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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원류(조종운1607-1683지음)에 보이는 죽산안씨 기록에는 先系가 이어지지 않는 안범(安範) 계열(전라도 보성지역 거주, 우산 안방준의 고조)이 있었다. '보성안씨'라고도 불리던 이 갈래가 선계를 찾으려고 온갖 노력하다가 벌어지는 사건. 안방준(安邦俊) 후손들이 선계를 죽산안씨 안원형(安元衡) 계열로 연결시키고, 다시 선계를 죽산안씨 안전(安戩)으로 연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방준의 행장 기록대로 죽산안씨 안전(安戩)으로 연결했어야 함에도, 엉뚱하게도 순흥안씨 안향(문성공 安珦)의 후손으로 연결하려다가 벌어지는 황당한 사건. 저들의 선조 죽산안씨 우산 안방준을 순흥안씨로 만드는 '환부역조'까지 마다 않고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희대미문(稀代未聞)의 사건. 前代未聞의 煥父易祖(환부역조)사건. |
정신없는 늙은이들, 죽은 딸네 집에 또 갔다.
- 순흥안씨대감(順興安氏大監)유감(遺憾)
(上)
글 사진 | 順興人 오원 安在弘
'족보는 세도(世道)에 관계가 있으니, 어찌 한 집안의 역사로만 볼 수 있겠는가.'
譜族之有關世道。豈直以一家史視之哉。
보족지유관세도. 기직이일가사시지재.
라고,
순흥안씨 족보 병자(1936년)보 서문에
안병호(安秉鎬)공은 후세(後世)에게 교훈을 주는 글을 적었다.
그리고,
'또 세태가 점점 나빠져 속임수가 날로 불어나고 있으니,
郭崇韜(곽숭도)가 汾陽王(분양왕)의 묘에 통곡함과 杜正倫(두정륜)이 城南(성남)의 집안이라고
무릅씀은 이미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하여 괴상한 것을 날조하고 공연한 것을
穿鑿(천착)하여 선대의 아름다운 자취를 속이는 바, 자인(慈仁)과 忠州(충주)에서 하듯이 하는
자들이 없지 않다. 만일 일찍 이것을 대조하여 깨뜨리지 아니하고, 혹 잘못된 것을 그대로
인습한다면 漁目(어목)이 혼동하기 쉽고, 장차 도끼자루를 찾게 될 것이니,
실로 두려워 할 일이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적어,
무오(1918년)보에
'죽산안씨 안원형파와 탐진안씨 안원린파를 순흥안씨 갈래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다시는 저지르지 말라'고 경계하는 글을 실었었다.
함부로 '족보에 넣게 되면 그 잘못된 기록을 빼기는 매우 어려워지리라'고
훈계하는 글을 남겼었다.
그러나
순흥안씨 족보 경신보(1980년)에
죽산안씨 안원형파와 탐진안씨 안원린파를 입보(入譜)시킨 것은
'두고두고' 순흥안씨 문중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족숙(族叔) 병호 公의 훈계를 귀담아 듣지 않고
족질(族姪) 균섭 公은 또 다시 실수를 거듭한 것이었다.
순흥안씨 문중의 일일 뿐 아니라,
한국의 안씨 역사를 통채로 왜곡하는 중대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역사란
' 그 시대를 살고간 사람의 흔적을 적은 기록'일 것이다.
삶의 흔적을 그대로 적어야 바른 역사가 되는 것이다.
순흥안씨 족보 경신(庚申 1980년)보가 간행된 다음,
모두 다 기록할 수 없는 문서들에 족보 기록이 인용되었고,
허위(虛僞거짓)기록이 유포(流布)되어
그 병폐(病弊)가 말로 다 할 수 없이 부풀려져 퍼져나갔다.
경신보 간행 때에
죽산 탐진 안씨들의 입보를 끝까지 반대하던 '올곧은 인사들'은
순흥안씨 종사(宗事)에 진저리를 치고, 다시는 종사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고.
죽산안씨와 탐진안씨들은 날개를 달고 설쳐대며
'족사 날조왜곡'을 계속하였고,
순흥안씨 문중의 '정신없는 늙은이'들은
죽산안씨를 '큰집'이라고 모시는 '치매' 현상까지 나타나고,
탐진안씨 유령인물 안원린을 조상으로 섬기는
'얼빠진 늙은이'까지 생겨났다.
아, 어찌 순흥안씨 족사가 이렇게 문란하게 되었는가.
아!
어찌 대명천지 21세기에 들어서서, 또 다시 부끄러운
순흥안씨 족사 변조 사건이 벌어졌는가!
<순흥안씨대감 사진 넣기>
단기 4335년, 서기 2012년,
순흥안씨 대종회 이름으로 '순흥안씨대감'이 간행되었다.
돌이켜 보면,
순흥안씨 족보 경신보 간행 후, 경신보 기록을 바탕으로
많은 족보관련 서적이 출판되었고, 왜곡된 기록이 전재되어
백성을 혼란하게 만들었었다.
그 '잘못된 출판물의 폐해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순흥안씨대종회 이름으로 '순흥안씨대감'을 간행한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순흥안씨1파 사무국에 있을 때부터 시작된 기획물이었다.
순흥안씨 서파공파 '안정(지금은 안동대 연구원)' 종원이
5 년여에 걸쳐 자료를 수집하였고,
필자에게 거들 것을 요청하여 몇 차례 편집에 간여했으나,
도저히 책이 될 것같지 않아 그만 두기도 하였었다.
대종회 회장에게
'이 자료만으로는 도저히 책이 될 수 없으니, 모든 원고를
새로 써야 하고 순흥안씨 기록만으로 편집하여 출판해야 합니다'
라고 건의했었다.
