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7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부활주일 * 홍지훈 목사
마가복음 16:1-8/ 갈라디아 2:20-21
예수는 나의 주님, 세상의 구원자
2022년 부활절이 되었습니다. 부활절이 오기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 참회의 기간인 사순절을 보냈고, 그 중에는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고난주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2022년 봄이 오기까지 2년 동안 전 세계는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한 공포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여러 차례 변이 바이러스가 등장하여 더 큰 희생을 요구하더니, 백신접종률이 높아지고 치명률이 낮아지면서 오미크론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심은 거의 극복된 것 같습니다. 과학의 힘을 입은 인간의 노력도 큰 역할을 하였지만, 인간의 계획대로 다 되는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인간은 아직도 자연스러움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르고 산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닥치는 대로 파헤치고 살다가는 어떤 “자연스러운” 결말이 올지 알 때도 된 것 같은데, 여전히 그 결말을 벗어나지 못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은 자연환경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고, 인간의 삶은 다른 인간과 불가분의 사회적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상생의 관계를 유지해야 자연스럽습니다. 한 편이 무리하면 그 피해는 반드시 다른 한 편으로 고스란히 전이되고, 결국 그 피해는 부메랑이 되어서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어떤 종교이든지 그 사회 속에서 역할을 하는데, 특히 기독교는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르침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신앙의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정 반대로 기독교 안에 들어오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문제도 “부활”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해서 절대로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활은 매우 중요한 시금석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 16장은 4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예수의 부활 장면을 묘사한 대목입니다. 마태복음의 부활은 성경으로 20절 분량입니다. 누가복음은 훨씬 많은 53절 분량입니다. 요한복음을 어떨까요? 56절을 2장에 나누어서 설명할 정도입니다. 이에 비하여 마가복음은 단 8절뿐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가장 먼저 기록된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서도 가장 분명하고 단순하게 기록한 오리지널이겠지요.
어느 정도로 단순하가 하면, 여성들이 무덤에 향유를 들고 찾아갔는데, 걱정과는 달리 무거운 무덤 돌문이 열려있었습니다. 들어가서 보니, 흰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앉아서 하는 말이,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 계시지 않소.”하며 빈자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갈릴리로 가셨으니, 거기서 제자들을 만나게 될 것을 전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가복음은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여러 차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기록했는데, 이것을 정리하면,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무덤이 비었다.
(2) 예수는 살아나셨다.
(3)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부활 신앙은 이렇게 단순하게 요약됩니다. 3개의 단문 중에서 오늘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은 3번입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은 다른 사건들과 달리 반복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그 반복은 그 때만 있는 일이 아니라, 지금 오늘 우리에게도 반복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바꾸면, “예수의 부활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라는 질문과도 같습니다. 예수는 지금 나의 상황에서 내 마음 속에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읽을 때에 말씀 속에서 예수가 벌떡 일어나듯이 등장하셔서 내 마음에 강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나 예수가 너의 주님이 맞느냐?”라고 말입니다.
부활신앙이란 “예수는 살아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제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는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직접 만나서 배운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서 “내가 주님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예수는 나의 주님!”이 된 것입니다. 이 신앙이 바울을 변화시켰습니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나의 주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나 예수가 너의 주님이 맞느냐?”고 물으실 때에 “예수는 나의 주님입니다.”라고 대답하려면,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예수의 가르침과 <같은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부활을 증거 하는 유일한 방법은 “나의 주님이신 예수의 가르침이 내 삶 속에서 부활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지난 2000년간 부활신앙을 유지한 힘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가 설교의 제목에 “세상의 구원자”라는 내용을 넣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신앙이란 개인적인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였습니다. 그 당시 권력자들의 손에 의하여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이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권력자들의 사형집행이 하나님의 눈에는 “무효”라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사형 당하게 된 원인무효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바리새파와 사두개인, 그리고 성전 제사상들 등등 로마지배자들의 대행권세를 남용하던 자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이 “옳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인간의 삶 속에서 예수의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성서를 면밀히 관찰한 분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는 철저한 이타주의를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다면, 오늘 현대의 이기심을 경계하실 것이고, 개인적 이기심을 넘어선 집단적 이기주의를 비판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이기주의는 자기 욕망과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내면에 잠재한 염려와 불안의 자아가 욕망과 연결되고, 나아가서 성취와 성공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나의 자아, 너의 자아, 그리고 우리의 자아가 어떤 종류인 것인지 따져보고, 생각해보고, 예수의 가르침과 비교해 보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이기심은 쉽게 불의와 손잡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비판하다가 예수는 십자가 처형을 당했고,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오늘도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2장 20절에서 바울이 고백합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앞부분에서 바울이 말하고자하는 바는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얽매인 삶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의 결말은 자신만 율법의 형식에 얽어매는 것이 아니라, 타인까지 율법으로 정죄하고 말게 됩니다. 용서와 화해와 사랑은 설자리를 잃고 마는 것이지요. 율법이 지닌 가치는 그 “정신”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면, 우리의 생각을 예수가 지배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 바울처럼 자신의 온 생애를 떠돌며, 천막을 짜며, 매를 맞으며, 전도하는 일에 몰두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2:20) 예수가 나를 위해서 당신을 희생하셨다는 “대속적 죽음”이란 믿음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삶의 목표”입니다. 믿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적어도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분이 있다고 믿는다면, 나도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삶의 고귀한 가치를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아니라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평화목 교우 여러분,
2022년 부활절은 여러 교우님들께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까? 올해는 내 속에 잠재한 이기주의가 조금은 무너졌으면 좋겠습니다. 내 욕심이 정한 목표 때문에 집착하다가 절망하는 일이 좀 줄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심이 부족해서 품었던 편견이 조금은 해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몸이 힘들다고 해서 마음까지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다시 일어설 힘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질병과 전쟁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나에게도 아픔과 안타까움으로 다가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예수는 내 속에 들어오셔서, 나를 변화시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내 삶의 주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