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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남북대표회의에 참석한 김구 선생이 평양에서 남측을 대표해 연설을 하고 있는 장면. |
[김용삼의 현대사 추적]안두희,김구를 저격한 진짜 이유는?
‘실리 보고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1948년 여순사건 진압부대였던 한국 4연대가
여순 반란자들과 관련돼 있었으며, 이승만 정부와 북한 정권과도 다른 파시스트적인 정부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정부의 수반으로 김구를 옹립하려 했다는 기록이다.
말하자면 김구가 군부 내 反이승만 세력과 손잡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혐의가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미국서 돌아온 이승만의 귀국 일성은 “모든 정당과 당파를
초월하여 한 개의 덩어리로 만들어가지고 우리 한국의 완전무결한 독립을 찾는다는 것이
나의 희망”이었다. 이보다 한 달 여 뒤인 같은 해 11월 23일 김구의 귀국 일성은 “혼이
돌아왔는지 육체까지 가지고 돌아왔는지 그저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모르겠다”였다.
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왔던 독립운동 지도자 백범 김구는 자택인
경교장(현재의 강북삼성병원 자리)에서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총탄에 맞아 절명했다.
이날 6월 26일 정오 무렵, 현역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경교장에 나타나 김구 면담을
요청했다. 선우진 비서는 먼저 온 손님과의 면담이 끝나자 안두희를 김구의 방에 안내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로부터 불과 몇 분 후 2층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다.
아래층 응접실에 있던 비서 선우진과 이풍식, 경비원들이 뛰어올라가자 김구를 살해한
안두희는 스스로 권총을 내던졌다. 이때 시간이 12시 45분경. 사건 발생 당시 아래층에 있던 선우진(당시 백범 김구의 비서)는 당시 정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안두희(安斗熙) 소위가 왔습니다.”
“그래. 들어오라 해.”
그 즉석에서 허락하시므로 그를 선생님 거실로 들여보낸 때가 12시 30분께였다.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 응접실에서는 라디오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곧 지하실로 가서 선생님의 오찬 준비 상황을 알아보았다. 식모는 “네, 만둣국을 다 끓여가요”라고 했다.
주방에서 아줌마의 말을 듣는 순간 윗 층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동이 났다. 1층으로 뛰어올라가 다시 2층 백범 선생 방으로 뛰어오르던 나는 층계에서 한 손에 들었던 권총을 떨어뜨리며 “내가 선생님을 쏘았소” 하는 흉측한 모습의 안두희를 만났다.
허둥지둥 방으로 뛰어올라간 나는 “선생님, 이게 어인 일입니까” 하며 울부짖었으나 유혈이 낭자한 채 책상에 엎드린 선생은 말씀이 없으셨다. 순식간의 참변이었다.
아직 체온이 식지 않은 선생을 다다미방으로 모시고 이웃해 있는 적십자 병원에 의사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1층으로 다시 내려오니 비서진들에게 얻어맞은 범인 안은 쓰러져 있고 경비실에서
연락을 받은 경찰이 달려와서 그를 데려 가려는데 그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 정체 모를
군인들이 떼 지어 몰려와 범인이 군인이란 이유로 저격범 안두희를 바람같이 쓰리쿼터로
끌고 갔다. 불과 2,3분 사이의 암살 음모공작 현장이었다.>
안두희는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석 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포병장교로 복귀했으며,
1953년 완전 복권되었다. 그 후 안두희는 김구를 흠모하는 곽태영 권중희 씨 등으로부터
폭행, 진상고백 등을 강요당했다.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 중구 신흥동의 안두희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버스 운전기사 박기서 씨가 나타났다.
박기서 씨는 어린 아이 팔뚝 굵기 정도, 길이는 40cm 정도의 ‘정의봉’이라는 글씨가 써진
몽둥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준비해 간 나일론 끈으로 안두희의 두 손을 등 뒤로 결박한 다음 ‘정의봉’으로 수 차 가격했다. 너무 열심히 패서 숨이 차자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신 후 계속 구타를 하여 안두희를 타살했다. 당시 안두희의 나이는 80세였다.