그리하여 어언 5 년여에 걸쳐
적지 않은 자금이 들어간 자료들은 그저 '참고자료'가 되었을 뿐이고,
새로운 원고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 일은 새로운 편집위원으로 위촉된
안용환(명지대 연구교수/순흥안씨1파, 판관공파),
안재철(단국대 한문학과 교수/1파, 찬성공파)박사,
안승준(한국학중앙연구원/2파)박사,
안병하(오산대 겸임교수/3파 총무)이사 등 넷이었다.
필자는 수 차례에 걸쳐
편집과정의 오류를 지적하였고 받아 들여진 것도 있다.
그러나 죽산안씨 안원형파와 탐진안씨 안원린파의 기록은
끝내 경신보 기록대로 실리게 되었다.
그 와중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안승준 박사(순흥안씨2파)는
원고 집필은 물론하고 감수위원도 사퇴하기에 이르렀고
'학자적 양심'을 지켰다.
(죽산안씨와 탐진안씨 기록은 '별록으로 기록하자'라고까지 양보한 것으로 알려진다.)
나머지 편집 작업은 세 교수가 나누어 담당하여 책이 엮어졌다.
순흥안씨 선조들이 그토록 경계하던 '농서이씨설'과 '전의록'도
'믿을 만한 기록'으로 기문(奇聞)둔갑(遁甲)하여 실렸다.
'탐진안씨 안환'이라는 者가 날조한 '안씨분봉총록'이
그대로 책에 반영(反映)되어 정사(正史)가 되려고 날뛴다.
죽산안씨 안원형과 탐진안씨 유령 안원린은
순흥안씨 안목의 아들로 버젓이 실려있다.
편집작업을 한 세 교수의 '학자적 양심'에 묻고 싶다.
"농서이씨동래설이 사실인가? 거짓인가!"
"안목의 아들이 하나인가? 셋이 분명한가?기록을 찾았는가?"
"죽산안씨(안원형파)와 탐진안씨(안원린파)가 순흥안씨에서 분파되었는가?"
참맘으로 묻고 싶다. '학자적 양심'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를.
그 후,
죽산안씨 안원형파(안종채)의 요구로 책이 두 권으로 편집되었고
下 권에 온갖 거짓기록이 담겨지게 되었다.
우산 안방준의 악령이 구천을 떠돌다 다시 돌아왔는가.
참고자료로만 쓰려던 기록들,
곧 근세에 지어진 거짓기록이 조선 초의 기록과 분별없이 섞여지고,
본관이 다른 세 안씨가 뒤엉켜서 진흙탕을 허우적거리는
'꼴이 꼴같지 않은' 기록들이 종이책 속에서 범벅이 되어 뒹굴고 있다.
우산 안방준이 남긴 거짓기록이
'날로 침소봉대(針小棒大)되어' 上 권과 下 권에 실렸고,
검은 글자로 흰 종이에 박혀서 볼수록 눈알을 어지럽히고 있다.
2 년여의 우여곡절 끝에,
순흥안씨대감은 출판되었고 현재 배포되고 있다.
순흥안씨 기록과
죽산안씨 안원형파와 탐진안씨 안원린파의 기록이 뒤섞이어
탑골공원 공중변소의 '똥덩어리'같은 '대감'으로 태어났다.
(내용은 그동안 개인이 만든 순흥안씨 관련 책자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죽산안씨 안원형,
아들 안면, 아들 안노생, 아들 안복초도 순흥안씨가 되었고,
보성안씨 우산 안방준도 순흥안씨로 '환부역조'를 이루었다.
탐진안씨 유령 안원린,
아버지 안원린보다 먼저 태어나는 기적을 선보인 안우 장군,
아들이 없었던 '안지'는 죽은 뒤에 아들이 '수두룩' 달렸다.
영광안씨 안도는 아버지(유령인물 안원린)가 생겼고
50년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형(안우)을 두게 되었다.
탐진안씨 독립투사 백산 안희제도 순흥안씨,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장관이자 모윤숙 시인의 첫 남편인
탐진안씨 안호상 박사도 순흥안씨가 되었다.
죽산안씨 안원형파와 탐진안씨 안원린파의
희대미문의 환부역조 사건은 순흥안씨대감 책 속에서
멋적은 웃음을 짓고 있다. 히죽거리고 있다.
역사란,
의문은 전해도 되지만 / 疑固可傳(의고가전)
그릇된 것을 전해서는 안 된다 / 訛不可傳也(와불가전야)
라고 했다.
아,
정신없는 늙은이들이 죽은 딸네 집에 또 갔다.
어쩔거나! 아, 이 일을 우찌 할 거나?
안가여, 순흥안가여!
순흥안씨 족사는 왜 이리 어지럽게 반복되는가?
<사진넣기>
출판사는 순흥안씨2파 종원이 운영하는 박영사,
책값은 17 만원이라는 적지않은 금액.
대한나라의 순흥안씨들이여!
부디 '마니많이' 사서 꼼꼼히 읽어보시구려!
맹자(孟子) 가라사대(曰)
盡信書 不如無書
진 신 서 불 여 무 서
(책에 있다고 다 믿으면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
라
고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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譜族之有關世道。豈直以一家史視之哉。
보족지유관세도. 기직이일가사시지재.
'족보는 세도(世道)에 관계가 있으니, 어찌 한 집안의 역사로만 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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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둥이님 고맙읍니다. 내가 책을 구입하여 자세히 한번 읽어 보겠읍니다.
부끄럽읍니다, 나도 지금까지 모를고 지내온 글을 올려주셔서 알았읍니다.
죽산 안씨가 엣조상의 위 할아버지라고 알고 있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립니까?
누가 술먹자고 부르네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몸둘바를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