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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디찬 방보다 더 차가운 심연의 고립 속에 사는 ‘혼살이’분들과 때로 언쟁을 벌이고 욕을 주고받으며, 여전히 삶은 소중한 것임을 깨닫는다. 스물아홉 살 막걸리를 좋아하는 청년과 헤어진 지 4년째인데 가끔 카카오톡으로 소식을 받았다. 그 소식 끝에 구치소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금 있으면 출소하는데 도와달라는 말이었다. 식당 두 군데에서 밥값과 술값을 내지 않고 도망갔단다. 직접 찾아가서 밥값을 지불하고 확인서도 받아왔다.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내용까지…. 출소할 이 청년을 위해 동네 형들이 작은 힘을 모았다. 하지만 돌아온 건 출소 후 연락 한 번. 이후 연락을 끊고 사라졌다. 이런 실패는 자꾸 반복된다. 이럴 땐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예수 형님이 생각난다.
운동에 중독되어 하루라도 뛰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친구처럼, 그럴 줄 알면서 다시 기다리는 마음을 어떻게 하나. 실패는 괴롭다. 가능하면 피하고 싶다. 다른 동네에 산다는 이 청년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더 이상 그 아이를 책임질 수 없어요. 이제 연락하지 말아주셔요.” 살아있기는 한지, 걱정인지 염려인지 생각인지 모를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그래도 마지막 떠나는 길에 인사라도, “수고했어”라는 말이라도 전하고 싶다. 아픔과 불만이 쌓여 생각이 망가지고 마음이 돌아오지 않으니, 예수님인들 이 친구를 회복시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하시고 용서하라 하시니, 말 그대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며 보상을 바라지 않고 다시 기다려볼 뿐이다. 직접 찾아다닐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 실패에 대한 의미 부여는 곧 다가올 미래에 대한 귀한 약이 된다. 현재로 밀고 들어오는 미래의 무지개이다. 귀하디귀한, 값지고 쓰디쓴 처방전이다.
2017년 여름, 귀한 천사 같은 이를 만났다. 3년 동안 좋은 일을 도모하며 은혜와 사랑, 기쁨과 고생을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나누고자 나름대로 결사와 결의로 다짐해왔다. 그 천사 같은 분과 좋은 일을 나누다가 서너 명이 모이게 되었고, 협력해보자 다짐하며 활동을 이어갔건만, 코로나 때문인지 무척 고달픈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세 번째 겨울, 성탄절을 기점으로 일이 틀어졌다. 좋은 일 하자고 만난 이들의 감정이 틀어지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들을 겪었다. 치유와 회복의 시간을 가져보고자 했으나 쉽지 않았다.
한마디로 실패다. 부끄럽지만, 이후 지금도 여전히 관계는 실패한 상태다. 받은 실패를 잘 일구어가야 하는 일이 나와 친구들의 소중하고 값진 과제다. 원수로 남을 수는 없다. 미워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실패했다고 미워할 수만은 없다. 미워하면 상처가 남아 모든 일이 부자연스러워진다. 생명을 일구며 이어가려 한다. 혼자 몰래 숨어 사라지고 싶을 때, 곳곳에 그 얼을 받아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다시 걸어갈 뿐이다. 위기 상황엔 근본 중심에 서라는 어느 형님의 말이 기억난다. 그는 가던 길 그대로 가면 된다고 말했다.
실패는 생명을 일구는 삶의 실마리다. 주류 집단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경멸했다. 가문 규율을 어기고 결혼 전에 아기를 가졌고 유대 전통에 어긋나는 행보를 했기에, 그저 죽임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태어나는 생명들을 찾아다니며 예수를 죽이려 발버둥을 쳤다. 실패의 표본이었다. 이 미천한 생명이 온 인류를 구원하는 평화의 구세주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지금도 여전히 갈릴리 변방에서 삶을 일구는 또 다른 예수들은 어두운 곳에 소외된 공간에서 실패인 듯한 생명으로 일구어지고 있다. 우리들도 그 길 따라 첫 기억을 되새기며 꾸준히 걸어가면 좋겠다.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미명 끝을 밝히는 새벽이 오리라 예비하듯이 실패를 벗 삼아 영글어가는 우리네 인생으로 승화시켜 가기를 기도한다.
