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 정부는 1909년 6월 15일 자로 한국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본국의 樞密院 의장으
로 내정하고,후임 2대 통감으로 소네 아라스케를 임명한다.한직으로 이동한 이토는 7월에도 반도에서
여유를 즐겼다.그가 귀국하기 전인 1909년 7월 1일엔 경복궁에서 신구통감의 送迎會(송별과 환영을
동시에 여는 것)를 대한제국이 열어 주었고,동시에 記念葉書까지 발행해 주었다.일본의 명치정부는
합병 1년전인 1909년 7월 6일 閣議(내각회의 의결) 결정으로 '韓國倂合方針' 을 발표한다.이어 7월 12일
에는 대한제국의 司法權 마저 빼앗고 다음날 경성 한복판인 취운정(翠雲亭:가회동에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낮은 언덕에 있었음)에서 한국의 고관대작및 유지들을 모아 놓고 병합의 기초를 닦고 한국을
떠나는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하는 송별 詩會를 대한제국 정부 주도로 열어준다.1909년 7월 13일 오전
10시 일본의 전현직 통감과 한국의 각부대신및 조선의 주요 고위관민(토호와 유지들)들이 모여 送迎詩
會를 열어 준 것이다.이때 신임통감인 소네 아라스케는 병을 이유로 결석을 했으나 떠나는 이토 히로
부미는 詩會의 개막에서 일장 연설까지 했다.일본의 내각이 이미 한국을 합병하기로 의결(7월 6일)했
다는 그 사실을 대한제국은 황제가 있는 제국임에도 몰랐다.아무런 저항없이 이토를 위한 송별시회를
베풀어 준 것이다(1909년 7월 14일자 황성신문 참조)
2, 바로 이 詩會 자리에 참석했던 한국의 친일파(친일도배)들은 이토를 추앙하면서 餘興을 즐겼다고
신문기사는 쓰고 있는데,이때 노래하고 지어졌던 詩들을 이토의 사위인 스에마츠 노리즈미(末松謙澄)
가 한일 양국의 선린우호 강화를 위하여란 부제로 '翠雲雅集(취운아집)' 이란 시집으로 엮었다.아무튼
이토에 대한 송별기념엽서에 이토는 '하늘에서 내려준 인재이자 호걸이란 별칭(天挺人豪)' 까지 한국
에서 얻었으나,이일이 있은지 3개월 후인 1909년 10월 26일 그는 안중근을 비롯한 또 다른 스나이퍼에
의해 하얼빈 역에서 불귀의 객이 된다.아무튼 1909년 7월 13일 이토의 송별시회에 참석해 이토를 찬양
했던 당시 한국의 황족들과 高官大爵 들을 보면,
" 고종의 친형이자 대원군의 아들이었던 이재면과 그의 아들인 이준용,대원군의 조카 이재완등 황족을
비롯해,총리대신 이완용,내부대신 박제순,탁지부(현재무부)대신 임선준,법부대신 고영희,학부대신
이재곤,농상공부대신 조중응,중추원의장 김윤식,중추원고문 권중현,시종원경 윤덕영,숭녕부총관
조민희,내각서기관장 한창수,군부차관 한진창,탁지부 회계과장 구희서,
등 정부의 고위대작들은 거의 참석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토를 칭송하기 바빴다.이들은 모두 이토가
통감이 된후 임명된 허수아비 대한제국 관료들로 친일파를 넘어 유사 일본인들과 같았다.대한제국의
골격을 이루고 있던 황족들과 고위관료들이 타국에 의한 자기나라 병합방침을 찬성하며 핵심 주모자를
흠모하며 시회까지 열어주며 착취와 횡포의 통감역할 노고를 치하까지 해준다는 것이 말이 되는지는,
지금보다 더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물어봐야 할것 같다.
3, 이토의 송별시회에는 황실과 정부의 고관대작 만이 참석했던 것이 아니다.그동안 이토가 음으로
양으로 후원했던 친일 유림계의
'이정로,이의덕,김유제,이중화,박제빈,최강,정봉시,정준민,정만조,정병조,김종한,송영대,남규희,
이준섭,김춘희,여규형,강우형, 박이양,조동희 등이 있었고,황실 外戚으로는 '민영휘,민영기,민영소'
등도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었다.
마지 못해 참석해다는 말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특히 대한제국의 법부대신과 농상공부 대신을 지내
면서 한국병합을 적극 찬성했던 친일파로 정미7賊(1907년)과 경술 9賊(1910년)에 들어가는 趙重應
이란 자의 이토 찬양시를 보면,얼굴이 화끈거린다.대한제국의 대신으로의 무책임과 아부의 극치를
볼수가 있다.이러고도 그가 대한제국의 대신이라면 대한제국이 망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그의 이토
히로부미 찬양시 7언 절구를 보자(한문생략),
"春翁(이토를 극 존칭하는 표현)은 70살 먹은 노인 이면서도 기운이 넘쳐
마치 활불(活佛:살아 있는 사람부처)이자 하늘을 날아 오르는 神仙과 같다.
