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오늘은 좀 느긋하게 출발한다고 해서 새벽에 온천 대신 방에서 반신욕을 했다. 피로가 풀리면서 한결 몸이 가벼웠다. 아침 식사를 하러 가니 진해에서 온 여자분이 어젯밤에 온천을 했는데 너무 좋아서 두번씩이나 다녀왔다고 하는 거다. 그 말을 들으니까 "나도 가볼 걸"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려서는 엄마 따라서 동네 목욕탕을 다니곤 했는데,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목욕 바구니를 끼고 대중탕에 가는 게 왠지 부끄럽게 생각되어 집에서 씻기를 고집했다. 집에 작지만 욕조가 딸린 목욕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씻는 게 습관이 되어 온천에 가도 가족탕이 있는 곳에만 가게 된다. 남이 들으면 웃겠지만 세상에는 별 인간이 다 있으니까 나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 일본 큐슈 지방으로 배낭여행을 갔을 때 여자들과 어울려 온천을 한 적이 있는데 좀 쑥쓰럽긴 해도 새로운 경험이 그렇게 싫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이럴 때 딸이라도 있다면 구경삼아 한번쯤 손을 잡고 가볼건데 나 혼자는 망설여지는 거다. 그렇지만 북해도에 와서 온천욕을 안한다는 건 정말 바보같은 짓이며, 그냥 돌아가면 두고 두고 후회가 될 것 같았다.
아침 식사 후에 쇼와신잔에 갔다. 쇼와신잔은 1943년에 보리밭이 갑자기 융기하면서 만들어진 443m에 달하는 기생 화산으로 지금도 산 중턱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용암이 지상으로 나오지 못하고 땅속에서 굳어 버리니까 그 용암의 힘으로 땅이 올라오는 베로니테카형 화산이라는데, 매일 땅이 쑥쑥 솟아나 2년 만에 큰 산이 하나 생겼다는 게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지구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도야 호수 선착장에 가서 유람선을 탔다. 호수가 큰데다가 갈매기가 유람선을 따라 다니니까 마치 해운대 미포 선착장에서 오륙도를 돌아오는 유람선을 탄 듯 바다 위에 떠있는 기분이었다. 눈 앞에 보이는 섬들은 눈에 덮여 그대로 한 폭의 수묵화였다. 그 섬에다 사슴들을 방목하고 있어 접근할 수 없다는데, 멀리 물을 마시고 있는 사슴이 보였다. 북해도 사슴은 작은 조랑말 정도로 커서 꽤나 사나울 것 같다. 뺨에 와닿는 바람이 차가웠지만 얼지 않는 호수와 주변의 설경이 너무 멋져 한참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점심 식사는 버섯 우동 나베 정식이 나왔는데 몸에는 좋을지 모르나 여전히 내 입맛에는 그저 그랬다. 어쩌면 내 혀가 진한 양념에 길들여져 있어 자극이 없는 담백한 맛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중국짐에 가도 짜장면이나 짬뽕을 시켜 먹지 우동은 거의 먹은 적이 없었다. 문제는 일본 음식에 있는 게 아니라 맛있는 음식에 대한 내 편견에 있었나보다.
식사 후에 아이누 민속촌 관광을 했다.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족의 문화를 전승 보존해 놓은 곳이라지만 솔직히 볼만한 건 없다. 민속춤과 악기 연주 등을 구경하고 민속 박물관을 둘러 보았다. 마당에 세워 놓은 연어 덕장과 아이누족의 집들이 오히려 더 볼만 하였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와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한국어 안내판이 있고, 간단한 한국말을 하는 일본인들이 많았다. 특히 아이누 민속촌에서 만난 공연 사회자는 한국말로 익살을 떨 정도로 유창하였다.
15년 전 쯤 일본에 처음 왔을 때 놀랐던 것은 차들이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다닌다는 것과 화장실 사용 후 휴지를 변기에 버린다는 점이었다. 내가 묵었던 유스호스텔 화장실 벽에는 주인이 직접 써붙인 오자 투성이 한국말 경고문이 있었는데, 한국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 같아 볼펜으로 죄다 틀린 글자를 고쳐놓고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정확한 한글로 정중하게 부탁하는 글이 곳곳에 붙여 있어 이제는 우리가 제대로 손님 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이 느껴져 흐뭇했다. 그것이 모두 한류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배용준, 박용하, 류시원에 이어 요즘에는 일본 아줌마들이 장근석에 빠져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힌 그들에게 국민 훈장이라도 줘야 하지 않을까. 이번에 일본 공항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우리 큰애가 여권을 내밀자 눈이 휘둥그레져서 "권상우, 권상우, 배우" 라고 저희들끼리 소근거리며 야단이 났다. 이름만 같을 뿐이었는데도 이 정도이니 한국 연예인들에 대한 그들의 관심에 놀랍고 또 자랑스러웠다.
