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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續八 / 己卯
성균관 전적 김공 묘갈명 병서(成均館典籍金公墓碣銘 幷序)
옛날 공희대왕(恭僖大王 중종)이 재유(在宥 재위)하시던 때에 장차 지치(至治)를 도모하려 하여 삼황(三皇)ㆍ오제(五帝)의 성대함을 뒤따르려 하시니, 정암 조선생(靜菴趙先生 조광조)이 일어나 좌우에서 보필하자, 여러 현자(賢者)들이 몰려와 한 세상이 크게 감동하였다.
이윽고 소인이 해독을 부려 선비를 베어 죽여서 거의 없어지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이것이다. 그 후에 사재(思齋) 문목공(文穆公) 김정국(金正國)이 당시 사류(士類)들 가운데 죄망에 걸리고 초야에 은둔한 자들을 손수 기록하고《기묘당적(己卯黨籍)》이라고 이름하였는데, 불초가 어렸을 적에 일찍이 이것을 얻어 보았다.
그런데 그 중간 한 단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김필(金珌)은 자가 자수(子修)이니, 기묘년(1519, 중종 14)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기묘년의 옥사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다행히 화를 면하고 거짓 미친 체하여 벼슬하지 않고 집안에 있었는데, 사람을 보면 번번이 미친 말을 하곤 하였다.
오직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밤낮으로 펴보면서 굶주려도 밥을 달라고 하지 않고 추워도 옷을 달라고 하지 않으며 밥을 올리면 먹고 옷을 올리면 입어, 인간의 일을 폐하고 끊었다.”
나는 마침내 탄식하기를,
“이는 이인(異人)이니, 또한 몸이 깨끗함에 맞고 버려짐이 권도에 맞는 자라고 할 만하다.”
라고 하였다.
불초는 중년에 공의 6대손 정랑공(正郞公)과 교유하면서부터 처음으로 공이 실로 우리 8대 조비(祖妣)인 김씨의 동기간(형제)이 되심을 알았으나, 아직도 말씀과 행실의 대략을 자세히 알지 못했음을 한하였다. 그런데 지금 공의 먼 후손이 장차 공의 묘소 앞에 비석을 세우려 하면서 나에게 찾아와 한마디의 말을 청하였다.
내가 묻기를,
“공의 유사(遺事)에 개략이라도 전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가승(家乘)은 산일되어 수습되지 못하였으나, 한두 가지 얻어들은 것은 없지 않습니다.”
하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 주었다.
“공은 세속에 뛰어난 자품으로 속박당하지 않는 기개를 겸하여 머리를 굽히고 글을 배우려 하지 않다가, 나이 18세에 비로소 분발하고 스스로 열심히 책을 읽어서 문장이 갑자기 진전되었습니다. 마침내 상사(上舍)에 오르고 이어 괴과(魁科)에 급제하여 곧바로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습니다.
일찍이 대사성 김식(金湜)을 사사하였는데,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교외에 나가 스승의 귀양 가는 길을 전별했다는 이유로 죄를 받았습니다. 또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었다가 화를 면하니, 이는 미친 사람으로 자처하였기 때문에 또한 해를 가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공은 나이가 대질(大耋)을 누리면서도 병환이 없었으나, 남과 서로 상대하지 않고 항상 홀로 앉아 길게 탄식하였으니, 그 은미한 뜻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공은 의표가 거룩하고 위대하며 필법이 기이하고 힘차서, 직접 쓴 시권(試卷)을 본 자들이 보배로 여기고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묘년에 불타버렸고 공이 기묘년에 급제한 시권도 회갑 해에 이것을 잃었으니, 또한 기이한 일입니다.
