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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38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로 그리스도교 배교자인 율리아누스 황제!
로마 제국 49대 황제 율리아누스는 그리스도교에서는 배교자 율리아누스 (Iulianus Apostata,
Julian the Apostate) 라고 불리는데...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니,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로 33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외할아버지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황제가 되자 서민 출신인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와 이혼하고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와 재혼해 그 사이에서 아들
둘을 보았는데, 두 아들 중에 테오도라의 차남이 율리아누스의 부친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입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복 동생 율리우스는 2번 결혼했는데, 첫번째 아내 갈라에게서 본 아들이
콘스탄티우스 갈루스, 두번째 아내 바실리나에게서 얻은 아들이 율리아누스니 이복형제로,
키가 작은 율리아누스와 달리 갈루스는 금발머리를 가진 키가 크고 준수한 미남이었다고 합니다.
율리아누스는 외조부 율리아누스가 그리스인의 피를 이어받았던데 비해 이복형 갈루스는 어머니
갈라를 통해 세베루스 왕조의 후손으로 이탈리아 가문 풀비우스 일가의 후손이기도 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대제) 에게는 조카가 넷이 있었는데, 그중에 나이가 어렸던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를
제외한 두 조카를 세 아들과 함께 공동 후계자로 제국을 5등분하여 다스리게 할 예정
이었으니, 제국의 혼란기라 황제가 많으면 방어에 유리하기도 하고 내란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후, 갑작스레 닥친 숙청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
으로 수십여명이 살해되었는데, 이때 차기 황제인 두 조카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두
이복 동생도 죽었으며 겨우 살아남은 율리아누스와 갈루스는 나이가 고작 6세와 12세 였습니다.
고아가 되어버린 두 이복 형제는 어린시절 니코메디아에서 동방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감시를 받았는데,
콘스탄티우스가 아리우스파였기 때문에 아리우스파 성직자 에우세비오스에게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고
세례까지 받았으며, 스키타이 출신 고트족 거세 노예 마르도니우스에게서 고전 문학과 철학을 교육받았습니다.
6년후 342년에, 이들은 카파도키아의 마르켈룸에 유폐되었고 콘스탄티우스 2세의 감시가
철저했던 탓에, 바깥 세계와 격리된 생활을 했으니.... 선생이었던
마르도니우스도 오지 못하게 했기에 친구도 노예의 자식 정도 밖에 없었던 삶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삶은 마그넨티우스가 로마의 두 황제 중 한 명인 콘스탄스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키니
콘스탄티우스 2세는 전쟁중이던 사산조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고 반란 진압에 나섰으며,
그때 자기를 대신해 동방을 맡아줄 부제가 필요했으니 오랫동안 유폐했던 두 사촌
중에 형 갈루스가 임명되니 율리아누스도 자유를 얻어 소아시아에서 철학자들과 교류했습니다.
갈루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누이동생 플라비아 콘스탄티나와 결혼하여 안티오크를 수도로
삼아 동방 황제로서 통치를 하였는데.....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억압받으며 살아온데다가 자유를 보장받지 못한 현실에 분노가 컸습니다.
아내가 된 콘스탄티나 또한 오빠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분노가 컸으니, 콘스탄티나는 원래 아르메니아
왕국의 황제가 되기로 했던 한니발리아누스의 아내로 황후가 될 예정이었으나, 그가 숙청되어
살해당했기 때문에...... 그녀는 반란중인 마그넨티우스에게 접근해 그와 결혼하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도 갈루스 동방황제를 견제하니 두 황제 사이 갈등은 커져 동방은 혼란에 빠지는데....
시리아 속주 총독이 살해될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던 안티오크의 대규모 식량 부족 사태가 벌어
지고,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항복한 도시 하나를 몰살시켜 살아남은 주민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정제가 보낸 두 고관을 살해해서 오론테스강에 시체를 던졌으니 그대로 내버려뒀다가는 갈루스만 욕먹는
걸로 끝나지 않고, 콘스탄티우스 2세의 통치에 심각한 위협이 될수밖에 없었으며 카라칼라 황제가
212년 내린 안토니우스 칙령 때문에 제국의 모든 백성이 로마 시민권자가 되었으므로 더욱 그랬습니다.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이 진압된 후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갈루스를 제거하기로 마음 먹었고 354년
갈루스를 밀라노로 불러들인후 체포해 반란죄 명목으로 처형했는데.... 갈루스는
그 전에 황제의 누이인 자기 아내를 먼저 밀라노로 보냈지만 여행 중에 병이 들어 죽었다고 합니다.
