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선돌에서 법흥사적멸보궁까지
(2022년 9월 3일)
瓦也 정유순
오전에는 단종의 애사(哀史)를 둘러보고 오후에는 영월선돌로 간다. 제31호 국도를 따라 소나기재 주차장에 도착하여 지정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선돌이 보인다. 선돌은 영월 서강(西江)가에 위치하며 마치 큰 칼로 절벽을 쪼갠 것처럼 형상을 이룬 곳으로 높이 약 70m 정도의 입석(立石)이다. 단종(端宗)이 영월 청령포로 유배 가는 길에 이 곳에서 잠시 쉬어 가며, 우뚝 서 있는 것이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고 하여 ‘신선암(神仙岩)’이라고도 한다. 푸른 강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다.
<영월 선돌>
1820년(순조 20) 문신 홍이간(洪履簡)이 영월부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문신이자 학자인 오희상(吳熙常)과 홍직필(洪直弼)이 홍이간을 찾아와 구름에 싸인 선돌의 경관에 반해 시를 읊고, 암벽에 ‘운장벽(雲莊壁)’이라는 글씨를 새겨 놓았다고 한다. 선돌 아래 깊은 소(沼)에 위치한 자라바위 전설에 의하면, 남애마을에 태어난 장수가 적과 싸우다 패하여 자라바위에서 투신했는데 그가 변하여 선돌이 되었다고 하며, 그 후로 선돌에서 소원을 빌면 한 가지는 꼭 이루어진다고 한다.
<영월 서강>
국도 제31호와 제38호가 개설되기 전까지는 선돌 아래로 신작로(新作路)가 있었으며, 1905년 목탄차가 다닐 수 있도록 도로를 확장하였는데, 이 공사를 기념하기 위해 <광무구년이춘화배로수칙을사2월1일(光武九年李春和排路修勅乙巳二月一日)>이라고 글자를 새긴 비석을 세웠다. 제천에서 영월로 연결되는 38호 국도에서 선돌로 접근 할 수 있는 진입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선돌을 가까이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서강에서 본 영월 선돌>
선돌을 본 후 발길이 가는 곳은 약18㎞ 떨어진 한반도지형이다. 주차장에서 내려 산길을 걸어 들어가면 오간재전망대가 나온다. 이 전망대는 한반도지형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지점이다. <한반도지형>은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 옹정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으로 인하여 2009년 영월군 서면에서 한반도면으로 면(面) 이름이 변경되었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 땅, 한반도를 꼭 빼닮아 명소가 되었다.
<영월 한반도지형>
이 지형은 감입곡류의 차별침식과 퇴적에 의하여 생성된 지형으로, 공격사면과 활주사면을 관찰할 수 있다. 감입곡류(嵌入曲流)란 산지의 깊은 골짜기를 구불구불 휘감아 흐르는 하천으로서, 하천 지반이 융기하여 하방침식작용이 강화될 때 형성된다. 평창강이 주천강과 합쳐지기 전에 크게 휘돌아 치면서 동고서저(東高西低) 경사까지 더해 한반도를 닮은 특이한 지형을 만들어낸 것 같다. 한 가지 흠은 멀리 시멘트공장이 보이고, 북으로는 <석회석>을 채취하고 난 산의 상처가 가슴을 쥐어뜯는다.
<시멘트공장>
바쁘게 요선정과 무릉리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요선암(邀仙岩)으로 발을 옮긴다. 이곳은 원래 영월군 수주면(水周面)으로 영월군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2016년 11월 15일 자연경관이 수려한 면(面)의 정체성을 살린다는 취지로 관할 무릉리와 도원리에서 명칭을 따와 무릉도원면(武陵桃源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름철이면 관내로 흐르는 법흥천에서 가족·연인들을 위한 계곡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동강과 서강 합류지점>
강원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요선정은 무릉리 주천강 상류 강가에 자리한다. 조선 숙종(肅宗)의 어제시(御製詩)를 주천면 서북쪽으로 흐르는 주천강 북쪽 언덕에 있던 청허루(淸虛樓)에 봉안하다가 붕괴되었고, 숙종의 어제시 현판(懸板)은 일본인 주천면 경찰지소장이 소유하게 되자 무릉리에 거주하는 원씨(元氏), 이씨(李氏), 곽씨(郭氏)의 3성(姓)이 주축이 된 요선계(邀僊契) 회원들은 이에 거부감을 느끼고 고가로 매입하였다. 이를 봉안하기 위하여 1913년에 건립한 것이 요선정(邀僊亭)이다.
