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사무실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던 K 병장이 제대하는 날이었다.
경북 어디가 고향인 K 병장은 자칭 Y대 상대를 다니다 온 행세에다 폭력과 간계를 망라한 군기 잡기의 명수였다.
내 위로 두 명 윤 상병과 임 일병이 그 아래서 무진 고생을 했다.
나는 DMZ 송악OP에서 전출을 와 엉겁결에 제대 목전의 말년병장 아래 서무계,
그러니까 행정서기병을 엉겁결에 맡는 바람에 좀 덜 당하고있는 편이었지만,
나 또한 그로부터 심적, 육체적 고통을 많이 당했다.
여기서 심적이라함은 예컨대 연애편지 대필 등이다.
그러니 이런 K 병장이 제대한다는 건, 우리 통신보급소대로서는 하나의 ‘사건’으로
그 건 말하자면 억압에서 풀려나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무실 앞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은 후 K 병장은 드디어 부대를 떠났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가 떠난 현실을 잠시나마 안도감 속에서 만끽하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K 병장이 제대하던 1974년 10월 26일의 기념사진. 뒷줄 왼쪽이 윤종규 상병. 오른 쪽이 K 병장이다. 아랫 줄 왼쪽이 나인데, 나는 이 때 CPX로 인해 몇날을 꼬박 세운 상태였다.
그가 제대를 하고 부대를 떠났다는 것으로 우리들은 시원해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분위기도 있었을 것이다. 조직을 어떤 형태로든 좌지우지하던 핵심적인 요소가 빠져나갔다는 건
바꿔 말해 뭔가 통제력의 공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어서 그에 따른 어떤 막연한 불안감이 조성되기도 하는 것이다.
공포의 대상을 감수해야할 통제력으로 받아들이면서 불안해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들은
그가 사라진 후의 그 공백을 누군가가 메워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
그리고 그 게 누가될 것인가를 짐작은 하고있었던 것이다.
군대가 바로 이런 곳이다.
그 날 저녁식사 후 밧데리창고에서 집합명령이 떨어졌다.
다들 그럴 줄로 짐작은 하고있었을 것인데, 제일 고참이 된 윤 상병이 내린 것이다.
내 아래로 고만고만한 4명의 소대원이 있었으니, 윤 상병과 내 바로 위의 임 일병을 포함해 모두 7명이다.
집합 전에 윤 상병은 제일 쫄병인 김흥배 이병더러 몇 개의 각목을 넣은
바케스에 물을 채워 집합장에 갖다 놓으라 했다.
각목을 사용하다 부러지지 않게 하기위해 그렇게들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겁을 주기위한 일종의 집합 퍼포먼스이다.
윤 상병과 나. 어느 사역장에서인 것 같으다.
6명이 고참 순으로 섰고, 윤 상병이 그 앞에 섰다. 그리고는 일장의 훈시.
통상 군대에서 고참이 집합을 시키고 하는 훈시라는 건 별 거 아니고 말하자면 부하들의 말도 안되는
잘못을 지적하면서 구타를 합리화하기 위한, 말도 안 되는 어거지성의 강한 질책이다.
K 병장으로부터 많이 당했던 윤 상병으로서는 우선 바로 어제까지도 자신이 당했던,
말하자면 위아래의 처지가 바뀌어 자신이 집합을 시키고 훈시를 한다는 점에서 감회가 서렸을 법하다.
나는 윤 상병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구나고 생각하고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윤 상병의 입에서 ‘개판’이라는 말이 나왔다. K 병장 제대하고 보니까 하는 짓들이 군기가 풀어지고 ‘개판’이라는 것인데,
‘개판’은 흔히들 고참들이 집합에서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다.
윤 상병은 그러고는 대열의 제일 위 임 일병 앞에 서더니 얼차려를 몇번 시켰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주먹으로 배를 쳤다. ”예, 일병 임 인배!“ 하고 소리치는 임 일병의 입에도 주먹을 날렸다.
임 일병을 두들겨 패는 명분은 밑에 아이들을 잘못 다스리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 바로 곁의 임 일병 맞는 걸 보면서 다음이 내 차례이니 마음으로 준비를 하고있었다.
임 일병이 고꾸라져 주저앉았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내 앞에 선 것이다.
나는 윤 상병이 어떤 사람이라는 걸 어느 정도는 알고있었다.
경북 문경 출신으로 부지런하고 좋은 사람이다. 다만 군대에 와서는 혹독한 졸병생활을 하면서 사람이 좀 뻗뻗해졌다고나 할까,
좀 딱딱하고 무미건조하게 보였다. 인상도 그랬다.
나는 윤 상병으로부터 군대 일을 많이 배웠다. 졸병생활의 거의 A부터 Z까지를 그에게서 배웠다.
그에게서 배운 모포 개는 요령은 지금껏 어느 누구보다 빠르게 잘 하면서
어쩌다 그 일을 할 때는 윤 상병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윤 상병은 나에게 잘 해주었고 이것 저것들을 잘 챙겨주기도 했다.
