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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의 한국 나들이]
어머님께서 몹시 앓고계신다는 순란이의 전화를 받은 후 우리는 즉시 돌아가려고 마음 먹었었다. 헌데 큰 누님 계좌에 적금해둔 돈을 찾아내올 수가 없었다. 비밀번호가 맞지 않았다. 중국에 큰 누님과 여러번 전화 통하고 안해와 영이가 매일같이 은행에 가 비밀번호를 쳐봤지만 열리지가 않았다. 돈푼이라도 쥐고 가야 어머님 모시고 병원에 갈 수 있지 않겠는가?
병환에 계시는 어머님께선 얼마나 이자식을 근심하며 기다리고 계시는지 모른다. 나의 마음은 한시가 급했다. 그런데 그 비밀번호가 사람을 말려 죽인다. 누님 본인이 신분증을 지니고 가야 해결 할 수 있다는데 한달 썩 넘게 지나야 한국으로 나올거라 하신다. 별 수 없이 그때까지 일을 해야 했다. 돈을 싹 긁어모아 이틀간 뛰여다니며 연길공장 가스레인즈 생산에 수요되는 내화 밀봉재료 이백만원어치를 사 부쳤다.
안해가 “감자옹심이”에 들어간 이튿날 나는 고양시 일산구 “공사인력개발 센터”로 찾아갔다. 진짜로 막벌이판에 들어선 것이다. 누님께서 한국에 오시기 전까지 한달만 견지하려는 것이다.“벼룩시장”의 광고를 보나 길가의 간판들을 보면 인력시장이거나 직업소개소같은 것이 기수부지이다. 그러니 뭐든 하려고만 든다면 일거리 찾기는 쉬운편이라 하겠다.
광고에서 제시 해준대로 영등포역 앞거리에서 87번 좌석뻐스를 타고 시간반쯤 달려 일산 암센터역에 내려 전화를 치니 사장님이 차를 몰고 실으러 왔다. 원래는 한역 더 가 정발 고등학교역에서 내렸더면 이분만 걸어 그 인력 센터에 들어 갈 수 있었을 것을 잘못 내린 것이였다.
일산 국립 암센터는 자리도 컸고 건물도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건물 색갈이 해말쑥한걸 보아 세운지가 그리 오래된것 같지는 않았다. 암 고치는 병원과 전문가는 물론이고 연구원도 있고 료양원도 있고 암에 관한 것이라면 총 집합한 곳이라 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크고 구전하다고 해도 사람이 살면서 그런 곳에는 들어갈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하는 것인데… 하고 나는 생각 하였다.
국립암센터나 공사인력개발센터나 다가 센터인데 자그마한 건물의 지하에 자리한 인력센터는 너무나도 초라 하였다. 60-70평방메터되는 작은 지하실에 합판을 세워 세칸으로 나누어 한칸은 사무실로 쓰고 한칸은 나같은 외래 일군들의 숙소로 쓰고 나머지 한칸은 주방겸 샤워실로 쓰고 있었다.
지하실 층계를 내려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사무실인데 왼손켠에 서 정필소장님 책상이 벽에 대여있다. 채상위엔 전화기 한대가 놓여있고 책상 곁엔 찬물과 끓인 물이 나오는 정수기가 세워져있다. 책상 맞은켠, 그러니 출입문 정면에 24인치짜리 작은 채색 텔레비죤이 벽을 등지고 높이 얹혀져 있고 그아래 차탁을 마주하고 길다란 인조가죽 낡은 쏘파 두개가 놓여있다.
텔레비죤이 얹혀진 벽 왼켠에 잇다인 합판으로 세워진 벽에 역시 합판으로 만들어진 출입문 두개가 달려있다. 첫문에 들어서면 둬뼘되는 각목을 세우고 위에 널판자를 펴서 만든 7-8명씩 누울 수 있는 통침대가 량켠으로 설치되여있다. 이미 투숙한 일군이 열명 정도라 내가 누워 잘 자리는 넉넉하게 있는셈이였다. 서소장은 지저분한 이부자리들을 이리저리 밀쳐버리고 왼켠 중간에 내 자리라고 여기저기서 낡은 담요도 뽑아오고 어지러운 이불과 베개도 주어다 주었다.
