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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한복(韓服, 문화어: 조선옷)은 고대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민족의 고유한 의복이며 한복의 기본적인 형태는 고대 북방민족의 스키타이계 복식이 원류인 호복입니다 대다수의 평민들은 흰색 옷을 즐겨 입었으며 한복의 기본 구성인 치마와 저고리, 바지 등은 변치 않고 오랜 세월 동안 기본 골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호복으로써 한복에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활동성을 중시하며 딱 붙는 옷이 아니고 또한 천 자체를 보면 직선형이지만 몸에 입을 경우 곡선이 살아나게 도와주는 미적 특징도 나타나는데 이는 주머니가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복은 호복이 아닌 기모노나 한푸 등 이웃 국가들의 복식과 달리 저고리와 치마, 즉 상·하의가 분리 되어 있어 형태상으로 구분되며 현대의 한복은 보통 조선 시대에 착용했던 한복과 유사성이 크며 명절이나 격식을 갖추는 자리에서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량한복은 생활의 편리함을 강조하고 있어 20세기 동안 그 외형이 여러 변화를 겪었습니다 한복도 의복이므로 기성복처럼 아주 빠르지는 않지만, 시대의 흐름과 대중의 요구에 따라 색과 소재, 특징 등을 새롭게 접목하며 이러한 시도는 여러 한복 디자이너들에 의해 현재에도 시도되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나라 남자한복 두번째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진 : Google & 바늘총각네 한복공방
포졸복과 나장복
조선시대, 포졸들과 나장들이 주로 입었던 근무복이자 전시때 입던 조선군의 군복으로, 사또나 포도대장 등의 옷인 구군복과 함께 조선을 다룬 사극에서 자주 보이는 옷 형태는 포졸복: 민복+쾌자+전립+전대띠, 나장복 : 고깔 + 민복 + 전대띠로 구성인 되었으며 세세한 구조는 다르겠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구군복에 색깔만 바꾸면 포졸복과 나장복이 된다. 포졸복은 조선시대 사극에서 조선군의 가장 낮은 말단졸병들이 입고 나오는 옷이고 나장복은 조선시대 죄인을 고문하는 사람들이 입던 옷이다 심지어 용의 눈물처럼 두 시대에 걸친 드라마에서는 고려 말까지는 멀쩡히 두정갑과 갑사용 전용 갑주에 창과 방패, 검 등으로 다양하게 무장하는데,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면 군사들의 장비가 별안간 당파(흔히 말하는 삼지창)에 헐렁한 포졸복으로 통일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이렇듯 포졸복은 엄연히 "군복"이지만 현대 한국인들에겐 "웨이터 복장", "펭귄 복장", "전통 갑옷" 따위의 우스갯거리로 인식되고 있다. 중요한 건 일제의 역사왜곡도 아닌 한국 미디어가 돈 때문에 지금의 이미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현대 매체에서는 관아에서 정식으로 근무하는 포졸 이상급의 인원과, 그 이하급의 관복을 차려입지 않은 비정규적으로 동원하는 인원의 개념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지극히 기초적인 오류가 흔히 퍼져있다. 하지만, 포졸은 범죄를 잡는데 관해서 전문성이 있고 최소한의 권한은 갖추는등 제대로 된 군인, 경찰직종이므로 헐렁하고 추례한 옷을 입는 직업이 아니었다
배자
저고리 위에 덧입는 덧옷으로 소매가 없고, 양옆의 귀가 겨드랑이까지 틔었으며 길이가 짧다. 흔히 비단 등의 겉감에 토끼·너구리·양의 털이나 융으로 안을 대고 선(縇)을 두른다.개화기 이후의 습속으로는 여자만이 착용하였으나, 예전에는 남녀가 모두 입었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시대 유물 중에는 약 2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 옷의 배자가 있다. 이를 입은 모습은 단원풍속도(檀園風俗圖) 등에서 볼 수가 있다. 남녀의 배자는 그 기본 형제(形制)는 같으나, 여자것은 끈이나 고름 또는 여밈이 없이 입으며 남자것은 앞판의 양 겨드랑이 밑에 달린 끈을 뒤판의 겨드랑이 밑 쇠고리에 걸어 착용하였다. 또, 예전에는 장(長)배자, 단(短)배자의 구별이 있어서 장배자에는 소매가 달렸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옷을 일컫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유물들의 연대로 보아 배자가 꽤 일찍부터 착용되었음은 확실하나, 그 유래는 알 수가 없다. 소매 없는 짧은 웃옷이라는 그 기본 형제만을 보아서는 신라 흥덕왕 복식금제(服飾禁制)에 보인 배당(褙襠)이 배자라 할 것이다. 그 당시의 신라에서는 당복(唐服)을 들여다 썼으므로 배당 역시 중국에서 들어온 옷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배당에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 조선시대 배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원래 중국에서 배자라 함은 진(秦)나라에서 비롯된 여자 조복(朝服)의 겉옷이며, 큰 소매가 달린 모양의 원삼(圓衫)과 같다. 