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자전'이 연일 흥행 호조입니다. 서서히 할리우드 흥행 대작들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꽤 관객몰이가 짭짤합니다. 홍보도 꽤 힘을 발휘하고 있고, 뭣보다 알짜배기들로 짜여진 출연진이 보여주는 연기 호흡이 만만찮습니다.
이 정도 영화라면 흥행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싶으면서, 어쩐지 이 영화는 세계적인 트렌드를 한국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슬쩍 듭니다. 그건 바로 '전복'이란 것이 아닐까요. 제목에 대한 얘기는 맨 마지막에 첨언합니다.
일단 줄거리부터:
이몽룡(류승범)과 방자(김주혁)는 남원 퇴기 월매(김성령)의 딸 춘향(조여정)을 보고 반합니다. 하지만 춘향의 마음을 먼저 차지하는 것은 마영감(오갑수)의 도움을 얻은 방자.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낀 향단(류현경)은 방자를 짝사랑하지만 방자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곡절 끝에 몽룡은 서울로 가버리고, 방자는 춘향의 곁을 지키지만 몽룡은 과거에 급제해 암행어사가 됩니다. 남원 일에 별 관심 없던 이몽룡은 급제 동기인 변학도(송새벽)를 만나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절묘한 계획을 짜내게 됩니다. 그 계획이란...
다들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춘향전'을 뿌리부터 뒤집어 놓은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런 뒤집기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거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2일 개봉한 영화 ‘방자전’은 누구나 다 아는 고대소설 ‘춘향전’의 춘향이가 이도령 아닌 방자에게 반했다는 다소 발칙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진짜 주인공은 춘향을 버리고 한양으로 가버린 이몽룡이 아니라 줄곧 곁을 지키며 궂은 일을 무릅쓴 방자였으며, 오늘날 사실과는 전혀 다른 ‘춘향전’이 전해지는 것은 의도적인 왜곡이라는 것이다.
다 아는 이야기를 뒤집어 보는 전복(顚覆)의 재미는 유래가 깊다. 엄밀히 말하면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기생의 딸인 춘향이 장원급제한 어사의 정실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전복적인 내용이지만, 남원 지방에 내려오는 ‘박석고개 전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이몽룡을 짝사랑한 춘향은 본래 미녀가 아닌 끔찍한 추녀였고, 월매의 간계에 넘어가 춘향과 하룻밤을 같이한 이몽룡은 본얼굴을 보자마자 서울로 도주한다. 굴욕을 참지 못한 춘향이 자결하고, 그 원혼 탓에 남원 땅에 부임하는 신관 사또마다 죽음을 당하자 나라에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해 낙방거사 이몽룡에게 남원 현령을 제수한다.
이때 몽룡이 진혼을 위해 윤색된 ‘열녀춘향수절가’를 만들어 널리 유포시킨 게 오늘날 전해지는 춘향전의 유래라는 것이다. 판소리 춘향가에도 나오는 박석티가 본래 박색치(薄色峙)였다는 게 이 전설의 핵심이다.
전복의 미학은 최근 대중문화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방자전’이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고, 3일 종영한 KBS-2TV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는 원작에서 주인공 신데렐라를 학대하던 조연인 ‘계모가 밖에서 데려온 딸’을 주인공으로 바꿔 놓아 큰 성공을 거뒀다.
올 칸 영화제 개막작이던 영화 ‘로빈 후드’는 영국의 한 변두리 셔우드 숲을 누비던 의적 로빈 후드가 전국의 영주들을 이끌고 국왕을 압박해 영국 헌정의 기초인 대헌장(Magna Carta)을 낳게 한다는, 다소 황당무계한 줄거리를 갖고 있다. 동화 속 왕자와 공주 이야기를 뚱뚱하고 못생긴 괴물로 바꿔 놓은 ‘슈렉’ 시리즈 4편은 지난주 미국에서 개봉돼 이미 흥행 1억 달러를 넘어섰다(국내는 8월 개봉).
