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교수(한양대 국문학과)는 옛사람의 정신세계를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문장으로 현대인에게 전하는 파워 라이터로 정평이 나 있다. 학술서와 인문교양 서적 모두 활발하게 펴내 저서가 30~40권에 달하는데, 이 중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미쳐야 미친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등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책이 많다. 그의 책은 고문을 번역했든, 학술서적이든 술술 재미있게 읽히는 게 매력.
한문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파묻혀 있던 옛 인물들이 그로 인해 한 사람 한 사람 현대 세계로 걸어 나오고 있다.
그가 이번에는 6명의 후배, 제자들과 함께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시문집 《정유각집》을 처음으로 완역 출간했다. 박제가는 조선후기 실학자로, 연암 박지원과 함께 북학파의 거장으로 꼽히는 인물. 이제까지는 사은사(謝恩使)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면서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본받아 생산기술을 향상시키고, 통상무역을 통해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실현할 것을 주창했던 사상가적인 면만 알려져 있었다.
《정유각집》은 이미 번역된 《북학의》를 제외한 박제가의 시 1721수, 산문 123편을 완역한 것으로, 그의 삶의 궤적과 생각의 변화, 뜻을 같이한 이들과의 우정, 시대 상황에 대한 뜨거운 격정 등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박지원 《연암집》에 이어 《정유각집》이 완간되면서 연암그룹 핵심 3인방의 전작 번역이 마무리돼 연암그룹의 내부 동향과 당대 생동하는 지성사의 흐름을 더욱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가 크다.
정민 교수를 한양대 교수실에서 만났다. 줄지어 서 있는 책장에는 옛사람들의 글과 그가 저술한 책들이 함께 꽂혀 있고, 널찍한 책상 위에는 벼루와 묵, 다기가 놓여 있다.
박제가 문집에서.
때때로 먹을 갈아 붓으로 글을 쓴다는 그. 책장 맨 위에는 그가 한지에 붓으로 쓴 글이 놓였고, 출입문에는 중국의 서예가 위유런(于右任)이 쓴 글이 붙어 있다. 이곳에서 수많은 책들이 잉태되어 나왔다.
“강독 모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이 책이 왜 아직 번역되지 않았는지 깨달았어요. 워낙 현학적인 글들이라 해독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 전거가 구절마다 복병처럼 숨어 있었죠.”
단짝처럼 다녔던 이덕무가 큰 키에 비쩍 마른 몸매, 여리고 서정적인 면모였다면, 박제가는 떡 벌어진 어깨에 작고 다부진 체격으로 절대 굴복하지 않는 성격. 글에서도 그의 그런 면모가 읽힌다고 한다.
“서얼이었던 박제가는 정조의 서얼허통(庶孼許通) 정책에 따라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과 함께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을 지냈습니다. 검서관은 지금으로 말하면 정보검색 전문가죠. 임금이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면 수많은 책들 중에서 찾아내는 일이니, 누구보다 방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학자 군주였던 정조는 이들에게 때때로 숙제를 내주고 일일이 체크하곤 했는데, 박제가는 현학적인 글쓰기로 자기 과시를 했지요. 옛사람의 글을 읽다 보면 그들의 내면세계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데, 박제가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정조가 신하들의 문체가 잘못됐으니 순정한 고문(古文)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며 반성문을 써오게 했을 때, 임금에게 조목조목 따져 반박한 게 박제가입니다. 그는 사상뿐 아니라 시학(詩學)에서도 구태를 일신하고 혁신적 시풍을 선도한 시인이요, 이론가였지요.”
박제가는 젊은 날의 자서전이라 할 《소전(小傳)》에서 “물소 이마에 칼 같은 눈썹, 초록빛 눈동자에 흰 귀를 지녔다”고 스스로를 묘사했다. 네 차례씩 중국으로 연행(燕行)했던 박제가는 북학파 가운데서도 국제적 감각이 남달랐다.
“우물에서 계속 물을 퍼내야 신선한 물이 솟듯이 물건도 계속 돌고 돌아야 한다고 한 경제에 대한 통찰을 보면 자본주의 사회를 미리 꿰뚫어본 것 같아요. 그만큼 시대를 앞선 인물이지요.”