수나라에서는 장수의(長袖衣)로 내관복(內官服)으로 사용되었는데, 당나라에서 이를 더욱 짧게 하여 반비(半臂)라 하였고 뒤에 이를 배자·배심(背心)·답호(褡護)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전복(戰服)이 답호이며, 나장복(羅將服)의 겉옷이 반비의(半臂衣)이다.이렇게 배자라는 말은 여러 가지 형제(形制)의 옷을 지칭하므로 문헌에 보인 배자라는 옷 이름만을 가지고 유래를 밝히기가 어렵다. 다만, 배당이나 배심이라는 말은 등과 가슴에 닿는다는 뜻이니, 무수(無袖) 또는 반수(半袖)로 등과 앞만 있는 옷을 일컫는 것이다.
심의
심의(深衣)는 유학자들의 상징이자 예복으로 고려 때 주자학과 더불어 중국에서 전래되었다. 재료는 무늬 없는 명주, 모시 등 염색하지 않은 흰 옷감을 사용하는데, 상의인 저고리와 하의인 긴 치마가 연결되어 길이가 발목에 이르는 형태이다. 깃의 모양은 직선으로 곧게 내려와 서로 교차하여 입는 직령(直領), 깃 모양이 네모진 방령(方領)으로 나뉜다 깃과 도련, 수구에 검정색의 연(선)이 둘러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12폭의 치마가 몸을 휩싸고 있어 심원(深遠: 깊고 원대)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심의'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중국 북송 시대부터 입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고려에 들어와 조선 말까지 선비들의 연거복(燕居服: 일상복)으로 착용하였다.심의의 기원은 주나라 이전이며, 심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유우씨(순임금)가 심의를 입고 양로의 예를 행하였다"라는 것이다. 또한, 〈옥조(玉藻)〉및 〈심의(深衣)〉편에 심의의 형태 및 부분적인 치수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고려사》에서 고려 예종이 입었다는 기록이 최초이며,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연산군, 중종 등 국왕이 심의를 입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제현, 송시열, 최익현, 흥선대원군 등의 초상화에서는 심의를 입은 모습을 볼 수 있다심의는 옷의 형태와 치수에 있어서 유교의 이념을 담고 있다. 이때문에 유학자들에게 널리 통용되었고, 유학자들은 심의를 수의로 사용한 경우도 많아서 복식 유물이 다수 남아있다.저고리인 의(衣)는 4폭으로 만들어 사계절을 뜻하고, 치마인 상(裳)은 12폭으로 만들어 열두 달을 뜻한다. 즉, 심의 한 벌이 일 년 열두 달을 상징하여 우주의 원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에 둥근 소매는 예를 표하며, 곧은 깃과 선은 바른 정치와 의리를 뜻한다. 옷의 가장자리에 두른 검정색 선(黑緣)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공경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선의 색을 구분하기도 하는데, 부모와 조부모가 모두 계시면 오채(五彩)로 꾸며 즐거움을 나타내고, 부모가 계시면 청색으로 하여 공경함을 나타낸다. 부모가 없는 사람은 선을 본 바탕색 그대로 하여 슬픔을 나타낸다. 그러나 나중에는 모두 검은 선을 두르게 되었다.심의는 유학자들에게 실로 바람직한 옷이어서 1518년(중종 13) 조광조는 중종에게 글을 읽을 때는 심의를 입고 읽는 것이 좋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앵삼
조선시대 유생이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하였을 때, 또는 신래(新來)가 착용하던 예복(禮服)으로 앵삼은 유생복(儒生服)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유생복은 『경국대전』 예전 의장조에 규제된 바로는 치포건(緇布巾)·청삼(靑衫)·조아(條兒)로서, 치포건은 복건(幅巾)이었고 청삼은 난삼(襴衫)이었다 이것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다가 1746년(영조 22) 이후 복구되었는데, 『대동기년(大東紀年)』에 기록된 바를 보면 영조 22년 유생이 과거를 볼 때에는 난삼에 복두(幞頭)를 쓰게 하였고, 또한 생원·진사에 대하여도 복두·난삼을 착용하도록 방을 붙이게 하였다 한다. 이 유생복 난삼은 반령(盤領)으로 되어 있었으며 의색은 녹색이고, 깃·도련·수구에 조연(皂緣) 즉, 난(襴)을 붙인 것이었다. 앵삼은 이러한 난삼의 일종이었는데, 다만 의색이 황색이었다는 설도 있고 유청색이었다는 설도 있다. 후기에 들어와서 이것이 잡용되었기에 이와같은 양설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앵삼의 앵자(鶯字)가 의미하는 바로는 꾀꼬리의 색을 딴 옷 즉, 황색이 바른 의색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앵삼에는 각대(角帶)를 매고 복두를 쓰며 목화를 신는 것이 정장이었는데, 복두 대신 사모를 쓰기도 하였던 것 같다.
