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속받은 존귀한 하나님의 친구인 인간
본문/에베소서2:12-18절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은 모든 것이 풍성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동료와 친구가 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외롭습니다. 현대의 수많은 오락산업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이 인간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왜 사람들은 외롭고 공허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을 잃어버렸으며, 하나님과 친밀한 유대감을 갖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친구가 되려면 근본적인 갈망을 충족시키려고 무수한 형태의 종교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해와 달, 별들, 등을 숭배하고 새와 동물과 곤충 심지어 이상한 영의 세력들과의 교류를 추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철학이나 교육, 오락이나 종교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저열한 쾌락으로 가련한 추구를 드러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에게 창조자 하나님을 발견하고 교제하려는 선천적인 욕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젖먹이 아이가 어머니의 포근한 품을 갈망하듯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의 방황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친구와 동반자가 될 때까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고 동행할 때 비로소 안식을 얻고 참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가슴 깊이 공감되어 지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할 것들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이 존귀한 존재라도 말합니다.(시49:12/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사람의 기본적인 가치입니다. 그가 죄인이든, 아니든, 하나님 믿든지 않 믿든지 상관이 없이 모든 인간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또는 많이 배웠든, 못배웠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지 상관이 없이 성공한 자든지 그렇지 않은 자든지 모두가 다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존귀한 것입니다. 시편8:3-5절에 그 사실은 시편 기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사람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존귀한지 시편 기자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그 증거가 6-8절에 나와 있습니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왜? 하나님께서 만물을 인간의 발 아래 두시고 다스리게 하셨습니까? 창세기에 보시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1:16절에서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그러므로 인간이 존귀한 이유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름을 받았기 때문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 구절에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창9:1-6절입니다.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5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6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모든 동물을 먹거리고 주셨습니다. 동물은 아무리 많이 잡아먹어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 명만 죽여도 큰 죄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동물과 달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우리를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셨을까요?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즉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뿐 아니라. 시편8:3-8절에서도 그것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창세기3:8절에 있다고 봅니다.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교제할 대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신 이유는 친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멜 노나 태리라는 하나님의 사람은 [예수님의 은은한 사랑의 바람]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말씀은 권능있는 선포이다. 그는 그분의 모든 영광과 아름다운을 우리의 인격을 통해 반영하도록 지으셨다. 우리는 그렇게 인간과 사귐을 갖고 함께 동행하시려는 그분의 의도를 만족시켜드릴 존재로 지어진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무한한 영예가 아닌가?]
그리고 이것을 티 엘 오스본은 다음과같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처음 창조하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았고, 매일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렸다. 그들은 죄나 죄책감, 혹은 두려움이나 열등감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의 부모님과 함께 있는 어린아이들과 같았다.
그들이 정당하게 있을 곳은 하나님 곁이었고,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과의 매일의 사귐을 누렸다. 그들은 친밀한 관계 속에 살았다. 그들의 생활은 축복의 동산의 삶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수치심으로 위축되거나 외로움 속에 버림받거나,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배제되는 것을 결코 계획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친구이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 지구에 거주하고 지구를 개발하면서 하나님과 친구가 되도록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한쌍은 하나님의 목적에 참여하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당신과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
마지막 부분이 중요합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당신과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러셨듯이, 그 후손들 즉 저와 여러분과도 사귀고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회막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백성의 진중에 거하실수 있도록 성소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또 성소 안에 지성소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백성들과 만나고 백성에게 말씀 하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출29:42, 45-46절
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늘 보와에 계신 하나님께서 보좌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마귀가 그토록 찬탈하기 원했던 보좌에 앉아 계신 절대 주권자께서 그 보좌에 앉아 계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 속에 들어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소를 왜 지으라고 하셨을까요? 백성들과 함께 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42절,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내가 그분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만나고 교제하고 동행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애굽땅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시키신 이유는 그들 중에 거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이유는 단순히 천국보내기 위해서도 되겠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와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를 곁에 두고 싶어 하듯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복음을 문자적으로만 알면 안됩니다. 지식적으로만 알면 안됩니다. 이 복음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를 천국들어가기를 원하시는 것보다 더더욱 우리와 함께 하시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를 원하시고 갈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들을 때, 단순히 죄 사함의 원리나 구원받는 원리가 아니라. 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바르게 반응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를 원하시는 것처럼 저도 하나님을 원합니다. 저도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저도 하나님과 친밀해지기를 원합니다. 저도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친구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누렸습니다. 그동안 그들은 안전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들은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했으며 풍성한 생명을 누렸습니다. 그러다가 창3장에 기록되어 있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원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풍성한 삶을 누렸던 에덴동산에서 강제 추방되었습니다.
창3:23-24,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이것은 죄인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첫 번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고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죄인은 하나님과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것입니다. 그럼 왜 죄인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제를 원하는 사랑이실 뿐 아니라. 거룩하신 분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주님을 뵈었을 때 스랍 천사들이 한 찬양을 여러분 보시기 바랍니다. 사6:1-3절입니다.
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하나님은 거룩한 천사들도 압도될 정도로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이십니다. 너무 거룩하셔서 하박국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합1:13절에서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죄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니누어지게 합니다.