동생 율리아누스도 의심받아 밀라노로 불려왔지만 황후 플라비아 에우세비아의 도움으로 황제와
직접 대면해 변호함으로써 간신히 살아남아 그리스로 유학을 떠났는데 반년후 사산조
페르시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되고, 그렇다고 마그넨티우스의 반란 때문에 공백이 생긴
서방을 비워둘수도 없었던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유일한 남자 혈육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습니다.
서방부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정제의 또 다른 여동생 헬레나와 결혼했지만 갈리아에 있었던 콘스탄티우스 휘하 장수
마르켈루스, 세베루스, 바르바티오등은 율리아누스에게 미온적이었으니... 율리아누스와 콘스탄티우스 2세가
사촌이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방계 친척들을 콘스탄티우스가 숙청했으니 남보다 못한 친척이었기 때문인데...
그러니까 장군들은 만약 율리아누스가 숙청되면 그때 연루될까 염려해 그를 적극적으로 도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율리아누스는 지원도 받지못한채 한겨울에 알프스를 지나 갈리아로 갔지만, 다른 이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맡은 바를 매우 잘해내었으니..... 지원도 받지 못하고 병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갈리아의
군무장관 살루스티우스에게 도움받아 그 적은 병력으로 군사활동을 펼치며 견실하게 운영합니다.
그리하여 율리아누스 부제는 5년간 원정을 4번이나 성공적으로 이끌어 담당 구역 갈리아와 라인강 방어선
의 게르만족들을 격퇴하였고, 적극적인 감세 정책과 농경 활성화 정책으로 갈리아 부흥을 꾀했습니다.
부제 율리아누스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는 동안, 정제 콘스탄티우스 2세는 도나우강 방어선을
지키면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페르시아 군이 국경지대
도시 아미다를 점령하면서 국경선에 구멍이 나니 정제는 부제 율리아누스에게 지원병을 요청합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망하고 헬레니즘 왕국
이 들어섰다가, 이란 민족이 다시 파르티아를 세우고는 로마와 대적했는데......
227년 파르티아가 멸망하고 더 강한 적인 사산조 페르시아가 로마와 끊임없이 대립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로 치자면 이라크, 이란,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아우르는 제국인
사산조 페르시아는 로마 제국이 상대하기 껄끄러운 엄청난 강적인데.....
메소포타미아 북부 유프르테스강과 시리아 그리고 아르메니아에서 전쟁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4세기 중엽으로 한정하면 로마가 유리했으니 297년 부제 갈레리우스가 페르시아군에 승리후 체결한
강화조약으로 니시비스(터키 국경 니사이빈) 와 싱가라(이라크 세나르) 를 최전선으로 하고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차지했으며 더욱 티그리스강 상류까지 손에 넣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땅을 뺏겼다고 생각한 페르시아 샤푸르왕이 싱가라와 니시푸스를 공격을 계속하다가 아미다를 함락하니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러한 페르시아 전쟁 차출을 빌미로 율리아누스에게 한방 먹일 생각이었고, 하필
콘스탄티우스 2세의 견제를 막아주던 부제의 황후 헬레나와 정제의 황후 에우세비아가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부제 율리아누스가 감당할수 없을 요구를 하게 되지만, 정작 차출의 대상이 된 병사
들이 동방으로 가기를 거부하더니..... 설득하기 위해 나선 율리아누스를 큰 방패에 태워 머리 위로
들어올려서 정제로 추대해 버리니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와 맞서기로 함으로써 내전이 발발합니다.