굴건제복
굴건제복(屈巾祭服)은 상중에 있는 상주(喪主)가 입는 옷이다. 굴건이란 상주가 두건 위에 덧쓰는 건(머리쓰개)을 말하며, 제복은 상복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전통 상복으로 옛날 집안 어른이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 자식들과 유가족들은 굴건제복을 입고 곡을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대나무 지팡이를 할머니 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오동나무 지팡이를 짚었고 외출 할 때는 하늘의 죄인이라해서 방갓 또는 백립 패랭이를 쓰고 외출했다고 한다
승복
승려가 입는 옷. 이에 따라 승려가 열반에 들 경우 수의가 되기도 한다.보통 한국인이 인식하고 있는 "스님 옷"은 긴 회색 한복이다.승복의 구성은 가사, 장삼, 평상복, 행전각반, 모자 또는 관, 신과 버선, 주장자와 불자, 두루마기로 구성된다. 이 회색 한복의 이름은 일반 승려가 입는 장삼이다. 보통 팔이 네모로 길게 늘어지고 발목까지 내려와 8폭으로 접어진 회색옷을 장삼이라 하는데, 이 장삼은 아주 소중히 다뤄야 한다고 한다. 장삼의 양쪽 팔부분은 각각 네등분되어 있는데 각각 대지문수보살, 대행보현보살. 대비관세음보살. 대원지장보살을 의미한다고 한다.밑자락이 8폭으로 접혀 있는것은 팔부신장을 의미, 불법을 옹호하는 신장들이 입은 이를 감싸준다고 한다. 가사는 원래 붉은 색만 허용되는데 요즘에는 다른 색도 쓴다고 한다. 여담으로 시키면 한다! 약간 위험한 방송에 의하면 속옷만큼은 일반인과 똑같은 것을 입는다고 한다(...) 동내의도 마찬가지인데, 동내의는 보통 재가불자로부터 보시받은 것을 착용한다. 열반에 들 경우도 승복을 수의로 입기 때문에 동일하다.
더거리
더그레 또는 호의라고도 하며 그 모양이 전복(戰服)과 비슷하므로 답호(褡護)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 옆이 완전히 터진 세 자락 옷인 점이 전복과 다르다. 군복류의 웃옷으로 창옷이나 첩리 위에 덧입는다. 군졸과 마상재군의 것은 소매가 없고, 나장의 것은 짧은 소매(半袖)가 있다. 군졸의 것은 융복(戎服)의 전복과 그 형제(形制)가 비슷하나, 나장의 것은 그 길이가 엉덩이에 닿을 만큼 짧으며 흰 선(襈) 장식이 있고 등에는 흰색으로 ㅌ자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 창옷과 호의는 최하급의 군사나 군노(軍奴)의 복장이었다. 조선시대의 나장은 고깔에 철릭과 호의를 입었으며, 의장(儀仗)·포수(砲手)·기수(旗手)·정원사령(政院使令) 등은 창옷에 호의를 입고 건을 쓰고, 의장군사(儀仗軍士)·취고수(吹鼓手)·무감(武監) 등은 창옷·호의에 전립(戰笠)을 썼다 호의는 앞자락을 뒤로 돌려 묶어 입기도 하였으며, 길이가 짧아서 그 밑으로 창옷자락이 보이기도 하였다. 호의는 기능적이라기보다는 색채로 표시하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즉, 방위색에 따라 전·후·좌·우·중앙 등 오위에 응하여 흑·적·청·황 등의 색이 통일되었으며, 초(哨)의 군기, 영솔관(領率官)인 초관의 전복, 초관이 든 수기(手旗) 등의 색과 일치하였다. 그리고 갈도와 마상재군의 호의는 주황색이었다.
