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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명언] 언제까지 돈의 종노릇을 할 작정입니까?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349-407년)은 우리에게 ‘요한 금구(金口)’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황금의 입’은 6세기부터 그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쓰였는데, 그의 삶을 살펴보면 그의 ‘황금의 입’ 뒤편에 ‘황금의 삶’이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참된 말씀은 삶에서 비롯되는 까
닭이다.
349년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난 그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양육되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세속 학문을 마친 그는 안티오키아의 주교였던 멜레티우스의 눈에 띄어 독서직을 받고 이듬해부터 수도승의 삶에 뛰어든다. 그러나 엄격한 수행생활로 병을 얻게 되어 안티오키아로 돌아와야 했다. 6년간의 수행생활은 이후 그의 사목적 삶에 굳건한 바탕이 되어주었다.
386년 사제품을 받은 이후 요한은, 멜레티우스의 후계자였던 플라비아누스 주교를 도와 주교의 “눈이자 손, 입”(플라비아누스의 표현)으로 헌신하면서 뛰어난 강론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3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면서 그의 삶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사치를 일삼던 부유층과 황후 에우독시아를 비판하며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다가 황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이다.
맘몬에게 영혼을 내주는 사람들
“… 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재물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탓에 가치가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누가 행복하다는 말은 그가 돈이 있다는 뜻이요 누구를 동정하는 것은 그가 가진 게 없다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누가 재물을 모으려고 어떻게 했다거나, 다른 누구는 어찌하다 파산에 이르렀다거나 하는 것들뿐입니다. 누가 군인이 되거나 결혼을 하거나 무슨 직업을 가지려 할 때는, 그것이 빠른 시일 안에 부자로 만들어주는 일인지 분명할 때만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모인 우리는 이러한 악을 어떻게 쫓아버릴지 고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여러분을 종으로 삼고 있는 맘몬을 언제까지 재갈을 물리지 않은 채 방치할 작정입니까? 여러분은 언제까지 돈의 종노릇을 할 작정입니까?(Imo potius quosque servi eritis pecuniarum?) 언제가 되어야 여러분은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까?
만일 사람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유를 얻으려고 온갖 수를 다 쓰겠지만, 돈의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여러분은 이 무서운 종노릇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하지를 않습니다. 돈이라는 폭군에 잡힌 삶은 사람의 종노릇보다도 더 무서운 것입니다”(「마태오 복음 강해」, PG58,790).
물신에 사로잡힌 당대 사람들에 대한 꾸짖음이다. 1620년이 더 지난 이야기가 놀랍게도 우리의 현실과 정확하게 겹친다. 우리나라가 세계 십몇 위를 다투는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맘몬에게 영혼을 내주고 얻은 결과가 아닐까?
신문이나 방송에서 어떤 일의 타당성을 따지면서 그 일로 얻는 경제유발 효과가 몇억 원, 몇조 원이라고 보도하는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된다. 우리의 주요한(어쩌면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이 돈임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가난이 악이 아니라 가난을 원치 않는 것이 악이라고 말한다(「마태오 복음 강해」, PG58,791).
“…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 6,18)라고 했고, 엘리야는 아합 임금에게 ‘내가 이스라엘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임금님과 임금님 조상의 집안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1열왕 18,18)라고 말했습니다. 자유롭게 말하게 하는 것이 가난임을 보십시오.
그러나 부자는 항상 종으로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 반면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벌도 몰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가난이 말할 자유를 빼앗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가난하게 파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사명은 완전한 자유로 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는 강합니다. 아무도 그에게 손해나 손상을 입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온갖 어려움을 겪습니다. 종들, 황금, 재산, 일, 끝없는 욕심, 사회적 야심, 끝없는 필요 등 모든 것이 그를 억누르고 사로잡습니다”(「히브리서 강해」, 18, PG 63,137).
참으로 가난한 사람
그가 말하는 가난은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려고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의 전제조건이었다. 세상이란 예나 지금이나 본래 그런 모습이라 치자.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교회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공격한 무리는 황실과 부유층만이 아니었으며, 권력에 야심이 있던 교회 인사들 또한 거기에 합류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테오필로스는 403년 보스포러스 해협 근처에서 교회회의(이른바 참나무 교회회의)를 열고 자기편 사람들을 모아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면직하고 유배형에 처한다.
