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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의 산다화
인터넷 다음까페 염화실에 11월 29일자 사진이 올라왔다. 용학스님께서 다시 범어사 학장 스님으로 오셔서 학장실을 큰스님께서 방문하신 사진이었다.
“학장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몇 년 만에 복귀하신 거예요?”
“1년 동안 고사했는데 축하는 무슨 축하예요. 내 할 일이 태산같이 많고, 학인들도 없는데.”
“큰스님께서 외출 잘 안 하시는데 직접 학장실까지 내려오시고, 사진 속 표정도 굉장히 기뻐하시고요. 큰스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는지요?”
“운동 삼아 내려오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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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스님이 오셔서 “마음에 안 드시겠지만 축하드립니다.” 하고 인사하셨다.
“범어사 화엄경 연구원 연구원장 겸직으로 왔어요.”
하고 용학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제서야 기뻐하시는 큰스님사진이 이해되었다.
“스님들 모시고, 신도님들도 망라하고 각성스님하고, 화엄경 관련된 스님들 총출동시켜서 화엄경 연구하고 그거는 신나지요.” 하고 용학스님이 말씀하셨다.
법문 시간에 스물일곱 살이라고 소개하신 범어사 승가대 학인 스님 두 분이 자리에 앉으신 것을 용학스님이 늦게서야 보시고, 이번에 범어사 승가대학 학장겸, 새로 생기는 화엄경 연구원 초대원장으로 오신 이야기를 대중스님들에게 말씀해주셨다.
학인스님들에게 겨울에 피는 의리 있는 꽃 산다화를 꺾어오라는 숙제를 내주신 것을 말씀하시며 ‘산다 산다 산다화’라고 하셨는데, 문수선원 앞에도 동백꽃이 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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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다시 한번 염화실 화엄전 동정란의 사진들을 살펴보니 학장취임을 축하하시는 여러 개의 난화분 사진 중에 ‘유통교해(流通敎海) 교학상장(敎學相長) 불교사회연구소 원철’이라고 하는 난화분의 리본이 눈에 띄었다. 대만 원도선원 신도분들이 화엄경을 올리고 성지순례를 할 때 용학스님이 전화를 두 번이나 주셨었다. 해인사 가는 버스 안에서 또 해인사 참배를 마치고 송광사로 이동하여서, 두 건 다 당시 해인사 승가대 학장으로 계시던 원철스님에 대해서 ‘내 도반’이라고 길게 자랑하시는 내용의 전화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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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가 끝나고 인사를 드리러 가자 용학스님이 이름을 부르시면서 ‘화엄경 공부 열심히 하세요’ 하셨다. 원철스님은 염화실에 글을 ‘펌질’해달라는 문자와 함께 통도사 화엄법회의 법문도 권해주셨는데 마침 큰스님께서 두 번째로 읽어주셨던 ‘여래현상품, 보현삼매품’을 산뜻하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하는 인사문자를 드리자 ‘시간 날 때마다 경전 읽으며 지혜를 더욱 증장하시길 바랍니다’ 라고 답문자를 해주셨다.
새해를 앞두고 도반이신 두 분 스님의 새해 덕담이 일치했다.
‘남쪽으로 고정된’ 새해의 나침반으로 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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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열흘이나 장염을 앓으셨다는 학무거사님은 오히려 ‘얼굴이 더욱 좋아지셨다’는 인사를 많이 받으셨는데 “부처님 향기 아래 있으니 항상 좋지요.”하셨다.
아침에 차를 타고 나설 때는 ‘오늘 만나는 모든 분들이 부처님!’하고 기쁜 마음으로 출발한다고 하셨다. 큰스님께서 법문 중에 늘 운전할 때 양보하라고 하셨는데 학무거사님은 그 말씀 그대로 끼어드는 차들을 다 ‘부처님!’ 이라고 생각해 기쁜 마음으로 양보한다고 하셨다.
아침마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향을 한 개비 피우고 일을 시작한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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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날 큰스님이 읽어주시는 유튜브 화엄법회는 제13권 광명각품으로 접어들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부터 서울 경기지방에는 큰 눈이 내렸는데 법회 아침까지 계속 눈이 내렸다. ‘화리생련’이라는 말씀 ‘처처에 문수보살’ 하고 읽어주시는 큰스님의 음성에 134명의 청중이 귀 기울이는 소리가 눈 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二
如來出現品 第三十七之三
三. 普賢菩薩의 說法
7. 如來出現의 正覺
반갑다. 오늘은 291페이지(민족사刊 제3권) 세 번째 단을 할 차례다. 저번에 조금 짧게 하려다가 ‘정말 빨리 끝낼 건가’ 해서 입승스님에게 야단 맞았잖은가.
방송도 그렇고 멀리서 오시는 인연들도 그렇고, 시간을 고려해서 앞으로 어쭙잖은 해석은 좀 빼고 번역 위주로 진도를 빨리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여래출현품은 뒤로 넘어가면 읽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이해되고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혹시 더 필요한 내용들이 있으면 소초나 합론에서 추출해서 노트하실 내용들을 유인물로 만들어 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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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 공부한 여래출현품을 강원방식대로 살짝 과목만 짚어보겠다.
여래가 출현하는 데에도 신구의(身口意) 삼업이 있을 것이다.
여래의 신업(身業)이 무엇이냐? 여래의 어업(語業)이 무엇이냐? 의업(意業)이 무엇이냐? 하는 내용이 나왔다.
다음으로는 여래출현의 경계(境界)는 어떠냐? 또 여래가 출연하시는 행(行)은 어떠냐? 하는 것에 대한 답을 밝혔다.
또 여래출현의 정각(正覺) 깨달음은 어떠냐? 이 단락도 다른 단락들과 같이 여남은 단락으로 다시 나뉘어져 있는데 그중 앞의 두 단락을 먼저 공부했다.
하나는 ‘정각의 체상(體相)’이라고 하는 깨달음, 본체의 모습을 보았고, 다음으로 ‘삼세일체법을 다 요지하는 것이 여래출현의 정각의 작용이다’ 라는 내용을 공부했다.
삼세일체법의 요지라는 것이 무엇이냐? 비유로써 저 바다가 모든 삼라만상의 여러 가지 다양한 형상을 다 받아들여서 나타내어서 그것을 바다라 말하듯이, 모든 부처님의 보리, 여래출현,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모든 중생들의 마음과 근성과 욕망을 두루 나타낸다.
그런데 우리가 치문(緇門)을 배울 때 ‘개중생지근욕성(盖衆生之根欲性)이 수(殊)라 약일이론지(若一以論之)인댄 공비득지야(恐非得旨也)’라고 했던 것처럼 여래의 보리는 모든 중생들의 마음과 근성과 욕망을 두루 나타내면서도 이무소현(而無所現)이다, 라고 하였다.
‘나타내면서도 나타내는 바가 없다’
이 대목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나타내는 것이 없으므로 그것을 부처님의 도리라고 말한다.
나타내면서도 나타내는 바가 없다, 그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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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늘 공부할 대목 들어가겠다. 읽는 것도 생략하고 빨리 진도 나가는 위주로 하겠다.
(3) 性相의 甚深
佛子야 諸佛菩提는 一切文字의 所不能宣이며 一切音聲의 所不能及이며 一切言語의 所不能說이로대 但隨所應하야 方便開示니라
“불자여, 모든 부처님의 보리는 일체 문자로도 표현할 수 없으며, 일체 음성으로도 미칠 수 없으며, 일체 말로도 말할 수 없건마는 다만 마땅함을 따라서 방편으로 열어 보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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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性相)의 심심(甚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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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제불보리(諸佛菩提)는 : 모든 부처님의 보리라고 하는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일체문자(一切文字)의 : 일체 문자의
소불능선(所不能宣)이며 : 소불능선이다. 그래서 화엄경에는 화엄경이 없다. 화엄경의 글자에는 화엄경이 없다. ‘읽는 그 사람이 화엄경이다’ 이런 표현이다.
일체음성(一切音聲)의 : 일체 음성의
소불능급(所不能及)이며 : 소불능급이라, 어떤 음성으로도 미칠 수 없다. 말소리에 불과한 것이지 뜻이 아니다. 피치못해서 그 말소리와 글자에 뜻을 담고 넘어가기는 하지만, 의지하기는 하지만 글자 자체, 음성 자체가 화엄경이 될 수는 없다.
