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사람과 하는 사람(단1:8-9)
2024.4.28 김상수목사(안흥교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과 그것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선한 목표, 꿈과 비전, 선한 일, 금메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 등……. “할 수 있는 사람”이란 자격이나 능력을 뜻하지만, “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실제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력이나 추진력 또는 믿음의 결단 등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단지 “할 수 있는 사람”에서만 머물지 말고, 실제로 “하는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기대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격이나 가능성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면서 시작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수많은 사례들 중에 몇 가지를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공부를 잘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서, 실제 노력하는 사람으로!
많든 재물과 재능을 가진 사람에서, 베푸는 사람으로!
살을 빼면 좋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서, 실제로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매번 결심만 하는 사람에서, 행동하는 사람으로!
중보기도와 묵상, 전도 등의 유익을 아는 사람에서, 실제로 행하는 사람으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면 좋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서, 실제로 다니는 사람으로!
왜 사람들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또는 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갈까? 물론 영적으로 마귀 사탄의 미혹도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심리적으로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막연한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돈 걱정 - “당장 뭐먹고 살지?”, 체면걱정, 지식걱정, 건강걱정, 나이걱정, 외모걱정, 각종 걱정 등). 그래서 언뜻 보면 고통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미 두려움에게 고통을 당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은혜 받았습니다”, “도전 받았습니다”라는 말은 자주 하면서도, 실제로는 “도전하지 않는(또는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주저하면서 지체하는 동안 시간의 속도는 우사인 볼트(Usain Bolt)보다 더 빠르게 우리를 앞질러 간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들과는 달리 실제로 해보면 별 것 아닌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처음부터 겁먹지 말자. 막상 가보면 아무것도 아닌 게 세상에는 많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누구나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살 수 있는 자격과 힘을 이미 갖고 있다(빌4;13). 그러나 누구나 그러한 삶을 누리며 살지는 않다는 것 같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 우리(나)는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일 뿐인가, 아니면 “하고 있는 사람”인가? 언제나 그랬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사람”에서, “하는 사람”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인생의 도약에서 신앙성장에서나 다 마찬가지다. 물론 이런 모습이 늘 쉬운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이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나 자신의 신념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용기”이다. 이렇게 될 수 있도록 강한 믿음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본 설교자도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앞으로 어떻게 등록금을 내고, 어떻게 먹고살지? 나는 가진 것도 없고, 뒷배경도 없는데 어떡하지?”라고 걱정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과감하게 주님을 위해서 결단을 내리고, 실행한 이후로 지금까지 하나님은 매번 나보다 앞서서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다만 우리에게는 믿음의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니엘(Daniel)은 왕이 내린 음식이나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뜻을 세웠다.
“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9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단1:9)”(단 1:8-9)
구약시대에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후에 총리에 자리에까지 이르고, 노년에는 포로에서 해방되는 일에 배후에서 결정적인 정치적인 역할을 했던 믿음의 사람이다. 다니엘이 왕이 내린 진미를 거부한 이유는, 그 당시에 왕이 내린 음식은 바벨론의 우상 앞에서 바쳐졌던 제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곧 그 음식을 먹는 사람도 그 우상을 섬긴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렇기에 다니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무슨 음식인지 모르고 먹었다면 모를까, 그 의미를 알면서도 먹는 것은 신앙의 양심상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니엘은 그것들을 거부하고, 채식과 물만 먹겠다고 뜻을 정했다(8절). 그런데 이유야 어쨌든 포로의 신분이면서 왕이 내린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두려움에 맞서기로 결심한 순간 두려움은 증발한다(앤드류 매튜스)”라는 말이 있듯이, 다니엘이 뜻을 정한 순간 더 이상 그에게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담대하게 자신의 뜻을 환관장에게 말했다(8절). 이것은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그야말로 ‘간이 배 밖에 나온 것’과 같은 무모한 행동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결심이 행동이 되는 순간에 하나님은 그의 일생을 바꾸셨다. 본문 9절 말씀을 잘 보라. 누가 환관장의 마음을 움직이셨는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환관장의 마음을 움직여서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다. 이 부분이 뜻을 정한 것보다 더 극적인 인생의 변곡점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얼굴이 더 윤택했고, 바벨론의 왕 앞에서 시험을 볼 때는 그 지혜가 바벨론의 모든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는 뛰어나게 하셨고(단1:10-20), 마침내 총리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셨다. 다니엘은 단지 “할 수 있는 사람”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이 과정에서 강력한 믿음의 용기가 작용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처럼 실제로 “하는 사람”을 통해서 당시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18세기 영국은 유럽 최대의 노예무역국이었다. 영국인들 중에는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서 신대륙 등에 팔던 사람들이 많았다. 이 일에 사용된 배들을 노예선이라고 한다. 그 당시의 그림이나 기록들을 보면, 흑인노예들은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았다. 그들은 짐승이나 물건과 같았을 뿐이다. 그들의 죽음은 단지 "그것(it)의 죽음“에 지나지 않았다.