공은 호가 모기재(慕箕齋)이니, 아마도 양광(佯狂)의 자취가 대략 기자(箕子)와 부합되기 때문에 그렇게 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초는 마침내 일어나서 말하기를,
“공의 사적이 비록 오래되어 증거할 수 없으나, 사재(思齋)께서 특별히 쓰신 것 또한 충분히 그 풍렬(風烈)을 대략 상상할 수 있으며, 집안에서 전해오는 몇 마디 말씀은 또 사재가 기록한 것과 서로 발명되니, 굳이 많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은 안산(安山) 사람이니, 고려 때 복야(僕射)를 지낸 긍필(肯弼)의 후손이다. 본조의 위정공(威靖公) 정경(定卿)과 평호공(平胡公) 개(漑)는 모두 높은 관직에 이르렀고, 평호공의 아드님 맹강(孟鋼)은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감(承文院校勘)이 되었는데,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인재는 글씨를 잘 썼고 모부인 또한 그러하였으니, 공의 필력은 그 유래가 있는 것이다. 공의 태어난 해와 별세한 해는 모두 산일되어 전하지 않고, 묘소는 안산 두미포(斗尾浦)의 선영 아래에 있다. 배위 전주 이씨는 종실 오원군(五原君) 보정(寶貞)의 딸인데, 공과 부장하였다.
아들 원회(元會)는 선친의 뜻에 따라 벼슬하지 않았고 딸은 윤현(尹顯)에게 출가하였으며, 서자는 원복(元復)과 원신(元信)이다. 원회는 세 아들을 두었으니, 장자는 수온(守溫)이고 차자는 수공(守恭)이고 막내는 첨지 수검(守儉)인데, 후손이 매우 많다. 수검의 증손에 참봉 시성(始聲)은 뜻과 행실이 있었고 호가 도계(陶溪)이니, 정랑은 바로 도계공의 아들로 이름이 정오(定五)이다.
정랑은 신임사화를 당하여 절의를 세운 바가 있고, 그 아우 수오(秀五)도 조행으로 칭찬을 받고 있으니, 또한 대대로 이어온 문벌을 높일 만하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부사(父師)가 광병(狂病)을 내고 / 父師發出
명이에도 스스로 편안히 하니 / 明夷自靖
공이 이 의리를 얻어 / 公得是義
감추면서 바르게 하였네 / 用晦而正
기자를 사모하고 실천하니 / 維慕而蹈
길이 다르나 심정이 같다오 / 異塗同情
문소(聞韶)의 칭찬한 말씀 / 聞韶褒衮
참으로 공론이었네 / 允矣公評
내 뒤에 시를 지어서 / 我追詩之
남긴 곧음을 표하노라 / 式表遺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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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사재(思齋) 문목공(文穆公) 김정국(金正國) :
1485~1541. 사재는 호이고 문목은 시호이며, 자는 국필(國弼),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1509년(중종
4)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14년(중종 9)에 사가독서하였으며,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성리학과 역사, 의학 등
에 두루 밝았으며, 저서로는《사재집》.《기묘당적》 등이 있다.
[주-D002] 몸이 …… 자 :
김필의 행동이 깨끗함에 부합하고 벼슬하지 않은 것이 권도(權道)에 맞음을 말한 것이다.《논어》〈미자(微子)〉에 “공자께서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을 평하시되 ‘숨어 살면서 말은 함부로 하였으나, 몸은 깨끗함에 맞았고 폐함(벼슬하지 않음)은 권도에
맞았다.〔隱居放言, 身中淸, 廢中權.〕’ 하였다.”라고 보인다. 우중은 중옹(仲雍)으로 태왕(太王)의 둘째 아들인데, 아우 왕계
(王季)에게 제후의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형인 태백(泰伯)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도망하였으며, 이일(夷逸)은 미상(未詳)이다.
[주03] 상사(上舍)에 …… 급제 :
상사는 성균관으로, 김필은 중종 8년(1513)의 식년시에서 생원ㆍ진사에 합격하였다. 괴과(魁科)는 장원 급제함을 이른다.
[주04] 김식(金湜) :
1482~1520. 자는 노천(老泉), 호는 동천(東泉)ㆍ정우당(淨友堂)이며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었으
나, 벼슬에는 관심이 없고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 뒤 안당(安瑭)의 천거로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에 서용되고 1519년
(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부제학ㆍ대사성을 지냈다.
