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태종무열왕릉은 신라왕릉 가운데 피장자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왕릉 중 하나이다. 그것은 능 동쪽에 서 있는 능비의 이수에 적혀있는 '太宗武列大王之碑'라는 전액 때문이다. 무열왕릉의 위치가 정확하기 때문에 다른 왕들의 능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기준이 되고 있다. 삼국사기는 무열왕의 장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八年. 六月, <大官寺>井水爲血, <金馬郡>地流血廣五步. 王薨. 諡曰<武烈>, 葬<永敬寺>比{北}, 上號<太宗>. <高宗>聞訃, 擧哀於<洛城門>.
8년, 6월, 대관사의 우물물이 피로 변하고, 금마군에서는 땅에 피가 5보 넓이로 흘렀다.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무열이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으며, 태종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당고종이 부음을 듣고 낙성문에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전>
○진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영휘 5년(654년)에 춘추공이 왕위에 올랐다. 나라를 다 스린 지 8년째인 용삭 원년(661년)에 세상을 떠나니 그 나이가 59세였고 애공사 동쪽에 장사를 지내고 비를 세웠다.
<삼국유사 태종춘추공조>
영경사 북쪽과 애공사 동쪽이 같은 곳이라는 것은 앞서 서악동 고분군에서 말한 바와 같다. 무열왕릉은 지금까지의 왕릉과는 달리 능역이 매우 넓다. 서악동 고분군에 묻힌 마지막 왕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진지왕이다. 진지왕 이후에 왕위에 오른 진평왕이나 그의 딸인 선덕여왕, 그리고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진덕여왕은 모두 서악동을 떠났고 서악동 고분군 처럼 집단묘역도 아닌 단독릉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무열왕릉은 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었을까?
▲무열왕릉
▲무열왕릉
앞서 살펴본대로 진흥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으니 바로 맏아들 동륜과 둘째아들 사륜이다. 그런데 동륜은 태자시절 일찍 요절하였다. 진위논쟁이 치열한 화랑세기에 의하면 아버지인 진흥왕의 여자를 범하려고 궁궐 담을 넘다 개에게 물려서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륜을 이어서 태자의 자리에 그리고 진흥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그의 동생인 사륜이었다. 그가 바로 태종무열왕의 할아버지이자 진지왕이다. 하지만 동륜태자의 아들이었던 백정은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지 3년만에 정란황음을 이유로 진지왕을 페하고 유패시켰다가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진평왕이다.
▲무열왕릉
▲무열왕릉
진평왕이 54년간 재위한 후 죽자 더이상 남자 성골이 없어 처음으로 그의 딸 덕만이 즉위하게 되니 선덕여왕이다. 16년여간 재위한 선덕여왕은 비담염종의 난 와중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의 4촌동생인 승만이 왕위에 오르니 진덕여왕이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김춘추와 김유신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명목상의 왕이었을 뿐이었다. 사실 비담염종의 난도 따지고 보면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권장악에 대한 정통성 시비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러한 정통성 시비는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신문왕때 일어난 김흠돌의 난도 같은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진덕여왕이 죽자 당시 왕위 계승서열 1위 였던 알천공은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서라벌을 떠나니 더이상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대항할 세력은 없었다.
▲무열왕릉
▲무열왕릉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동륜태자 계열의 왕위계승은 끝나고 사륜왕 즉 진지왕 계열의 무열왕이 즉위하였으니 이제 신라의 중고기는 끝나고 중대로 접어들게 된다. 왕위에 오른 김춘추는 할아버지인 진지왕릉과 법흥왕, 진흥왕이 묻혀있는 이곳에 자신의 묘역을 만듬으로서 진지왕 계열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집단묘역의 시대가 끝나고 단독릉의 전통이 왕성된 시기였고 서악동 고분군 위로는 능역을 조성할 공간이 없어 아래쪽에 능역을 조성하였을 것이다.
▲무열왕릉
▲무열왕릉
무열왕릉에는 이전까지는 없었던 능비를 처음으로 세웠다. 물론 중국의 제도에서 수입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무덤의 방향이 남북이다. 즉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북쪽에는 다리가 오도록 안장하였다. 그리고 황제의 신도비는 동남쪽 해뜨는 방향에 세웠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되 신라의 전통이 아직 남아있어 시신의 방향을 동서로 두고 능비는 동북쪽에 세웠다. 이 전통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무열왕릉
▲무열왕릉
비의 양식은 당나라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귀부와 비신 그리고 이수를 갖추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세워진 비의 완성도가 아주 높아서 아시아 최고의 조각으로 불리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당나라 장인이 와서 조각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비신은 사라지고 없지만 이수에는 당나라에서 당시에 유행하던 현침자(懸針字)로 제액을 세겼다. 비각의 초석은 4개였고 왕릉의 비이기에 지표면보다 더 높게 조성하였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전김인문묘의 비는 신하의 묘이기에 지표면보다 더 낮게 조성하였다. 비각계단의 받침돌이 통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양식이 백제의 미륵사나 신라의 감은사에서 조립하여 계단을 만들던 것에 비하여 좀더 발전한 것이라 할 것이다.
▲무열왕릉
▲무열왕릉 상석
마지막으로 상석과 호석에 대하여 알아보자. 무열왕릉 봉분을 빙둘러서 삐죽삐죽 튀어나온 자연석이 둘러져 있다. 바로 호석이다. 무열왕릉에는 90여개의 호석이 둘러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호석은 원래 고구려 나 백제의 고분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현재 집안의 장군총이나 태왕릉 등에서 빗돌처럼 세워놓은 호석을 발견할 수 있고 서울 석촌동의 백제 고분군에서도 역시 볼 수 있다. 이 문화가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신라에도 유입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냇돌로 쌓은 호석은 있었지만 무열왕릉처럼 빗돌로 만들어 세우는 것은 없었다. 성덕왕릉이후 신라 능묘에 나타나는 십이지신상 장치의 기본틀이 무열왕릉의 호석에서 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무열왕릉 상석
▲무열왕릉 상석
무열왕릉 동편에는 한국 능묘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상석이 있다. 하지만 상석의 솜씨가 다소 조잡하여 후대에 만들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더 후대에 조영된 전신문왕릉의 상석도 조립방식이 비슷한 것을 볼 때 단정하기는 어렵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상석 아랫부분의 토층을 조사하면 쉽게 밝힐 수 있는 문제라 여겨진다.
▲무열왕릉 호석
▲무열왕릉 호석
▲무열왕릉 호석
<2008. 10. 11>
첫댓글 알천이 왕위 계승서열 1위라는 것은 어떤 근거에서인가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조 기사에 의하면 진덕왕이 죽자 여러신하들이 알천공에게 섭정할 것을 요청하자 알천이 나이가 많고 덕행이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며 춘추공을 천거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도 성골이 모두 없어진 마당에 진골 가운데 가장 연장자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