내가 배치된 왼켠 통침대가 붙어있는 합판벽 건너쪽이 주방겸 샤워실이다. 침실 출입문 켠의 침대머리에 작은 통로를 내고 주방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작은문을 달아 놓았기에 침실에서 직접 주방으로 드나들 수도 있고 사무실에서 두번째(왼켠) 문으로 드나들어도 된다. 사무실에서 주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손켠엔 침실로 통하는 작은 문이 달려있고 왼손켠엔 크고 작은 각종 건설장 공구들이 구멍나고 어지러워진 안전모 안전화나 작업복 따위들과 함께 마구 장져져있다. 왼켠 벽 가운데쯤 자그마한 랭장고가 서있고 다음 콩크리트로 만든 취사탁대(炊事桌台)위엔 전기밥가마, 가스레인즈 그리고 사발광주리와 칼도마가 놓여있다. 탁대와 잇닿인 곳엔 간이 샤워실이라고 한메터 높이로 벽돌을 쌓아 남자물건만 가리워지게 해놓았다. 끝머리 벽에 가스 온수 샤워기를 높이 달아놓은 것이였다.
매일 아침 날 밝기 전이면 막일군 20명 좌우가 사무실에 모인다. 숙소에서 자는 사람 여나문과 본지방 사람들 그리고 먼거리에서 자가용을 몰고 오는 사람과 옆집 지하실에 주숙하는 연길 김씨 아저씨도 있었다. 서소장은 우리들을 용인 단위의 부름대로 두셋씩 조를 지어 여러 일터로 보낸다. 어떤 일군에겐 전화를 쳐주어 센터에 들리지 않고 직접 집부근의 일터로 가게하고 일군이 모자랄 때면 단른 센터에 전화를 걸어 아무아무 곳으로 몇명 보내달라고 지원을 요청 하기도 한다. 간혹 인부가 남아돌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센터에서 주숙하는 우리들이 우선이고 그다음은 외지에서 다니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본지방 일군이다. 우리는 주숙비를 바치는거고 외지에서 다니는 사람들은 교통비가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 합리한 안배라 하겠다.
일터는 먼곳도 있고 가까운 곳도 있는데 공공뻐스를 타고 도착하자마자 아침밥을 주는데도 있지만 거개가 일을 한쉼씩 한 후 아침밥을 준다. 간혹 한사람만 부르는 일터도 있고 7-8명 요구하는 일터도 있었다. 한곳에서 하루나 이삼일 하는 일이 대부분인데 한주일 두주일씩 오래 쓰는 일터도 있었다. 일터란 모두가 건설장인데 별이별 일이 다 차려진다. 건물 안팎을 청소 한다든가 널려 있는 건축용구들을 주어 모으는건 기본이고 벽돌이나 모래를 높이 지어올리는 무거운 일도 했고 하루종일 현장을 돌며 담배꽁초만 줏는 가벼운 일도 했다.
받침대 철관을 주어모두는 일, 폼(콩크리트 막이판)을 날라다 규격별로 쌓는 일, 지하실의 무너져내린 콩크리트 쓰레기를 쳐내는 일,전기 안장 전선을 끄당겨주는 심부름 일, 외벽장식 대리석 운반공 일, 건물기초 흙벽 방타(防塌) 목공 일… 헤아려 보니 길지않은 한달사이에 일 여덟 건설장으로 다니면서 스무여가지 일을 해본것 같은데 지금에 와 적으려니 명칭을 몰라 구구이 쓸 수가 없다.
아침 여섯시쯤에 일을 시작하고 오후 다섯시쯤이면 일반적으로 퇴근한다. 간혹 여섯시에 퇴근 하는 일도 있고 한번은 사우나실의 바닥 장식 일을 했었는데 저녁도 못 먹은채 아홉시에 퇴근 한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돈을 올려주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은 기술일도 아니고 힘든일도 아니기에 일당 5만원이 고정이다. 날마다 5만원을 벌어가지고 와서는 인력센터 소장님한테 5천원 바친다. 입주시 선금으로 낸 주숙비는 하루에 2천원씩이다. 4만 3천원에서 뻐스비와 저녁 밥값이 들어야하고 나는 담배값과 소주값이 더 들어야한다.