이해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 절도안치(絶島安置)의 처벌이 내려졌으나 정광필(鄭光弼) 등의 비호로 선산(善山)에 유배되었다. 신
사무옥(辛巳誣獄, 1521, 중종 16)으로 다시 절도로 이배(移配)된다는 말을 듣고 거창(居昌)으로 피하였다가 자결하였다.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주05] 안처겸(安處謙)의 옥사 :
안처겸은 안당(安瑭)의 아들로,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南袞)과 심정(沈貞) 등 대신을 해칠 것을 모의하였다는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주살되었다.《기묘록보유》권상〈김필전(金珌傳)〉에 “신사년(1521, 중종 16) 송사련이 바친 죄인의 인명록에 김가 아들
〔金子〕이라는 기록이 있었는데, 공(김필)이 김씨라 하여 갇혔다가 증거가 없어 풀려났다. 공은 본래 안씨 집 형제들과 서로 친하였
는데, 이 때문에 놀라 실성하였고 마침내 병인(病人)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주06] 대질(大耋) :
해가 거의 기울었다는 의미로 연로함을 지칭하는데, 흔히 80세를 이른다.
[주07] 양광(佯狂)의 …… 부합 :
기자(箕子)는 은(殷)나라 말기 주왕(紂王)의 숙부인데, 공자가 미자(微子)ㆍ비간(比干)과 함께 ‘삼인(三仁)’으로 칭한 바 있다. 양
광은 거짓 미친 체하는 것이다. 주왕이 음탕한 짓을 자행하자, 기자가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떠날 만하다.”라고 말하니, 기자는 “신하가 되어서 자신의 간언을 들어주지 않는다 하여 떠나는 것은 바로 군주의 악
을 드러내고 자신은 백성들에게 환심을 얻는 것이니, 나는 차마 이렇게 할 수 없다.” 하고,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미친 체하면서 노비
가 되고는, 마침내 은둔하여 거문고를 연주하며 스스로 슬퍼하였다 한다.《史記 卷38 宋微子世家》
[주08]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 :
1417~1464. 인재는 그의 호이고 자는 경우(景愚),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세종의 비 소헌왕후 심씨의 이질(姨姪)이다. 1441년
(세종 23)에 식년 문과에 급제, 황해도 관찰사와 중추원부사 등을 지냈다.
1443년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正音) 28자에 대한 해석을 덧붙였고, 1444년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언문
(諺文)으로《운회(韻會)》를 번역하였으며, 1445년에는《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주석을 붙였다. 문장과 글씨에 모두 능하
였으며, 저서로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있다.
[주09] 정랑은 …… 있고 :
《경종실록》4년 5월 27일 기사에 “사간원에서 논하기를 ‘전 현감 김정오(金定五)와 전 찰방 최익수(崔益秀)는 역괴(逆魁)의 품안
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연전에 삼흉(三凶)인 이이명(李頤命)ㆍ김창집(金昌集)ㆍ이건명(李健命)이 처형되었을 적에 길가에서 상여
를 맞아 곡하는가 하면, 같은 마을 사람 장문위(張文煒)가 토역 별시(討逆別試)에 응하고 집에 돌아오자 강력하게 배척하고 발길도
닿지 못하게 하는 등, 그의 마음이 오로지 역당에게 쏠려 있습니다. 청컨대 나국 정죄(拿鞫定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라고 보인다.
[주10] 부사(父師)가 …… 하니 :
부사는 곧 태사(太師)로 은나라의 태사를 지낸 기자(箕子)를 가리키며, 명이(明夷)는《주역》의 64괘 가운데 하나로, 혼우한 군주
가 위에 있어서 어진 사람이 해침을 당하는 상(象)의 괘이다.《서경》〈미자(微子)〉에 “미자가 말씀하기를 ‘부사와 소사(少師)야,
내가 광병이 났으므로 우리 집안의 원로들이 황야로 은둔하였다.’라고 말하자, 부사가 답하기를 ‘스스로 편안히 하여 사람마다 각자
자신의 뜻을 선왕에게 바쳐야 하니, 나는 길을 떠나 은둔함을 돌아보지 않겠다.’ 하였다.〔微子若曰, 父師少師, 我其發出狂, 吾家
耄遜于荒. 父師若曰, 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소사는 비간(比干)의 관직명이다. 기자와 비간은 주왕(紂王)의 숙부이고 미자는 주왕의 서형인데, 비간이 직간을 하다가 주왕에게
죽음을 당하자, 기자는 거짓으로 미친 체하고 미자는 제기(祭器)를 안고 은나라를 떠나갔다. ‘스스로 편안히 한다〔自靖〕’는 것은
어려운 때에 깨끗이 지조를 지키며 편안히 대처함을 이른다.
