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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국개척교회연합회 원문보기 글쓴이: 안형식목사(국가연구자)
(3) 설교문
기자가 조용기 목사에게 질문했습니다. 조용기 목사라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교인 수를 자랑하는 교회입니다. 단일 교회로는 가장 큰 교회이지요. 여의도 순복음 교회 교인 수가 70만이라니...
“목사님 목회를 하시는데 무엇이 가장 어렵습니까?
“네 설교입니다.”
“아니 설교를 제일 잘하시는 분이 설교가 어렵다 하십니까?”
“설교는 단 한 번만 사용하는 것이로되 항상 바꿔 주어야 하니까 어렵습니다.”
그토록 어려운 설교. 설교문 없이 설교를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만, 부작용이 많이 있습니다. 했던 설교를 또 한다는 것이지요. 불행히도 교인은 안 잊어버렸는데 설교자는 잊어버리고 또 합니다. 그 머리에서 나왔으니 똑같겠지요. 설교문 없이 설교를 하는 목사님이 제일 두려운 교인은 필기하는 교인입니다.
새벽설교, 주일 낮과 밤 설교, 삼일(수요일)설교, 철야예배 설교를 하게 되는데요. 이중에 주일 낮 예배 설교에 상당한 공을 들입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다른 예배의 설교는 약화되지요. 그래서 주일 오후 찬양예배, 수요 성경공부 등으로 구분을 해서 필요한 설교를 하게 됩니다.
주일 낮 예배 설교에 사용되는 설교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목, 성경본문이 타이틀로 잡힙니다.
대개 A4 용지로 4장에서 5장 정도로 30분 설교의 분량이 되는데요. 청년들 말로는 “휠 받았다” 라고 표현하지요. 감동을 받으면 여기에 10분 정도는 무상으로 추가 됩니다. 어떤 분은 50분 설교를 하고는 눈총을 받은 분도 있기는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분이나 듣는 분이나 다 같이 감동을 받았다면 눈총을 받을 이유가 없지요. 문제는 말씀을 전하는 분은 감동을 받았는데 듣는 분들은 감동을 못 받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일이 몇 번 있다 보면 나중에는 설교문에 충실해지게 마련입니다.
처음 부분은 예화로 시작합니다. 웬만한 소재는 다 알고 있으니 심드렁할 것이고 해서 주로 강남의 큰 교회에서는 해외에서 일어난 일들을 예화로 들고 변두리로 갈수록 자신의 집안 이야기들이거나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예화의 소재로 삼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주로 신문이나 드라마에서 열 받은 내용이 많이 등장됩니다. 종종 시를 읽어 주시는 분이나 읽었던 책에서 감명 깊었던 내용을 예화의 소재로 삼기도 합니다. 상관없습니다. 예화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들으러 왔기 때문이지요.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그리고 어떤 것을 요구하셨으며 그에 따른 약속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설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설교의 뼈대가 되는 성경본문은 설교의 범위에 대한 한정이기도 합니다. 시간 내에 충분히 설명을 해 줄 수 없다면 설교의 본문인 성경본문에 대한 설명만 해 주면 되는 일이지요. 휠 받아서 삼천포로 빠지면 언제 본문으로 돌아올지 모를 일입니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저것을 도입했는데 아차 이걸 잊어버리고 도입된 저것에 심취해서 저것만 설명을 하다 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설교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교인들은 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정돈이 안 되는 것이지요.