‘모든 부처님은 이언설상(離言說相) 이심연상(離心緣相) 이명자상(離名字相)이다’ 이렇게 표현하지 않는가? 그래서
일체언어(一切言語)의 :일체 언어의
소불능설(所不能說)이로대 : 소불능설이다.
모든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앞에 말씀하셨다. 다 모습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나타낸 바가 없다. 이 글자에 부처님 뜻을 다 실었지만 글자는 화엄경이 아니다. 문단 분석도 마찬가지다.
단수소응(但隨所應)하야 : 다만 마땅함을 따라서 무엇으로?
방편개시(方便開示)니라 : 방편으로 열어보일 따름이라.
심성이라고 하는 것은 ‘심성이언(心性離言)이라’ 청량소초에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이 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떠나있다.
말을 떠났으면 생각도 떠난 것이고, 어떠한 조건을 다 떠나는 것을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라고 반야심경에서는 이야기한다. 성품의 원리, 이치, 성리, 심성의 원리는 허공처럼 원만하다.
허공이라고 하는 것은 모서리가 없고 가득한데, 허공 중에 여러 가지 물상이 나타날 때는 치우쳐서 모난 것은 모난 것대로, 둥근 것은 둥근 대로, 빨주노초파남보가 허공에 나타난다. 그러나 허공 자체는 원만하다.
허공을 어떻게 나타낼 수가 있는가? 도저히 나타낼 수가 없다. 다른 모양으로 인해서 허공이 좁아 보이기도 하고 넓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건 허공의 모양이 아니다. 허공은 모양 없는 모양이다.
여래출현품의 뒤로 가면 ‘약인욕식불경계(若人慾識佛境界) 그대여 여래의 출현을 알고 싶으냐?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이라, 그대의 마음을 허공처럼 비워라’라는 표현이 나온다.
(4) 三輪의 平等
佛子야 如來應正等覺이 成正覺時에 得一切衆生量等身하며 得一切法量等身하며 得一切刹量等身하며 得一切三世量等身하며 得一切佛量等身하며 得一切語言量等身하며 得眞如量等身하며 得法界量等身하며 得虛空界量等身하며 得無礙界量等身하며 得一切願量等身하며 得一切行量等身하며 得寂滅涅槃界量等身하나니 佛子야 如所得身하야 言語及心도 亦復如是하야 得如是等無量無數淸淨三輪이니라
“불자여, 여래 응공 정등각이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에 일체 중생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으며, 일체 법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으며, 일체 국토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으며, 일체 삼세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으며, 일체 부처님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느니라.
일체 말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으며, 진여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으며, 법계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으며, 허공계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으며, 걸림 없는 경계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으며, 일체 서원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으며, 일체 행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으며, 적멸한 열반경계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느니라.
불자여, 얻은 바 몸과 같이 말과 마음도 또한 그와 같아서 이와 같이 한량없고 수없는 청정한 삼륜(三輪)을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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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륜(三輪)의 평등(平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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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륜이라고 하는 것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묶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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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래응정등각(如來應正等覺)이 : 여래 응공 정등각이
성정각시(成正覺時)에 : 바른 깨달음을 이룰 때에, 그 뒤에 열세 가지 몸을 쭉 나타낸다.
득일체중생량등신(得一切衆生量等身)하며 : 모든 중생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는다.
부처님은 몸이 없고 무심이기 때문에 백 명이면 백 명, 천 명이면 천 명, 만 명이면 만 명, 중생이 오는 데 따라서 양껏 늘어난다. 본래 없지만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다.
하늘의 달은 하나라서 고륜(孤輪)은 본불낙청천(本不落靑天)이라, 달은 땅에 떨어지는 바가 없고, 강물이 생겨지는 족족 달도 늘어나지만, 본래의 달은 절대 늘어나는 바가 없다.
이런 뜻으로 이해하신다면 여래출현이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제가 햇중 때 우리 노스님이 열반하시고 처음 나온 책이 ‘마음 없는 마음’ 이었다. 노스님의 ‘마음 없는 마음’ 열반책이 문득 생각난다.
부처님 없는 부처님을 설명하는 것이 여래출현품이다.
득일체법량등신(得一切法量等身)하며 : 법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으며
득일체찰량등신(得一切刹量等身)하며 : 일체찰과 같은 등신이라, 국토 분량과 같은 등신
득일체삼세량등신(得一切三世量等身)하며 : 일체 세상의 분량과 같은 등신
득일체불량등신(得一切佛量等身)하며 : 모든 부처님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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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일체어언량등신(得一切語言量等身)하며 : 득일체어언량등신하며, 말한 것만큼 부처님이 생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아미타불이 몇 분이냐? ‘도마죽위(稻麻竹葦) 무한극수(無限極數) 삼백육십만억(三百六十萬億) 일십일만구천오백(一十一萬九千五百) 동명동호(同名同號) 대자대비(大慈大悲) 아등도사(我等道師) 금색여래(金色如來)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염불이 있다.
여기 여래출현품에 가서는 ‘보현보살이 몇 분이냐? 너도 보현보살 나도 보현보살 시방세계 모든 찰토의 수행자 이름을 전부 다 동명보현이라 한다’ 라고 나온다.
여기 열 가지 대목 몇 장만 넘어가면 그 대목이 나온다.
우리 모두는 보현이다.
그것은 세주묘엄품을 할 때부터 화엄경의 정신이다.
여기에서 보현보살이 삼매에 드니까 시방일체찰의 모든 보현보살이 동시에 삼매에 들었다. 여기에서 문수보살이 게송을 하니까 시방세계 동시에 모든 문수보살이 함께 게송을 했다. 계속해서 이렇게 화엄경에 나와 있지 않은가. 그것이 지금 여래출현품에서 나타내는 울림이라고 볼 수가 있겠다.
우리가 음악을 연주할 때 예를 들어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분다. 그런데 피리 소리에는 뜻이 없다. 트럼펫을 불고 피아노를 치면 소리는 있지만 뜻은 아무것도 없는데, 곡조를 슬프게 하면 슬픈 음악이 되고, 곡조를 기쁘게 하면 기쁜 음악이 된다. 소리에는 기쁘고 슬픈 것이 묻어 있는 것이 아닌데 그걸 의도적으로 희노애락을 따라서 작곡 편곡하면 그렇게 된다. 이런 뜻이 여기에 충분히 담겨있다.
부처님은 어떤 선악이나 시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여래출현이 되고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다.
득일체어언량등신하며, 말의 양이 부처님과 같으며
득진여량등신(得眞如量等身)하며 : 진여의 분량과 등신이라. 같은 몸이고
득법계량등신(得法界量等身)하며 : 법계 양과 같은 등신이다.
득허공계량등신(得虛空界量等身)하며 : 허공계 양과 같은 몸이고
득무애계량등신(得無礙界量等身)하며 : 걸림없는 경계의 분량과 같은 몸이고
득일체원량등신(得一切願量等身)하며 : 일체 원력과 같은 양이다. 원하는 것만큼 다 온다는 말이다. 감응한다.
득일체행량등신(得一切行量等身)하며 : 일체 행의 분량과 같은 몸이며
득적멸열반계량등신(得寂滅涅槃界量等身)하나니 : 적멸한 열반 경계의 분량과 같은 몸을 얻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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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소득신(如所得身)하야 : 마치 앞의 것 13가지 몸을 얻은 것처럼
언어급심(言語及心)도 : 말과 심(心)도, 심은 뜻이다. 말과 마음도, 말이라고 하는 것은 방편인 턱이고 심이라고 하는 것은 원리인 턱이다.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 또한 그와 같아서
득여시등무량무수청정삼륜(得如是等無量無數淸淨三輪)이니라 : 이와 같은 등을 얻은 것이 무량무수한 청정 삼륜이라.
무량무수의 청정한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얻느니라.