박기서 씨가 구속된 후 사회 각계 인사들이 ‘백범 암살범 안두희 처단 박기서 의사 석방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9000여 명이 서명한 탄원서를 인천지방법원에 제출했다.
박기서 씨는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98년 3월 8일,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받아 1년 4개월 만에 풀려났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누구인가?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는 1917년 평북 용천군에서 태어나 신의주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떠나 1939년 메이지대(明治大) 전문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3학년 때 대학을 중퇴,1941년 중국으로 건너가 안휘성 회남(淮南), 강소성 서주(徐州) 등을 전전하며 사업을 했다. 1945년 1월 귀국하여 용암포 군청에 근무하기도 했다.
안두희의 집안은 고향 일대에서 손꼽히는 갑부였다. 해방 후 북한에서 토지개혁이 실시되자 그의 집안은 몰락했다. 1947년 빈손으로 월남한 그는 서북청년회 종로지부 총무부장과 중앙 총무부장을 지냈다. 안두희의 행적을 기록한 자료들을 보면 이 시기에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 및 요원, 우익 테러조직인 백의사(白衣社)의 자살특공대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1948년 11월 육군사관학교 특8기로 입교, 1949년 육사를 졸업하고
포병사령부 연락장교(소위)를 맡았다.
요약하자면 안두희는 일제 시대 때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 출신이고, 국내외에서 다양한 사회 경험을 쌓은 인물이다. 그는 부유한 지주 집단 출신으로 반공정신이 투철한 월남 실향민이었다. 그런 그가 김구를 암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2009년 11월 3일 국사편찬위원회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처음으로 밝혀졌다고 공개했다.
국사편찬위 측은 해외사료 이전사업의 일환으로 미국에 파견한 방선주 박사와 정병준 박사가 미국 정부 측에 수년 전부터 비밀해제를 요구해 열람하게 된 ‘김구: 암살에 관한 배후 정보(Kim Koo: Background Information Concerning Assassination)’란 제하의 미 육군 정보국 문서파일(RG 319, Entry 85A, 1949년6월29일 작성)에 이 같은 사실이 적시돼 있다고 밝혔다.
미 제1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조지 실리 소령이 백범 암살 직후인 1949년 6월 29일 작성한 이 문서는 ‘김구-암살관련 배경정보’란 제목 아래 “나는 그를 정보원으로, 후에 한국 주재 CIC 요원으로 알고 있었다”며 “안두희는 백의사 혁명단 1소조 구성원으로 백의사 지도자인
염동진이 명령을 내리면 암살을 거행하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고 기록돼 있다.
실리 소령은 1946년부터 1948년 12월까지 한국 주재 CIC 파견대에서 근무한 한국통으로,
20개월간 염동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의사는 낙양군관학교 재학시절 백범 김구와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던 염동진이 장제스
휘하의 반공 결사단체인 남의사(藍衣社)를 모방하여 1944년 11월 서울에서 월남한
청년·학생들이 중심이 돼 조직한 반공 결사조직이다. 이 단체는 반공 테러활동과 함께
미군 CIC와 연계 하에 대북 첩보활동을 펼쳤다.
실리 보고서의 비밀
백의사는 1946년 3월 평양역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대회에서 김일성 암살을 기도하고,
북한지역 토착 공산주의자인 현준혁을 암살했다. 실리 소령은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범들도 이 지하조직의 구성원으로 알려져 있다”고 적었다.