그러면서도 율리아누스는 정제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 해명하려 했고, 정제의 영토로 진군하기는 커녕
자신은 정제와 적대할 생각이 없다는걸 어필하려는듯 라인강 너머 야만족들과 싸우면서 1년을 보냈습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사산왕조와 강화를 맺고 치러오자 360년 2월 “아우구스투스”정제)“ 를 받아들인후 군사
를 이끌고 시르미움에 도달해 평화롭게 도나우강 방어선을 손에 넣었으니.... 그렇게 로마 제국의 양대
정예를 손에넣은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와 붙기 위해 군사를 편성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합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갑작스레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자신을 치러오는 부제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목하니
졸지에 정통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을 개혁하니, 첫번째는 황궁의 입을 줄이는 것으로 재정
이 부족하기 보다는 황궁의 사치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고용인 특히 환관들은 모조리 쫓아냈습니다.
또한 갈리아에서 했듯 재정 지출을 대폭 감소하고 세금 감면책을 펼쳐 복잡한 세금 체계를 간소화하는
세제를 개혁했으며, 콘스탄티우스 2세의 전제적 통치와 의심 많았던 성격을 혐오해 도미나투스
이전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시절의 프린켑스 처럼 백성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늘리며 권위를 줄였습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라는 별명이 붙게한건 종교정책이니.... 예전 황제들의 박해 처럼 대놓고 사람을 잡아
죽이는 식은 아니었지만, 한창 진행 중이던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를 정면에서 거스르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쳤으니, 이 때문에 율리아누스가 죽었다고 봐도 될 정도로 큰 반발에 부딪히게 됩니다.
율리아누스는 모든 종교를 공인하는 칙령을 내렸으니 밀라노 칙령후 성장하는 그리스도교에 밀리던 타 종교의
숨통을 트여주었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 이단으로 몰리던 그리스도교 내 다른 종파들에게도 믿음의
자유를 주었으니 그리스도교 내부로는 종파간 다툼을 부추기고 외부로는 다른 종교의 재기를 노린 조치였습니다.
게다가 밀라노 칙령 이후 사실상 면세였던 교회의 재산에도 세금을 매겼으니.... 세금감면을
받기 위해 교회에 재산을 바치거나 성직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한
사례들을 끊어버린 것이니 “율리아누스 아포스타타(배교자 율리아누스) 라고 불리게 됩니다.
방치된 다른 종교들의 신전과 오래전 불타버린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하고 지원하여 다른 종교 제례를
부활시키고자 하였으며, 옛 종교들의 성지에 들어선 교회에 원 종교의 상들을 세우고 그리스도교의
성유물을 치웠으며 콘스탄티우스 2세가 폐쇄했던 원로원 내의 승리의 제 단 (Ara Victoriae) 도 다시 복원합니다.
단순히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 간의 균형을 맞춘 것이 아니라 할수있는 선에서 그리스도교를
억압했으니, 그리스도교 교사들이 교재로 그리스 고전 사용을 금지하는 법률로....
그리스도교도면서 어떻게 이교도의 신들을 다룬 책으로 교육을 할수 있느냐는 것 입니다?
그외 그리스도교도들을 공직에서 내쫓고 황제가이 옛 로마 방식대로 희생제를 지냈으며,
교회가 불타고 주교가 추방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나니 이미 제국 내에서
상당한 기반을 구축한 그리스도교 세력은 당연히 이러한 종교 정책에 거세게 반발합니다.
그래서 로마가 그리스도교 국가로 변했음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에드워드 기번은 율리아누스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로마는 대규모 종교 내전에 직면했을 것이라고 “로마제국 쇠망사” 에서 주장했습니다.
한편 그리스- 로마 전통종교 교인이 많은 도시에는 혜택을, 그리스도인이 많은 도시에는 우대를 줄이는 방식도
취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나 이전 황제들처럼 폭력으로 다스리지는 않았는데, 그리스도교는 박해
받았던 300년 세월을 버텨왔기에 힘으로 다스려봤자 순교자로 기리는등 버티면서 내부적으로 더 단단해집니다.