그외 액화가스 값이라고 몇천원이였던지 한번 낸적이 있다. 그러고나면 하루에 4만원 아래로 남을 것이다. 모래를 7층에서 10층으로 지어올리는 무거운 일을 하루하여 7만원을 받아봤다. 5만원 이상을 벌었을 때엔 센터 소장한테 만원을 바쳐야 할뿐만 아니라 체력 단련이 안된 나로서는 이튿날 사지가 쑤셔나 누워 있어야 했으니 좀 적게 받고 매일 출근하기만 못한 일이였다.
건설장마다 목공반이거나 철근공반, 용접공반에는 중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많이 끼여 일하고 있었고 몽땅 중국 사람들로만 조직된 구르빠도 적지가 않았다. 그런 집단에 참가하라고, 그러면 힘 적게 들이고 많이 벌 수 있다고 추천하는 사람이나 요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허지만 나는 한달도 못하고 귀국해야 하는 몸이니 이일 저일 단기적인 림시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산병원 부근에 자리한“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건설장에서 며칠간 잡일을 하게 되였다. 보잘것 없는 잡일이라하지만 하기 나름이다. 서른살을 좀 넘긴 본지방 키다리애 하나는 각목 메여나르는 일을 한다는 것이 자기 팔뚝보담도 가늘고 자기 키보담도 짧은 나무대기만을 골라메고 느릿느릿 다닌다. 곁사람 보기에도 거북한데 부끄러운줄도 전혀 모른다. 현장감독원같은 사람들한테 되게 꾸지람도 받군 하였지만 변함이 없다.
한번은 현장 총감독인 나보다 둬살 년상으로 보이는 나그네가 혼자서 건설장 밖의 길을 쓸고 있는 나를 불렀다.
“아저씨, 쉬염쉬염 하세요.”
“괜찮은데요 뭐.”
하루종일 시키는 일만 고분고분하고 말 두마디 넘기지 않는 성미인 나는 한마디 대꾸하고는 하던일을 계속 하였다.
“아저씨, 잠깐 멈춰보세요.”
나는 “예?”하며 돌아섰다. 내가 뭘 틀리게 했는지 아니면 다른 일을 급히 시키려는 것인지… 그가 나와 뭔가를 말하려하고 있음을 나는 느꼈다.
“막일 다니지 말고 우리 회사로 들어오세요,”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섰는데 그가 말을 계속 하였다.
“지금 우리 현장에 공구 관리원이 한사람 수요 되는데 해주면 안될까요? 숙식을 안배해드리고 매월 백 오십만원씩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인데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님께서 병환이 중하셔 이달내로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하거든요, 죄송합니다.”
“교폽니까? 한국분인줄 알았는데. 간다니 방법 없죠. 같이 일 다니는 분들과 이야기 해 의향 있으믄 나를 찾으라구 하세요, 골라서 채용 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죠.”
“그럼 수고하세요, 날도 덥고 급한 일도 아니고한데 쉬여가며 하세요.”
“예에, 감사합니다!”
나는 인츰 동료들에게 말하긴 했으나 그후로 “음주문화”건설장에 일하러 가지 못했기에 누가 그를 찾아 갔었는지, 또 누가 채용 되였는지 나는 모른다. 집으로 돌아올 계획이 아니였더면 내가 그일을 맡아 했을텐데 아쉽게 된것이다.
“음주문화연구센터”는 쌍둥이 고층건물로 세울 예정인듯 몇메터 사이두고 14메터 깊이의 커다란 기초구덩이 두개를 팠는데 하나는 이미 3층 지하실로 콩크리트를 다 때렸고 하나는 밑바닥 청리와 철근기둥 세우는 일을 하고 있었다. 쌍둥이 건물이 아니고 두 구덩이 위에 길다란 건물을 세울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준공한지가 오랠텐데 어떤 모습으로 일떠섰을지 궁금하다.
고양시는 서울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일산신도시”라 이름달고 철근 콩크리트 건물들을 많이 세우고 있었다. 북한의 진공을 막고 서울을 보위하는 방어선이라는 말같잖은 소리들을 들었다.
인력센터 숙소에는 흑룡강성에서 온 사람 넷, 러시아에서 온 애들 둘, 본국인 넷, 나까지하면 도합 11명이고 사무실 귀퉁이에 합판으로 두면을 막고 독방살이 하는 내 나이와 비슷한 나그네 한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그를 리실장님이라고 부르는데 그센터에서 실장인지 아니면 원래 모 회사의 실장이였었다고 그렇게 부르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자가용에 연장들을 싣고 다니면서 자기절로 값 높은 일만 찾아하는 사람이다. 침실 첫머리에 자리잡은 60여세 돼보이는 늙은이도 센터 소장의 안배 없이 절로 일을 찾아서 하러 다니는 고급 미장이이다. 그러니 그들 둘은 주숙비만 내고 일 소개비를 내지 않는 것일게다.