국사편찬위가 공개한 ‘실리 보고서’에 의하면 김구가 남북 연석회의에 다녀온 후 연공적인 길을 걷고 있다며 ‘큰 나무인데 공산주의라는 벌레가 꼬이고 있다’는 백의사 측의 비판적 발언이 기록돼 있어 김구가 이념 투쟁 과정에서 우익에 의해 살해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또 하나 ‘실리 보고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1948년 여순사건 진압부대였던 한국 4연대가 여순 반란자들과 관련돼 있었으며, 이승만 정부와 북한 정권과도 다른 파시스트적인
정부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정부의 수반으로 김구를 옹립하려 했다는 기록이다. 말하자면 김구가 군부 내 反이승만 세력과 손잡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혐의가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그렇다면 국사편찬위가 공개한 자료에서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제기된 백의사 단장 염동진은 누구인가? 염동진은 1909년 경기 파주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1932년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이 학교의 한국 학생들은 김구 계열과 이청천 계열로 나눠져 있었는데 염동진은 이청천 계열로 분류되어 김구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실리 보고서에 의하면 염동진은 중국에서 활동 당시 김구의 밀고로 중국 공산당에 넘겨져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맹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김구 암살이 그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면 이런 개인적인 원한도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눈이 멀어 ‘맹인장군’으로 불렸던 그는 광복 이후 공산주의자에 대한 각종 테러활동을 벌였으며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살해됐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살해하는 데 사용된 속칭 '정의봉',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연합뉴스 제공)
안두희가 김구를 쏜 이유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의 홈페이지에는 ‘백범 살인범 안두희 공판기’ 자료(http://www.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4t04)가 올라와 있다. 이 자료에 김구의 살해 당시의 정황과, 안두희의 백범 살해 이유가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관련 기록 중 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기소문 요지>
1. 육군 소위 안두희는 국방경비법 제 43조 위반으로 단기 4282년 3월 중순경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였다.
2. 육군소위 안두희는 단기 4282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혁명투사 김구 선생을 권총으로 불법 살해하였음. 즉 6월 26일 피고가 김구 선생을 방문하기 전 경교장에 있는 다방 자연장에서 약 20분 동안 두뇌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전부터 맘에 품고 있었던 한독당과 김구 선생의 반정부적인 노선에 대하여 김구 선생의 본심을 타진하고 피고의 거취를 결정할 목적으로 김구 선생을 만났다. 피고는 김구 선생을 향하여 공산주의 이적행위에 가담하지 말고 본심으로 돌아가서 간신배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권하자 선생은 “네가 내게 반동하느냐, 나에게 반동하면 국가민족에 대한 반동이다”라고 노하기에 그 순간 정신이 혼란하고 흥분하여, 김구 선생이 있음으로서 대한민국에 지장을 주며, 그것이 곧 민주정부 육성에 장해물이 된다고 하고 여순사건, 강·표소령 월북사건, 장덕수사건, 공산당과의 합작 등을 생각하고 미국제 권총으로 약 1미터 거리에서 제 1탄을 발사하고 계속하여 3, 4발을 쏘았다.
“선생은 외군 철퇴 지지, UN 한위 반대, 1억 5천만 불 원조안 반대”
[제1공판] 오전 10시 20분 개정, 오후 4시 30분 폐정
판 사 : 한독당에 입당한 동기는?
안두희 : 나는 맨 처음에 조민당에 가입하였으나 별로이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특히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인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을 두 국부로 모셔왔고, 또 숭배해왔다. … 그 후 두 분이 분열되자 처음에는 표면적인 분열이 아닌가 하여 앞으로 다시 합류하게 될 것을 바라며 선생을 모셔오던 중 우연히 홍종만과 가까워졌고, 홍종만의 열렬한 권고와 묘한 방책에 이끌려 입당하게 되었다. 당에 입당한 것은 당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생을 친히 모실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법으로 생각하고 입당했다(피고는 음성을 높여 말했다).
검 사 : 군인은 정당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가?
안두희 : 잘 안다.
검 사 : 그럼 알면서 왜 입당했는가?
안두희 : 위법인줄 알면서도 어느 정도 군인도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과 또
김구 선생을 친히 모실 생각에서 입당했다.
