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우(蘭嵎) 주태사(朱太史.주지번)가 《부부고(覆瓿藁)》라는 4부(四部.즉 詩,賦,文,說)로 된 책 1질을 가지고 와서 나와 다음과 같은 말들이 오갔었다.
[註:주지번은 서화에 능했던 명나라 관리였는데 1606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원접사 유근(柳根)의 종사관이었던 허균(許筠)과 만나 문학적 교류가 이뤄졌다. 부부(覆瓿)는 장독 뚜껑을 덮는다는 뜻으로 자기 저서를 겸손하게 일컫는 말이다]
“내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조선에 가서 그 나라의 많은 관신사(冠紳士)들과 추종했습니다. 그 중에서 허씨(許氏) 집안이 그 장점을 독차지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 계장원(季壯元)의 문집입니다. 그의 문(文)은 우여완량(紆餘婉亮)하여 감주(弇州. 명나라 문인 왕세정)의 만년의 작품과 같고, 그의 시는 창달섬려(鬯達贍麗)하여 화천(華泉. 명나라 문인 변공)의 청치(淸致)가 있으므로, 나는 그윽이 기뻐하여 그 전집(全集)을 구했던바, 금년에 비로소 1질을 서울에서 보내와 저리(邸吏)가 전달한 것입니다. 이와 함께 매우 진지한 편지를 보내왔는데 내용은 ‘해내(海內) 대방가(大方家)의 한마디 말을 빌려 책머리를 빛나게 해달라.’는 청이였습니다. 노사(老師)가 비록 구학(丘壑)에 물러나 있지만 예림(藝林)을 주맹(主盟)할 분은 공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한 말씀 포장하는 글을 써서 먼 곳 사람의 정성을 위로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방금 해내(海內)의 문사(文事)를 맡고 있는 이들이 어깨를 견주고 서서 모두 서경(西京)에 적치(赤幟)를 꽂고 개천(開天)에 포고(枹鼓)를 쥘 만한데도, 유독 가선(家膳)을 싫증내고 야목(野鶩)을 즐기며(자기 것을 싫어하고 남의 것을 좋아하는 것) 소월(疏越)을 배척하고 금매(禁沬)를 탐내려 드니, 그 소견이 역시 어긋난 게 아니겠소.”
“아니지요. 이는 황가(皇家) 대일통(大一統)의 거룩함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름답고도 밝은 교화가 전역에 넘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구역 밖에까지 파급된 것입니다. 조선은 기자(箕子)의 봉지(封地)이므로 유독 먼저 그 교화를 입었고 허문(許門)은 태악(太嶽)의 후예인 까닭에 으뜸으로 그 예림(藝林)을 독차지해서 그의 형과 누이의 문장도 이와 함께 범범(渢渢)한 대아(大雅)가 된 게 아니겠소. 이 문집은 비록 칠자(七子.명나라 때 시문으로 명성을 떨친 7명의 才子)의 사이에 두어도 종양(宗梁.칠자중 두사람 이름)의 열에야 끼지 않겠소. 이는 진실로 조모(朝暮)에 만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요.”
나는 태사의 재주 있는 사람을 아끼는 마음을 아름답게 여기는 동시에, 황풍(皇風)이 멀리 창달한 것을 우러르며 업(業)을 마치기로 하였다.
아, 인재가 나는 것은 비록 지기(地氣)의 작용이라 하지만, 어찌 운(運)에 응하지 않고 일어나는 일이 있었던가. 삼한(三韓)은 성주(成周)로부터 중국과 상통하였으나 문헌이 너무도 드러난 것이 없다. 수당(隋唐) 시대로 접어들어 작자로서 이를테면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우중문(于仲文)에게 보낸 규계(規戒.오언시)라든가 신라(新羅) 왕이 비단에 짜서 공덕을 칭송한 따위가 비록 간책(簡冊)에 실려 있으나 대개는 모두 적막하여 하승(下乘)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이 사람의 작품이 유독 홍진(鴻縝)에 노닐어 아려(雅麗)하게 울려서 중원의 제자(諸子)들과 더불어 고건(櫜鞬)을 이어받을 만하다 하겠다. 다만 종신ㆍ양유예 두 사람에게 견주는 것은 조금 지나친 추앙인 듯하나 태사(太史)의 밝은 안목을 어찌 다 가릴 수 있으랴.
수천 년 이래에 홀로 이 작가를 얻었는데 이 시기가 마침 소대(昭代)를 만났으니 운에 응해 일어나는 것은 지기(地氣)로서 막을 바가 못 됨을 이 한 가지로 보아 알 수 있다. 종백공(宗伯公)이 되풀이해서 칭송하기를 마지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초에 부부(覆瓿)의 뜻으로 명명한 것은 지나친 겸손에서 나온 듯하나 끝내 부부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 책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다. 그렇다면 《법언(法言)》과《현경(玄經)》이 빨리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은 태사의 덕이거니와 그것이 낮아져서 내가 군산(君山)이 될 경우라면 또한 욕되게 함이 아니겠는가.
이는 이적(夷狄)으로서 중국에 나아간 것에 불과하니 중국으로 여길 뿐이다. 그러나 내가 좋다고 아무리 춤을 추어도 우맹(優孟)이 손뼉을 치며 손숙오(孫叔敖)를 시늉하는 격이니, 공은 아마도 골계(滑稽)라 조롱하지 않겠는가(여기서는 이정기 자신이 환담이 양웅의 글을 칭찬한 것처럼 허균의 글이 후세에 전해지리라고 평하면 허균에게 도리어 욕이 되리라는 말로 자기를 낮춰서 말한 것). 이로써 서(序)를 삼는다.
계축년(1613, 광해5) 계춘(季春) 하사일(下巳日)에 진강(晉江) 이정기 이장보(李廷機爾張父.이장은 字)는 쓴다.
첫댓글 성소부부고는 교산(許筠)의 저술인데, 교산은 진주사(陳奏使)였을 때에 알게 된 주지번(朱之蕃)을 통하여 明의 이정기(李廷機)에게 성소부부고 서문[惺所覆瓿藁序]을 부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