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라는 삶에서 자기의 길을 분명히 걸어가기 위해서는 ‘자기 삶을 위한 시간’을 의식적으로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다카하시 아유무 <Love & Free>
길고양이가 유난히 많은 경남 남해군 평산리 마을.
남해로 숨어들다
어린 시절 엄마한테 혼이 나면 방구석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하루 종일 나오지 않았다. 고작
이불 한 장에 몸을 숨겼을 뿐인데 외부와 차단되었음을 의식하고 나 홀로 울다가 웃다가, 그렇게
평안을 찾았던 것이다.
남해는 마치 그 시절 이불 같은 존재다. 경치는 아름답고 주위는 고요하고 사람들은 느리다. 시끄
러운 세상에서 나를 숨길 수 있는 곳이랄까. 남해대교를 건너는 그 순간, 끊임없이 달려들던 걱정
과 고민이 와드득 떨어져 나가는 듯하다.
그렇게 달려 평산리에 도착했다. 산비탈에 옹기종기 들어선 집들이 쪽빛 남해를 내려다보는 작고
예쁜 마을이다. 남해 바래길 중 ‘다랭이 지겟길’의 시작점인 평산항이 이곳에 있다. 독일마을, 다랭
이마을, 보리암 등 유명 관광지와 거리는 멀지만 한적한 매력에 취한 젊은이들이 며칠씩이나 현지인처럼 머물러 가기도 한다.
‘생각의 계절’ 게스트하우스
[왼쪽/오른쪽]2층 계단에서 내려다 본 1층 카페 / 2층 싱글룸 객실 내부
평산2리에 위치한 ‘생각의 계절’은 그런 여행자들에게 마땅한 보금자리다. 따뜻한 핸드드립 커피
를 마시며 책을 볼 수 있는 카페와 트윈룸, 더블룸, 싱글룸, 도미토리 등 다양한 형태의 객실을
갖춘 이 마을의 유일한 게스트하우스다.
파티 일색인 여타 게스트하우스와는 달리 자기만의 시간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 모여 한적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객실 내 정숙과 밤 11시 일괄 소등이 원칙이지만 이러한 규정에
불만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후 4시 30분. 체크인이 허락되자마자 미리 예약해둔 싱글룸으로 들어갔다. 침대와 에어컨, 옷걸
이를 지나 작은 책상이 눈길이 간다. 무심코 열어본 서랍 안에서 손때 묻은 수첩을 발견했다. 이 방에 머물다 간 누군가의 흔적들이 빼곡하다.
[왼쪽/오른쪽]배고플 때마다 문 앞에서 울던 길고양이 / 책상 서랍 속에서 발견한 방명록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가 틀어졌는데 비행기표 값이 환불되지 않아 남은 돈으로 이곳에 내려왔습니다. 오는 순간까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아, 해외여행 가고 싶다. 이렇게요. 하지만 이곳 ‘생각의 계절’은 정말 소중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힐링도 아니고 그냥 멍 때리다가 간다. 머리가 아파서 왔다가 다 나아서 간다. 멍하니 있던 1분 1초가 너무 좋아서 다시 올 거다.”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의 생각들을 들추다 보니, 이곳에서 맞닥뜨리게 될 나의 시간들이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비 내려도 괜찮아.
[왼쪽/오른쪽]사장님의 서재 / 투숙객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커피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여행 첫날부터 하늘이 뿌옇더니 결국 장대비가 내렸다. 하지만 관광하는 여행이 아니기에 마음은
오히려 편했다. 1층 카페로 내려와 책을 몇 권 골랐다. 유난히 고양이 관련 책이 많았는데, 바깥에
서 밥 달라고 야옹대는 길냥이들에게 선뜻 밥을 건네주는 사장님 내외를 보고 있자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인심 좋은 사장님은 투숙객에게도 맛 좋은 커피를 무료로 제공한다. 일본, 스페인 등지에 거주하며 현지의 이름난 카페를 많이 돌아다녔던 사장님 부부의 기술이 녹아든 덕분이다. 유료로 판매하는
드립 커피는 조만간 원두를 바꿔 제공할 예정이다. 멜버른에서 로스팅 한 것이라고 해서 미리 시음해보니 지금까지 먹어온 쓰거나 묽은 프랜차이즈 커피와는 확실히 달랐다. 향긋하고 고소하며 끝에서는 산미가 느껴진다. 이 원두를 수입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수요를 보유하거나 적합한 추출 기구를 구비하는 등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갖춰야 한단다. 그래도 사장님은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잘 만든 커피 한 잔은 책 읽는 여행자들에게 좋은 친구가 될 테니.