제 글이 쉽게 읽힌다고요? 소리 내 읽으면서 고치기 때문이죠
한문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옥편.
‘조선 후기 고문론(古文論·문장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가 대중과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1996년 《한시 미학 산책》을 내놓으면서. “어려운 한문을 어떻게 그렇게 재미있고 쉽게 옮길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낭송”을 비결로 든다.
“글을 쓰고 나면 세 번 정도 소리 내서 읽어요. 그때마다 리드미컬하게 읽히지 않는 부분은 손을 봅니다. 마지막으로 아내한테 읽어달라고 하는데, 아내가 ‘이건 좀 어색한데’라고 다시 집어내지요.”
‘낭송의 힘’에 대해 그는 “조선시대 처자들이 담을 뛰어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글을 익힐 때 300독이고 500독이고 반복해서 낭송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배에 힘을 주고 리듬을 살려 읽는 소리는 옆집 처녀들 마음을 흔들어놓았죠. 조광조 옆집에 살던 처녀도 담을 넘어 들어가 ‘사랑한다’고 호소했는데, 조광조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인륜을 저버렸다며 종아리를 때렸다고 합니다. 훗날 조광조가 사화에 연루돼 죽게 되었을 때, 그 처녀의 아들이 사간원에서 조광조의 죄를 물을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 처녀가 아들을 불러 ‘그 분이 얼마나 곧은 분인지 아느냐?’며 옛이야기를 했다 합니다.”
청나라 화가가 그린 박제가 초상.
그가 특별히 애정을 느끼는 시대는 18세기 조선.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를 공부하면서 이들이 살았던 시대에 매료된 그는 이 시기를 ‘마니아의 시대’로 정의한다.
“18세기 조선에서는 갑자기 벽(癖) 예찬론이 쏟아져 나옵니다. 박제가는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말할 정도로 한 분야에 미친 마니아를 인정했죠. ‘벽’은 이 시기 지식인의 한 경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서구가 연경에서 초록 앵무새 한 마리를 들여와 기르면서 관찰한 내용에 앵무새 관련 자료를 꼼꼼히 덧붙여 이덕무와 유득공에게 보였다. 두 사람은 앵무새에 대한 자료를 더 찾아냈고, 결국 《綠鸚鵡經(녹앵무경)》이라는 책으로 만들어져 나왔다. 이렇게 세부적인 분야에 미치는 지식인이 쏟아져 나온 요인에 대해 정민 교수는 ‘정보화’를 든다.
“중국을 통해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고 출판문화가 발전하면서 정보의 양이 갑자기 급증했습니다. 그러자 누구든 쉽게 얻는 정보가 아닌, 나만의 알짜배기 정보를 만들겠다는 욕구가 생겨난 겁니다.”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시작된 ‘정보화 사회’가 18세기 지식인 사회에서 이미 보편화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미쳐야 미친다》는 이 시절 지식인의 내면을 사로잡았던 열정과 광기를 보여준 책으로,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는 18세기를 살았던 지식인과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을 연결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온 셈이다.
“다산 정약용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핵심가치가 무엇인지, 매뉴얼과 로드맵을 딱 정해놓고 계획적으로 해나갔죠.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알 때까지 설명을 거듭했습니다. 반면 연암 박지원은 화두를 툭 던져주면서 ‘네가 생각해봐라’ 하는데, 그 말이 사람을 완전히 카오스에 빠뜨립니다. 스스로 성장하게 하는 방법이지요.”
올해 그는 연암과 다산에 관한 책을 연달아 내놓을 예정이다.
연암이 쓴 산문의 행간을 읽어내고 글쓰기 틀을 설명하는 《연암 박지원 문장론》, 사라져가던 우리 차 문화를 되살려낸 다산을 집중 연구한 《조선 후기 차문화사》, 다산의 편지글 140통을 해석한 《다산 서간록》을 차례차례 출간한다. 다산의 편지글을 찾기 위해 그는 소장가들과 전국의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을 두루 찾아다녔다. 다산의 친필편지를 하나하나 촬영해 서책으로 만들고, 번역작업을 한 것. 편지글이라는 형식 때문에 다산의 개인적인 면모를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한다.