361년에 황제로 즉위한 율리아누스는 자신이 이교도로 개종한 사실을 공개했고 기독교를 질병이라
부르며 기독교인들이 미쳤다고 적대시했으며, 로마의 전통적인 다신교 신앙을 회복시키고
기독교 신앙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는데, 기독교 신앙에서는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했으며....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3일만에 부활하여 성전을 대체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또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도들의 몸이 성전이라고 말하니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의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물로써 기독교 신앙을 뒷받침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율리아누스는 예루살렘 3성전 재건을 지원해 공사가 시작되었으니 유대교
의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해 예수의 예언과 기독교 복음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363년에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성전 기초를 공사하는데 큰 지진이 나고 땅속
에서 불길이 치솟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공사하던 인부들이 불에 타 죽으면서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363년 5월에 갈릴리 지역에 엄청난 대지진이 일어났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지시하였던 율리아누스 황제도 지진 발생 한달후인 363년 6월에 페르시아
원정에서 전사하면서 성전 재건은 취소되었으니, 유대인 랍비들은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장에 불을 붙여서 태워버렸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딱히 증거는 없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의 포위 공격으로 무너졌던 유대교 예루살렘 제3 성전 재건 공사가 초자연적 현상
으로 중단되었다는 기록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와 같은 비기독교인 로마 역사가의 저술에서도
나타나며, 암미아누스는 율리아누스 황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도 이러한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안티오크의 알리피우스가 속주 총독의 도움을 받아 공사를 추진했는데, 성전 기초 근처에서 불덩어리
가 계속 터져 나와 인부들이 접근할수 없게 되었고, 일부는 불에 타 사망했습니다. 이렇게
불길이 그들을 계속 밀어냈고, 공사는 중단되었습니다. -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Res Gestae 23권
율리아누스는 이교를 그리스도교 라는 혐오스러운 대적의 본을 따서 재조직해야만 그 공격에 맞설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거기에 황제 자신이 금욕적인 사람이었고, 이런 까탈스러운 삶을 전통 종교의 전문
성직자들에게 강요했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 종교는 전혀 금욕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는게 문제였습니다.
12세기 동로마 제국 역사가 게오르기오스 케드레노스에 따르면, 율리아누스가
362년에 개인 주치의이자 친구였던 오리바시우스 (Oribasius) 를
델포이로 보내어 신탁을 받았는데 이것이 델포이의 '마지막 신탁' 이었다고 합니다.
다이달로스 궁전이 땅으로 추락하였다고 황제에게 전하라. 포이보스(아폴론의 별칭) 는 더
이상 자기 방도, 점술의 월계수도, 예언의 샘(카스탈리아 샘) 도 없노라. 재잘거리는
물 또한 이미 조용해졌느니라. 케드레노스는 율리아누스 황제로 부터 700년 뒤
사람이므로, 율리아누스가 델포이에서 저런 내용으로 신탁을 받았는지는 알길이 없습니다.
율리아누스가 강경한 반기독교 정책을 고수한 것에는 그의 불우한 가정사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안티오크에서 머무르던 당시 저술한 “카이사르” 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으니,
콘스탄티누스 1세가 모든 신들에게 거부당한뒤 예수 앞에 달려가자 예수가 그에게 답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혹하는 자, 살인하는 자, 신성을 모독하는 자, 파렴치한 자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까이 오라! 이 물로 그를 씻어 즉시 정화시키리라. 같은 죄악을
두번 저지른다 해도 가슴을 한번 치고 머리를 한번 때리면 다시 정화시켜 주리라.”
골육상쟁의 피해자로서 쓰라린 상처가 묻어나는 대목이니.... 율리아누스의 입장
에서는 무릇 신이라면 과거에 악행을 저지른 자를 단순히 회개했다고
바로 용서해서는 안되고 진실로 고결한 사람에게만 포상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율리아누스가 그리스도교와 관련하여 가장 혐오했던 점은 바로 이렇게 아무런 자격요건 도 없이
'모두에게 구원을 약속한다.' 는 것이었는데.... 그러나 율리아누스의 이러한 관점은
대중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했고 결국 그의 반그리스도교 정책은 그의 죽음과 함께 실패로 돌아갑니다.
363년 율리아누스는 전임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준비하다가 끝내 이루지 못한 사산 왕조에 대한
원정을 진행했으니, 안티오키아에서 병력 9만명을 모아 3만명을 프로코피우스에게 주어
아르메니아로 보내고 거기서 아르메니아 동맹군과 합세해 북쪽에서 사산 왕조 수도로 진격하게 합니다.
