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12월은,
챙겨야 할 것도 많고 정리할 일들도 숙제처럼
남는다.
2016년,
수고 하셨고 고생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사건들을 열거하지 않아도 다사다난
했던 한해였지요.
나에 있어 올 한해는,
매우 의미 있고 뜻 깊은 날들이었다.
우선,
새해 1월에 열린 ‘아마바둑 사랑회’ 신년회에서,
수년 간 글을 끄적거려 카페에 올렸더니만, A7
홍시범 대표님이 원고지 들이는 것이 딱해 보였
는지, 감사패에 곁들여 소정의 식사 값까지 챙겨
준 일이다.
필자와 홍시범 감독님.
그리고 6월에,
53년 만에 고향(충남 아산)땅을 다녀와서 ‘내 고향 단쟁이’라는 글을
15매 원고지에 꾹꾹 눌러 써서 여러 바둑카페에 올린 바 있는데, 나고
자란 땅이 같은 맹주상 시인님이 순천향 대학 ‘아산학연구소’에서 발행
하는〈아산 시대〉에 내 졸작을 추천하여 실리게 되었다.
〈아산 시대〉에 실린 필자 원고
그 덕에 24만원의 원고료가 나와 의미 있게 썼지만.
좋은 것이 있으면 우울한 소식도 있게 마련인지라, 1975년 낮에 일해
번 돈으로 야간 검정고시를 같이 공부했던 40년지기 친구 하나가 세상
을 떠났다.
그 어렵던 시절 동고동락했던 사회 친우인데 하늘나라에서는 부디
아프지 말거레이.
그 무덥던 8월,
전남 강진 ‘국수산맥’에 참석했다가 마지막 날 이세돌 9단의 고향 신안
비금도를 찾은 일은 추억에 남을 것이다.
한국기원 윤광선 대리와 ‘하트 해변’을 멀리 두고 기념 한 컷 남긴 것은,
가슴 시리도록 두고두고 한 켠에 저장되리라.
'하트 해변'을 뒤에 두고 한국기원 윤광선 대리와 한 컷.
국화꽃 향기 퍼지던 가을 날,
내 고향(충남 아산)에서 ‘전국 체육대회’가 열렸는데,원년으로 치러진
‘바둑 경기’ 가 하필이면 나 태어난 곳이어서 무척 기쁜일이 되고
말았다.
일요신문 유경춘 기자님이 바둑경기장에서 찍어준 사진. 큰사위, 큰 딸과 함께.
그도 그럴 것이,
53년 만에 찾았던 고향을 채 1년이 되기도 전에 두 번째로 내려가는
빌미가 된 것은,큰 사위는 전남 바둑대표 코치로,큰 딸은 광주직할시
페어바둑 선수로 출전한 힘이 컸지만, 이참에 내 작품을 추천해 준
맹주상 시인님 부부를 만나 온양 온천역 건너 음식점에서 생선회로
융숭한 대접을 받은 일은 축복 받을 일이고도 남았다.
참, 오늘은 성탄절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제
맹 주 상
동짓달
밤이라야지
센 눈보라가
어둠속 길을 치는
동짓달
밤이라야지
성탄제가
열리고
곤히 잠이 든
어린 것 머리맡에선
붉은 합성지로 짠
새 목도리가
꽃뱀처럼
서리고 앉아 있었다.
온양온천역 뒤에 있는 맹주상 시인의 〈강촌〉앞에서 시인과 한 컷.
내 바둑지도 30년 생활에 방점을 찍은 것은,시흥시 최초 바둑교육 학교
특색사업으로 ‘시화초 원년 지도사범(월,수,금)’으로 나가게 된 일이다.
특기적성 방과후 바둑강사로 15년(1998년6월 ~2013년2월) 경력을 갖고 있
긴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초 중심의 초급실력을 다루는 것이고,
선수반을 책임지고 지도하기란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원년인 첫 해,
3월~ 11월까지 지도한 성과를 시험 삼을 일이 드디어 찾아온 것은, 때마침
‘제1회 시흥시 바둑협회장배 바둑대회’ 공문이 학교로 날아들었기 때문.
제자들을 수많은 바둑대회에 참가하여 입상을 많이 시켜본 필자라지만,
수능시험을 보내는 부모처럼 다소 긴장되기는 마찬가지.
열심히 지도한 성적은 1학년부 준우승, 2학년부 우승, 준우승.
바둑대회 나가 우승, 준우승(2명), 장려상 받은 아동을 학교 선수반에서 지도하는 필자
‘진인사 대천명’ 이라 했거늘, 최선을 다한 자에게 하늘은 그냥 지나 치진 않는
모양이었다.
장려상도 여러 명이었으니 첫해 수확치고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성적.
그 입상 현수막이 일주일 동안 학교 교문에 자랑스럽게 걸렸는데, 지도한 필자
의 뿌듯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제자들의 저 어린 날의 추억은 길고도 후하게
가슴에 새겨지리라.
「남을 가르칠 때는 선으로 가르치되
너무 높은 이상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그가 쉽게 따를 수 있어야 한다.」
필자가 누구를 가르칠 때, 늘 마음에 새기는 마음가짐이다.
첫댓글 아주 훌륭합니다.
감사 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