변호인 : 저격 전까지 몇 번 선생을 봤는가?
안두희 : 일곱 번 찾아가서 여섯 번 만났다.
변호인 : 6월 26일 무슨 일로 면회하러 갔는가?
안두희 : 근 30일간 면회를 안 하였기에 간 것인데 그 전에도 출입을 삼가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고, 나중엔 왜 왔느냐고 책망까지 들었다.
변호인 : 입당 전과 후의 감정은?
안두희 : 표면상으론 한독당 노선은 유혈기피노선이라고 보았는데, 그 후 점점 그들의(김구 선생을 제외하고) 언동이 불순하여 나는 이런 정당을 따른다는 것에 대해 침울해졌고 정치적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나는 김학규를 십여 차례 만났는데 4월 중순경부터 반정부적인 말을 하였으며, 구체적으로 정부시책을 비판하고 대통령을 공박하였다. 나는 김구 선생을 살해했다. 애국자이며 국부이며 영도자인 선생을 살해했다.
(이렇게 흥분된 어조로 크게 떠들자 변호인의 요청으로 5분간 휴정 후 속개하였다.)
안두희 : … 이렇게 위대한 분을 내가 살해한 데는 의의가 있다. 나는 저격 후 즉시 자살하려고 했으나 순간적인 이유로 자살을 중지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생명의 애착을 느끼지 않는다. 김학규는 민국을 정부라고 부른 일이 없고, 국회 소장파에 가담하여 정부시책을 끝끝내 반대하고 외군 철퇴를 주장했다. 강·표 양 소령 월북사건(1949년 5월 강태무, 표무원 소령이 각각 1개 대대씩 이끌고 월북한 사건-편집자 주)도 필연코 한독당에서 조종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벌써 탈당의 의사까지도 암시하였다.
김학규는 강·표 양 소령 월북사건에 대한 각계 동향과 여론을 물었고, 우리 조선에서도 뭘 일으켜야 되며, 젊은이래야 되니 그때를 위해서 비밀조직을 하되 8·15선거까지에는 쾌속히 그리고 절대 확실히 비밀세포를 가지라. 김구 선생에게도 말했다고 내게 말했다.
변호인 : 6월 26일 전까지 김구 선생과 만나 한 이야기는?
안두희 : 잘 기억이 안나서 … . 선생은 외군 철퇴를 지지하였고, UN 한위(한국임시위원회-편집자 주)를 반대했고, 1억5천만불 원조안을 반대했다. 선생은 경교장 경호원은 나를 경호하는 게 아니라 내 동향을 탐지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나는 국내 정세가 변할 때마다 김구 선생을 찾아가서 선생이 본심으로 돌아갈 것을 말했으나 선생은 그럴 때마다 화를 냈다.
“나는 이 순간, 선생을 국가의 반동이라고 생각했다”
[제3일 공판] 오전 10시 5분 개정, 오후 4시 5분 폐정
변호인 : 살해경위를 상세히 말하라.
안두희 : 그날 아침 조반을 먹고 예사로이 포병대에 나가려고 동화백화점 앞까지 와서 자동차를 타려다 문득 어제 밤에 아내가 낙태한 것을 생각하고 돈을 주려고 다시 집으로 갔다. 집에서 나오면서야 비로소 그날이 공일인 줄 알고 영천 친구네 놀려가려던 맘에서 자동차를 집어탔다.
대한문을 거쳐 이화여중 앞을 지나 로타리에 다다랐을 때 경교장 김구 주석을 만나겠다는 충동이 일어나 그만 차를 내려 자연장 다방으로 발을 옮겼다. 차를 마시다가 가정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생각하며 번민했다. 오늘은 꼭 선생을 만나 최후의 본심을 알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30분 후 자연장을 나왔다.
