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와 두 아버지
감의 고을에 홍시가 익어간다. 주황색의 달콤한 과즙이 뚝뚝 떨어질듯 한 감은 가을볕에 탱탱함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집집마다 지천으로 매달린 감을 보니 두 분의 아버지가 생각난다.
오십년 전 내가 처음 시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간 날 남편의 고향 집 사립문 옆에는 감나무가 있었다. 제법 큰 감나무에는 노란 감꽃이 나처럼 수줍게 미소 짓고 있었다. 시아버님은 6.25 전쟁 중에 이웃마을의 유명한 지관이 점찍어 준 이 터에 집을 지으셨다고 했다. 방 두 칸의 작고 초라한 안채와 한 칸짜리 사랑채가 있는 집이었지만 시아버님은 당신의 집이 생긴 것이 너무 좋아 감나무를 심으셨다고 했다.
작고 달곰한 꽃으로 나를 반겼던 감나무는 해마다 가을이면 주황색 등으로 집을 밝혔다. 감이 익어 가지가 늘어지면 시아버님은 장대로 감을 따서 우린감과 감식초를 만들어 서울로 가지고 오셨다. 남편과 나는 아침저녁으로 감식초를 물에 타서 마셨다. 그래서였는지 자주 곪아서 고생하던 남편의 혀와 입안에 어느 날부터 염증이 생기지 않았다.
신혼 초였다. 시아버님이 다니러 오셨다. 남편은 아버님이 된 밥을 좋아하신다고 귀띔해 주었지만, 나는 밥물을 조절하지 못해서 그만 뚜걱뚜걱할 만큼 된밥을 짓고 말았다. 밥상을 받으신 아버님은 웃으시면서 괜찮다고 하셨다. 아버님은 나에게 남의 머릿속에 있는 공부도 했는데 밥하는 일쯤이야 하다보면 잘하게 된다고. 서툰 내 음식솜씨를 탓하지 않고 그저 무조건 맛있다고 하셨다.
어느 해 시댁에 갔을 때였다. 부엌에 김치 한 접시도 없어 들에서 나물을 뜯어 겉절이를 하고 데쳐서 된장에 무쳐놓았다. 밥상을 받으신 아버님이 나물이 참 맛있다고 하셨다. 아마도 며느리가 힘들게 준비한 것에 대한 칭찬이신 것 같았는데 옆에 계시던 어머님이 양념 아까운 줄 모르고 쏟아 부어 맛있는 거라며 핀잔을 주셨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란 말이 있듯이 시어머니가 나에게 트집을 잡으면 아버님은 달달한 홍시처럼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셨다. 나한테는 무조건 관대하고 부드럽게 대해주시는 아버님이 이상하게 어머님한테는 데면데면하셨다. 그런 아버님의 모습을 보고 살아서 인지 남편도 나한테 까칠하게 굴었다.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면 좋으련만 태생이 땡감 같은 남편은 같은 말을 해도 항상 떨떠름하게 마음을 상하게 했다.
남편이 무뚝뚝하고 까칠하니 사실 시댁에도 정이 가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아버님한테는 마음이 갔다. 아버님은 맏며느리인 나에게 집안 내력에 대한 이야기와 살아오신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버님과 마주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님은 아들인 남편보다 나하고 더 많은 대화를 하셨던 것 같다.
어머님이 차멀미로 고생하시니 아버님 혼자 서울 우리 집에 자주 오셨다. 남편은 출근하고 내가 아버님을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인천 연안부두, 창경원, 남산 등 서울구경을 시켜드렸다. 아버님은 나와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남편 흉을 봐도 그저 허허 웃으시고 무조건 내가 옳다고 역성을 들어주신 것은 풋감이라 떫고 서툰 내가 나이 들어가면서 맛있는 연시로 익어 갈 것이라고 믿어 주셨기 때문이리라.
친정 앞마당에도 감나무가 있었다. 아버지가 심은 감나무였다. 감꽃이 지면 꽃받침은 감꼭지가 되어 초록의 열매를 맺었다. 초록의 감잎 뒤에 꼭꼭 숨어있는 초록 감이 얼마나 많이 달렸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여름 날 햇살에 부지런히 몸집을 키운 푸르뎅뎅한 열매는 추석 명절이 다가 올 무렵이면 삐죽이 얼굴을 내밀었다. 마당을 서성거리면서 시푸르뎅뎅한 열매가 감이 될까 싶은 생각을 할 때쯤이면 귀가 얇은 감은 하루가 다르게 주황빛으로 물들어갔다. 그 중 크고 빛깔이 조금 나은 몇 놈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소금물에 몸을 담그고 나면 떨떠름한 맛이 없어져 차례상 위에 올랐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소금물에 삭혀 침시가 되는 과정은 으스대며 본연의 맛을 내지 않는 땡감에 일침을 가하는 일이었다.