“노예선”(윌리엄 터너 작품, 1783년)이라는 그림에 보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노예선의 승무원들이 배에 선적한 노예들을 산채로 바다에 던져 버리고 있다. 그래야 분실된 화물로 인정을 받아서 더 많은 보험금을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 영국 하원에 윌리엄 윌버포스(W. Wilberforce, 1759-1833)라는 의원이 있었다. 그는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오늘날까지 “영국의 양심”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그는 흑인노예들의 처참한 상황을 듣고,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노예법을 폐지하는데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런 신앙적인 뜻을 정치권에서 법으로 정하는 것에는 엄청난 저항과 고통이 따랐다. 그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그를 견제하고 노예제도폐지를 반대했다. 그 당시 노예무역은 영국 경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하나님이 윌버포스에게 만나게 해주신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존 뉴턴(John Newton)이다. 존 뉴턴은 전직 노예선 선장 출신으로 철저하게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면서, 목회자가 된 인물이다.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305장)도 그가 회개하면서 지은 곡이다. 존 뉴턴의 경험과 신앙적인 조언은 윌버포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의 결단과 행동으로 마침내 1834년에 영국 의회에서 노예제도 폐지 법안이 가결되었다. 이들의 행동하는 믿음으로 인해서 영국은 프랑스의 피의 혁명이나 미국의 남북전쟁 같은 고통을 겪지 않고도, 노예법을 폐지시킬 수 있었다. 이들이 이러한 과정을 그린 영화가 [어메이징 그레이스](2008년 한국개봉)이다.
**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 리뷰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KROm-mtuQfU&t=2s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부요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자격이나 능력을 이미 갖춘 사람들이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성령님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실제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얼마 전에 우리교회에서 봄 소풍으로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과 남산을 다녀왔다. 그곳에 묻힌 선교사님들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나 능력을 갖춘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실제로 결단을 내리고 행동으로 실천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한국 땅에 놀라운 일을 하셨다.
아마 어떤 사람은 “시간이 없어서”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고민만 반복하면서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월을 아껴야 한다(엡 5:16). 적당한 생각은 지혜를 주지만, 과도한 생각한 자신을 겁쟁이로 만들 뿐이다. 그것은 생각이 아니라, 잡념에 불과하다. 그래서 발명왕 에디슨도 이런 말을 했다.
“변명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고 못난 변명은 ‘시간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믿음으로 행동한 만큼 우리의 삶은 변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다니엘이나 윌리엄 윌버포스와 존 뉴턴 또는 이 땅에 묻힌 선교사님들처럼 말이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과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다. 우리도 얼마든지 믿음의 용기를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실천해야할 일이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에 실천하겠다는 뜻을 정하자. 그리고 믿음의 용기를 갖고 그것을 시작하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나에게 좋은 것이고, 예배드리고 교회 다니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지체하지 말고 지금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만약 언젠가는 여러 가지 주님이 기뻐하는 선한 일들을 하겠다는 뜻을 갖고 있다면, 지금 하라. 이렇게 시작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건강 재정, 환경을 변화시키시고, 적절한 사람도 붙여주시고, 성령의 은사들도 선물로 주신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