우여곡절 끝에 첫째 유배에서 돌아왔으나 이듬해 두 번째 유배길에 오른 요한은 결국 이들의 계교에 의해 탈진한 상태로 길 위에서 세상을 떠난다. 호송하는 군인들에게 요한이 도중에 죽게 하면 승진시키겠다는 약속을 해두었던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모든 일을 통해 하느님은 영광 받으소서!”였다. 자신에게 겨누어진 위협에조차 초연할 수 있었던 참으로 가난한 사람, 요한 크리소스토모다운 최후였다.
[교부들의 명언] 죄를 씻는 눈물은 좋은 눈물입니다
“죄를 씻는 눈물은 좋은 눈물입니다.” 밀라노의 주교였던 성 암브로시오 교부(339-397년)의 말씀이다. 암브로시오는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노, 대 그레고리오와 함께 라틴교회의 전통적인 4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이며, 교회학자로 공경을 받는 분이다 (4월호 ‘교부들의 명언’ 참조). 그의 가르침 가운데 ‘좋은 눈물’에 대해 살펴보자.
착한 이가 죄의 아픔을 느낀다
행복선언 가운데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하신 주님의 말씀을 설명하면서 암브로시오 주교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여러분이 잘못했던 것을 아파하십시오! 여러분이 흘리는 눈물로 깨끗이 목욕하십시오! … 죄를 지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울어야 하고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루카 복음 해설」, 5,55).
인간은 나약하여 누구나 죄의 유혹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을 뉘우치며 속죄하고,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을 고쳐나가야 한다.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는 것은 회개의 길로 들어서는 첫걸음이다. 스스로 자신을 살펴 자신의 죄를 하느님 앞에 고백하는 사람은 용서와 치유의 은혜를 받는다. 암브로시오 교부는 이렇게 말한다.
“죄의 아픔을 느끼는 것은 착한 영혼의 표시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못 느끼는 사람은 상처의 중한 상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의 병은 치유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처의 아픔을 느끼고 불안해하는 사람은 그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 때문에 쾌유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상처의 고통을 느끼면 그곳에 생명의 느낌이 있는 것이니, 느낀다는 것 자체가 생명체가 살아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다윗의 변론」, 1,9,47; 「통회」, 2,10,92).
통회의 눈물로 용서받은 이들
우리는 성경에서 통회의 눈물로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을 받은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암브로시오 교부는 다윗 임금, 마리아 막달레나, 베드로 사도 등을 모범 인물로 제시한다.
다윗 임금은 한때 자기 부하 장군 우리야의 아내와 간통하고 그 죄를 숨기고자 우리야 장군마저 살해하는 중죄를 지었으나(2사무 11,2-17) 통회하는 눈물로 죄의 용서를 받았다.
주님을 배반했던 유다 사도도 만일 통회했더라면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암브로시오 주교는 이렇게 강론하였다(「참회론」, 2,8,69).
“주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했던 베드로는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에 주님에 대한 사랑을 세 번 고백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 번 울고 용서를 받았다면, 몇 날 며칠을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던 다윗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겠습니까! 다윗의 눈물은 그에게 양식이나 다름없었고, 그는 재를 밥처럼 먹었으며, 그의 음료수에는 눈물이 섞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며 탄식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님께서 쳐다보았을 때 베드로는 울었습니다. 그렇다면 쉬지 않고 주님의 대전에서 계속 눈물을 흘리며 울었던 다윗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께 저의 눈을 듭니다. 제 눈에서 눈물이 시내 되어 흐릅니다’”(「다윗의 변론」, 1,6,25).
그는 늘 신자들에게 성경의 표양을 따르자고 강조하였다. “눈물로 당신의 상처를 덮으십시오! 복음에 나오는 그 여인도 죄와 냄새 나는 잘못을 눈물로 덮었고,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었을 때(루카 7,36 이하) 자기 자신의 죄를 씻었던 것입니다”(「참회론」, 2,8,66).
