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17. 대림절 세 번째 주일예배설교
에베소서 2장 1~10절
성탄절을 맞기 전에 묵상하는 구원의 은혜
■ 기독교 신앙에 있어 ‘생명’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것보다 생명을 중시하고, 생명의 가치를 높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일에 거룩한 분노를 나타냅니다.
혹시 생명을 중시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냐고 질문하시나요? 맞습니다. 불교는 생명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동물은 먹지 않는 규칙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불교의 분파에 따라 다르긴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식물 위주의 식사를 합니다. 그래서 생명을 가장 중시하는 종교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물질적·물리적 차원에 국한한 생명 이해입니다. 살생을 금한다는 정도의 생명 이해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순환 논리를 가지는 정도입니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의 생명 이해는 물질적·물리적 차원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물질적·물리적 차원을 포함해 정신적·영적 차원의 생명 이해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생명’의 대전환을 제안하고 안내합니다. 그것은 ‘새 생명’(새로운 생명)으로의 안내입니다.
오늘 본문은 ‘새 생명’ 개념과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새 생명’이라는 단어는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본문보다도 ‘새 생명’의 의미를 명확히 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성탄절을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시켜줄 것입니다.
■ 설명한 대로, 본문은 ‘새 생명’이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어가 없다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어인 “구원”을 통해 ‘새 생명’의 의미를 더욱 드러나게 하고 있습니다. 4절과 5절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보시다시피, ‘새 생명’이라는 말은 없고 “구원”이라는 말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이 ‘새 생명’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허물로 죽은 우리가 살아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허물로 죽었다’는 것은 육체의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죽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뜻과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로는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보다 비참한 인생, 비참한 죽음은 없습니다. 이를 2절과 3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왜 영적 죽음이 비참한 인생, 비참한 죽음인가요? “진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육신의 욕심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한 결과입니다. 전적으로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른 결과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의 결과가 “진노”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일반적인 ‘생명’의 상태입니다. 1절의 표현대로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가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 ‘생명’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으나 죽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새 생명’이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생명’은 어떻게 얻을 수 있나요? 하나님의 살리심에 편승(便乘)하는 것입니다. 4절과 5절, 그리고 8절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4~5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절)
자, ‘새 생명’,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절대 안 되고, 반드시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수고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을 얻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이 저지르지만, 해결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안 짓는 것이지만, 일단 죄를 짓고 나면, 그 죄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순간 진노 아래 있게 되고, 이는 영적 죽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입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 풍성하신 긍휼을 푸셨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기꺼이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생명을 맞바꾸셨습니다. 과연 이 하나님의 행위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더욱이 이 “은혜”는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사랑이기에 “선물”입니다. 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래서 이 새 생명의 은혜는 선물이기에 단 한 가지 방법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그 어떤 대가도 필요 없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자랑하면 됩니다. 9절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물론 할 일은 있습니다. 10절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무슨 말씀인가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목적하신 바가 있는데, 그것을 이행하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하신 바는,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내는 것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불순종하는 일체의 행동에 대해 반대하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도록 수고하는 모든 행위가 선한 일입니다. 이것은 용서와 화해를 필요로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저항과 심판을 필요로 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정의입니다.
참으로 구원은 은혜로 받는 선물이지만, 구원받은 이의 삶은 선한 삶,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드려야 합니다. 새 생명은 그 어떤 대가도 요구되지 않지만, 새 생명의 삶은 선한 삶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비전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 새 생명의 삶입니다.
■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 구원-새 생명만일까요? 아닙니다. 헤아려보면, 모든 것이 베푸신 것입니다. 사는 것 자체,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베푸신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날마다 선물 가운데 사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만 주셨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배들에게도 주셨습니다. 이 사실이 구원받고 나니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우리 후배들, 후손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7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하심을 알게 하는 것, 이것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도 선한 일입니다. 물론 이 선한 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행하기 어렵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의 방해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잃은 것도 억울한데, 선한 일까지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음도 은혜이지만, 선한 일을 행함도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삶이 은혜입니다. 매일 매순간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는 것, 살아내는 것,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바로 이 모든 것의 현시가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대단하고 진심이신지 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하나님의 선물의 정점이자 또 하나의 시작입니다. 요즘 말로, 하나님 선물의 플랫폼입니다. 그러므로 곧 만날 성탄절은 구원의 은혜의 시발점입니다. 그리고 또 곧 만날 부활절은 구원의 은혜의 종착점입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노래하는 시즌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노래만 하는 시즌이 아니라 선한 일이 극대화되는 시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불순종하는 일체의 행동에 대해 반대하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수고가 극대화되는 시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의 은혜의 찬송은 최고조가 됩니다.
■ 바라기는,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한 우리 모두가 구원의 은혜의 찬송이 최고조가 되도록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참 좋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