액주름포
조선시대 남자가 착용했던 겨드랑이 아래에 주름이 잡힌 곧은 깃으로 구성된 편복便服의 포로 액주름포는 겨드랑이 아래에 주름이 있는 포라는 의미이며, 문헌 기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처음 살펴볼 수 있다. 세종 28년 5월조(『세종실록世宗實錄』 권 112)에 의정부의 「복색상정조건服色詳定條件」에서 “서인庶人·제원諸員·대장隊長·대부隊副의 일수양반日守兩班 및 공상천례工商賤隸는 단령을 없애고 철릭과 액추의腋皺衣·직령의를 입도록 하라”라는 기록이 있다. 세조 13년 10월조(『세조실록世祖實錄』 권 44)에 왕이 귀성군龜城君 이준李俊의 아내에게 초록면주유방첩아草綠綿紬襦榜褶兒, 면주겹방첩아綿布裌榜褶兒에 양옆에 주름이 있는 옷을 하사한 내용이 있다. 이러한 액주름포를 ‘액추의’ 라고도 하는데, 겨드랑이 밑에 쭈그려서 주름잡은 옷이라는 뜻이다. 액주름포는 형태적으로 볼 때 길과 섶이 의衣와 상裳으로 분리되지 않고 옆에 달린 무만 따로 주름잡아 겨드랑이 밑에서 연결한 부분적인 의상연의衣裳聯衣 형태이다. 형태는 소매 형태나 트임, 길이와 고름 등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계절에 따라 착용되었던 평상복임을 알 수 있다. 실물자료는 조선시대 초중기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현재 박물관에 소장된 액주름포는 명주· 무명·목면·저포·공단 등 다양한 재료로 제작되었다. 구성 방법도 소매 형태나 트임 유무와 길이, 고름의 색상과 크기가 다채롭게 나타나고 있어 기능적으로 착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적인 면에서도 조선시대 남자가 착용했던 포 중에서도 독특한 형태이다. 특히 액주름은 옆길 무의 상부에 잔주름을 일정하게 잡아 작은 사다리꼴 무에 바느질하고, 이것을 다시 배래와 연결한 형태이다. 이러한 사다리꼴의 무는 주름 부분이 옷의 형태나 기능 면에서 편하게 착용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대부분 액주름포에는 당襠이라고 불리는 정사각형의 무를 삼각형으로 접어 함께 연결하였다. 액주름포는 깃·소매·상하의 비율·주름의 너비·고름의 유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액주름포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비교해 보면, 깃의 형태는 칼깃이 주류를 이루나 목판깃이 나타나기도 한다. 액주름포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였는데, 주로 명주·목면·저포·공단 등이다. 바느질 구성방법은 홑·겹·솜·누비 등으로 제작되었다. 소매 형태는 통수형이 대부분이나 임진왜란 후에는 통수형· 두리형·배래형이 나타난다. 주름 형태는 맞주름과 외주름이 공존하며 임진왜란 후에는 주름의 너비와 안주름 분량이 늘어난다. 또한 화장과 전체 길이가 다른 포제보다 짧은 편이다 액주음의 액腋은 겨드랑이 액자이고, 주음注音은 주름이라는 우리말의 한자 표기이다. 이는 양 겨드랑이 밑에 주름이 잡혀 있는 옷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액주름포는 조선시대에 왕부터 평민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입었던 포이다. 액주름포는 조선시대 초중기에 잠시 입다가 없어진 포로 양쪽 겨드랑이 밑에 주름이 잡혀 있는 곧은 깃의 포이다. 액주름포는 조선 전기에 출토되었으나 임진왜란을 분수령으로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는 전쟁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지고 나라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융복인 철릭의 착용이 늘어나고, 실학사상이 대두하면서 도포와 창의, 심의가 널리 착용되었기 때문이다