설교문은 논리적이며 조직적인 짜임새를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설교자가 충분히 알 수 있으며 그 내용을 듣는 교인들도 다 알 수 있도록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번 감동을 주는 설교를 해서 눈물을 쪽 빼 놓겠다 하는 그런 욕심은 버리는 것이 옳다는 말이지요. 18세기 미국의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일으켰던 죠나단 에드워즈는 지독한 근시라 안경을 쓰고도 큰 글자로 쓴 설교문을 떠듬떠듬 꼬박 읽어 내려갔답니다. 그런데도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날 정도로 감동을 주었습니다. 감동은 설교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본연에 충실하기만 하면 됩니다. 감동은 전적으로 성령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변론 내용 중에서 모세에 대한 내용을 떼어내어 모세에 관한 설교를 한다고 가정합니다. 설교가는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는 모세에 관한 기록을 바탕으로 모세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하고 난 뒤에 결론으로 갈 것입니다. 결론 부분에서 “모세가 나이 40에 살인자가 되어 광야로 도망을 갔으니 살인자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축이나 하면서 자식을 낳고 살았으니 여느 목축인과 다름이 없는 평범한 촌부에 불과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애굽의 왕자라는 신분에서 일개 촌부가 되었으니 실패한 인생이 아니었겠는가. 그것도 환갑 진갑도 넘어 80세나 되는 늙은이가 되었다. 늙고 실패한 인생을 불러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살인자요 실패한 인생이요 석양에 기우는 인생과 같은 80의 나이에도 버리지 않고 불러서 쓰시는 하나님이시다. 끝난 인생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면 위대한 인생이 된다. 모세의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우리도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역사의 주인공으로 쓰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모세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대체적으로 이런 내용으로 마무리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가 주어야 합니다. “모세의 40년 동안의 애굽 왕자 생활은 지도자의 리더쉽이 준비된 기간이며, 미디안 광야의 40년 세월은 훈련의 세월이었지요. 쓰임 받기 위하여 준비되고 훈련된 기간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경우에서 보듯 준비되고 훈련된 사람을 쓰십니다. 결국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준비된 일꾼으로 훈련되어진 일꾼으로 어려서부터 준비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내가 그리 못 되어 있다면 자식을 그리 되도록 준비시켜 주고 훈련되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준비가 되어있던지, 어떻게 훈련이 되어있던지 준비되고 훈련된 사람을 쓰십니다. 그렇게 쓰시기 위해 혹독한 준비의 과정과 처절한 훈련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가십니다. 만약 혹독한 과정 가운데 있거나 처절한 생활 가운데 있는 분이라면 하나님께서 쓰실 날이 가깝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하는 내용까지는 들어 있어야 합니다.
즉 객관적인 성경본문의 내용에서 주관적인 하나님의 뜻을 파악해내야 하는 것이지요. 이 작업은 즉흥설교의 형태로는 나오지 못합니다. 또 본문에 두어야 할지 아니면 결론부분에서 강조되어야 할지에 대하여 고민되고 작업되어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설교문 작성을 마쳐 놓고 각각의 부분(보통 3개의 대지) 중 어느 위치에 두어야 가장 효과적인 감동이 나올 것인지에 대하여 예측하고 있어야 합니다. 에덴교회의 소강석 목사는 주일 대예배 설교의 설교원문을 10회 이상 녹음기에 녹음을 하면서 설교문을 검토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감동적인 설교는 그냥 나오지 않습니다.
예시)
결단할 때와 붙어 있어야 할 때
본문 (요6: 65~71)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로 믿고 알았삽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자러라.” (요6: 65~71)
너희도 가려느냐? 주께서 12제자들에게 물어 보셨을 때, 베드로가 본문 말씀으로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떠나지 않겠다고 단단히 대답했습니다. 반드시 끝까지 가서 영생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대단한 각오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은 함께 해 온 세월이 3년 밖에 되지는 않았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함께 해 왔습니다. 제자들이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른 세월의 년 수가 3년입니다.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 항거할 수 없는, 항거를 해서는 안 되는 절대부름에 부응하고 제자가 된지 3년 세월입니다.
이는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어린양으로 세상에 내려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을 시작으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하셔야 했습니다. 금식을 하시고 크게 주리신 때에 첫 번째 시험이 당도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덩이를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시험하는 자가 하나님이 아들이거든 이라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돌덩어리를 떡덩어리가 되게 하는 기적을 베풀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해 내라는 도전에 대해 예수님은 근원적인 대답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다음으로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전에서 뛰어 내려서 정말로 하나님이 아들인지 아닌지를 입증해 보이라고 종용합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호통을 치십니다. 다음으로 마귀가 제시한 것은 지극히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의 영화와 부귀를 보여 주면서 자신에게 절하고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유혹하며 회유합니다. 찬란한 미래와 성공의 보장이 비젼으로 제시 되었는데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셨느니라. 이에 마귀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나아와 수종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보건데 영생의 말씀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온전히 믿고 자신의 생명을 걸 수 있을 때, 영생의 말씀이라는 위력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아들이라는 정체성도 그리고 도전되는 일체의 유혹과 제시된 비젼에 대해서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자신의 생명으로 나타냈을 때 예수님에게서 나온 말씀은 영생의 말씀으로, 진리로 길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어떤 기간으로 보아야 할까요? 예수님의 나이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는데요. 예수님은 이미 12살 때에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하실 정도로 성경에 해박했습니다. 그런데도 30세가 될 때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서 영생의 말씀으로 나타날 때까지 세상 속에서 때를 기다리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매 결단하셨고, 선택하셨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붙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결단할 때, 선택의 여지가 내게 있을 때, 끝까지 붙어 있어야 할 때로 각각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시작은 결단할 때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 결단할 때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기로 결단하셨을 때, 하늘에서는 비둘기 같은 성령이 강림하실 준비를 하십니다. 십자가를 향해 죽으시기로 결단을 하셨을 때,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도와 성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천하의 그 누구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루실 줄 전혀 모르고 있던 때에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착착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향한 결단의 증표인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으로 결단이 되었음을 선포하셨을 때, 하늘은 열리고 성령은 비둘기 같이 강림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 아들의 결단을 기뻐하시며 격려하시고 온 세상을 향해 증거하셨습니다.