정민 교수(한양대 국문학과)는 옛사람의 정신세계를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문장으로 현대인에게 전하는 파워 라이터로 정평이 나 있다. 학술서와 인문교양 서적 모두 활발하게 펴내 저서가 30~40권에 달하는데, 이 중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미쳐야 미친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등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책이 많다. 그의 책은 고문을 번역했든, 학술서적이든 술술 재미있게 읽히는 게 매력.
한문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파묻혀 있던 옛 인물들이 그로 인해 한 사람 한 사람 현대 세계로 걸어 나오고 있다.
그가 이번에는 6명의 후배, 제자들과 함께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시문집 《정유각집》을 처음으로 완역 출간했다. 박제가는 조선후기 실학자로, 연암 박지원과 함께 북학파의 거장으로 꼽히는 인물. 이제까지는 사은사(謝恩使)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면서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본받아 생산기술을 향상시키고, 통상무역을 통해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실현할 것을 주창했던 사상가적인 면만 알려져 있었다.
《정유각집》은 이미 번역된 《북학의》를 제외한 박제가의 시 1721수, 산문 123편을 완역한 것으로, 그의 삶의 궤적과 생각의 변화, 뜻을 같이한 이들과의 우정, 시대 상황에 대한 뜨거운 격정 등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박지원 《연암집》에 이어 《정유각집》이 완간되면서 연암그룹 핵심 3인방의 전작 번역이 마무리돼 연암그룹의 내부 동향과 당대 생동하는 지성사의 흐름을 더욱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가 크다.
정민 교수를 한양대 교수실에서 만났다. 줄지어 서 있는 책장에는 옛사람들의 글과 그가 저술한 책들이 함께 꽂혀 있고, 널찍한 책상 위에는 벼루와 묵, 다기가 놓여 있다.
박제가 문집에서.
때때로 먹을 갈아 붓으로 글을 쓴다는 그. 책장 맨 위에는 그가 한지에 붓으로 쓴 글이 놓였고, 출입문에는 중국의 서예가 위유런(于右任)이 쓴 글이 붙어 있다. 이곳에서 수많은 책들이 잉태되어 나왔다.
“강독 모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이 책이 왜 아직 번역되지 않았는지 깨달았어요. 워낙 현학적인 글들이라 해독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 전거가 구절마다 복병처럼 숨어 있었죠.”
단짝처럼 다녔던 이덕무가 큰 키에 비쩍 마른 몸매, 여리고 서정적인 면모였다면, 박제가는 떡 벌어진 어깨에 작고 다부진 체격으로 절대 굴복하지 않는 성격. 글에서도 그의 그런 면모가 읽힌다고 한다.
“서얼이었던 박제가는 정조의 서얼허통(庶孼許通) 정책에 따라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과 함께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을 지냈습니다. 검서관은 지금으로 말하면 정보검색 전문가죠. 임금이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면 수많은 책들 중에서 찾아내는 일이니, 누구보다 방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학자 군주였던 정조는 이들에게 때때로 숙제를 내주고 일일이 체크하곤 했는데, 박제가는 현학적인 글쓰기로 자기 과시를 했지요. 옛사람의 글을 읽다 보면 그들의 내면세계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데, 박제가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정조가 신하들의 문체가 잘못됐으니 순정한 고문(古文)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며 반성문을 써오게 했을 때, 임금에게 조목조목 따져 반박한 게 박제가입니다. 그는 사상뿐 아니라 시학(詩學)에서도 구태를 일신하고 혁신적 시풍을 선도한 시인이요, 이론가였지요.”
박제가는 젊은 날의 자서전이라 할 《소전(小傳)》에서 “물소 이마에 칼 같은 눈썹, 초록빛 눈동자에 흰 귀를 지녔다”고 스스로를 묘사했다. 네 차례씩 중국으로 연행(燕行)했던 박제가는 북학파 가운데서도 국제적 감각이 남달랐다.
“우물에서 계속 물을 퍼내야 신선한 물이 솟듯이 물건도 계속 돌고 돌아야 한다고 한 경제에 대한 통찰을 보면 자본주의 사회를 미리 꿰뚫어본 것 같아요. 그만큼 시대를 앞선 인물이지요.”