내가 인력센터를 떠나던 날, 나는 하루 일을 끝내고 와 짐을 꿍져가지고 나오면서 작별인사나 남기려고 리실장의 방문을 처음 열었다. 헌데 이불로 무릎을 덮고 비스틈히 누워 작은 TV를 보고있던 리실장은 와뜰 놀라며 이불을 뒤집어 쓰고는 “어,어…” 소리까지 내며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형상에 나까지 깜짝 놀라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 서있었다.
“리실장님, 저 인제 돌아갑니다. 안녕히 계십쇼!”
먼저 정신이 든 내가 인사말을 끝낼 때에야 리실장은 “허유ㅡ”하며 천천히 이불을 내리우고 머리를 내밀었다. 도대체 왜서 그처럼 놀라고 무엇을 그렇게 무서워 하는 것인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나는 미리 준비 하였던 돈 5만원을 꺼내여 그의 이불 위에 놓으며 말을 이었다.
“따님이 결혼 한다 했죠? 축하 드립니다! 적지만 성의이니 받아주시요.”
“아니, 뭐 이렇게…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건강하시구요…”
“예, 예…”하며 나는 급급히 나와 뻐스역으로 향했다.
며칠전 흑룡강성의 두 늙은이와 내가 일거리가 없어 안배를 받지 못하고 센터에 있었는데 마침 리실장도 일하러 가지 않고 있었다. 그날 리실장이 우리에게 점심밥을 사주었고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 나누는 중 그의 딸이 곧 결혼하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였다. 비록 몇푼 안되는 밥이지만 그 마음이 고마워 꼭 갚고 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 했던 것이다.“有来无往非礼也(오기만 하고 가지 않으면 례의가 아니다)”라는 중국말이 있고 “되로 꾸고 말로 갚는다(滴水之恩 用泉相报)”는 우리민족 속담도 있다.
숙소에는 미장이 로인 한사람 외에 30대의 한국 젊은이 셋이 있었다. 셋 다 일도 잘 하고 인물 체격도 좋고 마음씨도 고운 애들이였다. 두 러시아 애들과 저녁마다 씨름하며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키가 좀 작은 애는 전문 벽돌 지여올리는 힘든 일만 맡아하였고 키 큰 애는 나같이 그곳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여기저기로 막일을 다녔다. 그들중 나이가 제일 어려보이는 애는 나보다 센터에 반달가량 늦게 들어왔는데 우리와 함께 일다니는 날보다 외출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들은 왜 고정 직업을 찾지 않고 막일을 하는 것인지? 장가나 들었는지? 나는 지금도 그러한 의문들을 풀지 못해 답답하다. 그들은 PC방에서 게임으로 밤을 새우는 때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저마끔 저녁을 먹은 후 시간반쯤 지났을까한데 “신분 확인 하겠습니다, 모두들 신분증 꺼내요!”하는 소리에 문쪽으로 머리를 돌려보니 경찰 셋이 침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모두들 말 없이 려권을 꺼내 보였다. <아차!> 가슴이 철렁 하였다. 나는 려권을 분실 할까봐 부천에 두고 가져오지 않았었다. 경찰아저씨가 내 앞에 다가와 섰다. 뚫어지게 쏘아본다. “빨리 내놓지 않고 뭘 꾸물거려?!”하는 눈길이다. 나는 려행가방을 뒤적이며 급급히 변명했다.
“려권을 조카집에 두고 안 가져왔습니다.”
순경은 지나치려는듯 둬발자국 가더니 홱 돌아서면서 입을 열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합니까? 두고 왔다면서 뭘 찾는척 합니까?”
“글쎄요…” 나는 할 말을 못 찾고 얼버무렸다.
그 경찰은 나를 측면에서 뜯어보고 있었고 다른 둘도 사냥물이나 발견한듯 나의 정면에 와 섰다.
“증명 할 수 없다면 우리 같이 가야하겠습니다.”
“글쎄요… 그런데 이걸루는 안 될까요?”