눈물은 진정한 회개의 표시이며(「시편 118 해설」, 17,32-35) 깊은 사랑의 표현이다(「루카 복음 해설」, 10,93). 또한 눈물은 간절한 청원의 표현이다(「참회론」, 2,8,69).
암브로시오 주교는 신자들이 눈물의 효과를 깨닫게 되기를 원했으며(「참회론」, 1,16,90), 성주간 목요일 저녁미사 때는 이렇게 강론하였다.
“이제 죄를 용서받는 시간입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자신을 위해 그 귀한 눈물을 흘리셨던 것같이 부디 우리를 위해서도 울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그리스도의 얼굴도 우리를 향해 돌아서실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죄사함의 은혜를 내려주십니다”(「창조」, 5,24,90).
눈물은 하느님의 마음도 움직인다
니네베 주민들이 울면서 죄를 뉘우쳤을 때 하느님은 마음을 돌이켜 내리시려던 벌을 거두셨다(요나 4,10-11). “이만큼 통회의 힘은 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분명히 마음을 바꾸셨습니다”(「참회론」, 2,6,48).
또 히즈키야 임금은 이사야로부터 죄의 벌로 죽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들은 뒤, 하느님께 기도하며 눈물로써 간청한 결과 하느님께서 뜻을 돌이켜 그가 15년을 더 살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셨다(이사 38,5; 「시편 해설」, 40,20).
다윗 임금도 죄를 저질렀지만 눈물로 죄의 용서를 청했고,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백성들을 멸망시키려던 뜻을 거두셨다(「참회론」, 2,6). 눈물은 이처럼 죄인을 살릴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마음까지도 움직일 수 있다.
“당신이 울면서 눈물을 흘리면 구원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눈물 흘리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분의 자비심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도 과부인 어머니의 눈물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자애로운 마음으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참회론」, 1,5,22).
눈물로 주님께 돌아오고 교회로 돌아오는 사람은 주님께서 저버리지 않으시고 모두 구원해 주신다. 주님은 당신께로 다시 돌아와 회개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더 큰 영광을 받으신다. 성경에도 쓰여있듯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한다”(「참회론」, 1,5,26).
죄인들에게뿐만 아니라 눈물은 의인들에게도 유익하다. 의인들의 마음속에도 위안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루카 복음 해설」, 6,18). 눈물은 신자들의 마음을 신선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사랑을 강하게 만들어준다(「발렌티니아누스 황제에게 보낸 서간」, 38).
눈물은 통회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신앙심을 보강하며 위로를 선사한다(「형의 죽음」, 1,5). 눈물을 흘리면, 전에는 부끄러운 죄의 골짜기에서 신음하던 사람의 양심이 가벼워지고 명랑해진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셔서 무서운 마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시편 해설」, 47,4).
함께 울며 슬퍼할 줄 알게 하소서
암브로시오 주교는 신자들의 영혼 구원과 자신의 구원에 대한 염려에서 굳건한 신뢰심으로 주님의 자비를 바라며 기도했고, 특히 죄인들에 대하여 측은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곤 하였다.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러 올 때마다 같이 울던 그의 기도가, 사제인 내게 큰 울림을 준다.
“주님은 고아와 같은 저를 사제직에 부르셨습니다. 이제는 제가 사제로서 멸망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무엇보다도 저에게 깊은 마음에서부터 죄인을 측은히 여기도록 깨우침의 은혜를 내려주소서. 이것이 가장 큰 덕행이 옵니다.
죄에 떨어진 사람을 만날 때마다 동정심을 가지도록 도와주시고, 절대로 교만해져서 야단치지 않게 하시며, 오히려 그와 함께 울며 슬퍼할 줄 알게 하소서. 제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으며 울 때 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울게 하시고, ‘타마르가 나보다 더 옳다.’(창세 38,26)는 성경말씀을 마음에 두며 살도록 도와주소서!”(「참회론」, 2,8,73).