율리아누스는 6만을 이끌고 사산 왕조 영토로 쳐들어가서 몇번 전투에서 승리하고
사산 왕조의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진군했으며..... 트라야누스 황제가 250년
전에 만든 운하까지 이용했지만 수도 크테시폰에서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습니다.
363년 5월 27일 페르시아 수도 크테시폰을 두고 로마군 3만 5천과 페르시아군 10만이 격전을
벌였는데, 적이 성문으로 패주하자 어느 장군이 매복에 걸릴까 염려해 추격하는
로마군을 불러세웠으니..... 아때 전군이 성으로 집입했으면 함락시킬수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전투는 로마군 사망자 75명인데 비해 페르시아군은 무려 2만 5천명이었으니 병사들의 전투력에 월등한
차이가 있었던 것인데, 이후 견고한 성채 포위공격은 장기전으로 이어지니 보급을 차단해 답답해진
적군을 성밖으로 끌어낸뒤..... 제 2군과 연락을 도모하면서 로마군의 장기인 회전으로 승부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프로코피우스의 제2군은 갈라진지 50일이 지나도 만나기로 한 수도 크테시폰에 나타나지 않고
연락마저 없자 로마군은 2군과 만나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가기로 하는데 문제는 1천척이
넘는 보급선을 어찌할 것이냐? 상류로 배르 끌고 올라갈수 없으니 배다리용 30척만 남기고 불태웁니다.
로마군이 북쪽으로 걸어서 철수하자 이제 숙영지는 밤마다 페르시아군의 습껴을 받게
되는데..... 그후 샤푸르왕은 전공을 탐해 페르시아군이 회전으로 나오자
6월 16일 전투에서 대패하 페르시아군은 후퇴했고 다시 게릴라전으로 괴롭힙니다.
6월 26일 적이 후미를 급습했다는 전달에 율리아누스는 흉갑도 대지 않은채 (기독교도 하인들이 흉갑 조차 입혀
주지 않은 태업을?) 둥근 방패와 장검만 들고는 말에 올라 달려가니 소수의 호위대만 따랐고 병사들을 다잡아
적을 격퇴하는 중에.... 적이 전위를 기습했다는 말에 황제는 다시 말을 돌려 달리는데 창이 배에 깊숙이 꽃힙니다.
창을 뽑으려다가 오른손 혈관이 나가고 배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정신을 잃고 말에서 낙마했는데,
급히 천막으로 옮겼지만 주치의는 상처가 내장에 이르른 것을 발견하니 가망이 없는
가운데 페르시아군은 사령관 2명에 50명이 넘는 귀족들까지 전사해 패주했다는 보고가 전해집니다.
출혈과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황제는 엄청난 승전보고를 들었는데... 장군들 중에 보이지 않는 아나톨리우스
를 찾았고 전사했다고 하자 황제는 눈물을 흘렸으며, 죽음에 임해 철학에서는 삶은 고통이고 죽음은
거기서 해방되는 것이니 즐거움이라 신이 자신에게 준 포상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숨을 거두니 31세 였습니다.
율리아누스가 갑작스레 죽음으로써 로마의 사산왕조 원정은 실패했고, 로마 군단은 후임을 선출
하면서 기독교파와 이교도파로 갈라져 격론을 벌이다가 능력은 떨어지지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 율리아누스의 근위대장이자 그리스도교도인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세웠으니 결과적으로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은 제국에 재앙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9만명을 동원했는데 원정에서 죽어 제국 군사력에 타격을 주었으며 요비아누스와 뒤를이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 발렌스의 치세에 율리아누스의 종교 정책은 폐기되었고.... 다신교적인 로마 제국의 역사는
율리아누스를 끝으로 막을 내렸으며, 그후 30년도 안되어 테오도시우스 1세 때 그리스도교는 국교가 됩니다.
율리아누스의 삶은 파란만장한 고난의 연속이었으니 어릴때 부터 피바람이 얼룩진 정치 숙청에 휘말려 고아가
됐고, 최고 권력자의 끝없는 집요한 견제에 시달렸으며 전쟁 초보자에서 제국의 전선을 유지하는 군사령관
으로 활약했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로 겨우 20개월 만에 전사 (암살?) 하니 삶이 허무하다는 느낌까지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