희망과 소망의 메아리를 들으며
실패의 고통은 바라보는 것 자체만으로 근심이 된다. 내가 상대방에게 더 이상 무언가 하지 못하게 되면 무력감이 엄습한다. 그저 스쳐 지나가며 애써 모른 척 넘어가면 오히려 마음이 편할 수 있으리라. 반복되는 죽음과 생존의 현장 가운데 실패를 넘어 패전의 전장만이 우리를 기다리는 듯하다. 깊디깊은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우연히 지나가는 비둘기 한 마리의 날갯짓에 불현듯 깨닫는 순간이 찾아온다. 계단 구석 모퉁이 틈에 생명을 틔운 자그마한 풀꽃을 바라보며 행복의 눈을 뜬다. 슬며시 지나가는 고양이 친구들의 속삭임을 통해 다시 희망과 소망의 메아리를 듣고 이른 아침 눈을 뜬다.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때때로 다른 가치로 그 길을 가려 한다. 기억했고 받았던 그 가치를 잊어버리면, 우리가 받아 누렸던 아름다움도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가 기억을 되새기고 가야 할 이유다.
코로나가 시작된 2020년 아직 바닷바람이 추운 이른 봄, 송정 바닷가에서 어느 형님과 달리기를 시작했다. 허리 디스크로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어하던 형님이 운동으로 치유를 전하는 운동 전도사를 만났다. 이분 도움으로 우리는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수영, 달리기, 사이클. 철인 3종을 즐기는 남자 천사다. 고통 중에 하늘의 인연은 이어지더라. 그 후 광안리에서 뭔지도 모른 채 새로워지기 위한 몸짓이었는지 몇몇이 바다 수영을 즐기고 송정해변과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이른 봄부터 한겨울까지 바다를 엄마 삼아 운동을 이어갔다. 바닷물 위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바다 품으로 들어갔다. 바다의 품이 엄마 품처럼 우리를 안아주더라. 해변에서 광안대교를 돌아오면 3킬로미터 정도, 발에 핀을 차고 2시간 이상을 바닷속에 머문다. 그곳에서 희망을 만났고 소망을 체득했다. 취미 생활이 아니라 살기 위해 달리고, 살기 위해 운동하는 이들을 만났다. 바다 수영을 통해 인생의 호흡을 잡았고 생명을 품은 엄마의 품속에 안겼다. 2022년 여름에는 이웃, 가족처럼 교인들과 함께 서핑을 즐기며 여름을 보냈다. 초겨울까지 추운 줄 모르고 송정해변에서 서핑으로 형제애를 다졌다.
실패와 함께하기
동시에 그럼에도 고통과 실패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슬픔과 고통은 행복과 함께한다. 해결해나가야 할 과제들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달리기를 통해 온몸으로 극한의 고통 속에서 터져 나오는 기도를 배웠다. 고통과 실패의 아픔 속 기도는 본능이고 아우성이다. 그냥 살아가야 한다. ‘keep going’을 말이 아닌 몸으로 배웠다. 그냥 몸으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 실패도 성공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냥 아름다운 마음으로 가득하다. 아픔을 승화하면서 내면이 강해질 수 있다고 귀한 형님이 말씀하시더라. 나는 무엇에 대해 견디고 있는가 허둥지둥하지 않으면서 그 고초를 당하면서 살아낼 수 있는가. 자기 삶, 곧 자기 몸으로 체득한 것은 자기 몸에 각인이 된단다.
무척이나 뜨거웠던 2023년 8월 어느 한낮에 드디어 영도 해양박물관 앞 바닷가에서 철인 3종 스프린트 코스를 달렸다. 750미터 헤엄치고, 20킬로미터 사이클 페달을 밟고 딱 5킬로미터를 가슴에 얼음을 부어가며 달렸다. 폭염이 절정에 다다른 때였다. 더운 줄 모르고 달렸다. 함께한 친구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나이 오십을 넘긴 내가 이런 운동을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때, 나는 달리기를 할 때마다 끝에서 1등, 2등을 했다. 왜 빠르게 뛰어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리고 2주 후 50킬로미터 울트라 마라톤을 친구들의 도움으로 달렸다. 세 명이 함께 뛰었다. 같이 뛰기로 했던 혼살이 친구가 사람들을 따라 과한 페이스로 달리면서 돌발 상황이 일어났다. 페이스를 유지하지 않으면 완주할 수 없다. 답사하면서 당부했고, 경기 전에도 신신당부를 했건만 사전 연습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뛰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라도 나면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25킬로미터는 걸을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날 나의 손목시계는 총 65킬로미터를 이동했다고 알려주었다. 물론 완주는 했지만. 실패와 함께한 달리기였다.