(5) 因果의 交徹
佛子야 如來가 成正覺時에 於其身中에 普見一切衆生이 成正覺하며 乃至普見一切衆生이 入涅槃하야 皆同一性이니라 所謂無性이라 無何等性고 所謂無相性이며 無盡性이며 無生性이며 無滅性이며 無我性이며 無非我性이며 無衆生性이며 無非衆生性이며 無菩提性이며 無法界性이며 無虛空性이며 亦復無有成正覺性이니 知一切法이 皆無性故로 得一切智하야 大悲相續하야 救度衆生이니라
“불자여, 여래가 바른 깨달음을 이룰 때에 그 몸에서 모든 중생이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을 두루 보며, 내지 일체 중생이 열반에 드는 것을 두루 보느니라. 모두 같은 성품이니라.
이른바 성품이 없음이니라. 무슨 성품이 없는가. 이른바 모양의 성품이 없고, 다하는 성품이 없고, 나는 성품이 없고, 멸하는 성품이 없고, ‘나’라는 성품이 없고, ‘나’가 아닌 성품이 없고, 중생의 성품이 없고, 중생 아닌 성품이 없고, 보리의 성품이 없고, 법계의 성품이 없고, 허공의 성품이 없으며, 또한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성품도 없느니라.
일체 법이 다 성품이 없음을 아는 연고로 일체 지혜를 얻고, 크게 가엾이 여김이 서로 계속하여 중생을 제도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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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因果)의 교철(交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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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래(如來)가 : 여래께서
성정각시(成正覺時)에 : 정각 바른 깨달음을 이룰 때에
어기신중(於其身中)에 : 그 몸에서
보견일체중생(普見一切衆生)이 : 부처님의 법신에서 모두 볼 수 있다. 일체중생이
성정각(成正覺)하며 : 성정각이다.
예불하고 사시마지 올릴 때 ‘제불좌이성정각(諸佛坐已成正覺)’이라고 한다. 더 구체적인 구절도 있지만, 그 구절에 들어있는 화엄정신을 여기 이 대목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 몸에서 일체중생이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을 두루 본다.
심봉사가 눈을 떠버리면 모든 봉사들이 다 눈을 뜬다.
근본 하나가 눈을 뜨면 옛날 봉사나 지금 봉사나 동서고금 막론하고 다 눈을 뜬다. 부처님이 눈을 떴을 때 우리도 이미 그 마음에 대해서 같이 눈을 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화엄의 원융사상이다.
내지보견일체중생(乃至普見一切衆生)이 : 내지는 널리 본다. 일체중생이
입열반(入涅槃)하야 : 입열반이라. 일체중생이 정각을 이루고 일체중생이 열반에 드는 것을 두루 본다. 왜 그러느냐?
개동일성(皆同一性)이니라 : 개동일성이라, 심성은 네거 없고 내거 없다. 마음, 일심(一心)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본래 없는 것이라서 똑같다. 그래서 개동일성이니 그 일성은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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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무성(所謂無性)이라 :소위 무성이라. 모두 같은 성품인데 이른바 성품이 없음이니라. ‘있다’고 하면, 배운 것이 있고 가진 것이 있고 모양이 있다고 하면, 사람이나 누구나 천양지차로 각각 다를 것이다. 옛날 것이 다르고 지금 역시 다를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 무고무금(無古無今)이라. 옛날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니까 누구든지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탄생을 무생(無生)이라, 정확하게는 무생이기 때문에 무멸(無滅)이다, 라고 한다.
여기에도 나오지만 부처님이 탄생하신 것이 없으니까 열반에 드실 일도 없다.
금강경에도 그러한 구절이 나온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더욱 정확하게, ‘여래가 출현했지만 출현하신 바가 없다’라고 명확하게 나온다.
개동일성이라, 우리 심성이라고 하는 한결같이 하나뿐인데 그럼 왜 사람이 다르냐? 그렇게 다른 것은 심성이 아니라 업성이다.
심성에 붙어있는 무명으로부터 야기되어서 각각의 업식으로 달라진다. 그 ‘업의 차이’를 가지고 사람들이 ‘마음’으로 자꾸 착각을 한다, 이런 이야기다.
망상분별을 가지고 마음이라고 착각하는데 그것은 진여자성이 아니다. 진여자성은 모두 같을 수밖에 없다.
제바달다하고 부처님은 0그램도 차이가 안 난다.
이것이 심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개동일성(皆同一性)’ 줄을 쫙 그어놔야 되겠다.
소위무성(所謂無性)이라, 십회향품에 보면 제8 진여상회향에서 이 진여라고 하는 것은 어떠냐? 무성이다, 무상이다, 무념이다, 무래다, 무고다,라고 나온다.
‘여래자(如來者)니 무소종래(無所從來)며 역무소거(亦無所去)라’ 그런 것들이 여기 동일법성에 다 해당하는 것이다.
무하등성(無何等性)고 : 무성이라고 했는데 어떤 성품이 없느냐? 보리의 성품이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성품이 없다.
‘화엄경이 헷갈리네?’ 헷갈리지 않는다.
금강경에 이렇게 해놓았다.
‘수보리(須菩提)야 여래(如來)가 연등불소(燃燈佛所)에서 어법(於法)에 유소득부(有所得不)아? 깨달은 바의 법이 있느냐?’ 하니까 수보리가 ‘불야(不也)니이다 세존(世尊)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얻으신 바 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딱 잘라서 말해버렸다. 그것이 바로 이 구절이다.
보리는 무성이다, 열반무성이요, 불성무성이고, 불종자는 무종자다. 불종자는 종자가 없기 때문에 진공이다. 그렇지만 한도 끝도 없이 펼쳐내기 때문에 묘유라고 이야기한다.
소위무상성(所謂無相性)이며 : 소위 모양 없는 성품이며
무진성(無盡性)이며 : 무진성이며 다 하는 성품이 없다.
법화경에서는 ‘무생(無生) 태어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멸(無滅)이다, 불생불멸이다’라고 나온다.
멸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멸진하지 않기 때문에 무진이다.
무생이니까 무멸이요, 무멸이니까 무진이요, 무진하니까 무량이요, 이렇게 쭉 나온다.
그것이 이른바 모양의 성품이 없고, 다 하는 성품이 없고 또
무생성(無生性)이며 : 나는 성품도 없다. 나는 성품까지 나왔다.
무멸성(無滅性)이며 : 멸하는 성품도 없다.
글귀들이 상대적으로 되어있다.
바깥으로는 모양이 없고, 안으로는 성품, 성질이 없다.
무아성(無我性)이며 : 나라고 하는 성품도 없고
무비아성(無非我性)이며 : 내가 아니라고 하는 성품도 없고
무중생성(無衆生性)이며 : 중생의 성품도 없고
무비중생성(無非衆生性)이며 : 비중생성도 없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아 생각해 보니까 그것이 바로 여래출현이고 진여자성이고 무성의 성품이었구나’ 이렇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무보리성(無菩提性)이며 : 보리의 성품도 없고
무법계성(無法界性)이며 : 법계의 성품도 없다. 여기서
보리의 인(因)으로 법계를 깨달을 수가 있다. 그래서 이것도 상대적으로 하나는 보리 또 하나는 법계, 이렇게 해놓았다.
보리의 성품도 없고 법계의 성품도 없다.
법계의 성품도 없지만 양껏 이법계(理法界) 사법계(事法界)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를 설명한다.
무허공성(無虛空性)이며 : 허공의 성품도 없고
역부무유성정각성(亦復無有成正覺性)이니 :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정각의 성품도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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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일체법(知一切法)이 : 지일체법이
개무성고(皆無性故)로 : 개무성고라 줄 그어 놓으면 되겠다.
그 부분을 여러분들께서 참고하려면 범행품 제일 마지막 말미 초발심공덕품 바로 앞에 즉심자성(卽心自性)이란 대목이 있다.
‘지일체법(知一切法) 즉심자성(卽心自性)’ 그다음 구절이
‘성취혜신(成就慧身)하면 불유타오(不由他悟)요 초발심시(初發心時)에 변성정각(便成正覺)이라’고 하는 대목이 이 구절과 똑같다.
변성정각(便成正覺)이라는 분이 여래출현이잖은가.
또 다른 데 인용을 해서 이해를 하려면 수미정상게찬품에 승혜보살장(勝慧菩薩章)에 가면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자성(自性)이 무소유(無所有)라. 여시해법성(如是解法性)하면 즉견노사나(則見盧舍那)라,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알면 바로 비로자나 부처님을 친견할 것이다’ 선방 수좌라면 누구든지 화두만큼이나 익숙한 구절이 나온다.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 여시해법성(如是解法性) 즉견노사나(則見盧舍那)’
그 구절이 여기에 똑같이 맞아떨어지는 구절이라고 볼 수 있다.