조복
조복(朝服)은 조선시대의 문무백관이 입는 관복이다. 명절이나 경사 또는 조칙을 반포할 때나 상소할 때 입었다. 이 옷을 입을 때 금관을 썼기 때문에 금관조복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복은 금칠한 양관(梁冠)과 적초의(赤綃衣), 적초상(赤綃裳), 중단(中單), 대대(大帶), 혁대(革帶), 폐슬(蔽膝), 후수(後綬), 패옥(佩玉), 말(襪), 혜(鞋), 홀(笏)로 구성된다. 입는 순서는 맨 먼저 중단을 입고 허리에 적초상을 두르고 그 위에 적초의를 입었다. 허리에는 대대를 두르고 뒤에는 후수, 앞에는 폐슬을, 좌우에는 패옥을 찼다. 다시 허리에 품계에 따라 혁대를 했으며 손에는 홀을 들고 발에는 말과 혜를 신었다
백관제복
조선의 백관과 종친, 왕세자 등이 제사를 지낼 때 입는 복식 일습이다 중국에서 왕세자의 대례복을 하사받은 1450년(문종 즉위년) 이전에는 왕세자도 6량관의 백관의 제복과 7량관 백관의 제복을 착용하였다. 양관에 달린 양의 개수로 신분을 나타낸다
우리가 사극에서 흔히 보는 내시복장
실제 내시복장
내시복장
우리나라 내시복장을 보면 사모 뿔이없는 사모와 흉배가 없는 녹색단령을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문무백관들 처럼 뿔이 있는 사모를 쓰고 흉배를 단 단령을 입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내시들은 사모뿔이 없고 흉배 없는 녹색단령을 전혀 입지도 않았으며 그런 옷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문무백관들처럼 똑같이 입었고 사극 연출가들이 신하와 내시를 구분하기 위해 일부러 고증을 오류 했다고 한다 결국에는 고려시대 사극에서도 내시들의 복장 중 사모의 뿔을 없애거나 조선시대 사극에도 이상한 내시복장을 만들어 참 안타까운 복식 고증오류를 만들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다만 내시복장을 잘 고증하는건 일부 방송국 사극 밖에 없으며 이렇게 된 이유는 바로 내시에 대한 자료 부족 또는 내시에 대한 안 좋은 생각과 이미지와 편견 때문이라고 한다
별감복
조선시대 궁중하례(宮中下隷)인 별감의 복식으로 별감은 액정서(掖庭署) 소속으로 그 직책과 배속(配屬)에 따라 대전별감·중궁전별감·세자궁별감·세손궁별감의 구별이 있었다. 이들은 궁중의 크고 작은 행사에 동원되고, 임금의 행차 때는 어가를 시위하는 직분을 맡았으므로, 그 차림은 화려하고 위의(威儀)가 당당하였다.별감복의 제식(制式)은 『경국대전』과 『속대전』·『세종실록』·『가례도감의궤 嘉禮都監儀軌』·「한양가 漢陽歌」 등의 기록을 통하여 대강을 알 수 있다. 비원(祕苑)에 소장된 한말 별감복 5점으로 그 실제를 확인할 수가 있다. 문헌 기록에 보인 별감복은 대개 예복(禮服)과 상복(常服)으로 구분된다. 예복은 임금의 종묘제사 때와 교외동가(郊外動駕)·차비(差備) 등 특별행사 때의 차림이다. 건(巾)과 단령(團領)의 관복류(冠服類)와 초립(草笠)과 철릭[帖裡]의 융복류(戎服類)가 따로 있었다. 『경국대전』에 보면 별감의 예복은 자색의 건(紫巾), 청단령(靑團領), 조아(條兒)로 기록되고 있으니, 『고려사』의 별감복(紫羅頭巾·細條纏帶)을 이어받은 것이다.세자궁별감은 청건으로 규정하였으며, 별감의 배속을 건색(巾色)으로 구분하였다. 이와 같은 복색(服色)은 후대에 이르러 청단령이 흑단령(黑團領)으로, 세자궁별감의 건색이 청→흑→초록으로 변천된 기록이 보인다. 별감의 단령은 품관(品官)의 관복 단령과 같은 형제(形制)의 옷이다. 그러나, 옷감이 주(紬)인 것이 특징이고 띠가 조아인 것과 부속제구(附屬諸具)에서 구별이 된다.