이렇듯 전복 스토리가 넘쳐나는 세상은 뭘 말해주고 있을까. 혹시 한번 주인공이 늘 주인공인 줄 알면 큰 오산이라는 교훈은 아닐까. 자신들의 지위를 과신하고 민의(民意) 읽기를 게을리했다가 2일 지방선거에서 아찔한 경험을 한 사람들에겐 왠지 남의 얘기가 아닐 것 같다. (끝)
아무튼 영화 얘기에 집중하자면, 영화 '방자전'은 전체적으로 무척 재미있는 영화긴 하지만 전반부와 후반부의 불균형이 조금 아쉽습니다. 전반부에서 마영감(오달수)를 중심으로 펼쳐지던 활기 넘치는 이야기가 사그러들 무렵 변학도(송새벽)이 등장하면서 흥미를 지속시켜나가는 데 까지는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지만 이몽룡의 전략이 등장하면서부터는 힘이 뚝 떨어져버립니다.
그저 관객의 입장에서는 왠지 비장감을 강요하는 듯한 결말이 아쉽습니다. 감동을 강요한다고나 할까요, 아니면 전형적인 한국 '흥행' 영화의 패턴이라고나 할까요. 축구로 치자면 전반전에 펄펄 날던 선수들이 후반에 체력 고갈로 역전을 허용하는 모습같은 느낌을 줍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재미가 없다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런 대로의 결말도 의미가 있고, 충분히 재미를 느낄 여지를 갖고 있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아쉽다는 겁니다.
시나리오라이터로서의 김대우 감독의 재치는 여전합니다. 일찌기 '음란서생'에서 조선시대판 '댓글'을 보여줬던 그는 이번엔 '은꼴사' 아닌 '은꼴편'을 던져줍니다. 요소요소에서 웃음을 던져주는 구성 또한 훨씬 세련되어졌습니다.
배우들로 넘어가면, 이번 배우들은 김대우 감독과 심하게 의기투합이 됐던 듯 합니다. 한국 영화 사상 가장 야한 장면 중 하나(뭐 '거짓말'이나 '미인' 처럼 아예 영화 전체가 그저 '야함' 속으로 던져졌던 영화들을 제외하고)에 주저없이 몸을 던진 조여정이나 류현경 같은 여배우들은 일단 말할 필요도 없겠죠.
김주혁이나 류승범은 크게 무리하진 않았지만 이미 수많은 관객들에게 공인받은 캐릭터를 활용해 편안한 연기를 펼쳤습니다. 이걸 갖고 뭐 평이했네 운운하면 뭐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두 남자 주역의 연기가 그저 평이해보이는 건 그만치 두 조연의 독특한 연기가 빛을 발했을 뿐, 김주혁과 류승범의 연기가 다른 작품에 비해 떨어진 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두 조연이란 마영감 역의 오달수와 변학도 역의 송새벽. 오달수는 타고 난 웃음제조기의 위력을 발산하는 가운데서도 특히나 '눕혀봐' 신에서, 0.5초 사이에 김주혁의 손길을 거부하는 숫처녀로 변신하는 기량이 무릎을 치게 했습니다.
송새벽은 또 '평생 남들의 기에 눌려 순둥이 비슷한 왕따로 살면서 그저 하릴없이 공부만 하다가, 고시 한번 잘 봐서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자리에 올랐는데,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의 통제를 벗어나자 그제서야 못된 버릇이 고개를 든' 이렇게 말로 하면 세 줄이나 되는 캐릭터를 그냥 딱 보는 순간 아, 쟤가 그런 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솜씨를 보여주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육혈포강도단'의 김병철과 함께 2010, 2011년 가장 각광을 받게 될 조연배우로 지목하고 싶습니다.
(저 배우를 어디서 봤더라 하는 분이라면 바로 이 영화, '마더'의 한 장면이 떠올랐을...)
총평을 먼저 해버렸더니 뒤에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제목에 대한 책임감으로 한마디 하자면, 최근 한 전통문화 관련단체에서 영화 '방자전'이 민족의 귀감인 열녀 춘향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항의에 나섰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애당초 심각하게 받아들일 항의도 아닌데다 이 항의가 영화 상영에 무슨 영향을 미칠 리는 없을 것 같고, 그 사건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존재와 이 단체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테니 양쪽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항의를 하고 계신 분들도 아마 이런 점을 충분히 납득하시지 않을까 싶군요. 위에 나오는 '박석고개 전설'로 봐선 춘향전 비트는 재미라는 건 이미 그 자체가 '전통문화'의 일부인 듯 하기도 하구요.
P.S. 아무튼 뭐 길게 썼지만 한마디 소감으로 요약하라면 닥치고 조여정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