득일체지(得一切智)하야 : 일체 온갖 지혜를 얻고
대비상속(大悲相續)하야 : 대비가 상속하여, 일체 지혜를 얻으면 저절로 자비로워지는 것이다.
일체지(一切智)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살바야(薩婆若)라고 하는 부처님과 같은 불지(佛智)이고, 대비라고 하는 것은 불지에서 나오는 중생을 향한 양도 끝도 한도 없이 펼쳐나오는, 저절로 우러나오는 대비심이다.
허공에서 다시 물이 저절로 우러나오는 대비심이다.
무연대비, 대비가 상속해서 삼매에서 능출능출 넘쳐 나오는 것이 대비상속이다. 그 대비심으로
구도중생(救度衆生)이니라 : 구도중생이라. 부처님의 본원력을 구도중생이라 한다.
십지품에 당념본원도중생(當念本願度衆生)이라, 마땅히 생각하라, 부처님의 근본의 원은 무엇이냐? 도중생이라.
크게 가엾이 여김이 서로 계속하여 중생을 제도하느니라.
(6) 正覺體의 譬喩
佛子야 譬如虛空이 一切世界가 若成若壞에 常無增減이니 何以故오 虛空은 無生故인달하야 諸佛菩提도 亦復如是하야 若成正覺과 不成正覺에 亦無增減이니 何以故오 菩提는 無相無非相이며 無一無種種故니라
“불자여, 비유하면 허공은 모든 세계가 이루어지거나 무너지거나 간에 늘거나 감소함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허공은 생기는 일이 없는 연고이니라.
모든 부처님의 보리도 또한 그와 같아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거나 이루지 못하거나 간에 또한 늘거나 감소함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보리는 모양도 없고 모양 아님도 없으며, 하나도 없고 여러 가지도 없는 연고이니라.”
*
정각체(正覺體)의 비유(譬喩)
*
불자(佛子)야 :불자여
비여허공(譬如虛空)이 :비유하면 허공은
일체세계(一切世界)가 : 모든 세계가
약성약괴(若成若壞)에 : 이루어지거나 무너지거나 간에
상무증감(常無增減)이니 : 늘어나고 줄어남이 없다.
태풍이 불어도 허공이 부서지는 법이 없고, 태양이 내려쬐어도 허공이 늘어나거나 뜨거워지는 법이 없고, 춥다해도 추워지는 법이 없다. 날씨가 춥고 바람이 추운 것은 지나가는 것들이나 그렇지 허공은 텅 비어 있다.
하이고(何以故)오 : 이러한 까닭으로 왜냐하면
허공(虛空)은 : 허공은
무생고(無生故)인달하야 : 본래 무생이다. 태어난 바 없는 까닭이다. 본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모든 화엄경이나 불교 경전에는 ‘지혜가 모자라기 때문에 사람이 비유를 하지만, 그 어떤 비유도 마음에 대해서 비유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허용하는 비유는 허공이다’ 라고 해놓았다.
*
제불보리(諸佛菩提)도 : 모든 부처님의 보리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역부여시하여, 부처님의 보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그와 같다. 여래의 출현도 그와 같아서
약성정각(若成正覺)과 : 정각의 깨달음을 이루거나
불성정각(不成正覺)에 : 깨달음 이루지 못하거나 간에
역무증감(亦無增減)이니 :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이 없다. 깨달아도 밥 한 그릇, 못 깨달아도 밥 한 그릇이다.
하이고(何以故)오 : 어찌한 까닭이냐.
보리(菩提)는 : 보리는
무상무비상(無相無非相)이며 : 모양도 없고, 모양 아님도 없고
무일무종종고(無一無種種故)니라 : 하나도 없고 여러 가지도 없다. 하나도 없고 다양한 것도 없는 것이다.
(7) 正覺相의 一相無相
佛子야 假使有人이 能化作恒河沙等心하고 一一心에 復化作恒河沙等佛호대 皆無色無形無相하야如是盡恒河沙等劫토록 無有休息하면 佛子야 於汝意云何오 彼人의 化心하야 化作如來가 凡有幾何오 如來性起妙德菩薩이 言하사대 如我解於仁所說義컨댄 化與不化가 等無有別이어니 云何問言凡有幾何니잇고 普賢菩薩이 言하사대 善哉善哉라 佛子야 如汝所說하야 設一切衆生이 於一念中에 悉成正覺이라도與不成正覺으로 等無有異니 何以故오 菩提는 無相故라 若無有相이면 則無增無減이니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成等正覺이 同於菩提하야 一相無相이니라
“불자여, 가령 어떤 사람이 능히 항하강의 모래와 같은 마음을 변화하여 만들고, 그 낱낱 마음마다 다시 항하강의 모래와 같은 부처님을 변화하여 만들되, 다 빛도 없고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이와 같이 항하강의 모래와 같은 겁이 다하도록 쉬는 일이 없다면 불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사람이 마음을 변화하여 만들고 부처님을 변화하여 만든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여래성기묘덕보살이 말하였습니다.
“내가 보현보살님이 말씀하신 뜻을 알기에는 변화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마나 되겠는가?’라고 물으십니까?”
보현보살이 말하였습니다.
“선재선재라. 불자여, 그대의 말과 같아서 가령 일체 중생이 잠깐 동안에 모두 바른 깨달음을 이루더라도 바른 깨달음을 이루지 않은 것과 평등하고 다르지 않으니라. 왜냐하면 보리는 모양이 없는 연고이니라. 만약 모양이 없으면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느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마땅히 이와 같이 등정각을 이루는 것이 보리와 같아서 한 모양이며[一相], 모양이 없음[無相]을 알아야 하느니라.”
*
정각상(正覺相)의 일상무상(一相無相)
*
불자(佛子)야 :불자야
가사유인(假使有人)이 : 가령 어떤 사람이
능화작항하사등심(能化作恒河沙等心)하고 : 항하사와 같은 마음을 변화해서 만들고
일일심(一一心)에 : 낱낱 생각 생각마다에
부화작항하사등불(復化作恒河沙等佛)호대 : 다시 항하사와 같은 부처님을 변화해 만들 때. 낱낱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과법으로 볼 때 인(因)이다. 다양한 수행을 가지고 다양한 결과를 도출해낸다.
개무색무형무상(皆無色無形無相)하야 : 그러나 모두 색도 없고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다. 무색 무형 무상하야 아무리 만들어도 빛도 형상도 모양도 빛깔도 아무것도 없다.
여시진항사등겁(如是盡恒河沙等劫)토록 : 이와 같이 항하의 모래 같은 겁, 항하사겁이 다하도록
무유휴식(無有休息)하면 : 쉬는 일이 없이 계속한다 하면
불자(佛子)야 : 불자야
어여의운하(於汝意云何)오 : 네 뜻에 어떠하냐
피인(彼人)의 : 그 사람이
화심(化心)하야 : 변화하여 마음을 만들고
화작여래(化作如來)가 : 부처를 변화하여 만든 것이
범유기하(凡有幾何)오 : 무릇 그 얼마나 되겠느냐.
*
여래성기묘덕보살(如來性起妙德菩薩)이 : 여래성기묘덕보살이
언(言)하사대 : 말씀하였다.
여래성기묘덕보살은 문수보살이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화엄경에서는 성기(性起)라고 하는데 이것은 진성연기(眞性緣起)다. 흔히 많이 쓰는 ‘연기법’은 생멸이 일어나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성기법’이라는 말을 주로 썼다. 성기(性起) 성품이 일어났다. 그래서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다. 마음이 모든 부처를 지었다.
성기(性起)와 연기(緣起)를 비교해보면, 연기라는 것은 잎사귀나 잔가지가 일어난 것이고, 성기라고 하는 것은 뿌리에서 싹이 올라오는 턱이다.
성기(性起)는 근본지혜를 상징하기 때문에 문수보살을 성기묘덕(性起妙德)이라고 표현했다. 또 화엄경 2회차 설법에서는 문수보살을 묘할 묘(妙)자에 머리 수(首)자를 써서 묘수(妙首)라고도 한다.