바퀴 달린 려행가방 안의 옷속을 뒤집다가 손끝에 문득 닿은 것이 공정사 직함 “자격증서”였다. 일자리를 찾는데 쓸모 있을런지하여 언젠가 넣어두었던 것이 뜻밖에 나타난 것이였다. 그들은 한동안이나 실물과 사진을 대조해 보더니 외출시엔 려권을 반드시 휴대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고는 나가버렸다. 하마트면 파출소에 가 꼬박 밤을 새며 시끄러움을 겪을번 하였다. 한국에 건너가 한달만에 경찰의 질문을 받았었고 한국을 떠나기 한달 전에 또 경찰의 질문을 받았다.
이상한건 불시로 들이닥친 경찰들인데 그들이 나타나기 전에 한국애들 셋이 가뭇 없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어떻게 사라졌고 왜서 사라졌는가 하는 그것이다. 나보다 후에 들어왔다던 그애는 경찰이 왔다 간 후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침과 점심은 일터에서 먹여주니 근심이 없었는데 저녁을 자취 하려니 조금 시끄러웠다. 첫 한주일 저녁마다 “신라면”두개에 “참이슬” 한병씩 했다. 라면 한개반은 정수기의 끓는 물에 담궈 주식으로, 마른 라면 반개는 술안주로 했다.
두주일간은 흑룡강성에서 온 세사람과 함께 밥을 해 먹었는데 두부 두모에 돼지고기 반근, 장 덩어리를 뚝 떼여넣고 부글부글 끓여 매운 고추가루 듬뿍 놓고 후ㅡ후ㅡ 불며 반지술에 먹을라치면 천하 별미였다. 거기에 안해가 해준 데친 부추무침이라든가 말린 무우장아찌라든가 겯들어 먹으면 막일군 호불아비 신세 서러운줄 모른다. 밑반찬은 떨어지기 바쁘게 안해한테 미루 전화하여 준비 시켜놓고 가져다 같이 먹군 하였다.
흑룡강에서 온 사람 넷 중 하나만 나보다 열살 아래이고 셋은 다 나보다 열살 넘게 이상이였다. 치치하르에서 왔다는 행동이 느릿느릿한 신씨 아저씨는 63세였는데 우리와 함께 해먹지 않고 작은 전기밥가마와 납양재기를 하나씩 갖추어놓고 저녁마다 부지런히 홀로 해먹는 것이였다.
일산에 온 이튿날부터 전신이 가려워 고생하였다. 중국에서도 가려운 증상을 겪은바 있는지라 물탈이라 여겼다. 부천이나 한국 그어디에 가나 그런 증상이 전혀 없기에 수토가 나한테 맞아 천만 다행이라 생각 했었는데 일산에 오니 아니였다. 매일 저녁을 먹은 후 나는 샤워기를 켜놓고 뜨거운 물로 전신을 지져 마비 시키곤 하였다. 뜨거운 물을 끊으면 더욱 가려워나 미칠 지경이였지만 뜨거운 물을 들쓰는 시각만은 가려움을 잊을 수 있었기에 그렇게하는 것이였다. 수토과민증이라면 물을 피해야 하는것일지 모르겠으나 물을 마시지 않고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마지막 한주일간 나는 다시 라면생활을 하였다. 주방의 하수도 구멍에 밥알이 들어가 막힌다고 서소장님이 하는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였고 나를 따라 하는 수 없이 술을 마시는것 같아 함께 밥먹는 이들에게 미안해서였다. 내가 따로 하니 그들은 참으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사장님의 잔소리는 나 하나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귀에 거슬리면 성미가 고약한 나는 참기가 힘들다.
나는 계획한대로 한달간의 막일군 “생활체험”을 마치고 부천으로 돌아왔다. 안해도 이튿날로 “감자 옹심이”에서 나와버렸다. 큰 누님께서 한국에 오실 시간은 그래도 일주일이나 있어야했다. 일주일이면 둘이서 적어도 오십만원은 벌 수 있을텐데 우리는 지겨웠다. 집으로 곧 갈 것이라 생각하니 일이라곤 전혀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우리는 남대문 시장에도 가고 동대문 시장에도 가고 큰 상점들도 돌았다. 안해는 원래 쑈핑을 좋아한다. 례물을 갖추고 항공권도 사고 배표도 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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