찬 서리가 내릴 때쯤이면 아버지는 긴 장대 끝에 망태를 달아 감을 따셨다. 장대가 닿지 않는 높은 가지 끝에 달린 감들은 까치나 다른 새들의 먹이로 남겨두는 여유를 두셨다. 어려운 시절을 살아오신 아버지는 동물한테도 나누어주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 같았다.
변변한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에 감을 많이 먹은 우리 형제들은 변비로 애를 먹기도 했었는데 그때는 감의 타닌 성분이 변비를 유발한다는 것을 몰랐다. 병원과 약국이 십리나 떨어진 읍내에나 가야 있었기에 어머니가 변이 안 나온다고 우는 동생의 항문에 손가락을 넣어 파 낸 일도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사학년 때 아버지가 지인에게 보증서준 것이 잘못되어 가세가 기운 우리 집은 시골로 이사를 했다. 시골로 가니 우선 학교가 멀었다. 아버지는 밤길을 무서워하는 나를 기차역으로 마중 나오셨다. 그때 아버지와 나는 함께 밤길을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크고 맛있는 대봉 감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던 것 같다. 또한, 좋은 남자를 만나려면 나부터 지혜롭고 현명한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결혼 후에도 아버지는 서울로 나를 보러 자주 오셨다. 아버지는 당신이 떠나실 것을 미리 알고 혼자 두고 가실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서 그러셨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시아버님은 63세 되신 해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남편과 나는 홀로 계신 시어머니를 위해 아버님이 사시던 터에 새 집을 지어 드렸다. 달라진 대문의 위치에 따라 감나무의 위치는 저절로 집 옆으로 바뀌었다. 시아버님은 가시고 안 계셔도 여전히 감나무는 크고 높게 자라 열매가 많이 달렸다. 해마다 형제들이 모여 감을 따서 나누어 가져갔다.
이태 전. 시아버님이 그토록 아끼던 감나무가 고사했다. 하긴, 아버님이 생전에 계실 때부터 얼마나 우려먹은 건가. 진액까지 쏟아내며 열매를 매달던 감나무는 바람이 들며 속이 썩어 힘없이 부러졌다. 재작년 가을, 칠십 년 수명을 다 한 감나무에서 딴 감을 남편은 아버님 감나무의 마지막 감이라면서 형제들에게 보내 주었다.
나는 감나무가 있던 자리에 서면 아직도 아버님이 그 자리에 계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한 분의 아버지 얼굴도 떠오른다. 바로 친정아버지다. 내가 가난한 집 칠남매 장남에게 시집가겠다고 했을 때 친정 부모님은 몰래 시댁에 와보셨다고 했다. 그때 친정아버지는 형편없이 작고 초라한 시댁 집을 보시고는 가난한 집의 맏며느리로 살아 갈 나를 걱정하시며 감나무 밑에 앉아서 한참을 우셨다고 훗날 친정어머니가 내게 말씀하셨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남편은 고향 집을 지키며 주변을 가꾸는 삶을 살겠다고 했다. 그래서 시작 된 고향에서의 삶이 벌써 십년이 되었다. 곶감의 고장인 고향에서 좋은 공기 마시며 무농약으로 직접 기른 채소를 먹으며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으니 남편은 위암, 나는 갑상선암을 이기고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오십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의 내 모습을 친정아버지가 보신다면 분명 장한 내 딸이라고 하실 것 같다. 비록 감나무는 없지만 나는 두 분 아버님을 생각하며 가끔 감나무가 서있던 그 자리를 돌아보곤 한다. 시댁의 감나무 아래 앉아 서럽게 우셨다는 친정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아버지는 맏딸인 내가 시댁에서 예쁨 받고 인정받는 며느리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러려면 식구들과 부대끼며 비바람도 맞고 소태같이 쓴맛도 보면서 시댁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야만 시댁에서도 대봉 감처럼 인정받는 맏며느리가 될 것이라고 믿으셨던 것 같다.
해마다 주황색 홍시가 등을 매달 때면 내게 세상과 타협하는 법을 알려주시며 따뜻하게 토닥여주시던 두 분 아버지가 생각난다. 친정아버지도 시아버지도 채근하지 않고 좋은 말씀으로 지켜보셨던 것은 시고 곯거나 떫은 감이 되지 않고 대봉 감이 되어 맏딸의 역할과 맏며느리의 역할을 잘 해나가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리라.
우리 집 대봉나무에서 제법 잘 익은 홍시 한 개를 땄다. 남편과 둘이서 나누어 먹을 요량으로 반을 갈랐다. 두 아버지의 감도 이런 색깔, 이런 느낌, 이런 맛이었다. 주황색 속살이 입에 닿자 녹아내리듯 달고 부드럽다. 마치, 두 아버지의 자식 사랑처럼 말이다.
첫댓글 이규애 선생님!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를 기리는 감나무와 두 아버지!
가슴이 울컥해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절제된 표현 군더더기 없는 문장 모두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