여아해어인소설의(如我解於仁所說義)컨댄 : 제가 이해하는 범위에서 당신이 말씀하신 뜻을 생각해보건대
화여불화(化與不化)가 : 변화하거나 변화하지 않거나
등무유별(等無有別)이어니 : 평등하여 차별이 없습니다.
허공이 변화해도 얼마나 변하고, 안 변해 봤자 또 얼마나 안 변하겠는가?
운하문언범유기하(云何問言凡有幾何)니잇고 : 어찌하여 얼마나 되겠느냐 하고 저한테 물어봅니까? 하니까
*
보현보살(普賢菩薩)이 : 보현보살이
언(言)하사대 : 말씀하시기를, 7회차 설법에서는 문수보살 즉 성기보살이 정수리에다가 부처님의 마정수기를 받고, 보현보살은 입에다가 부처님이 방광을 쏟아부어서 가피를 받지 않는가. 보현보살이 말씀하시기를
선재선재(善哉善哉)라 : 선재선재라
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여소설(如汝所說)하야 :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이
설일체중생(設一切衆生)이 : 설령 일체중생이
어일념중(於一念中)에 : 잠깐 사이에 반짝
실성정각(悉成正覺)이라도 : 모두 바른 깨달음을 얻을지라도
여불성정각(與不成正覺)으로 : 조금 정각했다 하더라도 정각을 이루지 못한 것과
등무유이(等無有異)니 : 평등하고 다르지 않으니
하이고(何以故)오 : 왜냐하면
보리(菩提)는 : 보리는
무상고(無相故)라 : 무상고니라. 보리는 앞에서 무성(無性)이라고 나왔었다. 여기는 무상(無相)이라고 나왔다.
안팎이 없는 것이다. 텅 빈 것이다.
보리라고 하는 것은 모양이 없는 연고이니라.
불교가 발전되면서 이 정도로 장황하게 설명해 놓았다.
약무유상(若無有相)이면 : 만일에 모양이 없으면, 모양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모양 없는 것이
즉무증무감(則無增無減)이니 : 어떻게 보태고 뺄 것이 있겠는가? 무증무감이다. 우리가 늘 하는 반야심경을 이렇게 잘 해석해 놓았다. 화엄경을 읽다가 반야심경이 해석된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응여시지성등정각(應如是知成等正覺)이 :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된다. 무엇을? 성등정각이
동어보리(同於菩提)하야 : 동어보리하야
일상무상(一相無相)이니라 : 일상무상이니라.
금강경의 일상무상이라고 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하고 정확하게 매치된다.
부처님께서 정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심이 동어보리하야 일상이 무상이다. 한 모양도 모양이 없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 모양을 없애려고 얼마나 반야심경 같은 데 많이 해놓는가?
‘무무명(無無明)’이니 해서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 내지(乃至) 무노사(無老死)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까지 가잖는가.
(8) 作用의 動靜
如來가 成正覺時에 以一相方便으로 入善覺智三昧하고 入已에 於一成正覺廣大身에 現一切衆生數等身하사 住於身中하나니 如一成正覺廣大身하야 一切成正覺廣大身도 悉亦如是하니라
佛子야 如來가 有如是等無量成正覺門일새 是故로 應知如來所現身이 無有量이니 以無量故로 說如來身이 爲無量界하야 等衆生界니라
“여래가 바른 깨달음을 이룰 때에 한 모양 방편[一相方便]으로 잘 깨닫는 지혜의 삼매에 들고, 들어가서는 바른 깨달음을 이룬 한 광대한 몸에 일체 중생의 수와 같은 몸을 나타내어 몸 가운데 머물며, 바른 깨달음을 이룬 한 광대한 몸과 같이 모든 바른 깨달음을 이룬 광대한 몸도 다 또한 이와 같으니라.
불자여, 여래는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문이 있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여래가 나타내는 몸은 한량이 없으며, 한량이 없음으로써 여래의 몸을 말하여 한량없는 경계[界]가 된다 하며 중생계와 같다고 하느니라.”
*
작용(作用)의 동정(動靜)
*
여래(如來)가 : 여래가
성정각시(成正覺時)에 :정각을 이룰 때에
이일상방편(以一相方便)으로 : 한 모양의 방편으로
입선각지삼매(入善覺智三昧)하고 : 잘 깨닫는 지혜의 삼매에
입이(入已)에 : 들어간다.
잘 깨닫는 삼매라고 하는 것은 무기공(無記空)이라든지 고요한 데 떨어지지 않고 잘 깨닫는 것이다.
어일성정각광대신(於一成正覺廣大身)에 : 일상 방편에 그런 작용을 잘 깨쳐서 선각지삼매에 잘 들어가서, 바른 깨달음을 이룬 광대한 몸에
현일체중생수등신(現一切衆生數等身)하사 : 나타낸다. 여기서 더 정확하게 써놓았다. 일체중생수등신이라. 등신(等身)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일체중생의 숫자와 동등한 몸, 등신, 동등한 몸을 나타낸다. 그래서 수행이 깊어질수록 부처님이 많이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가피력도 그렇다.
주어신중(住於身中)하나니 : 몸 가운데 머무나니 그러니까 바른 깨달음을 이룬 성정각한 광대신의 그 몸, 법신에 뭘 나타내는가? 일체중생의 숫자하고 똑같은 몸을 나타내고, 점층법을 한 번 더 쓴다.
여일성정각광대신(如一成正覺廣大身)하야 : 정각을 이룬 한 광대한 몸과 같이
일체성정각광대신(一切成正覺廣大身)도 : 일체성정각광대신도
실역여시(悉亦如是)하니라 : 실역여시라.
흔히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라고 한다.
여기는 그 일미진중이 아니고 ‘일정각신 왕창중생신’ ‘일일정각신 중에 왕창왕창 중생신’ 이렇게 되어있다.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그 대목이 이런 구절과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정각을 이룬 한 광대한 몸과 같이, 모든 바른 깨달음을 이룬 광대한 몸도 다 또한 이와 같으니라.
그래서 화엄경을 보면 참 복잡하다.
화엄경을 크게 신해행증(信解行證)으로 나눌 때 1회차를 신(信), 2회차부터 7회차까지를 해(解), 8회차를 행(行), 9회차를 증(證)이라 한다.
신(信), 1회차 거과권락생신분(擧果勸樂生信分)에도 다시 신해행증이 있고, 해(解), 2회차부터 7회 차까지 31품 수인계과생해분(修因契果生解分) 중에도 신해행증을 풀어놓았다.
8회차 이세간품에 가면 행(行)중에 또 뭔가? 신해행증을 묶어 놓고, 9회차 입법계품에 들어가면 증(證)이지 않은가? 증인데도 입법계품 안에 또 십주선지식, 십행선지식, 십회향선지식, 등각선지식, 묘각선지식, 십지선지식 이런 것이 나온다.
입법계품중에서도 신해행증이 또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화엄경의 구조를 보면 전부 다 프랙탈 구조처럼 계속 연결연결 되어있다. 세포와 세포가 신호를 전달하고, 조직과 조직이 연계가 되고 전체와 하나가 또 시신경은 시신경대로 귀신경은 귀신경대로 작용하다가 또 뭉쳐서 한 신경이 되고, 혈액과 소화기능과 비뇨기능과 전부 다 떨어져 있으면서도 각자 작용 속에서 뭉쳐 있고, 뭉친 것 속에서 또 뭉쳐 있다.
이러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은 화엄경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을 보든지 기계를 보든지 시계 하나를 보든지 전체가 다 그렇게 되어있다. 부분부분이 결속이 되고 또 시스템 시스템끼리 결속이 되고 전체가 결속이 되고 전체가 또 다른 데에 통째로 결속된다.
집집마다 TV 화면이 다 나오면서도 그 집집마다 TV 화면이 전부 KBS와 다 연결되어 있고, 이런 식이다.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보면 볼수록 ‘화엄경은 너무 정확하게 이와 사를 설명해 놓았구나’ 라고 느낄 수가 있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래(如來)가 : 여래께서는
유여시등무량성정각문(有如是等無量成正覺門)일새 :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문이 있다.
