 선생은 예심 판사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독립하면 민주정체로 할 생각이다”고 분명히 밝혔다.
판사 : 조선이 독립하면 어떤 정체의 나라를 세울 생각이었나?
손 : 민주정체로 할 생각이었다.
선생은 “이 일은 나뿐만이 아니라 일반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 나는 유럽전쟁(1차 세계대전) 중에 교도들과 우이동에 갔을 때, 전쟁이 끝나면 상태가 일변해 세계에 임금(君)이 없어질 것”이라고 이야기 한 일이 있다.
선생이 생각한 대로 당시의 민중이 민주정체를 바랐을까 하는 것은 의문이다. 대개 당시의 유생들은 왕정복고를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볼 때 3.1운동을 주도했던 손병희의 개혁적인 정치사상을 한 눈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3. 의암 손병희 선생에 대한 평가
“2019년이 ‘3·1혁명’ 100돌인데, 그 주역인 의암 선생이 의외로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안타깝다. 선생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역사적 변혁을 주도한 중심 인물이다.”
지난 30년 가까이 몰두해온 근현대사 인물 평전 작업 30권째로 <의암 손병희 평전-격동기의 경세가>(채륜 펴냄)를 펴낸 김삼웅(74) 전 독립기념관장은 그 세 가지를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 동학군 북접 사령관인 ‘통령’으로 10만 혁명군을 이끌고 관군·왜군과 싸운 치열한 혁명가다. 둘째, 동학 3세 교조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해 민족종교로 만든 종교지도자다. 셋째, 일제강점기에 기미 3·1독립혁명을 주도한 독립운동의 선각자다.”
김 전 관장은 “운동으로서 동학과 3·1은 좌절당하거나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혁명의 역사로 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1948년 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성공의 역사요, 그 중심에 의암 선생이 존재한다”고 했다.
의암은 3·1 거사 뒤 재판정에서도 시종일관 독립운동 의지를 당당하게 밝히면서 민주공화제 수립 뜻을 펼쳤다. 8·15광복 뒤 11월23일 환국한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가 닷새 뒤인 28일 순국지사 순방 첫번째로 찾아간 곳이 서울 우이동의 의암 묘소였다. 천도교 쪽도 그랬지만, 1919년 3월 서북간도와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수립한 대한국민의회가 발표한 임시정부 조직에는 의암이 대통령·박영효가 부통령·이승만이 국무총리였다.
손병희(1861~1922)는 충북 청원군 북이면에서 청주목 하급관리인 아전을 지낸 중인집안 서자로 태어나 젊었을 땐 ‘건달’ 노릇도 했으나 자력으로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한테서 의암이란 호를 받아 이름 그대로 의롭게 살려고 평생 노력했고 남접의 녹두장군 전봉준과는 의형제까지 맺었다.
김 전 관장은 그가 3·1독립선언 거사 자금을 대고, 기독교와 불교 유력자들을 독립선언 대표로 끌어들이는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면서, “그가 없었다면 3·1혁명 자체가 가능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라고 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도 그가 세운 인쇄소 보성사였다. 의암은 거사 뒤 일본으로 몰래 건너간 뒤에도 오사카·교토·도쿄 거리를 거침없이 활보하고 다녔다. 당시 최남선, 이광수, 방정환 등 젊은 인재들을 일본으로 불러내 공부하게 했고, 훗날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소파 방정환은 사위로 삼았다. “부채로 넘어가게 된 보성전문학교를 천도교 기금으로 살려내 오늘의 고려대 터전을 닦은 것도 의암이었죠.” 김 전 관장은 지난해 10월 일본을 방문해 의암의 궤적을 답사하기도 했다.
“의암은 한때 항일 무력항쟁을 위해 무기를 사들이기도 했으나 비폭력 평화투쟁 쪽으로 생각을 바꿔, 3·1 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에게도 평화시위임을 강조하라고 했다. 오늘날 촛불 평화시위의 뿌리가 거기까지 이어진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그는 “대의제가 제기능을 못하니까 국민이 직접 나선 것”이라며, 촛불시위를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독재가 남긴 적폐들을 청산하려는 ‘이중혁명’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기미독립선언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손병희 선생은 근대가 낳은 종교가, 혁명가, 교육자, 언론인 그리고 정치사상가로서 사회개혁과 구국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민족에 대한 시대적 사명감을 갖고 종교를 통해 민족의 울분을 극복하려 했고,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다시 세우려고 직·간접으로 자신을 희생했다. 이렇게 격동기를 살아온 그는 갈고 닦아온 60 평생의 개혁 의지를 3.1운동이란 독립정신으로 꽃 피웠다.
선생이 활동한 시기가 이제 한 세기를 넘겼다. 그는 우리 고장의 위인이요, 민족의 지도자로 활약한 충북이 낳은 위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북에서는 선생에 대해 너무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아쉽다. 도 차원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청주시에서도 3.1운동 100주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선생의 사상과 얼을 기리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우리 고장의 후손들에게 선생의 정신과 사상을 부각 시켜 제 2의 손병희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충절의 고장의 면모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조종오 찬, 손병희선생전, 서울 웅변구락부 76, 1946.
2. 조선고등법원검사국 사상부, 손병희 등 공판시말서, 경성동국, 1931.
3. 조규태, 손병희의 꿈과 민족운동, 중원문황연구13, 2010.2.
4. 박성수, 3.1운동과 의암손병희, 중앙사론21, 2005.6.
5. 한승동, "건강 허락할 때까지 역사인물 50명 정리해보겠다”, 한겨레신문, 2017.2.23일자.
<필자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