이사야59:2절에서 그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나님의 임재는 거룩한 임재이고 하나님은 죄와 거하실 수 없습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보여준 것은 모세의 율법입니다. 그래서 티 엘 오스본은 율법을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대속물로 동물을 바치는 이 복잡한 과도기적 제도를 공식적으로 수립하셔서 하나님의 율법을 공경하라고 가르치셨고, 하나님의 임재의 거룩함을 깨우치셨다...구약의 제사장의 의식과 동물 제사의 모든 절차는 하나님의 임재의 놀라운 거룩함과 의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구약 율법의 의식은 초등교사의 역할로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와 함께 거하실 수 없다는 똑같이 중요한 사실까지 깨우쳐주셨다.]
이 외에도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거룩한 것이며 죄인들이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먼저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하실 때 하나님은 다음과같이 경고하신 것으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출19:10-13절입니다.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11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12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13 그런 자에게는 손을 대지 말고 돌로 쳐죽이거나 화살로 쏘아 죽여야 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고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
다음으로 20-24절에 있습니다.
20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22 또 여호와에게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23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산 주위에 경계를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 하셨사온즉 백성이 시내 산에 오르지 못하리이다
2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경계를 넘어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이분이 사람과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한 분입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심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경계를 정하셔서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 하신 것입니다.
또 우리는 제사장의 의복에 달린 방울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의 의복에 방울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출28:31-35절, 31 ○너는 에봇 받침 겉옷을 전부 청색으로 하되,
32 두 어깨 사이에 머리 들어갈 구멍을 내고 그 주위에 갑옷 깃 같이 깃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
33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석류를 수 놓고 금 방울을 간격을 두어 달되
34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한 금 방울, 한 석류, 한 금 방울, 한 석류가 있게 하라.
35 아론이 입고 여호와를 섬기러 성소에 들어갈 때와 성소에서 나올 때에 그 소리가 들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마치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시내산에 아무나 오르면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임재해 계셨던 성소안에 아무나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제사장들만 들어갈수 있었는데, 제사장도 아무 때나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레16:2절에 보시면 그 사실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심지어 제사장이 정해진 시간에 성소에 들어갔을 지라도 실수하거나, 범죄하면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마치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리다가 제단에서 불이 나와서 두 제사장을 태워죽였던 것처럼 제사장이 정한 시간에 성소에 들어갔을 지라도 거기에서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옷에 방울을 단것입니다. 아무도 성소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때에는 발에 끈을 묶고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 있는 사람들이 제사장이 걸어 다닐 때마다 방울 소리가 들리면 제사장이 살아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방울 소리가 멈춥니다. 그러면 죽은 것입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이 앞에 잘못을 저질러서 하나님이 쳐서 죽은 것입니다. 그때 죽은 제사장의 시체를 끌어 내야 합니다. 그래서 옷에 방울을 단 것입니다. 방울소리가 끝나면 죽은 줄로 알고 그를 끌어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또한 법궤를 빼앗아간 블레셋 사람들에게 임한 재앙과 심판입니다.
삼상5:1-12절에 5:1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2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3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5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6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7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8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하랴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 갔더니
9 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
10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11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12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복이었습니다. 범궤는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곳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복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재앙입니다. 그들에게 심판이었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에게 심판을 불러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것입니다. 지금은 일부가 아니라. 십일조 전체를 떼어먹어도 죽지 않습니다. 건축헌금을 약정하고, 전체를 떼어먹어도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때에는 일부를 숨겼는데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오순절날 강력하게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그와 같은 심판이 일어난 것입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오순절 날처럼 강력하게 임하시는 것이 부흥입니다. 그런 부흥은 많은 기적과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더불어 죽음도 일어납니다. 부흥이 오면 심판도 옵니다. 회개치 않는 자들, 완악한 자들, 강퍅한 자들, 대적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치시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 마크 듀퐁의 책에 보시면 그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강력하게 임하는 집회를 인도할 때는 여기에 죄를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빨리 이 자리에서 나가라고 경고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법궤를 열어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한 심판도 있습니다. 삼상6:19절에,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마지막으로 법궤를 옮기던 중 법궤에 손을 댄 웃사의 죽음을 볼수가 있습니다. 삼하6: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이 일로 인해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 다윗마저도 법궤를 모셔오는 것을 두려워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인은 가까이 하거나 함께 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인인 인류는 절망입니다. 또 그래서 불교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유교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슬람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입니다. 종교로 그분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종교를 만들어 놓고, 교리를 만들어 놓고, 의식을 만들지만 그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다 헛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를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착한 사람이 천국 가고 나쁜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말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세상에 착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생각이나 말로나 행동으로나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았어야 하나님앞에 의인입니다. 기준이 너무 심하다고 불평하십니까? 살인을 열 번 저질러야 살인입니까? 살인은 한번 저질러도 살인입니다. 모든 종류의 죄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왜 심하다고 합니까?
또 하나님은 생각을 읽으시고 심장과 폐부를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생각으로 짓는 죄도 죄입니다. 단 한번 이라도 생각으로 죄를 범했으면 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량한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구원이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인데,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인데 어떻게 인간의 알량한 도덕, 알량한 선행을 가지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수 있으며, 의의 나라인 천국에서 용납받을 수 있겠으며, 그 나라에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영원히 할수 있다는 생각합니까?
이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죄를 지은 후 선을 행했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선행을 하면 살인죄가 없어집니까? 강간을 저지르고 선행을 하면 강간죄가 없어집니까? 강도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어리석게 선행을 의지합니까? 선행으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종교와 선행이 다 구원에 있어서는 무용지물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들이 아무리 종교를 만들어 섬기고 알량한 선행을 해도 그것으로 절대로 가까이 할 수 없고 만날 수도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이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