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적(閔頔)은 자(字)가 낙전(樂全)이며 태어날 때부터 그 모습이 비범하였다. 외조부인 유천우(兪千遇)가 그를 보고는 기특하게 여겨서 “이 아이는 뒷날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모부인 전 재상 김군(金頵)이 그 말을 듣고는 자기 집에서 길렀다.
국속(國俗)에 어릴 때는 반드시 승려를 따라가서 글을 익히게 되어 있었는데, 얼굴과 머리털이 아름다운 남자[面首]는 승려든 속세 사람이든 모두 받들어서 선랑(仙郞)이라고 불렀다. 따르는 무리의 숫자가 어떤 경우에는 1,000명이나 100명에 이르기도 하였는데 그 풍속은 신라(新羅) 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민적은 열 살 때 절에 가서 글을 배웠는데 천성이 명민하여 글을 받으면 바로 그 뜻을 깨달았다. 눈썹[眉宇]이 그림과 같고 풍채가 빼어나고 아름다워서 한번 본 사람은 모두 사랑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이 소문을 듣고는 궁중으로 불러보고는 국선(國仙)이라고 지목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 동궁(東宮)에 속한 관료로 임명되었다가 여러 번 옮겨서 첨의주서(僉議注書)를 지내고 비서랑(秘書郞)으로 바꿔 임명되었다가 군부정랑(軍簿正郞)으로 옮겨서 비색 공복과 은어대[銀緋]를 하사받았다. 또 판도정랑(版圖正郞)으로서 세자궁문랑(世子宮門郞)을 겸직하면서 자색 공복과 금어대[金紫]를 하사받았다.
충선왕(忠宣王)이 왕위를 물려받자 비서소윤(秘書少尹)에 제수되었다가 충렬왕이 복위(復位)하자 예에 따라 면직되고, 충선왕을 따라가서 연경(燕京)의 사저에 4년 동안 있다가 뒤에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충선왕이 왕위를 계승하자 불러서 전의부령(典儀副令)으로 삼았고, 선부의랑 지제교(選部議郞 知製敎)로 바꿔 임명하였다가 밀직승지 겸 사헌집의(密直承旨 兼 司憲執義)로 승진시켰으며, 곧이어 평양윤(平壤尹)을 지내다가 파직되어 다시 4년 동안 한가롭게 지냈으나 녹봉은 예전처럼 받았다.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하여 선부전서 보문각제학(選部典書 寶文閣提學)으로 임명하였다가 이듬해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하였고, 다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하정사(賀正使)로 원(元)으로 갔을 때 충선왕이 대도(大都)에 있었는데, 민적이 예전의 신하라 하여 비길 데 없이 후대하였으며 뒤에 여흥군(驪興君)으로 봉하였다. 충혜왕(忠惠王)은 그를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密直司事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로 임명하였다. 충숙왕 후4년(1335)에 죽으니 나이는 67세였으며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민적은〉 집에서 지낼 때는 정원을 만들어 두고 꽃이 필 때마다 손님들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시 짓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하였으며 가난하고 한미하여 늦게 벼슬에 오른 사람들을 대접할 때는 더욱 정성과 예의를 다하였다. 아들은 민사평(閔思平)과 민유(閔愉), 민변(閔抃), 민환(閔渙)이다. 민환은 자신의 전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