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에 제가 훈군님의 글을 퍼와서 저장해 놓은 글입니다.(일부는 제가 편집함)
"재사(再思)태자는 유리(琉璃)주류(朱留)의 아들이다. 호동(好童)과 같은 어머니이고, 그런 연유로,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들로 길러졌다."
(*대주류왕은 광개토왕비문에 나옴.)
(추가:
재사태자는 호동(好童)태자와 어머니가 같은 동복형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동의 어머니가 갈사왕(曷思王)의 손녀(혹은 딸)이므로, 재사태자 역시 북방 갈사부여 계통의 혈통을 강하게 이어받은 인물입니다.
양자(養子) 입적 기사:
본래 주류의 친아들이었으나, 갈사부여 세력과의 복잡한 정계 개편 및 어머니의 인연으로 인해, 대무신왕의 아들(양자)로 입적되어 길러졌다고 기술됩니다.
갈사왕 해소(解素)는 금와왕과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고구려 시조
추모(주몽)의 동모제(친동생)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유리명왕과의 인연:
해소(解素)의 딸인 갈사태후(曷思太后)는 처음에 고구려 2대 유리왕의 처가 되어 아들 재사(再思, 태조대왕의 친부)를 낳습니다.
대무신왕과의 재혼 (근친 혼인 형태):
유리왕이 훙서(사망)하자, 갈사태후는 순사(따라 죽음)하려 했으나, 국모인 송태후가 "양국의 불목을 막아야 한다"며 만류했습니다. 이에 유리왕의 아들인 3대 대무신왕이 갈사태후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여 호동(好童)태자를 낳게 됩니다.
유리왕을 주류왕이라 부른다고 많은 학자들이 생각하여, 유리왕과 주류왕은 동일인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위의 기사에서 보면 유리와 주류는 다른 인물로 보입니다.
(유리를 삭제하고, 주류를 재기입한 내용에서 알 수 있다.)
게다가, 대무신왕의 아들로 길러졌다고 적혀 있어, 대해주류왕인 대무신왕과 주류왕이 동일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류는 제 3자의 인물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주류는 과연 누구일까요?
저는 '고루태자'라고 생각합니다.
'고루태자'는 전욱고양씨의 성씨인 '고씨'와 그 어머니인 계루부인의 이름인 '루'를 따서 지었다고 <추모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구려의 시조 출자설 중에 전욱고양씨를 시조로 삼는 출자도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왕실이 비류나부에서 계루나부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이는 비류나부에서 황후(왕후 송씨, 비류국왕 송양의 딸)를 맞았던 유리왕이
계루부(계루부인의 근거지인 환나국을 지칭)로 바뀌었다는 것도 이를 증명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정성일님의 의견으로는 고루태자의 경우에 감출 이유가 없으므로,
'온조태자'를 광명대제와 대무신제 사이의 왕으로 추론하셨었는데,
아무래도, 광명대제(유리왕)는 한나라와 전쟁에 패배하여 전사하였고, 그러한 연유로,
'고루태자'가 왕위에 올랐다가, 대무신제가 장성함에 따라, '상왕'으로 물러났다고 볼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하기에, 한나라에 패배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숨겼으며, 모본제의 죽음으로 대가 끊겨져 버린 고구려 왕통을 잇기 위하여, 일족인 '재사태자(신명선제)'를 세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후일의 북연을 세운 고운은 고루태자의 후손임을 강조하면서, 고구려와 형제국이라 주장한 것과 남북조 시대의 고징, 고환 부자 역시 고루태자의 후손임을 강조하면서, 고구려와 친분을 맺으려한 것을 볼 때에 고루태자의 후손이 고구려왕실을 이어나갔음이 분명한 듯 합니다.
(첨부: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소수림왕 신미년(371년) 조의 주석에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은 무휼(無恤)이다"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만 가지고, 깔딱거리면, 멍청이가 되어 버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