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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0. 주일설교말씀. 본문:빌립보서4:4~9절
제목 : 평강의 하나님
할렐루야! 오늘도 귀한 말씀으로 은혜 받기 위하여 새생명교회를 방문하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지금 이 시기, 이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줄 믿습니다. 아멘!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 앞서 4:1절에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권면하면서 시작합니다. 이어서 4장4절에서는 기뻐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세상이 말하는 기쁨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계획하고 원하는 일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얻는 기쁨이 아니라 또한 .육신의 질병이 고침을 받고 난 뒤에 얻는 기쁨이 아니라.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얻어, 행복한 가정을 얻었기 때문에 얻는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고난 중에 얻는 기쁨이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얻는 기쁨이다. 야고보서 1장 2절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신 것을 볼 때 시험과 환난과 어려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는 평탄한 길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닥치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되는 일들을 방해하는 요인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이러한 일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기쁘게 여겨야 하며,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같은 마음을 품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가운데 많은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일어날 때마다 이러한 상황들을 통하여 좋은 것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고 기쁘게 여기면서 찬양하며 나아가는 그래서, 자신에게 닥치는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 기쁨을 찾고 그리 할수록 더욱더 주님만을 의지하며 진정한 기쁨을 누리며 행복해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하박국 3:17-19)." 찬양하며 살아갑시다.
환난 중에 즐거워 하는 이유는 그 환난이 마침내 소망을 이루어 가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_ 로마서 5:3-4절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얻는 기쁨이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해야 하는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육적인 문제 해결에서 찾는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을 찾기보다 염려와 걱정이 더 쌓이게 될 것이다. 기쁨이 사라지게 되며, 예수 믿는 즐거움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온갖 고난과 환난 속에서 그 고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소망 때문에 기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즉 나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얻는 기쁨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얻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 가운데 얻는 기쁨이다라는 것입니다.
2.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어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주 안에서 기뻐할 때 공동체 안에서 기쁨은 전염되고 '모든 사람'에게 '관용'으로 전달된다. 내 맘에 기쁨이 없으면 관용을 베풀기가 쉽지 않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인과 교회 밖의 사람들을 포함한다. '관용'(에피에이케스)은 '자신의 법적인 또는 관습적인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행동'을 의미한다. 주 안에서 종말론적인 회복의 기쁨을 경험하는 공동체는 기쁨과 관용의 태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파하는 선교적 공동체가 된다.
빌립보 교인들이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기' 때문이다(5절).
이것은 예수의 재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바울의 이 권면은 2:15-16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기쁨과 관용으로 세상에 나가 생명의 말씀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빌립보 교인들은 세상의 별과 같이 빛날 것이며, 그리스도의 날에 바울은 그들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럼 관용이란 무엇일까요?
문자적으로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자신의 우위성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의미하며 부드러움, 인내, 타당성, '용서할 준비가 된'을 뜻함 '넓은 마음으로 남을 품는 것'이란 의미
마샬(Marshall)은 '남의 잘못에 대해 너그럽고 그들의 결점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인자한 태도'라고 정의하였다. 관용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적 아량이며, 이러한 태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더불어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소망에서 생겨난다.
관용을 베푸는 방법에 있어서는?
차별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라는 것이며, 또한 이에 따르는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라는 질문과 함께 또한 목적에 있어서는 ; 빌립보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하여, 주께서 가깝기 때문이다. 주님의 재림의 때가 가깝기 때문이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죄악들을 드러내 공의로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스스로 조급해 하지 말고 타인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충성된 자들에게 상을 주시며 행악자들에게 벌을 주시고 모든 만물을 회복하시기 위해 속히 오실 것이기 때문에 아들도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키울 수 없으며, 그렇다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바꾸어서도 더욱 안되며, 맞춰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래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교인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에 드는 교인이 어디에 있는가. 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교인을 찾을 수 없다. 그렇게 양육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바꾸어도 안 된다. 관용을 베풀면서 안고 살아가야 한다.
교회 공동체의 구원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관용의 방법에 있어서는?
관용이란 남의 잘못에 대해 너그럽고 그들의 결점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인자한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관용을 자신의 마음에 따라 대상자를 선정한다면 관용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어떠한 이유 때문에 관용을 베풀지 못한다면 그것은 관용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하면서 관용은 차별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야 한다.
3.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 공동체가 이러한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 피해야 할 것은 '염려'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현재 명령형이므로 지속되는 행위를 가리킨다.
'염려하는 것을 멈추기를 계속 해라, 막아내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투옥된 상태에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이 흘러넘쳤다.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세상과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을 말한다는 해석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관점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기도'이다. 기도가 없으면 그러한 관점을 유지할 수 없고, 아예 소유할 수도 없다. 기도의 시작은 염려의 중단이기 때문이다. 염려가 생기는 근원은 '마음과 생각'이다. '마음과 생각'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통제 밖에서 마음대로 작동한다.
① 마음-감정적인 요소'은 헬라어로 '카르디아'인데, 심장을 가리킨다. 이곳에는 감정, 사랑, 정이 들어있다.
② 생각-이성적인 요소'은 헬라어로 '노에마'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과정'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우리의 염려는 이 두 장소에서 일어난다.
감정적인 장소와 이성적인 장소에 걱정이 엄습하면,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어 간다. 이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걱정과 염려를 떨쳐 내고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바울은 염려를 중단하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을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라는 권면으로 설명한다.
즉, 염려를 중단하고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를 시작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기도와 관련된 세 단어(기도, 간구, 감사함)를 사용한다.