허공쯤 되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기나 저기나 이쪽도 허공이요 저쪽도 허공이고 통째로 하나가 된다.
누구인가? 설령에서 나오다가 발가락을 툭 차고나서 깨달음을 얻은 스님, 현사선사다.
설령에서 공부하는 현사선사에게 설봉선사가 말하였다.
“너는 여기서만 공부하고 다른 데 가서는 공부 안 하나? 제방(諸方)으로 선방 좀 돌아다녀라.”
“예.”라고 하면서 현사선사가 나오다가 돌뿌리에 엄지발가락을 채이고는 발톱이 빠져가지고
“아야 아야 스승님 때문에 괜히 나오다 발가락만 아파 죽겠네.” 하다가 깨쳤다.
돌부리에 채여 콩콩 뛰면서 ‘아야 아파 죽겠다. 여기도 허공이고 저기도 허공이고 아무 데서나 공부하면 어떠냐’ 여기도 허공, 저기도 허공, 중생이 그러다가 깨친 것이다.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 화엄경의 이치, 원리, 무차별을 가장 잘 나타낸다.
그것을 작용인 사(事)로 볼 때는 바라밀행으로 보현행원을 해서 어질게 베풀어 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간탐심이 많고 탐욕이 많은 사람은 보시하는 바라밀을 행하고, 참을성이 없고 성질머리가 못됐으면 인욕바라밀을 행하고 이런 방편들이 있다.
그러면서도 기신론 같은 데서는 이렇게 말한다.
‘법성이 공한 줄을 알고 보시바라밀을 행하라. 법성이 공한 줄 알고 계율 바라밀을 지켜라. 법성이 공한 줄 알고 인욕바라밀을 해라’
금강경 같은 데는 기신론의 그런 이야기를 더 극명하게 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 즉비반야바라밀(卽非般若波羅密)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密)’이런 구절들이다.
시고(是故)로 : 이러한 까닭으로
응지여래소현신(應知如來所現身)이 : 여래께서 나투는 몸은
무유량( 無有量)이니 : 한량이 없으며
이무량고( 以無量故)로 : 또 한량이 없는 까닭으로, 여래출현이 왜 한량이 없느냐? 무생이기 때문이다.
무생이기 때문에 무멸이 된다. 무멸이기 때문에 무진이 된다. 무진이 되기 때문에 무량하다, 이렇게 되겠다.
설여래신(說如來身)이 : 여래의 몸을 말하여
위무량계(爲無量界)하야 : 한량없는 경계며
등중법계(等衆生界)니라 : 중생계 같다고 하느니라.
(9) 周邊法界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知如來身一毛孔中에 有一切衆生數等諸佛身이니 何以故오 如來成正覺身이 究竟無生滅故라 如一毛孔이 徧法界하야 一切毛孔도 悉亦如是하니 當知無有少許處空도 無佛身이니라
何以故오 如來가 成正覺에 無處不至故로 隨其所能하며 隨其勢力하야 於道場菩提樹下獅子座上에以種種身으로 成等正覺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여래 몸의 한 모공(毛孔)속에 일체 중생의 수효와 같은 모든 부처님의 몸이 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여래의 바른 깨달음을 이룬 몸은 끝까지 나고 멸함이 없는 연고이니라. 한 모공(毛孔)이 법계에 두루 하듯이 일체 모공도 다 또한 그러하니, 마땅히 알라. 조그마한 허공에도 부처님의 몸이 없는 데가 없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은 이르지 않는 데가 없는 연고이니라. 그 능함을 따르고 그 세력을 따라서 도량의 보리수 아래 사자좌 위에서 갖가지의 몸으로 바른 깨달음을 이루느니라.”
*
주변법계(周邊法界)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응지여래신일모공중(應知如來身一毛孔中)에 : 마땅히 여래의 몸의 한 털구멍 속에서
유일체중생수등제불신(有一切衆生數等諸佛身)이니 : 중생의 숫자와 같은 제불신이 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우리 깜냥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무슨 말인가? 이것은 바로 한 모공에는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한 모공은 여지가 없다. 틈바구니가 없기 때문에 찰나다.
찰나제 삼매의,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부처님의 모공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것은 불생이다. 불생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이 다 수용이 된다, 이 말이다.
진공이기 때문에 묘유가 가득하다 이런 말씀이다, 이렇게까지 해놓았다. 이것은 불생인 까닭이다.
유생(有生)이라고 진짜 생하는 것이 있다라고 한다면 한 털구멍 속에 모든 중생 숫자만큼 부처님이 용납될 수가 없다.
TV에서 사람들이 데모하는 것을 카메라로 찍은 것을 보면 그 작은 화면 안에 수만 명이 들어간다. 한 명도 없기 때문에 가득히 있는 것이다. 한 명도 없기 때문에 가득하게 다 집어넣을 수가 있다.
우리의 아뢰야식도 그렇다.
아뢰야식의 공간 범위는 제가 볼 때 점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번지로 치면 0번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기억들이 그 속에 다 들어간다. 일미진중에 함시방이다.
조금만이라도 여지가 있어서 ‘요만한 공간, 해마 속에 기억 장치를 하자’라고, 요만한 공간이라도 여지를 줬다면 아마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기억이 하나도 안 떠오를 것이다.
공간이 하나도 없다. 진공이기 때문에, 제로이기 때문에, 천 백만 가지가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제가 이것을 깨달았다. 깨를 달아 놨다. 제가 깨를 달아놓은 것을 다들 아실 것이다. 참깨를 달아 놨으니까 깨치고 싶은 분들은 오셔서 샌드백 치듯이 치시면 다 깨친다. 제방 앞에 와서 한 방씩 치고 가면 다 깨친다. 이 사람도 깨치고 저 사람도 깨치고 몽둥이로 치면 크게 깨치고 작대기로 치면 작게 깨친다.
각성큰스님께 법문들을 때 ‘큰스님한테 잘못하면 큰일 나고 작은 스님한테 잘못하면 작살난다’고 하셨다.
너무 지루하니 웃고 넘어가자.
*
하이고(何以故)오 :어떠한 까닭이냐.
여래성정각신(如來成正覺身)이 : 여래께서 깨달음을 이룬 몸은
구경무생멸고(究竟無生滅故)라 : 끝까지 생멸이 없는 까닭이라. 여기 써 놓았다.
생멸이 멸하면 적멸이 위락이라. 그런데 그 적멸마저도 없는 것이다. 즉적멸이다.
여일모공(如一毛孔)이 : 한 털구멍이
변법계(徧法界)하야 : 법계에 두루하듯이
일체모공(一切毛孔)도 : 일체모공도
실역여시(悉亦如是)하니 : 실역여시라. 모든 털구멍도 그러하니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하니
당지무유소허처공(當知無有少許處空)도 : 당지하라. 무유소허처공에도, 조그만 허공에 용납하는 것도
무불신(無佛身)이니라 : 거기에도 부처의 몸이 있는 데가 없다. 무생인데 있긴 뭐가 있겠는가?
‘수보리야, 여래가 연등불전에서 얻은 바 법이 있니?’
‘없습니다. 불야니이다. 왜 있습니까?’
‘왜 있다고 하겠니? 중생이 있으니까 있다고 해야 안되겠나?’
*
하이고(何以故)오 :어찌한 까닭인가
여래(如來)가 : 여래께서
성정각(成正覺)에 : 정각에,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은
무처부지고(無處不至故)로 : 이르지 않은 데가 없는 것이니라. 허공이 없는 곳이 없다.
수기소능(隨其所能)하며 : 그 능함을 따르고
수기세력(隨其勢力)하야 : 그 세력을 따라서
어도량보리수하사자좌상(於道場菩提樹下獅子座上)에 : 도량의 보리수 아래서 사자좌상에서
이종종신(以種種身)으로 : 갖가지 몸으로
성등정각(成等正覺)이니라 : 바른 깨달음을 이루느니라. 그래놓고 화엄경에는 뭐라고 하는가?
한 번도 간 바가 없다. 이항처차보리좌니라.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나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라.
