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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와 문과 휘장
26: 31-37
31. 너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공교히 수 놓아서
32. 금 갈고리로 네 기둥 위에 드리우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받침 위에 둘찌며
33. 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장안에 들여 놓으라 그 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34.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고
35. 그 장 바깥 북편에 상을 놓고 남편에 등대를 놓아 상과 대하게 할찌며
36.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 놓아 짜서 성막 문을 위하여 장을 만들고
37. 그 문장을 위하여 기둥 다섯을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갈고리도 금으로 만들찌며 또 그 기둥을 위하여 받침 다섯을 놋으로 부어 만들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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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바깥의 울타리와 문
지난 주일에 성막의 본 건물은 약 20평정도 되는 직사각형 방이라고 했습니다. 이 성막의 주위를 삥 둘러 울타리를 치라고 하셨습니다. 뜰의 길이는 100규빗(45미터)인데, 거기에 스무개의 기둥을 세우고 스무개의 기둥 밑에는 놋으로 만든 받침 한 개씩을 두어 그 놋 받침에 끼워 세우게 하셨습니다. 뒤편 울타리는 길이가 50규빗(22.5미터)인데 거기는 열개의 받침위에 열개의 기둥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둥의 높이는 5규빗(2.25m)으로 하고, 세마포 장으로 둘러쳐서 성막 안뜰과 바깥을 구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약 340평의 뜰이 만들어집니다. 그것이 성전 뜰입니다. 성소의 정면은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면, 양쪽 벽으로부터 15규빗(6.5미터)은 세 개의 기둥과 받침을 세우고 장을 쳐서 막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앞면 22.5미터 중에서 양쪽으로 6.5미터씩을 장으로 울타리를 둘렀으니 13미터가 막힌 셈입니다. 앞면의 22.5미터 중에서 13미터를 빼니까 9미터가 남게 됩니다. 거기에 다섯 개의 기둥을 세우고 네 폭의 수놓은 세마포로 장을 늘어뜨려서 문을 삼게 하였습니다(27:14-15). 그것이 성막 뜰의 문입니다. 옆의 울타리 휘장은 아래위를 붙잡아매어 들어올 수 없게 하였고, 정면의 문은 위만 매어놓아서 쳐들고 들어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성막에는 왜 울타리가 필요하고 문이 따로 필요했을까요? 오늘은 울타리의 흰 세마포 휘장과 문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1. 울타리는 높았습니다.(27:18)
일반적으로 울타리를 치는 이유는 아무나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만 자격이 있는 사람이 정문을 통해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울타리인 세마포 휘장의 높이는 다섯 규빗 이었습니다. 2미터 25센티나 됩니다. 이 정도의 높이를 넘어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키가 2미터 50은 되어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나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소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고 아무나 넘겨다 볼 수도 없는 곳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죄 지은 인간은 성결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가로막아서 하나님의 성소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로 접근하려다가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짓는 인간이 완전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심판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인간의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길이 없는 것은 아닌데, 오직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죄와 은총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문은 예수님입니다.
2. 문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이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은 오직 한 길 뿐임을 계시합니다. 문을 통하지 않고 울타리를 넘거나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행4:12에서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라.” 하셨고, 요10:9에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으며, 요14장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참된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아가면 구원뿐만 아니라 매일의 양식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히4:16).
3. 문은 아주 넓었습니다.
성막의 폭은 4.2미터인데 거기서 양쪽에 70센티 짜리 금박한 판자 두 쪽이 양쪽 기둥 겸 벽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4.2미터에서 1.4미터를 빼면 문의 너비는 2.8미터나 됩니다. 어울리지 않으리만큼 넓은 문입니다. 그리고 바깥 울타리의 문은 폭이 50 규빗인데 문은 20 규빗으로 9미터나 됩니다. 크지도 않은 건물에 들어가는 문이 9미터나 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큰 문입니다. 뭔가를 강조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그 어떤 사람이라도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520장)
“듣는 사람마다 복음 전하여 복스러운 소리 사면 퍼치세.
사람 있는 대로 전할 소식은, 어느 누구나 오라.
아무나오게, 아무나오게 세상사람 마다 말씀 들으라.
하나님의 아들 오라하시니
어느 누구나 오라”
“아무나 와도 좋소.”
예수님이 유일한 문인데, 그 문만 통과한다면 그 누구도 거절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죄인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얼마나 쉽습니까? 천 번의 절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불로 팔을 지져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하고,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깔려 살다가 망할 존재라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공로를 믿기만 하면,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4. 문은 흰 바탕에 홍색 자색 청색 실로 수를 놓게 되어있습니다.