평생을 수고한 그 뜻을 누가 알아 주리오만
그가 근심하는 것은 오직 서양세력이 동쪽으로 밀려 옴이다."
이시(善隣唱和 제 2집에 실려 있음)가 바로 1909년 7월 13일 (합병 1년전)당시 취운정 시회에서 대한
제국의 대신인 조중응이 이토에게 바친 찬양시다.그는 한국의 대신으로 자기나라를 침략해 유린하고
더 착취하고자 합병으로 수순을 바꾸는 우두머리에게 극 존칭인 春翁(春堂은 남의 부친에 대한 극존
칭임)은 말할 것도 없고,간지럽게도 이등박문을 살아있는 活佛이자 하늘을 나는 신선으로 표현했으니
어이가 없을 정도다.이처럼 학식높은 고관대작들 조차 이런 표현들을 쓴것을 보면 당시의 대한제국은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수 있다.이후 이들과 이들 후손들은 일제 36년을 거쳐
지금까지 한국의 기득층,즉 토착 倭寇로 남아 있으면서 빨갱이와 종북을 팔고있다.이들은 특히 남북
관계 개선이나 북미관계 개선을 아주 싫어한다.
4, 이런 趙重應은 일찌기 아관파천(1896년)때 까지 친일파 진영에서 활동하다가 친일파들이 숙청되
자 서둘러 일본으로 도망했다가,통감부가 생긴후 이토의 배려와 知日인사 자격으로 1906년에 복귀한
자다.이자는 1910년 합병후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정부로 부터 귀족(화족)인 자작 작위와 함께 지금
돈으로 20억이 넘는 10만 엔의 은사공채 까지 받았던 골수 친일파다.우리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일명 개화파로 불려졌던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을 비롯해 이들과 동조한 상당의 세력들은 대부분
친일파로 보면 무리가 없다.이들은 언제나 일본을 오고 갈수 있었다.조중응 처럼 일제와 친하게 지내
면서 연대를 했던 수많은 친일세력들이 해방후에는 미군에 붙어 반공(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공산주의 반대)주의자로 변신해,멀쩡한 사람들까지 빨갱이로 몰았고 이를 기회로 친일파란 신분까지
세탁을 했다.
미군의 점령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 질낮은 미국식 개독교 뒤로 숨은 친일파들도 너무 많았다.이런
친일파들과 그 후손들은 자신들이 살아 남고자 빨갱이와 좌빨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또 친일파
들과 부역한 이들이 그때는 그럴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나 그건 그렇지 않다.대한제국의 고관대작들이
이토에게 아부와 교활의 찬양시를 써서 바쳤다는 취운정이란 곳에서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憂國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었다.이미 1909년 2월(이토를 위한 시회가 열리기 5개월 전)에는 '나철,이기,
오기호' 등이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사대주의를 배척하는 檀君敎(대종교)의佈明書를 공표하기도 했
었다.
5, 조중응이 詩에서 이토가 서양세력들의 서세동점을 걱정한다고 했으나,당시의 일본 자체가 서구화
된 세력들이 정권을 잡았었고,이토 역시 영어를 잘해서 서구세력들로 부터 차관을 얻어왔던 것이
아니던가? 1902년에 맺었던 영일동맹 역시 서구세력의 힘을 빌려 또다른 서구세력을 몰아내자는 뜻이
들어가 있고 이어 러일전쟁까지 일으켰던 것이다.일본은 반도에서 실권을 잡고자 1884년 친일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후 반도에서 친일파들을 본격 양성했다.갑신정변에서 북양군벌 이홍장(휘하의
원세개가 반도 총독으로 오다)에게 밀려나자 절치부심으로 10년동안 군비를 확장해(10년 동안 8개
사단을 창설함) 청일전쟁(1894년)에서 승리한다.전장의 장비들은 모두 최신형으로 영국에서 차관으로
들여 오거나 사온 것이다.이때 캐슬러 기관총까지 들여왔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이홍장과의 담판으로 얻은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3국 간섭
으로 돌려주게 되자,臥薪嘗膽 10년을 준비해(10년 동안 9개 사단을 증설) 러일전쟁(1904)을 일으켰다.
여러번 말했던 것 처럼 전쟁은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투기사업이기 때문에 돈이 없으면 할수가
없다.돈많은 놈이 이기는 것이 전쟁이란 사업이다.본인이나 본국이 없으면 빌려주는 錢主라도 있어야
할수가 있다.바로 이 러일전쟁때 일본을 향한 전주 역할을 영국의 은행가들과 로스차일드 가문(미국의
로스차일드 대리인 제이콥)이 했다.단지 겉으로의 치장은 영일동맹 이었다.그들은 러일전쟁을 일본이
억지로 이기게 해줬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