그 윤 상병이 집합대열에서 내 앞에 선 것이다. 나는 바짝 기압이 든 자세로 눈을 정면으로 윤 상병의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윤 상병의 눈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았다.
아, 이 양반이 좀 떨고있구나.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야, 김 일병! 니는 서무계 본다고 열외나 하고 그러면서 쥐새끼처럼 빠지고 말이야,
그래 갖고 어디 군대생활 한다고 할 수 있겠어 엉! 군기가 빠져가지고…
한바탕 고함과 함께 윤 상병은 힘껏 주먹을 쥔 팔을 올리고는 내 면상을 때리려는 자세와 함께
그 주먹이 나를 향해 날라오려는 순간이었다. 내가 일촉측발 순간적으로 오른 손으로 윤 상병의 팔을 잡았고,
윤 상병의 팔은 내 손아귀에 옴짝달싹 못하고 잡힌 것인데, 팔을 꺾으면 쉽게 꺾일 것 같은 느낌이 확 들었다.
그 순간 나에게 팔을 잡힌 윤 상병의 모습은 참으로 어정쩡해 보였을 것이다.
그 순간 나와 윤 상병의 눈이 마주쳤다. 윤 상병의 눈은 어쩔 줄 몰라하는 당혹함 그 자체였고 참담한 표정이었다.
그런상태에서 내가 호소하듯 외쳤다.
이제 좀 고만합니다. 서로 그만큼들 죽도록 개고생하고 당했으면 된 것 아닙니까.
이런 짓, 이런 개고생을 언제까지 계속하려 합니까. 이런 악순환의 고리, 이제 제발 좀 끊읍시다!
상황은 일찍 종료됐다. 윤 상병과 나의 그런 모습을 본 임 일병은 그 즉시
하극상의 못 볼 것을 본 집합대열을 해산시키고 소대원들을 내무반으로 보내 취침케 했다.
그리고 우리 셋, 그러니까 윤 상병과 임 일병, 그리고 나는 밧데리창고에 앉았다. 누구를 시켜 PX에서 경월소주 몇 병,
그리고 취사반에서 마른 멸치와 고추장을 갖고오게 했다. 그리고 마셨다.
그날 밤 그 자리에서 우리들끼리 합의가 이뤄졌다.
집합과 폭력을 포함해 다시는 K 병장 시절과 같은 군생활을 하지 말자. 군기를 기반으로 하되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자.
군에서의 시간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지 말고 자기개발의 시간으로 활용하자 등등.
이런 합의를 하면서 윤 상병과 임 일병은 나에게 아래 소대원들을 일임했다.
알아서 관리하라는 것이고, 그에 따른 후과와 책임도 나에게 지라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어느 회식장에서의 윤 상병과 나. 오른 쪽은 중대본부 서무계였던 김태주 일병.
그 뒤 우리 1사단 통신보급소대의 군생활이 어떻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다들 무사하게 제대들은 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의 빚을 졌고 지금도 그러하다.
나는 그 날의 그 하극상과 관련해 윤 상병에 대한 죄송감을 전제로 후회삼아 하고싶은 말이 있다.
군대에는 자율과 자유도 좋다. 하지만 자유와 자율을 위해서는 이를 조절하고 유지하고 통제하는
조직적인 기풍과 함께 군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필요할 경우 다소 폭력적인 기압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윤 상병에게 잘못 대항했고 그로써 일정 부분 마음의 빚을 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윤 상병과 임 일병 그리고 나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제대를 했다.
입대가 그들에 비해 3-4개월 늦었던 나는 교련 혜택을 3개월 봤기 때문이다.
제대 이후 임 일병과는 한 두어 차례 만나 본 적이 있다. 그게 1980년대 였는데, 지금은 연락이 끊어졌다.
윤 상병과는 딱 한 차례 봤다. 1976년 내가 복학해 대방동 전철아파트 어머니 친구댁에서 기식하고 있을 적에
종로 대입학원에 다니던 그 집 큰 아들이 어느 날 누구를 아파트로 데려왔는데, 맙소사 그가 바로 윤 상병이었던 것이다.
윤 상병은 그 때 한의대를 가려고 대입학원을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는 소식을 모른다.
나름 찾으려 애를 썼는데 찾아지지가 않았다.
부대 식당 회식장에서 빈 소주 댓병을 들여다보고 있는 윤 상병. 오른 쪽의 나는 저 때 저런 모습으로 뭘하고 있었는지 기억에 없다.
나는 아직도 윤 상병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많다.
윤 상병은 그날 저녁 나의 그 하극상으로 많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것인데 그게 죄송스럽고 미안한 것이다.
윤 상병과의 그 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참 부끄럽게 하면서 나로 하여금 윤 상병에게 사죄를 하도록 스스로 종용해왔다.
지금도 물론 그러하다. 하지만 윤 상병을 찾을 수 없으니 답답한 것이다.
누구든 이 글을 보고 윤 상병에 관해 아시는 분이 있으면 꼭 연락해주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