천하에는 여러 인종이 살고 있습니다. 검은색 피부를 가진 사람도 있고 노란색 피부를 가진 사람도 있고 흰색 피부를 가진 사람도 있고, 부자도 있고 빈자도 있고 권력자도 있고 힘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은 그런 것들로 사람을 차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다 맞아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사실을 맨 처음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어떤 민족이나 어떤 계층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찾아올 수 있는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가 넷이라는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유대인을 위해서는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마태복음을 기록해 주셨고, 로마인을 위해서는 마가복음을, 합리적인 헬라인을 위해서는 누가복음을, 그리고 신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요한복음을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문에 친 휘장이 네 조각이며, 바깥 울타리 문의 기둥도 넷입니다. 부자고 빈자고 상관없고, 남쪽 사람이건 북쪽 사람이건 상관없습니다. 흑인도 백인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무식자도 유식자도 아무 차별을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자기는 죄인이고 해결 못할 문제에 짓눌려 있는 존재라서 주님의 구원이 필요해서 왔다고 주님을 믿기만 하면, 그 앞에 문은 활짝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사면팔방에서 모여오는 그 어떤 상황을 만난 그 누구라도 그리스도만 통과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구원의 문은 오직 예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라는 대로, 주님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두 개의 휘장
보통 휘장이라고 하면 무엇인가가 안에 있는데, 아직 그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 가리고 있는 것을 휘장이라고 합니다. 가장 흔한 휘장이 무대의 막입니다. 연극 공연을 할 때 시간이 되기도 전에 관중들은 들어와 앉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 연극 준비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배우들은 막을 쳐놓고 그 안에서 열심히 무대를 갖추며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준비가 다 끝나고 시간이 되면 막이 오르면서 연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휘장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막에는 두 개의 휘장이 있었는데, 하나는 성전 안에 있고 하나는 바깥문에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보좌인 법궤가 있는 곳을 가리기 위한 것이고, 하나는 성전 안에서 섬기는 자들을 가리기 위한 것입니다.
성전 안쪽 휘장은 촛대가 놓인 바로 앞에 있어서 천정으로부터 땅에 닿도록 드리워져 있었고, 그룹이라는 천사가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이 휘장의 바로 안쪽에는 법궤와 천사의 날개가 마주보고 있는 속죄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입구에 있는 휘장은 문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삼색의 실로 수를 놓았지만 그룹이라는 천사 모양은 없었습니다(26:31, 36).
여기에 중요한 계시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는 그룹이라는 천사가 있고 하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룹이라는 것은 하나님 옆에서 죄인들의 접근을 막는 역할을 하는 천사라고 알려졌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류가 범죄하고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 사람들이 거기 다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천사가 그룹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3:24).
그런데 그 천사가 아주 아름다운 색깔로 수놓아 그려져 있습니다.
아름다운 휘장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기대를 가지게 합니다. 도대체 저 뒤에는 얼마나 좋은 것이 있기에 저런 아름다운 휘장으로 가려 놓았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서 아름다운 휘장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초청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천사의 무늬가 없는 문의 역할을 하는 아름다운 휘장은 그야말로 모든 사람을 초청하는 의미입니다. 누구든지 이 아름다운 성막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세상의 떡이시며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가면 또 하나의 휘장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죄인을 막는 그룹의 모양이 새겨져 있어서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우리가 막상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우심에 반하여 그분께 나아가려 하면, 하나님은 더 이상 내게 가까이 나아오지 말라고 그룹의 모양이 새겨진 휘장으로 막으십니다. 그 거부하는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는 휘장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그룹 천사가 새겨진 휘장입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그 휘장을 쳐들고 그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성소에는 휘장이 둘인데, 하나는 초청하는 휘장이고 하나는 거부하는 휘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매우 궁금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아주 아름다운 수를 놓은 휘장에 반하여 성막으로 가까이 나아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도 함부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입구에 있는 놋으로 만든 제단에서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고 나서, 다음에는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고 나서야 성막 안에 들어가서 떡 상과 등대를 지나 정면 중앙에 향단 앞에 가서 매일 향을 피우며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대제사장만 일 년에 단 한차례, 희생제물의 피를 들고서만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이 휘장을 쳐들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대제사장뿐이고, 기회는 일 년에 단 한번 뿐이었으며, 반드시 피를 들고서야 들어가야 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대제사장이신 단 한사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의로우신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서 인류를 구원하시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히 9:12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휘장은 무엇을 막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런 한계를 그어 놓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은 인간의 공로나 자격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심각한 죄인이어서 그냥 나아가려 한다면 즉사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이지 인간의 열심이나 자기가 세운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십니까? 누구에게 당신의 보좌 앞에 나아가 사죄의 은총과 사랑과 영생을 누리는 구원의 은혜를 주십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나아오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지 않고 오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거부하는 휘장, 즉 가로막는 그룹에게 제지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금요일 오후 세시에, 예루살렘에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었는데, 그날 정오부터 세 시간 동안 어둠이 온 천지를 덮고 거대한 지진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주님이 죽으시는 그 순간에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그룹 모양을 수놓은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지성소의 법궤를 밖에서 누구라도 다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휘장은 두려운 휘장이어서 아무도 접근도 못했고,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찢을 엄두도 내지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그 휘장의 높이는 4.5미터인데, 위에서부터 찢겼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찢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고, 하나님이 찢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 순간에 그 휘장을 찢으셨을까요? 히 10:19-20에 보면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우리가 죄지어서 그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으므로 비로소 거부하는 휘장이 찢겼다. 가로막힌 담을 무너뜨렸다. 예수님이 자신의 육체를 찢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휘장을 찢어서 길을 내 주셨다는 말입니다. 명확하지 않습니까?