경교장에 들어가자 선우 비서와 악수를 하고 잡담을 교환하고 있으니 강 대위가 들어왔다. 나는 김구 선생과의 면회를 강 대위에게 양보하고 선우 비서와 포에 대한 잡담을 하였다. 강 대위가 간 후 나는 선우 비서의 안내로 2층 계단을 디딜 때 마침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해방의 역마차’라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들렸다. 내가 선생 앞에 나가 거수경례를 하자 선생은 2미터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 때 선생은 매우 표정이 불쾌한 것이 역력했다.
선생은 38선 사태 및 포병의 편성 상태는 어떠냐고 묻기에 흐지부지 대답한 후 나는 선생에게 일부러 꾸며 거짓말을 하여 본심을 알아보려 하였다. … 나는 2, 3일 중 옹진 전투에 나가게 되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출정하며 선생님께 인사도 드리고 선생님의 포부도 똑바로 알고 싶어 왔습니다 하고 말하니까 선생은 국회 소장파 얘기를 꺼내며 세간에서는 경교장을 싸고 여러 가지 낭설이 떠돌고 있는 이때에 너까지 와서 이러면 남들이 색안경을 끼고 볼 테니 돌아가라고 말하였다.
나는 선생에게 그런 말을 하시는 선생을 어찌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저마저 선생님을 의심하게 됩니다. 정당이나 언론계에서는 모두 선생을 공산당과 악수한다고 합니다. 오늘을 꼭 선생님의 본심을 확실히 알고야 돌아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더니, 선생은 대노하시며, 이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크게 떠들었다. 나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선생님은 선생님이 30여 년 간 투쟁한 탑을 지금 선생님 손으로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지금 이 때가 바로 선생님이 개심할 때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으니 본심으로 돌아가서 회개하십시오 하였다. 그랬더니 선생은 크게 노하시며, 에이 고약한 놈, 나에게 반동하는 놈은 국가와 민족의 반역이다 하고 말하였다. 나는 이 순간, 틀림없이 선생을 국가의 반동이라고 생각했다. 국가를 위하여 선생을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나는 단정했다.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선생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결심했다.(밑줄은 필자가 친 것임) 고조로 흥분한 나는 선생과 여순 사건, 강·표 소령 월북 사건, 장덕수 사건 등을 연상하려기에 그 후의 언쟁은 기억이 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의자에게 반쯤 몸을 일으키고 권총을 내어 눈감고 제1탄을 발사하였다. 선생은 두 손을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총을 쏜 후 선생을 보지 않고 그대로 서쪽 마루로 발을 옮기며 내 머리에 권총을 겨누었으나 순간적으로 죽을 필요가 없다는 영감을 느끼었다. 나도 자존심과 영웅심을 가진 사람이다. 또 국군에 누를 끼칠까봐 두려웠으나 죽는 것보다 살면 또 국가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한독당의 비밀을 완전히 폭로하고야 만다고 결심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이국태는 그때도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권총으로 선생을 죽였다고 말하니 그들은 당황하며 무슨 말인지 의심하는 것이었다 … . 그때 밖을 보니 정복 경관이 나를 향하여 조심조심 달려왔다. 나는 계급장과 모자를 다 버렸다.
“빨리 나를 사형해 달라”
[제4일 공판] 오전 10시 개정, 하오 0시 52분 폐정
판 사 : 사실 심문은 이것으로 끝났는데, 지금 피고의 심정은 어떤가? (판사는 낮은 음성으로 묻는다.)
안두희 : 마음이 잔잔하다. 다소 정치적 번민은 있었으나 지금은 자기가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 . 정치적인 것을 다 집어치우고 인간적으로 돌아가면 가신 선생의 생각이 절실하다. 나는 몇 번 죽여주어도 좋다. 빨리 사형을 내려달라…. 만일 사형을 나에게 내리지 않고 미온적인 형벌이 있다면 나는 내 자신이 목숨을 끊어버리겠다.
판 사 : 우국지정에서부터 그런 일을 했으나 인간적으로 선생을 숭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고 다시 한번 재생하여 창공을 바라보는 그러한 기분을 가질 수 없을까 … .