[주11] 감추면서 바르게 하였네 :
이 말은《주역》〈명이(明夷) 상(象)〉에 “어둠을 써서 밝게 한다.〔用晦而明.〕”는 말과 〈단(彖)〉의 “그 뜻을 바르게 한다.〔能
正其志.〕”는 말을 합하여 쓴 것이다.
[주12] 문소(聞韶) :
의성(義城)의 고호로, 《기묘당적》을 지은 김정국(金正國)을 가리킨 것이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황교은 류재성 김창효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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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粤昔恭僖大王在宥之日, 方將陶鑄至治, 追軌三、五之盛, 靜菴趙先生起, 而左右之群賢湊集, 一世聳動。 旣而宵人逞毒, 斬伐殆盡, 世所謂己卯士禍者是已。
其後思齋金文穆公正國手錄當時士類之罹網屛野者, 名之曰《己卯黨籍》。 不佞幼時嘗得見之, 至其中一段, 有曰: “金珌字子修, 登己卯壯元。 連延己卯獄, 被繫幸免, 佯狂不仕在家, 見人輒發狂語。 惟手不釋卷, 晝夜披覽, 飢不呼食, 寒不呼衣, 進食則食之, 進衣
則衣之, 廢絶人事。” 乃喟然曰: “此異人也。 亦可謂身中淸、廢中權者乎!”
中歲, 與公六代孫正郞公游, 始知公實爲我八代祖妣金氏之同氣昆弟, 而猶恨言行大致之未悉也。 今公遠裔將樹石墓前, 來請余一言。 余問: “公遺事其有槪略可傳者耶?” 曰: “家乘軼不收, 亦不無一二耳剽者。 蓋公以拔俗之姿, 兼不羈之氣, 不肯屈首受書。 至年十八, 始發奮自勸讀書, 文辭驟進, 遂升上舍, 仍擢魁科, 直拜成均館典籍。 嘗師事金大成湜, 禍作, 以出郊餞謫行被罪, 又株連安處謙獄而得免, 自處以狂, 故亦無以加害也。 公年享大耋, 猶無恙, 雖不與人相接, 常獨坐長唏, 其微意可窺矣。 公儀觀魁偉, 筆法奇崛, 其自書試卷, 見者無不珍賞。 至己卯, 燬于火, 公以己卯釋褐試卷, 又以周甲歲失之, 亦異矣。 公號慕箕齋, 豈以佯狂之迹略符於箕子而然歟?” 不佞乃起而言曰: “公之事蹟, 雖久而莫徵, 思齋所特書, 亦足以槪想其風烈, 若家傳數語, 又與思齋所記相發, 何必多也?”
公安山人, 新羅敬順王之後。 本朝威靖公定卿、平胡公漑俱至大官。 平胡子孟鋼登第, 爲承文院校勘。 娶仁齋姜希顔女生公。 仁齋工書, 母夫人亦然, 公之筆力, 厥有所自云。 公生歲卒年倂逸不傳, 墓在安山斗尾浦先兆。 配全州李氏, 宗室五原君寶貞女, 祔於公。 子元會, 遵遺意不仕; 女適尹顯。 庶子元復、元信。 元會三子: 長守溫, 次守恭, 季僉知守儉。 後承甚繁。 守儉曾孫參奉始聲, 有志行, 號陶溪。 正郞卽陶溪之子, 名定五。 當辛、壬之禍, 有樹立, 其弟秀五以操守見稱, 亦尙其世類也夫。 銘曰:
父師發出, 《明夷》自靖。 公得是義, 用晦而正。 維慕而蹈, 異塗同情。 聞韶褒衮, 允矣公評。 我追詩之, 式表遺貞。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