노보리베츠 온천지역으로 이동을 했다. 전날 190cm 이상 폭설이 내렸다더니 길에는 제설차들이 눈을 치우느라 바쁘고 수많은 관광버스들이 좁은 언덕길에서 교차하느라 말도 못하게 혼잡하였다. 이번에도 아까이상은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주차장까지 버스를 능숙하게 몰고 들어갔다. 호텔에 짐을 풀기 전에 지옥 계곡부터 보기로 했다. 황회색 바위에서 화산가스가 분출하여 주변 일대를 강한 유황 냄새로 뒤덮고 있어 마치 지옥을 연상하게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1분에 3000리터의 온천수가 솟아오른다고 한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겨우 한 사람이나 다닐 정도로 눈을 치워 놓아 자칫 발을 헛디뎠다가는 다리가 눈 속에 깊이 박혀 좀처럼 빼낼 수가 없을 것이다. 마침 내 앞에 가던 중국인 남자가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졌는데 다리가 완전히 꺾여 무릎을 크게 다쳤는지 고통스러워했다. 지독한 유황 냄새와 계속 연기를 뿜어대는 산 그리고 좁은 산길에서 뒤엉켜 올라가고 있는 사람들, 그야말로 지옥을 방불케하는 풍경이었다. 그만 포기하고 내려오고 싶었지만 그 길에서는 돌아설 수도 없었다. 온천수마다 다 구경할 수도 없는 지경이라 한 곳만 보기로 했다. 내가 본 건 몇분 간격으로 보글보글 뜨거운 온천수가 끓으면서 솟아오르는 간헐천이었다. 물의 온도가 80도 정도라고 하지만 그곳에 동전을 던지면 물의 성분 때문에 녹아버린다고 한다.
우리가 묵게 된 타키모토관 호텔은 노보리베츠의 11종류의 온천 중에서 유일하게 유산염천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규모도 엄청커서 대목욕탕이 1500평으로 24시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이름 그대로 '온천 천국'이다. 우리 팀은 다다미방이 배정되었는데 오래된 호텔임에도 어찌나 깨끗하고 침구류가 깔끔한지 정성스런 주인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 감동적이었다. 저녁 식사도 여느 호텔 부페보다도 스테이크나 게다리 등 먹음직스럽고 풍성해 모처럼 포식을 했다. 식사 후에 유까다로 갈아 입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오늘 밤이 북해도의 마지막 밤인데 그 유명하다는 온천에 와서 노천욕도 못해 보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 기필코 다녀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애들이 저희들 먼저 목욕을 하고 오더니 지금 탕 안에 사람들도 거의 없고 노천탕에 갔더니 콧구멍이 뻥 뚫리고 머리가 맑아지는게 완전 천국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면서 둘째는 자기가 안내를 하겠다며 같이 가지고 잡아끌었다.
욕탕까지는 에스커레이터를 두 번 타고 올라가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또 복도를 돌아가는 복잡한 미로로 되어있다. 온천욕을 하러 갈 때는 각자 세수 수건 한장만 갖고 가면 된다. 욕장안에 샴푸, 린스, 바디 클린저 등 온갖 비품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에게 물을 것도 없이 모든 게 순서대로 배열이 되어 있어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전에 어디선가 노천탕에서 일본인들이 머리에 수건을 얹고 앉아 있는 사진을 보고 좀 웃기는 풍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샤워를 하고 그 자리를 깨끗이 정리를 한 후 자기 수건만을 갖고 탕으로 가게 되니까 그 수건을 잘못해서 탕안에 빠뜨리게 될까봐 머리에 얹고 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타인에 대한 그들의 배려가 그 정도인가 싶어 존경스러웠다. 샤워를 마친 후 나도 머리에 수건을 얹고 여기 저기 탕을 순례했다. 제일 뜨거운 귀신탕에서 한동안 몸을 덥힌 후 노천탕들이 있는 바깥으로 나갔다. 가이드가 알려준 제일 오래 되었다는 유산염천탕에 들어갔다. 탕 주위에 눈이 한자는 쌓여있고, 전나무는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흰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앙징맞은 물레방아가 계속 물을 퍼올리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불고 있었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하겠다. 애들이 말한대로 콧속이 뻥 뚫리고 머리가 시원한 게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해졌다.
첫댓글 여행가이드 북으로는 최고입니다. 느낌까지 와 닿은 여행기 감사합니다
우리 님들에게 북해도를 안내해 드리고 싶어 불필요한 이야기까지 곁들였네요. 좋은 정보가 되셨나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