(10) 周遍一切心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知自心에 念念常有佛成正覺이니 何以故오 諸佛如來가 不離此心하고 成正覺故라 如自心하야 一切衆生心도 亦復如是하야 悉有如來가 成等正覺이니라
廣大周徧하야 無處不有하며 不離不斷하야 無有休息하야 入不思議方便法門이니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如來成正覺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자기의 마음에 생각 생각마다 항상 부처님이 있어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 여래가 이 마음을 떠나지 않고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연고며, 자기의 마음과 같이 일체 중생의 마음도 또한 그와 같아서 다 여래가 있어 바른 깨달음을 이루느니라.
넓고 크고 두루하여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여의지 아니하고 끊어지지 아니하여 휴식함도 없어서 헤아릴 수 없는 방편 법문에 들어가느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여래가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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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일체심(周遍一切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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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응지자심(應知自心)에 : 응당히 알아라 자신의
염념상유불성정각(念念常有佛成正覺)이니 : 생각 생각마다에 항상 부처님이 계셔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을 알아야 된다.
불자야, 보살마하살이 응당히 알라. 우리 마음이 생각 생각마다 부처다. 역부여시 상설법이라고 한다. 상설법.
‘염념상유불성정각’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이것을 청량국사는 삼성원융관(三聖圓融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만약에 화엄행자가 보현행자가 되어서 수행하는 사람이 자기 마음속에 여래장이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 불신자는 비보살야라’ 그 사람은 보살 수행자가 아니다. 이타심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가 초발심자경문을 배울 때는 ‘혼자 방에 있을 때 여대대빈(如對大賓)하라. 신기독야(愼其獨也)라. 자기 혼자 있을 때도 속이지 말라’고 하였다. 내 자심(自心)이 부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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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고(何以故)오 : 왜냐하면
제불여래(諸佛如來)가 : 모든 부처님 여래들이
불리차심(不離此心)하고 : 이 마음 빼고는
성정각고(成正覺故)라 : 성정각을 이루는 적이 없다.
이 마음을 떠나지 않고 불리차심 성정각고니라
촌보도 불리한다. 불리차심 성정각고니라.
문수보살이 화엄경 입법계품 근본법회에, 마음에다가 보리심을 잔뜩 짊어지고 ‘이 보리심으로 중생들을 깨워주러 발보리심 하도록’ 남쪽으로 갈 때 육천 비구가 따라나섰다.
그 육천 비구가 중간에서 열 가지 대승으로 가는 길을 듣고는 그 보리심에 감화를 받고 발보리심을 하면서 문수보살을 또 친견하려고 하다가 불리문수사리족하(不離文殊師利足下)라, 문수사리 보살의 발밑을 떠나지 아니하고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을 친견했다.
이것이 화엄경 입법계품 본문에 나오는 구절이잖은가.
마음을 발심하고 보니, 초발심시변성정각이라고 육천 비구가 그렇게 해도 발심이 안 되고 부처님 회상에서 사자빈신삼매를 보여주고 보조삼세법계문 방광을 보여주는데도 깜깜무소식으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이해하고 알지도 못하다가, 자기가 발심해버린 사람 입장이 되니까, 스스로 발심하고 보니, 문수사리 발밑을 떠나지 않고도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을 친견했다.
우리도 이 자리에 앉아서 시방세계에서 미국 사람 전화 다 받고 화상통화 다 한다. 전화기가 없는 사람은 전화를 못 받는다. 전화기가 있는 사람은 다 받는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속에 발심의 전화기를 하나씩 갖추어 놓는 것이 중요하다. 성정각고니라.
그래서 우리가 흔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한다.
그 구절이 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에 나오는데 80화엄경에는 각림보살이 나온다. 60화엄경에서는 각림이라고 안하고 그 보살 이름을 여래림이라고 한다. 여래가 바로 각이기 때문이다.
여래림보살장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구절과 60화엄경에서는 심조제여래(心造諸如來) 라고 하는 구절이 바로 이 구절과 일대일로 대응한다.
야마천궁게찬품 80화엄경 제 19권에 나온다.
심조(心造) 마음이 짓는다, 제여래(諸如來) 마음이 모든 부처님을 짓는다, 그것이 일체유심조다. 일체의 모든 삼세여래는 유심조라 오직 마음이 짓는다는 말이다.
여기와 똑같은 구절이다.
일체중생심(一切衆生心)도 : 자기의 마음과 같이 일체의 중생심도 앞에서 동일하다.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 마음도 그와 같아서 역부여시라.
이 구절은 야마천궁게찬품 각림보살장에 보면 똑같다.
지금 여래출현품에서 공부하는 구절하고 야마천궁게찬품 구절하고 똑같다.
그 구절을 화엄경의 제 1게라고 하지 않는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신기한 것은 전에 읽어 놨던 것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따라온다는 점이다. 적어 놓은 것도 하나도 없는데 요거 읽으면 그게 따라오고, 자석만 갖다 대면 철이 따라오듯 따라온다. 재밌잖은가?
이 마음이 아주 신비로운 것이다
요거 읽다가 금강경 읽다가 능엄경 읽다가 읽어 놓은 것은 죄다 몰려와서 ‘스님 내 좀 써먹어 주세요’ 하고 톡톡 튀어 나오는 것이 재미있다. 진도 나가니까 다 써먹지는 못해서 그렇지. 일체중생심도 역부여시하야
여자심(如自心)하야 : 일체 중생의 마음도 그와 같아서
실유여래(悉有如來)가 : 다 여래가 있어서
성등정각(成等正覺)이니라 : 성등정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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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주변(廣大周徧)하야 : 넓고 크고 두루하여
무처불유(無處不有)하며 :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불리부단(不離不斷)하야 : 끊어지지도 않고 달라붙지도 않고,떠나지도 않고 붙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고
무유휴식(無有休息)하야 : 무유휴식이라. 그러니까 쉽게 생각해서 우리가 의식이 끊어진다고 하는데, 분별심이 끊어졌다 붙었다 한다. ‘끊어졌다 붙었다’ 분별심은 그렇다.
6식이나 7식이나 붙었다 떨어졌다, 붙었다 떨어졌다 한다.
그러나 아뢰야식, 8식에 들어가면 항무단이다. 끊어지지 않는다. 늘 그대로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거기는 탐진치가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도 하나도 없고 붙었다가 떨어졌다 하는 것도 없다.
장 전기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
“둘이 언제 왔노? 강사스님이 끌고 왔어요?”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스님들이 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범어사 강주로 다시 잡혀 올라왔다.
김삿갓 시에 보면 학생재미십(學生在微什)이라, 겨우 열 명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강주로 와보니 학인이 열 명도 안되고 재미일곱이다.
겨우 일곱 분이 계시는데 전에 삼 사십 명이 있었던 호시절은 다 갔다.
저는 강주로, 강당에 한 30년 살고, 20년 넘게 사는 생활을 했다. 거기가면 논산 훈련소 같아서 새벽예불부터 저녁 예불, 밥 공양을 다 참석해야 된다.
지금 법문하다가 고개 쑥 돌리니까 아주 흉칙한 둘이가 앉아 있다. 요즘 저한테 잡혀 오자마자 왕복서 외워야 되고 죽을 지경일 것이다.
범어사 강원에는 대교반 두 분 사교반 한 분 유명한 대학하고 똑같다. 교수 학생이 일대일이다.
교실도 여기보다 더 크다.
엄청 큰 방에 둘이 앉혀 놓고 또 한 분은 독강을 한다.
치문반은 휴휴정사 그 큰 데 독채를 차지해서 두 분은 거기에 가 계신다. 한 분은 부상자로 병가 이탈을 했다.
학인이 일곱 분인데도 가지가지다.
발우공양을 못할 지경이고 이 시대에 불교가 이렇게 쇠퇴하였다. 그래서 그저께 제가 두 분 학인 스님들께 숙제를 줬다.
왕복서 외우는 것은 당연히 외워 오셔야 되고, 범어사 안에 있으면 이 겨울에 다른 꽃은 다 지고 없다. 우리가 말법시대 이렇게 싸늘한 시절이 되면 꽃이 따뜻한 봄날이나 여름날 선선한 가을날 가을 코스모스 이렇게 피는 꽃들이 많지만 그런 것들은 다 볕 좋고 따뜻할 때 기회주의자처럼 산다.