제 글이 쉽게 읽힌다고요? 소리 내 읽으면서 고치기 때문이죠
한문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옥편.
‘조선 후기 고문론(古文論·문장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가 대중과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1996년 《한시 미학 산책》을 내놓으면서. “어려운 한문을 어떻게 그렇게 재미있고 쉽게 옮길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낭송”을 비결로 든다.
“글을 쓰고 나면 세 번 정도 소리 내서 읽어요. 그때마다 리드미컬하게 읽히지 않는 부분은 손을 봅니다. 마지막으로 아내한테 읽어달라고 하는데, 아내가 ‘이건 좀 어색한데’라고 다시 집어내지요.”
‘낭송의 힘’에 대해 그는 “조선시대 처자들이 담을 뛰어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글을 익힐 때 300독이고 500독이고 반복해서 낭송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배에 힘을 주고 리듬을 살려 읽는 소리는 옆집 처녀들 마음을 흔들어놓았죠. 조광조 옆집에 살던 처녀도 담을 넘어 들어가 ‘사랑한다’고 호소했는데, 조광조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인륜을 저버렸다며 종아리를 때렸다고 합니다. 훗날 조광조가 사화에 연루돼 죽게 되었을 때, 그 처녀의 아들이 사간원에서 조광조의 죄를 물을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 처녀가 아들을 불러 ‘그 분이 얼마나 곧은 분인지 아느냐?’며 옛이야기를 했다 합니다.”
청나라 화가가 그린 박제가 초상.
그가 특별히 애정을 느끼는 시대는 18세기 조선.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를 공부하면서 이들이 살았던 시대에 매료된 그는 이 시기를 ‘마니아의 시대’로 정의한다.
“18세기 조선에서는 갑자기 벽(癖) 예찬론이 쏟아져 나옵니다. 박제가는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말할 정도로 한 분야에 미친 마니아를 인정했죠. ‘벽’은 이 시기 지식인의 한 경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서구가 연경에서 초록 앵무새 한 마리를 들여와 기르면서 관찰한 내용에 앵무새 관련 자료를 꼼꼼히 덧붙여 이덕무와 유득공에게 보였다. 두 사람은 앵무새에 대한 자료를 더 찾아냈고, 결국 《綠鸚鵡經(녹앵무경)》이라는 책으로 만들어져 나왔다. 이렇게 세부적인 분야에 미치는 지식인이 쏟아져 나온 요인에 대해 정민 교수는 ‘정보화’를 든다.
“중국을 통해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고 출판문화가 발전하면서 정보의 양이 갑자기 급증했습니다. 그러자 누구든 쉽게 얻는 정보가 아닌, 나만의 알짜배기 정보를 만들겠다는 욕구가 생겨난 겁니다.”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시작된 ‘정보화 사회’가 18세기 지식인 사회에서 이미 보편화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미쳐야 미친다》는 이 시절 지식인의 내면을 사로잡았던 열정과 광기를 보여준 책으로,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는 18세기를 살았던 지식인과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을 연결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온 셈이다.
“다산 정약용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핵심가치가 무엇인지, 매뉴얼과 로드맵을 딱 정해놓고 계획적으로 해나갔죠.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알 때까지 설명을 거듭했습니다. 반면 연암 박지원은 화두를 툭 던져주면서 ‘네가 생각해봐라’ 하는데, 그 말이 사람을 완전히 카오스에 빠뜨립니다. 스스로 성장하게 하는 방법이지요.”
올해 그는 연암과 다산에 관한 책을 연달아 내놓을 예정이다.
연암이 쓴 산문의 행간을 읽어내고 글쓰기 틀을 설명하는 《연암 박지원 문장론》, 사라져가던 우리 차 문화를 되살려낸 다산을 집중 연구한 《조선 후기 차문화사》, 다산의 편지글 140통을 해석한 《다산 서간록》을 차례차례 출간한다. 다산의 편지글을 찾기 위해 그는 소장가들과 전국의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을 두루 찾아다녔다. 다산의 친필편지를 하나하나 촬영해 서책으로 만들고, 번역작업을 한 것. 편지글이라는 형식 때문에 다산의 개인적인 면모를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