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방골성당
대구 최초의 성당이자 대구대교구 순례지 성당
새방골은 와룡산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부락으로서
전설에 의하면 달성군 신당리 금호강하류에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돌풍이 불어 집이 날아와 떨어져
살고 있는 곳이 지금의 새방골이라 한다.
처음 함양조씨(1가구)가 개척하고 살았으나
임진왜란 때 왜란을 피해 진주강씨가 정착하게 되어
그로 인해 새로 집이 생겼다고 해서 새방골이라 한다.
그 후 함안조씨, 옥산전씨가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해서
경주이씨, 경주김씨 등이 모여들어 부락을 형성하고 ‘새방골’이라 칭했다.
새방골 성당은 천주교 대구대교구 소속본당으로서
프랑스 선교사 김보록(金保祿 Robert, Achille Paul, 1853~1922) 신부가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 이후 대구본당의 초대신부로
칠곡 연화리의 신나무골을 거쳐 1888년 이곳에 옴으로써 형성된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성당이다.
이는 한국교회사적으로나 근대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당시 폐쇄적이던
이 지방의 관습과 관리들의 횡포에 의한 추방을 의연히 대처해서
오히려 박해를 주도하던 관찰사를 경질시키고 1891년 4월 30일,
이곳 새방골로 호위무사의 경호아래 새로 부임한 관찰사의 영접을 받으며
금의환향함으로써 크고 작은 지방박해의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초기의 신자들에게 직물을 배우도록 권면하고
또 양잠을 권해 대구가 섬유도시로서의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되도록 하였다.
1837년 김현상 요아킴이 나이 38세에 부인 김발바라, 장남 응배 요한(12세),
둘째아들 진배 가를로(6세), 장녀 아가다(9세)를 데리고 경성을 떠나
신나무골과 한티에 와서 살다 경신박해(1860)때 한티에서 새방골로 이사 왔다.
장남 요한은 새방골에서 경신박해 때 두 번이나 체포되어 매를 맞았다.
그의 비신자 친구 손대여가 대구감사 서헌순에게 부탁하여 요한을 석방시켜 주었다.
아가다는 서철순의 아내가 되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대구본당의 초대회장/국채보상운동 주창자)를 낳았다.
이재영 고스마는 경북 칠곡군 동명면 송산동의 대치부락(어골)에서
신자인 아내 김마리아의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재영은 아내가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알고
집안이 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아내에게 배교를 강요했다.
김마리아는 신앙을 버리겠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몰래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이재영은 결국 그것을 알아내고 작두에 목을 갖다 대라고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아내는 태연자약하게 목을 작두에 갖다 대면서
죽는 한이 있어도 신앙을 버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의 목을 자르지 못하고 아내의 이러한 신앙에 감명을 받아
온 가족과 함께 그리스도인이 되고 경신박해(1860)를 피해
밤에 새방골의 송골로 피신해 와서 살았다.
새방골에는 1860년부터 이재영 고스마, 그의 4촌 이권필과
아들 이규혁(족보에는 이규복)시몬이 살고 있었다.
이재영은 1868년(무진년) 병인3차 박해 때 31세의 나이로
서익순(38세; 서상돈의 삼촌)과 정 바오로(25세)와 함께
절두산 한강에 익사당하는 순교의 영광을 받은 이 공사가의 4촌이다.
이재영의 아들 이장언(1861~1934)방지거는 대구읍내 뽕나무골(대구 계산성당부근)
이방지가(절두산순교자 이 공사가의 여동생; 최정복의 외조모)의 당질(堂姪)이요
문장이 좋아 김보록 신부의 복사를 맡았다.
당시 선진국이었던 프랑스인이었던 김보록 신부는
낯선 생필품을 많이 지니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비누는
이 지방민들에게는 여간 신기한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냄새도 좋고 또 자그마한 것이 쉬 닳지도 않고
거품이 너무 쉽게 잘 이는 것을 본 신자들이 신부님께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고, 신부는 사봉(Sabón:비누/불어)이라고 대답한 이후로
이 지역에선 비누를 ‘사븐(사분)’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된 것도
바로 이곳에서 생긴 일화이다.
김보록 신부의 발자취가 서린 이곳 성당마당엔
그의 이름을 딴 ‘보록정’과 공동체형성 120주년을 기념해서 흉상을 건립했으며
또 해마다 ‘보록제’를 열어 초대신부의 유지를
계승발전 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경상감영과 옥터(대안 성당)
경상 감영은 조선 시대 경상도 지역의 행정 중심지이며
천주교인들에게는 신앙을 증언한 곳이자 순교한 순교지이다.
1815년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남부 지방에 을해박해가 일어나자,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일월산 곧은정, 우련밭에 있는
신자들이 붙잡혀 감영으로 이송되어 취조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장사(杖死)하고,
최봉한 프란치스코, 김시우 알렉시오, 서석봉 안드레아, 김흥금,
김장복, 안치룡 등은 경상 감영 옥에서 옥사〈獄死)하였으며,
살아남은 7명은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또한 1827년 정해박해의 여파로 상주 잣골, 상주 멍에목, 상주 앵무동,
봉화 곰직이에 살던 신자들이 체포되어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들 가운데 박경화 바오로, 김세박 암브로시오, 안군심 리카르도등은 옥사하였고,
남은 3명은 1839년 기해박해 때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1860년 경신박해 때에도 서태순 베드로를 비롯하여 10여 명의 신자들이,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이윤일 요한과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
서인순 시몬 등 많은 순교자들이 옥실이를 한 곳이다.
을해박해 순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2016년에
7인의 순교복자비를세우고,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출처 :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이 아름다운 감영이 초기 천주교인들에게 신앙의 시험대였다는 사실은
평화로운 일상의 시민들에게선 낯선 이야기일 것 같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자
청송, 진보, 일월산, 우련밭 등에서 잡힌 신자들이 감영으로 끌려왔다.
그 가운데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매를 맞아 죽고
최봉한 프란치스코, 김시우 알렉시오, 서석봉 안드레아,
김흥금, 김장복, 안치룡 등은 감영에서 옥사했다.
남은 7명의 신자 또한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입었다.
1827년 정해박해 때는 상주 봉화 등에서 살던 신자들이 감영에 끌려와
박경화바오로, 김세박 암브오시오, 안군심 리카르도 등은 옥사하였으며
남은 3명은 1839년 기해박해에 관덕정에서 참수 당하였다.
1860년 경신박해 때에도 서태순 베드로 등 10명의 신자들이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이윤일 요한, 서인순 시몬 등
많은 순교자들이 옥사로 순교하기도 하였다.
대안 성당
대안성당은 감영의 터에서 순교한 많은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당이다.
순교지인 감영 터가 공원화되었기에 가장 가까운 곳에 건립되었다.
비좁은 도심에 세워진 성당인지라 마치 호텔처럼 세워졌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