안두희 : 내 마음은 지금 창공을 바라보는 것처럼 맑다. 다만 안두희가 인간으로 돌아갈 때 꼭 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백범 선생의 국민장 날 수많은 동포들이 아우성치고 발 구르며 우는 소리를 영창 속에서 들을 때 나는 울었다 … . 빨리 나를 사형해 달라. (피고는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는다.)
판 사 : 이번 사건을 계기로 처자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안두희 : 사람인 이상 나도 슬프다. 그러나 큰마음으로 생각하면 할 일을 했으니 … . 가족에 대한 모든 것도 머리에서 사라진다.
판 사 : 아무리 선생을 살해하는 동기가 우국지정에서 나왔다 하여도 그것이 국법에 저촉된 때에는 어떻게 될 지 몰랐는가?
안두희 : 오로지 사형을 바랄 뿐이다.
변호인 : 피고는 증인 홍의 소개로 입당했다. 이것은 국방경비법 43조에 해당 안 된다. 죄과 제1에 대한 것은 무죄일 것이다. 피고는 한독당을 위해 입당한 것이 아니라 김구 선생을 어려서부터 숭배했기 때문에 당에 가입한 것이다. 죄과 제2에 대해서는 살해를 인정한다 … . 대한민국의 장애물을 제거한 동기를 보면 죄과 제1과 어떤 유기성을 갖고 있다. 선생은 5·10선거를 반대하고 단정을 반대하고, 임시정부 주석이라 하며 대한민국을 반대했다.
그뿐만 아니라 무혈통일의 허울 좋은 이념 아래 비현실적인 길을 걸어 왔다. 본 변호인은 범행목적 동기는 정당했다고 인증한다. 국가가 중요한가? 법이 중요한가? 피고의 행위는 대한민국에서 표창할 일이다. 형벌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는데 있지 않고 이를 회개케 하고 교육하는데 있을 것이니 육군소위 안두희에 대해서는 무죄석방을 요구한다. … 피고는 의식적으로 범행을 하지 않았고 또 자수하였으니 이는 현명한 심판관께서 많이 참작하여 2년 집행유예 정도로 처결을 바란다. (검사의 진술에 대한 이와 같은 변호인의 반박이 있고 무죄석방을 요구하자 법정 내에서는 난데없는 박수소리가 들렸다. 심판관은 박수를 치면 안된다고 주의한다.)
검 사 : 피고 안두희를 총살형으로 구형한다. 절대 총살형으로 구형한다.
(검사는 종시일관 열렬히 논고하였다.)
안두희 : 한독당의 행위는 위선이라고 본다. 5·10 선거를 반대하고 군사고문단 반대, 경제원조를 반대한 한독당을 반정부적 정당이 아니라고 말하는 검찰관과 심판관에게 유감히 생각한다. 만일 이 자리에서 공산당과 한독당이 같은 노선이 아니라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라.
판 사 : 육군 소위 안두희에 대한 최후 판결에 있어 심판관들의 합의를 본 바 죄과 1에 유죄, 죄과 2에도 유죄를 만장일치로 가결하였고, 종합 판결을 무기명 투표로 본 결과, 과반수의 동의로 피고 육군소위 안두희에 대하여 종신형을 판결한다.(오후 0시 52분)
이승만 대통령은 김구 암살사건이 발생한 후 6월 28일, 7월 2일 등 두 차례에 걸쳐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은 성명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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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 급서에 대하여(1949년 6월 28일, 이승만 대통령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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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이 오늘 암살을 당하신 보도를 들은 나로서는 놀라고 담한(膽寒)해서 말이 잘 아니 나옵니다. 범인이 잡혔다 하니 무슨 주의로 이런 일을 행하였으며, 이것이 개인행동인지 연루자가 있는지를 엄밀히 조사해서 일일이 공표하여 범인은 법대로 처벌될 것입니다.