다시 장면을 갈릴리 호수로 맞춰 봅니다. 밤새워 그물을 내렸지만 허탕을 친 베드로가 차디찬 새벽공기를 뒤로 하고 해변에 배를 댔습니다. 그리고는 허망한 표정으로 다음 출어를 위해 그물을 손질하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떨어진 말씀은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명령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밤새 그물을 내렸으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리고 나서 얻은 고기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인지라 동무의 배를 불러 두 배로 가득 채웠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통한의 고백을 합니다. 의심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선지자인줄 몰라 뵈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자신의 죄라고 자복합니다.
무식한 사람이지요. 단순한 사람이지요. 과격하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단순 무식 과격 삼박자를 고루 갖춘 사람입니다. 어디 빛나는 자리에는 데려다가 쓸 수 있는 사람은 못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이 빛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아주 흡족해 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눅 5:8)
이런 경우 많은 사람이 자신의 환경과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하고 깊이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대답도 아주 짧았습니다. 생각이고 고민이고 그런 것 자체가 없이, 예수님이 말씀에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즉시 따랐습니다. 집에서는 가출한 가장이 된 것이며 어부인 동료들이 볼 때는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베드로를 보셨을 때 어떻게 보셨을까요? 예수님은 얼마 후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 죽은 것을 살려주십니다. 다른 제자들에게는 장례가 일어 났을 때에 가지 말라고 하셨던 예수님이신데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부러 달려가서 살려내십니다.
멋진 결단에는 멋진 인정이 따라 옵니다. 멋진 복이 집안에 가득 차며 사면 울타리까지 가득 차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께 장한 결단과 멋진 결단으로 인한 인정과 복이 있기를 이 말씀으로 축원합니다.
2. 선택의 여지가 내게 있을 때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출발을 알리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기까지 선택의 여지는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선택의 여지가 아직 그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를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오직 결단을 했을 뿐입니다.
로마의 성지순례 중에 빌라도 계단으로 유명한 스칼라 산타 교회의 27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던 27세의 청년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입니다. 그는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던 중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17절) 라는 말씀이 북받쳐 오르는 통에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복음과 의 그리고 몇 개 남지 않은 계단완주를 놓고 갈등하다가 결국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복음을 선택하고 벌떡 일어나서 계단을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력으로 1517년 그의 나이 34살에 비덴베르그 성당의 정문에 95개조항을 걸어 놓고 비진리와 싸웠습니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은 그의 진리에 대한 선택에서 나왔습니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탕 안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육중한 거구가 탕안으로 들어와서 털썩 앉는 겁니다. 출렁하면서 물이 넘치고 아르키메데스의 연약한 몸이 둥둥 뜹니다. 찰나에 머리에 전구가 켜졌습니다. 그가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던 부력의 원리를 목욕탕 안에서 발견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르키메데스는 홀랑 벗은 몸으로 "유레카"(URECA)를 외치며 뛰어나와서 냅다 연구실로 달려갔습니다. 부력의 원리를 공식으로 입증해 내야 하는데 머리에서 그 공식이 막 떠오르니 이걸 잊어버리기 전에 연구실에 도착을 해야 합니다. 유레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에게는 옷을 입을 선택이고 뭐고 아무 것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잊어먹기 전에 달려가는 길 밖에 아무 것도 눈에 뵈지 않았습니다.