지금 말법시대 불법은 쪼그라들고 힘든 이런 시절에 우리도 여기 자리가 많이 비었다. 문수선원에도 반은 비어서 반토막이라고 봐야 되는데, 이런 시대에 의리 있게 부처님, 싸늘한 겨울이 왔지만 겨울에도 지지 않는 꽃이 있다.
그 꽃이 산다화다.
나는 산다, 산다화.
동백꽃 중에 산다화 꽃이 있잖은가?
지금 피는 동백이 오리지널이다.
‘그걸 한 송이씩 꺾어서 내 방에 갖다 놓거라’ 했더니 지저분하게 일회용 종이컵에 갖다 꽂아 놓았다.
그 귀한 꽃을 꺾어 와서 종이컵에다가 꽂았다.
전 같았으면 패불건데 이제는 학인도 없는데 두드려 패서 보낼 수도 없고 ‘열심히 하자 잘 하자’하고 달랜다.
오늘도 거품을 물고 칠판에 몇 칠판이고 세 칠판 네 칠판 해서 일나서서 분필 하나들고 ‘화엄경이 이래 된다 저래 된다’ 대치동 1타 강사처럼 강의해주었다.
잠시 일이 분 시간을 할애해서 말씀드리자면 사정이 그렇다.
강당도 살려야 되겠지만 그래도 이 말법시대에 우리가 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산다화처럼 겨울에도 지지 않는 의연함이 있지 않나, 그 찬서리나 영하의 날씨에도 굴하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 또 내지는 매화도 제 방 앞에 늘 매화를 심어놓았는데, 매화는 거름을 먹고 살면 좀 쪽팔린다.
누가 가꿔주는 거 말고 그늘 속에서 비바람 속에서 매화가 자라고 소나무가 자라야 되듯이 중도 그렇게 사는 것이 중노릇 어지간히 공부하는 것이 되지 않겠나.
오늘도 강사스님이 너무 힘드신 거 같아서 문수강당에 가자 소리도 안 하고, 신발이 없길래 ‘아이고 토꼈구나. 내한테 잡히면 죽으니까’하고 생각했다.
강사스님은 저하고 한 30년 가까이 범어사에서 지내 오는데 제 성질이 별로 안 좋으니까 있으면 잡혀 갈 것 같아 여기 내려오기 한 20분 전에 가서보니 신발이 안 보였다.
‘아이고 살려고 토꼈나’ 싶었는데 여기 와 계시니까 너무 고맙다. 그런 심정이 든다.
그래서 어른 스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한 1년 사이에 계속 큰절에서 전문용어로 ‘오퍼’가 왔는데 계속 거절했었다.
‘밑에 후배들 중에 누구 잘 키워가지고 하셔야 됩니다.’
강당에 돌아가도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해서 저번에 또 스님 면전에서 한 서너 번 소임자들한테 주지스님이나 교무스님 한테 거절을 했었다.
방장 스님도 바뀌고 주지스님도 바뀌는데 논공행상 비슷하게 자리 차지하는 것도 모양이 좀 이상하고 맞지도 않다고 말씀드렸다. 저는 또 저 혼자 공부하는 것도 있고 공부하기도 급하다고 우물쭈물 하니까 큰스님께서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니 그동안 범어사서 얻어먹은 거 많잖아?”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게 막 푹 찔리는 것이다.
“얻어 먹은 것도 많고, 울력이다.”
“강주한다고 제가 올라오면 스님도 저도 남들의 시선이 그렇습니다. 욕하지나 않을까요?”
“남 시선 생각할 거 없다. 우리는 우리 길로 가면 된다. 올라와 가지고 금정총림 범어사 화엄경 연구원장 그게 네 주임무고 강주는 그냥 총림이니까 이름만 올리고.”
그래 용상방에 이름을 두 개 다 올려놨다.
범어사 강주로도 올리고 화엄경 연구원장으로도 올렸다.
용상방에 이름 안 올리면 안 올라켔더니 화엄경 연구원장으로 와 있다.
어른 스님께서 저를 살살 꼬시려고 ‘아이고 원장님’이렇게 부르신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스님들도 전문적으로 각성노스님이나 우리 어른 스님이나 또 우리처럼 공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문수강당에서 요렇게도 하고 또 따로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모임이 있다. 그런 모임도 해서 화엄경을 선문화 타운이라고 범어사 밑에 훌륭한 교실이 있다. 거기서 스님들 하고 더불어서 전국적으로 같이 모셔서 훌륭한 화엄법석을 내년 봄부터나 동안거 지나고 마련하도록 하겠다.
스님께서 엄명을 내렸다.
‘문수경전 연구회도 다 참석하라고 해라.’
‘문수선원의 금요 법회도 다 참석하라고 해라.’
‘화엄경 공부할 만한 사람은 눈만 붙은 사람 다 붙으라 하자.’ 그런 것이 스님의 원력이시기도 하니 스님을 모시고 있는 시봉제자로서 큰절에 올라와서 제가 살던 옛방에 다시 또 돌아왔다.
죄송하다.
(박수)
박수는 무슨 박수, 박수칠 일은 아니다.
군대 병장 제대하고 다시 논산 훈련소 군대 한 번 끌려가 보시라. 예비군 훈련도 그러는데, 딱 그 심정하고 똑같다.
“학인 때는 예불이고 뭐고 띵가 먹을 수도 있는데 강주쯤 되면 예불도 못 띵가 먹습니다. 공양도 못 띵가 먹습니다. 바깥에 강의 있으면 몰라도.”
그래서 범어사 제 방에는 연구실 책상 이거보다 더 큰 거 하나 갖다 놓고, 컴퓨터하고, 편집할 수 있는, 책 볼 수 있는 연구실 컴퓨터도 두 대 거룩한 거 갖다 놓고, 본격적으로 혼자 거기에 처박혀서 공부하고 있다.
우리가 조금 쪼그들었지만 다 뭉쳐서 좀 같이 공부하는 게 안 좋겠는가. 문수강당도 좀 활성화 되고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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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주변에 넓고 크고 두루하여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불리부단이다. 여의지 아니하고 끊어지지 않고 휴식함도 없어서 헤아릴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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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부사의방편법문(入不思議方便法門)이니 :입부사의방편 법문 이것이 바로 보현행원이다.
부사의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미칠 수 없지만 부사의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한테 딱 맞춤형으로 해서 남들에게 우리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대자대비심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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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신론에는 ‘본각(本覺)’이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본각에는 성정본각(性淨本覺)과 수염본각(隨染本覺)이 있다.
성정본각에는 여실공(如實空)과 여실불공(如實不空)과 법출리경(法出離境) 연훈습경(緣熏習境) 네 가지가 있다.
성정본각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자성청정의 본래부처자리다. 견성성불해서 가는 그 자리다.
그대로 생멸문의 진여를 성정본각이라고 한다.
진여문의 진여는 없다.
진여문의 진여는 없지만, 진여문의 진여가 똑같은 진여의 DNA를 가지고 생멸문에 왔을 때는 각(覺)이라고 했고 불각(不覺)은 중생이라고 했다.
성정본각은 그 앞에 텅 비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여기
수염본각은 성정본각의 냄새가 이렇게 넘어온 것이다. 수염본각에는 지정상(智淨相)이 있고,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 있다.
여기 나온 입부사의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부사의업상을 이야기한다. 부사의업이라고 하는 것이 부사의한 방편업이다.
그런 것들을 훈습이라고 한다. 진여가 훈습 되는 쪽을 두고 하는 소리다.
그런 것을 좀 전문적으로 해놓으면 원효스님하고 만나는 맛도 있고 아주 좋은데 그런 것을 안 해놓은 분들은 무슨 소린가 싶어서 골치만 아플 것이다.
그런 걸 보고 여기 화엄경 구절들을 다시 보면 ‘와 이렇게 정확하게 기신론이라든지 금강경이 매치 되어 있단 말인가? 세월이 다르고 사람이 달라도 마음은 똑같기 때문에 똑같이 쓸 수밖에 없구나’ 이런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응여시지여래성정각(應如是知如來成正覺)이니라 : 응당히 이와 같이 여래의 정각을 이루는 것을 알아야 된다.
그것이‘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나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에 해당한다.
불수자성수연성이 바로 부사의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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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철(한자로 철자가 좀 ???)
안 올라(올라)켔는데
감사합니다^^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고맙습니다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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