<요선정>
요선정 옆 바위 한 면에 새겨 놓은 무릉리마애여래좌상(武陵里磨崖如來坐像)은 살이 통통히 찐 새가 비상을 할 것 같은 바위에 얼굴은 양각으로 되어 있으나 그 밖의 부분은 선각으로 음각한 좌상이다. 전체 높이는 3.5m이며 타원형의 얼굴에는 양감이 풍부하여 박진감이 넘치고, 묵직한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었으며 간략한 옷 주름을 선으로 새긴다. 두 손은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펴서 손등을 보이고 왼손은 오른손과 평행하게 들고 있다. 이 불상은 강원도의 대표적인 마애불상으로 보인다.
<요선암과 마애불>
<무릉리마애여래좌상>
마애불상 뒤로 돌아가면 바위 끝은 주천강을 향해 절벽을 이룬다. 횡성군의 태기산에서 발원하는 주천강(酒泉江)은 평창강과 만나 서강을 이루고 영월읍에서 동강과 만나 남한강으로 흐른다. 옛날 주천면 지역에 술이 솟는 바위샘이 있었는데, 양반이 잔을 들이대면 청주(淸酒)가, 천민이 잔을 들이대면 탁주(濁酒)가 나오는데, 어느 날 천민이 양반으로 변장을 하고 잔을 들이대자 바위샘이 이를 알아채고 탁주를 내보낸다. 이에 천민이 화가 나서 샘을 부숴 버린 후부터는 술 대신 맑은 물만 흘러나와 주천강이 되었다고 한다.
<요선암에서 본 주천강>
요선암에서 미륵암 쪽으로 내려오면 주천강에는 천연기념물(제543호)로 지정된 <돌개구멍(Pot Hole)>이 있다. 이 구멍은 ‘속이 깊고 둥근 항아리 구멍’이란 의미로 하천에 의해 운반되던 자갈 등이 오목한 하상의 기반암에 들어가 유수(流水)의 소용돌이와 함께 회전하면서 커다란 항아리 모양으로 기반암을 마모시켜 발달한 지형이다. 주로 사암이나 화강암과 같은 단단한 암석에서 잘 발달하며 형태로는 원형이나 타원형이 많다.
<주천강 돌개구멍>
요선암에서 약14㎞ 떨어진 <사자산법흥사적멸보궁>이동한다. 반갑게 반기는 입구의 포대화상(布袋和尙)은 중국 후량(後梁)의 고승(高僧)으로 성(姓)과 이름을 알 수 없고, 항간에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의 화신(化身)으로 알려졌다. 몸은 비만하고 긴 눈썹에 배가 불룩 튀어나왔다. 일정한 거처가 없고, 항상 긴 막대기에 포대 하나를 걸치고 다니며 동냥을 하고, 어떤 때에는 어려운 중생을 돌봐주기도 했다고 한다.
<법흥사 포대화상>
법흥사적멸보궁(寂滅寶宮)에는 신라의 자장율사(慈裝律師)가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아 643년(선덕여왕 12)에 귀국한 뒤 오대산 상원사와 태백산 정암사,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에 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영월에 법흥사를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1984년 6월 강원도의 문화재자료(제29호)로 지정되었으나, 1990년 5월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다.
<법흥사 원음루>
쭉쭉 뻗은 키 큰 금강소나무가 상쾌함을 주는 오솔길을 약 300m 걸어 올라가면 선원이 있고, 거기서 다시 오른쪽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적멸보궁>이 나온다.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산속의 오솔길도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선원 뒤쪽에 보이는 사자산의 봉우리들이 서기(瑞氣)를 머금고 법흥사 도량을 듬직하게 둘러싸며 웅장한 산악의 맛을 내고 있어 한껏 그 위를 올려다보고만 싶다.
<법흥사 금강송 숲길>
적멸보궁 뒤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사리탑은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스님의 승탑일 뿐이란다. 이것이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으로 둔갑한 연유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진신사리의 영원한 보전을 위해 자장율사가 사자산 어딘가에 사리를 숨겨둔 채 적멸보궁을 지었다고만 알려져 있다. 지금도 간혹 사자산 주변에 무지개가 서리는 것은 바로 그 사리가 발하는 광채 때문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사리탑 옆에 있는 토굴은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법흥사 적멸보궁 뒤의 석굴과 승탑>
적멸보궁이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당이다. 보궁은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설법한 인도의 마가다국 가야성 남쪽 보리수 아래 금강좌(金剛座)에서 비롯되는데, 그 후 보궁은 불사리를 봉안함으로써 부처가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을 법계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게 되었다. 적멸(寂滅)은‘번뇌의 불꽃이 꺼져 고요한 상태’를 말하는데, ‘육신을 부단히 움직여 게으름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생각도 많이 하여 한곳에 머무르지 않게 하는 것’이 적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법흥사 적멸보궁>
<사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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