한인이 어찌해서 이런 만행을 범하는지 과연 통탄할 일입니다. 공사 간에 원혐(怨嫌)이 있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법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개명한 사람이 행할 바이거늘, 하물며 이로운 사람을 피해하고 어찌 그 백성이 그 개명한 사람의 대우를 받을 수 있으리요. 백범 선생이 피해당한 것으로 우리나라와 민족에게 얼마나 손해를 주게 된 것을 통분하여 마지않습니다.
지금 민국 정부가 성립된 지 1년이 다 못되어서도 우리 우방들이 많이 도와서 민주주의가 잘 발전되는 것과 관민 합작으로 치안을 잘 유지하여 나가는 것을 칭찬하며 미국에서도 트루먼 대통령 이하 여러 당국이 우리에 대한 경제 원조로 1억 5천만 불을 국회에 요청하여 며칠 안으로 통과되기를 기다리고 있으나, 한인들만 합심 합력하여 잘해나가면 다 같이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인데 어찌해서 이런 불법행동을 행하여 저의 목숨에 해롭고 나라와 민족에게 누를 끼치게 하는지 생각할수록 통탄할 일입니다.
나와 백범 김구 선생 사이의 친분으로 말하면 호형호제하고 의리는 실로 사생을 같이 하자는 결심이 있는 터이며 임시정부 주석으로 내가 절대 지지하였고, 그 후 임시정부가 귀국한 때에는 무조건하고 지지하여 온 것입니다. 중간에 와서 정치상 관찰에 약간 차이로 말미암아 정계에 다소의 의아하는 점이 없지 아니해서 우리 두 사람이 양편으로 시비를 듣고 있었으나 내가 믿고 듣고 바라기는 백범 선생이 조만간에 나의 주장하는 것이 아무 사심이 아니요 민국 대계에 유일한 방침으로 각오될 날이 있을 것을 믿고 있었으며 근자에 와서는 이런 희망이 점점 표면에 나타난 것을 보고 나는 마음에 기대하는 중인데 졸지에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어공어사(於公於私)에 원통한 눈물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해내 해외에서 백범 김구 주석을 모든 동포는 한줄기 뜨거운 눈물로 그분의 주검을 조상하며 따라서 그분의 평생 애국 애족하는 대의를 본받아 그 사업을 계속 완수하기를 다 같이 맹서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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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 암살 등 최근 사건에 관하여(1949년 7월 2일, 이승만 대통령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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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씨 살해동기, 때가 되면 반드시 공표할 것
…불행하고도 충격적인 김구(金九) 씨 살해사건은 자연히 한국 및 나어린 한국이 관계하고 있는 문제에 주의를 이끌게 하였고, 그와 함께 유엔 한위(韓委)의 분과위원들이 우리의 옹진반도를 방문하여 무엇보다도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우리의 자유로운 지역을 방위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을 본 것으로 해서도 관심이 우리에 집중되었다.
나는 선출된 국회의 몇몇 의원을 체포하게 된 필요성이 금일 발표된 동 사건의 경찰조사 보고 중에 설명된 것으로 믿는 바이다. 그리고 김구 씨를 살해한 동기에 관해서도 공표하고 싶은데, 그것은 발표할 만한 때가 되면 물론 반드시 공표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든 사실을 일반 앞에 공개해 놓는다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그 생애를 조국 독립에 바친 한국의 한 애국자에 대한 추억에 불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의 법정에서 용의(用意) 깊게 검문된 이들 사실은 김구 씨의 살해가 순수히 여하한 행동노선이 조국을 위하여 가장 유리할 것일까에 관한 당내 의견 차이의 직접적 결과임을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견 불합치는 결코 당 자체밖에는 알려진 일이 없으며, 김구 씨의 추종자가 동 논쟁을 결말짓고자 취한 격렬한 수단은 우리 전국에 비애를 초래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는 김구와 김일성 19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