[교부들의 명언] “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Putatis quia pacem veni dare in terram? Non, dico vobis, sed separationem).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1-53).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 성경본문에 관하여 암브로시오 교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고 가르치신 주님께서 이제 마음이 변하시어 이웃 사랑이고 예의고 모조리 다 파괴하는 말씀을 하셨다고 믿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분열을 명하셨다고 믿어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부모와 자녀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고 친척 사이를 파괴시키러 오셨다면, 주님께서 어떻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루카 복음 해설」, 7,135)
영육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
성 암브로시오 주교는 참행복에 대한 가르침 가운데 일곱 번째 행복, 곧 평화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위에 언급한 성경말씀을 인용하며 비유적으로 해석하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의 집과 같다. 하느님을 위한 집인지 또는 마귀의 집이 되는지는 각자에게 달려있다. 이 집에 식구들이 있는데, 둘은 셋을 거스르고, 셋은 둘을 거슬러 살고 있다. 둘은 영혼과 육신을 의미하고, 셋은 영혼의 세 가지 기능을 뜻한다(「루카 복음 해설」, 7,138-139).
이와 같이 갈라져서 살고 있던 미련한 상태의 비지성적 인간을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강생 구속하시어 변하게 해주셔서 지성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주시는 것이다(「루카 복음 해설」, 7,139).
“전에는 우리 인간이 동물과 비슷하여 지성을 모르고, 육적, 세속적인 존재였기에 성경에서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 오시어 우리 마음속에 당신의 성령을 넣어주시고 우리를 영신적인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루카 복음 해설」, 7,139).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심으로써 영혼과 육신 사이에 최종 평화를 이루어주셨다. 영육 간의 불목은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발생하였고, 그 결과 영육이 항상 분열을 일으켜, 함께 덕행의 길로 정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평화’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둘을 하나 되게 하셨고, 당신 몸을 바쳐 적개심을 없애주셨다. 평화의 주님께서는 과거의 인간을 새로운 인간으로 창조해 주셨다. 그 결과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 하나가 되고, 또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루카 복음 해설」, 7,141).
그리스도 안에서 영육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결합되어, 이제는 육신이 더 고귀한 영혼에게 순명하여 따르고, 죄의 허물을 깨끗이 용서받고 천상의 길로 동행하게 된 것이다. 육신은 영혼을 감싸주며, 영혼의 동반자가 되었다(「루카 복음 해설」, 7,141).
육신의 죄악 없애고자 불과 칼을
그리스도 덕분에 인간의 영혼이 본래의 위치를 되찾아 돌아왔다. 바로 이 점을 들어 암브로시오 교부는 위에서 제기한 질문, 왜 그리스도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분열은 그분이 주시려는 평화의 은혜와 상치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분열은 평화를 위하여 반드시 먼저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집안에 폭력배가 숨어 살 듯이 쾌락이 기거하면 악과 혼인한 것처럼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붙어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불을 가져오셔서 육신의 죄악들을 불살라버리십니다. 그리고 칼을 가지고 오셔서 예리한 칼로 우리의 뼛속 생각까지도 꿰뚫으십니다.
그리하여 영혼과 육신이 새롭게 되고 젊어지게 됩니다. 영혼은 지금까지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못했던 생활을 이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잘못되었던 인연을 다 끊어버리고 무성한 가지를 쳤던 그릇된 관계를 청산하게 됩니다”(「루카 복음 해설」, 7,145).
암브로시오 교부는 이와 같이 죄에 얽매여 있는 사람을 마귀의 은신처 노릇을 하는 거처로 비유하였다. 약하고 병든 영혼은 마귀와의 잘못된 결합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주님께서 지적하신 부모와 자녀 사이에 있을 분열은 바로 이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루카 복음 해설」, 7,143.145-146).
암브로시오 교부는 신자들에게 평화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따를 것을 권고하였다. 주님은 돌아가시면서 이 잘못된 결합을 풀어주셨으며(「루카 복음 해설」, 10,126), 영혼과 육신의 원수지간 담을 헐어버리시고 평화를 회복시켜 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영혼과 육신이 같은 것을 바라보고 느끼며, 둘이 협력하여 덕행으로 나아가게 된다(「루카 복음 해설」, 3,26).
그리스도께서는 이 평화를 당신 제자들에게 주시어 계속 나누어주게끔 하셨다(「루카 복음 해설」, 10,172). 주님께서 제자들 마음속에 심어주신 평화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다(「서간집」,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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