최선의 선택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로 장한 결단을 내리고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했다면, 최선의 선택까지도 성부 하나님께 맡겨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도 유레카를 외치며 냅다 뛰었던 아르키메데스처럼 들고 뛰는 겁니다. 그러면 망신을 당하게 하시던지 위대하게 만들어 주시던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해 주실 겁니다. 망신살 뻗친 아르키메데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역사에 찬란한 업적으로 남았습니다. 아르키메데스가 세운 원리로 인해 오대양을 달릴 수 있는 거대한 선박을 건조하여 세계의 문명이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청교도가 타고 미국에 도착했던 메이플라워 호가 바로 아르키메데스가 세운 부력의 법칙에 의해 건조된 대형선박이었습니다. 그 양반이 들고 뛰는 바람에 이런 위대한 일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아직 우리에게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까지도 주와 복음을 위하여 버리고 오직 복음과 의를 위하여 앞만 보고 달려가셔서 유레카를 외칠 수 있는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끝까지 붙어 있어야 할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외면을 받고 조롱과 멸시를 받았음에도 꿋꿋이 함께 했습니다. 제자들은 나중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멀리서나마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 드렸습니다.
끝까지 붙어 있었던 이들이 천국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하시고 난 뒤에 승천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여 마침내 오순절 성령의 강림을 맞이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비상하게 나타나는 사도행전의 시대에 복음을 통해 세계 각국의 역사까지도 움직였습니다.
제자들의 힘과 능력은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말씀된 것과 같이 예수님께 붙어 있음으로 해서 나타난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께 붙어만 있으면 저절로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게 되어 있습니다. 병든 가지이거나 쓸데없는 가지라서 잘려지지 않는 한, 봄이 되면 잎이 피고 꽃이 피며 여름이 되면 열매가 익어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시대가 악해지면 믿음의 변절자들이 생깁니다. 교회가 자신의 경제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에 떠나야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먹고 살기에도 바쁘고 힘이 드는데 교회생활까지 하려니 먹고 사는 것은 포기하지 못하겠고 교회생활을 포기하겠다는 분들도 생깁니다.
교회생활은 영생의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축복되어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가치를 무엇으로도 평가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하늘의 언어 즉 하나님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풀어주고 해석해 주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언자라고 높여주는 것이지요. 영생의 말씀이 그에게 가야 풀이가 되고 해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편으로 결단을 해야 할 이유가 생깁니다. 영생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선택의 기로에서 언제나 복음과 의를 취해야 할 이유가 생깁니다. 영생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평생 붙어 있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결단해야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는 때가 있었습니다.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을 때에 예수님은 그 기회를 성부 하나님께 돌려드렸습니다. 그때마다 하늘이 열리고 “저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는 증거를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비통한 기도를 드리며 예수님의 뜻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굴복시켜야 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고 난 뒤에 부활의 능력으로 실제적인 능력을 나타냅니다. 드디어 사도들이 죽은 자도 살려냈습니다. 영생의 말씀에 끝까지 붙어 있었기 때문에 영생의 말씀이 사도들에게서 부활의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끝까지 가야 합니다.
지혜로운 분은 때를 잘 구별합니다. 영생의 말씀을 선택해야 할 때, 영생의 말씀을 잡기 위해 결단을 해야 할 때, 영생의 말씀에 끝까지 붙어 있어야 할 때, 예수님처럼만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만 내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유레카를 외칠 수 있도록 까지 만들어 주십니다. 장한 결단으로 믿음의 반석 위에 서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유레카를 외칠 수 있는 복을 내려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축복기도/
한 번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죽는 일만 남았는데 우리는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고 겸손하게 살며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최종 선택은 아버지께서 내리시도록 선택권을 아버지께 돌리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늘 간섭해 주시옵소서. 외롭고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한 마음으로 내린 결단이라고 해도 복음과 의를 위한 결단이 되게 하옵소서. 중심이 견고하고 영생의 말씀과 끝까지 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께 인정을 받을만한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유레카를 외칠 수 있는 복을 자주 주셔서 저희들의 삶과 활동력을 기름지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하나님의 권속들의 열 손가락에 금칠의 복을 축복하옵나니 복을 주옵소서. 이 나라 이 민족 위에와 평강과 함께 장래의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해외 동포들에게 복을 주시고 병상에 신음하는 환우들에게 치료의 복을 주시옵소서. 슬픔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을 위로해 주시옵소서.
엎디어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우며 예수님의 찬란하신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