실패와 성공, 그 환상과 아집을 놓으면 지금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축복을 누리고 마을 사람들과 운동하며 국밥 한 그릇 먹는 밥상 나눔을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일이다. 예쁜 것이 아름다운 게 아니다. 외세의 논리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의로운 분노는 자기 마음의 평화로부터 시작된다. 복수심으론 안 된다. 나 자신의 평화를 만들고 그 소망을 살아내야 한다. 소망하는 바를 가면 된다. 내가 잘 가면 돌아온다. 그래서 실패는 인내의 필수 아미노산이다.
지난 10월 아버지를 하늘로 보내드렸다. 마지막 인사를 잘 드렸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시고 잘 가세요. 어머니 잘 챙기고 집안일 잘 정리할 테니 나중에 천국에서 만납시다.” 작지만 또렷하게 전하니 중환자실 간호사님들이 여러 생각이 드는 모양인지 말없이 쳐다보신다. 나중에 어머니께 다시 말씀드렸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물려준 재산은 없어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착하게 우리를 잘 키워주셨으니 괜찮아요. 정말 괜찮으니 이제 하나님 앞에서 그저 꿋꿋하게 살아갑시다.” 실패한 듯한 나의 아버지는 그래도 우리를 키우셨고 손자들을 돌보셨다. 많고 많은 아버지가 하늘에서 우리들을 잘 보고 도와주실 것이다.
같이할 수 있는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5월에는 울릉도로 짧은 연수를 다녀왔다. 울릉도로 가는 갑판 위에서, 깊은 밤, 새벽 2시 홀로 생각에 잠겼다. 고민을 거듭하는 상황이었다. 캄캄한 바다 위를 바라보다 잠시 죽음을 생각했다. 고통과 실패 속에서 결단과 선택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른 새벽 어느 형을 만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 같다. 권투와 합기도를 즐기는 운동 마니아였는데, 목사였다. 목사 같지 않은, 그냥 형 같았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희망이란 단어도 소망이란 표현도 없었다. 그분을 느끼고 3박 4일 동안 행복을 받고 왔다.
한 청년을 소개하고 싶다. 10대 때부터 인생의 실패를 느꼈던 30대 청년이다. 그 아픔과 고통을 책으로 써서 작가가 되었고,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을 돕는 상담 활동가로 살고 있다. 그 청년이 사는 마을 사람들 속에 나도 끼어 청년분과 매주 만나 모임을 이어가며, 실패 그리고 성공의 굴레를 떨쳐내고 있다. 이 청년분은 귀한 의사 선생님을 만나 매일 1만 보를 뛰며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깡말라 보이는 이 청년이 얼마 전 마을의 아빠들과 10킬로미터 단축 마라톤 대회에 함께했는데 무려 51분대 기록으로 완주했다. 우리 중에 가장 빨랐다. 실패를 직면한 사람들과 더불어 만나 부대끼며 살아가니 실패가 두렵지 않았다.
2024년에는 모든 마을 사람과 함께 달리길 소망한다. 온 동네 사람들과 아이들과 함께 천천히 달리고 싶다. 마을 학교 아이들과 바다 수영을 해보기를, 엄마 같은 바다 품에 안겨보기를 소망한다. 실패와 실패를 거듭하지만, 함께 더불어 사는 친구들과 철인 3종 스프린트 코스를 이어가고자 한다. 실패하다가 자포자기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다시 하면 된다고, 그냥 하면 된다고, ‘keep going’ 하자고 꾸준히 다가가는 친구가 되고 싶다. 단, 같이 갈 때만 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같이 걸어가자. 주어진 그 길. 힘들어도 같이 걸어가고 어깨를 내어주고 밥상을 같이 나누며 같이 가자. 그러면 실패해도 행복하고 아름답다. 같이할 수 있는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첫댓글 실패는 생명을 일구는 삶의 실마리다..
함께 천천히 달려보는 2024년이 되어보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