이 밖에 종묘제사 때의 별감복으로 복두(幞頭)와 자의(紫衣)의 기록이 보이나, 예외에 속하는 것이며 자의는 그 형제도 알 수가 없다. 별감의 융복은 행차 때의 제복으로 어가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모두 홍철릭[紅帖裡)으로 성장하였기에 별감의 융복도 홍철릭이었다. 다만 그 두식(頭飾)은 특징적인 황초립(黃草笠)이었다.『탁지지 度支志』에 보면 홍철릭과 황초립은 한해 건너, 두건(頭巾)은 해마다 네 차례씩 관에서 나누어주었다. 행차에 눈비가 오면 모우(冒雨) 두건을 별도 지급하였다. 별감의 상복은 황초립·홍직령(紅直領)이며, 그 내습(內襲)은 겹주름[脥注音] 철릭이다. 비원에 소장된 별감복의 실물은 바로 별감 상복인 홍직령 5점이다.3점은 무가 뒤로 넘어가고, 나머지 2점은 무가 뒤로 넘어가지 않고 옆이 막힌 특징이 있다. 소매모양은 앞의 것은 두리소매이고, 뒤의 것은 직(直)배래로 앞의 것이 본디의 홍직령 모양이고, 뒤의 것은 개화기 두루마기에 가깝다. 이것은 같은 무렵의 관복 단령에서와 마찬가지 변화라 할 것이다.이상과 같은 별감복의 구성은 「한양가」에 “초립 밑에 팔매 놓고……·생초(生綃) 고은 홍의(紅衣)·숙초(熟綃) 창의 받쳐입고·보라 누비저고리에·외돌뜨기 누비바지·양색단 누비배자(褙子)·전배자 받쳐 입고”로 묘사되고 있다. ‘홍의’와 ‘창의’는 홍직령·겹주음의 별감 상복차림이며, 그 속에 바지·저고리를 착용한 것이다. 이 같은 별감복의 착용모습은, 「한양가」에 “맵시도 있거니와·치장도 놀라울사”라 한 것으로 그 화려함을 짐작할 만하다. 또 신윤복(申潤福)이 그린 「유곽쟁웅 遊郭爭雄」 중 별감의 초립·홍직령 차림에서도 확인이 된다. 이로써 보면 별감복은 왕조사회에서 가장 멋진 것으로 여겼던 차림 중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청금복
조선시대 유생이나 성균관 학생의 옷으로『시경(詩經)』의 "청청자금(靑靑子衿), 푸른 옷깃의 그대여"라는 시구의 첫 문장에서 유래되었다. 각주에 '금(衿)'은 '영(領)'으로 '옷깃'이다. 성균관의 학생복인 '청금(靑衿)'이라는 명칭은 당(唐)에서 전래된 것으로 국학(國學)의 학생복인 청금복(靑衿服)에서 유래되었으며, 복식 형태는 명(明) 국자감의 '청원령(靑圓領)'에 기인하였다. 왕세자, 왕세손은 입학례 과정 중에 성균관 대성전(成均館 大成殿)에서 작헌의(爵獻儀)를 행할 때 왕세자의 상복인 곤룡포를 벗고 학생복으로 갈아입었다 1485년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어 있는 성균관 제학생도 학생복의 기본 구성은 복건 형태의 '연건후수(軟巾後垂)'에 청금단령(靑衿團領)이었다. 그런데 청금단령이 하급 관리인 서리(書吏)의 복장과 유사하여 착용을 기피하고 사복(私服)인 직령(直領)을 착용하였다. 18세기 후반 직령과 도포(道袍)의 착용이 혼재하다가 이후 도포로 정해진다. 18세기 풍속화와 〈왕세자 입학도〉 등에 유생의 복식이 직령과 도포로 그려져 있다. 1746년(영조 22) 난삼(襴衫)을 여러 학생들이 방방의(放榜儀)에서 착용하는 복식으로 개정하여 학생복은 청금복과 난삼으로 나뉘어졌다. 1884년 고종의 갑신의제개혁의 후속 조치인 사복변제절목(私服變制節目)에서 유생의 재복(齋服)은 구제(舊制)를 유지하되 사복(私服)은 소매가 좁은 착수의(窄袖衣)로 규정하였다
기수복
가마꾼복
취타대복
악사복
탕제사복
그외에도 여러가지 특수 한복이 있는데 붉은 건을 쓰고 붉은 홍포를 입고 파란 전대띠를 허리에 둘러서 입는 가마꾼복과 포졸복과 똑같은 기수복 그리고 건을 쓰고 바지 저고리와 쾌자를 입고 전대띠를 허리에 두르고 입는 탕제사복 노란색 황립에 노란색 두루마기 쾌자를 입고 파란 전대띠를 두르는 취타대복과 복두를 쓰고 어깨와 앞뒤에 흉배를 단 붉은 단령을 입는 악사복이 있다
첫댓글 다음시간에는 여자 한복을 소개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