소소한 마을길 풍경
둘째 날은 화창해 마을 산책을 하기로 했다. 안내 책자나 마을 지도가 따로 없으니 온전히 자신의
선택에 의해 길이 정해진다. 일단은 언덕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는 비가 와서 몰랐지만
이쪽에서 내려다보는 평산항 경치가 자못 아름답다. 멀리 아난티 남해의 화려한 건물과 산자락에
켜켜이 자리 잡은 다랭이논이 보인다. 척박한 남해 땅을 어떻게든 일궈내려는 주민들의 억척스러
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어느 집 노부부는 마늘을 까느라 두 손이 바쁘다. 집 한편에 마련된 외양간에도 마늘 껍질이 수북
하다. 남해에서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마늘 먹여 키운 소라더니, 대형 축사가 아닌 가정집에서도
흔히 키우는 모양이다.
[왼쪽/오른쪽]어선에서 갓 잡은 문어를 꺼내는 어르신 / 활기찬 어시장
마을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평산항까지 내려왔다. 횟집과 민박이 몇 개 들어선 소박한 모습
이다. 그런데 이 항구가 아침부터 시끌시끌하다. 자세히 보니 위판장에서 어르신들이 직접 잡은
낙지나 문어, 소라, 물고기 따위를 팔고 있는 게 아닌가.
워낙 작은 마을이라 이런 장면은 상상도 못했지만, 이곳까지 싱싱한 해산물을 사러 오는 손님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매일 오전 7시~8시 사이에 거래가 이루어진다고 하니 서울로 돌아
가는 날 양손 무겁게 올라가도 좋겠다.
무엇이든 현지 방식대로
느릿느릿 주변을 구경하고 나니 식사 때가 다가왔다. 주변에 편의점이나 카페, 식당 등이 전혀
보이지 않아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 추천을 부탁했다. 그렇게 찾아간 첫 번째 식당은 마을에서
약 4km 떨어진 남면의 주란식당. 화려한 연두색 외관과 달리 경상도식 백반을 소박하게 차려내
는 곳이다.
8천 원짜리 정식을 주문하면 따끈한 쌀밥에 국 포함 12가지 반찬을 한 쟁반 가득 내어주신다.
몇 가지 반찬은 매일 바뀌지만 기본적으로 김치, 나물, 오이무침, 생선, 장아찌 등 가정집에서
흔히 먹는 것들로 채워진다. 그중에 짭조름하게 속까지 간이 잘 밴 황태무침과 바삭하고 담백한
서대구이, 구수한 꽃게된장국에 손이 가장 많이 갔다.
[왼쪽/오른쪽]주란식당 백반정식 / 평산횟집 물회
저녁은 평산항에 위치한 평산횟집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 방명록에도 여러 번 언급
되기도 했지만, 아침에 평산위판장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보고 나니 남해의 해산물 맛이 무척이
나 궁금해진 탓도 있다. 간판에 ‘아저씨는 잡고 아줌마는 썰고, 직접 낚시고기 전문’이라고 적혀
있었기에 단번에 자연산 취급점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맛본 물회는 손에 꼽을 만큼 맛이 좋았다. 개불이나 멍게, 해삼 등을 먹지 못하는 나로서
는 자연산 광어와 신선한 야채, 매콤한 초장으로 맛을 낸 심플한 물회에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다. 적당한 두께로 썰린 푸짐한 생선살은 쫀득하면서도 부드러워 밥과 잘 어울렸다. 물회지만 비빔회
에 가까울 만큼 자박한 양념도 취향 저격이다. 여행자들 사이에선 작은 매운탕을 함께 내주는
회덮밥이 인기라는데 여름밤 시원한 맛이 그리울 땐 물회도 좋은 선택이 될 듯하다.
어둠이 내려앉은 평산항
저녁을 먹고 나오는데 며칠 전부터 사려고 마음먹은 소염제가 생각났다. 이번에도 역시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 약국 위치를 물었더니 주란식당 근처에 5시 반까지 하는 약국이 한 군데 있다고 일러
주신다. 또 차를 타고 나가야 하나? 괜히 시간이 촉박하게 느껴져 이면도로에서 엑셀을 꾸욱 밟았다.
“이 동네는 약국이나 마트 같은 편의시설이 웬만한 직장인 퇴근시간보다 빨리 문을 닫아요. 심지어 여기가 스페인도 아닌데 시에스타(이른 오후에 낮잠 자는 시간)가 있다니까요.”
맞다. 여기 남해지.
흘러가는 대로 천천히 살아보고 싶어 자발적으로 고립되었건만, 나는 또 별것 아닌 일에 열을 올리고 말았다. 그깟 약 내일 먹으면 어떠리. 드라이브 하는 셈 치고 마을 한 바퀴 돌아보면 그만이지.
엑셀에 올려놓은 오른쪽 발을 슬그머니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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