이 세 단어의 미세한 차이를 지나치게 따지는 것은 무익하며, 그러나 각 단어가 강조하는 면이 있다. ‘기도(프로슈케)는 가장 기본적인 단어로, 모든 종류의 예배, 간구, 감사를 포함한다. 시편에 나오는 많은 기도가 경배와 찬양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 역시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와 찬양으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문젯거리들만 가져다 놓고 그저 해결해 달라고 성급하게 기도하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께 기도 제목들을 올려 드리기 전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해야 한다. '프로슈케'에는 '기도하는 장소'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장소로 들어가면, 그 순간만큼은 우리를 둘러싼 문제들이 사라진다. 그 장소에서만큼은 내 문제가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찬양이 핵심이 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경배하고 찬양한 후에 우리는 구체적으로 '간구'(데에시스)를 드릴 수 있다. '간구'란 우리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주님께 아뢰는 것이다.
하지만 간구의 목적은 하나님의 마음을 되돌리고 우리의 뜻을 성취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것이다.
배우자의 뜻을 알아내어, 자신의 뜻을 되돌려 배우자의 뜻에 일치시켜 갈 때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갈 수 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알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 문제를 마음과 생각에서 끄집어내 탁자에 올려놓기를 기다리신다.
그 '탁자에 올려놓는 행위’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그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역사하실 공간을 드리는 것이다. 마음과 생각에 갇혀 온갖 걱정을 유발하는 문제들을 하나님이 해결하실 수 있도록 문을 여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5:7의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에서 '맡기라'로 번역된 단어의 본뜻은 '던지라'(에피맆토)이다. 그래서 영어 번역에 '간구'란 우리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문제들을 던지는 것이다. '간구'가 미래에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라는 소망의 표현이라면, '감사함’(유카리스티아)은 과거와 현재에 이미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정이다.
수많은 문제에 휩싸여 있을 때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
우리 삶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면 감사할 수 있다. 최소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그 은혜라도 감사할 수 있다.
'감사함'으로 기도 드릴 수 있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들에 감사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눈이 열려서 다른 것들에도 감사하게 된다. 바울은 7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의 문제나 환경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가 간구하는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언급도 없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문제가 아닌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해결'은 환경이나 문제가 바뀌는 게 아니라, 그 환경에 짓눌려 있는 우리가 바뀌는 것이다. 우리의 관점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영광스러운 복음은 어떠한 환경이나 문제에서든 우리를 승리하게 해 주며, 우리의 생각(관점)을 변화시켜 준다. 기도의 결과로 가장 많이 변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이것은 개인에게 적용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공동체에 적용되는 말씀이다. 기도하는 공동체에는 반드시 변화가 일어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아 가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 눈에 보이게 나타난 곳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공동체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서로 교제를 나누시는 모습이 바로 공동체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이다.
성부 하나님은 '아들의 말을 들으라' 말씀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돌리시며,
성령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그 이름을 높이신다.
삼위일체의 마음은 자기가 높아지고 자기가 영광 받고 자기가 주인공이 되려는 마음이 아니라, '남'(the others)을 위하는 마음이다. 바로 빌립보서에서 계속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가는 교회 공동체는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교회 안에 대접 받으려고만 하는 마음들은 사라지고 어떻게 형제자매들을 대접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마음이 풍성해진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아가는 진정한 개혁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바울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우리의 '헤아림'(누스, 마음), 즉 '인간적인 헤아림'에만 붙잡혀 있다면, 결코 걱정과 염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면, 우리의 삶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는 걱정과 염려가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예수의 마음이, 성령의 마음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의 평화에 둘러싸여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지배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걱정하는 이유는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 내가 이룩해 놓은 것을 지키지 못할까 봐 불안해한다. 하지만 받고 쟁취하려는 마음보다 베풀고 나누려는 마음을 품는다면 안도할 수 있다. 이사야 55장 6절에서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신 후 55장 7절에서 너희의 길과 너희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셨다. 8-9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알 수 없는 것을 뛰어넘는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미래를 맡길 때,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다. 바울이 사용하는 '지키다'(프루레오)라는 동사는 본래 군사 용어였다.
로마제국의 중요한 식민지였던 빌립보의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중요성은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빌립보에는 대단히 큰 규모의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바울이 '지키다'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은 그 당시 가장 강력한 로마 군대가 빌립보 시를 겹겹이 둘러싸 적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가 '걱정'이라는 적이 근처에 얼씬도 못하도록 '마음과 생각'을 겹겹이 둘러싸 지켜 주시는 것이다. 바울은 이 과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바울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 (엔 크리스토)이라는 관점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빌립보서에서 열한 차례나 반복되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롬 5:1).
감사의 기도를 한 결과는?
6,7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염려, 기도, 간구, 감사, 하나님의 평강, 마음, 생각 등이다.
결과는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고 한다.
'마음과 생각'은 염려가 발생하는 곳이다. 염려가 발생하는 곳을 치료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곳을 평강으로 치료해 주셔서 염려가 일어날 일을 처음부터 차단해 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사고 방식, 관점, 태도를 바꾼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믿는 기쁨, 즐거움을 어디에서 찾아내야 하는가?
신앙 생활의 보람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잘못된 관점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실망하게 되고, 자신이 바라던 것들이 충족되지 못하게 되어 주님을 떠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것입니다.
사랑하는 새생명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오늘 귀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위에 더욱 굳건하게 서서 우리들 각각 자신들의 반석위에 서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결론 맺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며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푸는 선교적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선교적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다가 염려를 만날 때, 기도를 통해 해결하고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기를 권면한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셨고 재림의 시간은 다가와 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항상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고,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출발하며 나아가는 우리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절의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한 삶'과 빌립보서 1장 27절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은 같은 의미이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성도들이 되겠다는 충성과 열정으로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각각 자신들의 양심에 선언하며 결단을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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