휘장이 찢겼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이제 활짝 열렸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뒤에는 그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로 주저 없이 나아갈 길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을 공개하신 것입니다. 그 휘장에 수놓아진 것은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을 막는 일을 하는 그룹이라는 천사였습니다. 그 그룹이 찢겨나갔습니다. 이제 우리를 가로막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피만 의지하고 나아가면,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가까이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도 막는 이가 없어졌고, 지성소를 지키는 그룹도 없어졌습니다. 그 어떤 죄인도 예수를 믿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피해를 입힌 사람을 찾아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나도 남의 죄를 용서 하고, 사람에게 저지른 죄도 용서를 받고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용서를 비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휘장이 열리니까 안에 있는 것이 다 보였습니다.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씩 덜덜 떨며 바라보았던 법궤가 보였고, 그 위에 있는 시은소도 보였습니다. 휘장이 찢어지니까 하나님의 보좌가 너무나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휘장이 덮여 있었을 때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관하여 정확하게 알 길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신에 대하여 무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휘장 뒤에 계셨고, 여러 가지 상징과 암시들로만 당신의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짐승이 죽었다고 어떻게 사람이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 이해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은혜로만 죄인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자주 암시하셨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휘장이 걷힌 뒤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밀물처럼 넘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죽으시는 순간에 휘장이 두 쪽 났습니다. 감추었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흠 없는 짐승을 바치라고 하신 것은 흠 없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제물이 되신다는 암시였다는 것을 휘장이 찢기고서야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한정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각입니다.
하박국은 이 날을 예언하기를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리라.”고 합2:14에서 예언하였습니다. 오늘은 그의 예언이 이루어진 시대입니다.
하나님과 그 은혜를 알고 나면 이 세상을 보는 데 있어서도 놀라운 통찰력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고 말씀했습니다. 세상을 바로 보는 지각이 하나님의 은혜의 내막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수록 우리 안에는 세상을 바로 이해하는 통찰력이 생긴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휘장이 걷혔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직접 나아가서 하나님을 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어떤 절차 없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의 고통과 절망을 아뢰고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하나님과 상의하면서 사는 삶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하시며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을 논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시며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너희에게 다 알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우리 사정을 말씀드리고 하나님의 일을 논의하며 대화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나의 의견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놀랍고 신기하지 않습니까?
오늘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이 강대국 대통령이나 수상인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앞에 다가가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은 소돔의 행정관들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에서 결정되었습니다. 400년 부려먹던 노예들을 다 빼앗기고 장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애굽의 운명은 바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모세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마주앉은 기도실에서 전쟁을 막을 수도 있고 나라의 멸망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악한 시대와 완악한 사람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마주 앉아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휘장이 찢겨 나갔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가서 마주앉는 것이 허락되었다는 뉴스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는 모든 성도는 각자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만인 제사장설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접근만 해도 즉사했던 죄인이 하나님의 품에 들어가 안기고 그가 주시는 은총을 누리며 그분과 마주앉아서 세상의 경영을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은혜는 하나님이 순결하신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들 앞에 길을 열어서 우리를 용납하신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 모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를 믿는 신자 중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도 우리 앞에 열어놓으신 하나님보좌 앞에 나아가는 길을 모르고 교회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고 저 멀리 앉아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나 듣는 수준입니다. 하나님께 매달려 본 적도 없고 간구하여 응답을 받아 본적도 없습니다. 또 하나는 체험적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앙생활은 하는데, 자신만 그 은혜를 누리지 구원을 얻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십니까? 이웃에게도 이 복음을 전하는 성도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