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 8 ~ 9000명의 왜군 수장
우리나라 역사의 3대 대첩으로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강감찬의 귀주 대첩이 있고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한산도 대첩, 진주 대첩, 행주 대첩이 있다.
한산도 대첩이 얼마나 대단한 전투였기에 우리나라 역사와 임진왜란 3대 대첩에 유일한 대첩으로 꼽힐까?
지금으로부터 430여년 전 1592년 4월 13일 섬나라 일본의 조선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순식간에 경상도가 유린당했고 개전된지 20일만인 5월 3일에 왜군에게 한양을 점령당했다. 왕이었던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자신이 도망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인 의주까지 도망가버렸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전라 좌수사였던 이순신은 유일하게 해전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여수항에서 1차 출정을 해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모두 승리를 거뒀고 왜선을 42척이나 격침시켰지만 조선함대는 한 척도 피해를 입지 않았고 조선 수군 한 명만 부상 당하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2차 출정을 해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에서는 더욱더 압도적인 모습으로 승리를 거뒀다.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이어진 것으로 예상되는 2차 출정에서는 왜선을 67척이나 격침시키면서 왜군들을 9000명 가까이 수장시켰으나 조선 함대는 피해가 없었고 조선 수군은 13명만 사망했다.
이순신 장군은 이 13명의 사망자들을 최고의 예우를 갖춰 장례를 치뤄줬고 이러한 모습을 본 부하들은 진심으로 목숨을 바쳐 싸우게 됐다.
한편 이순신 장군의 1차 출정 패배 시에 조선 수군을 너무 무시하고 방심했다가 패배했다고 생각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차 출정 대패 후 자존심이 상해 당시 일본의 최고 수군 권위자 구키 요시타카를 사령관으로 임명해 직접 이순신을 상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구키 요시타카는 오다 노부가나 때부터 수군제독을 지냈고 당시 일본 함대의 모든 설계를 했던 일본 수군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구키 요시타카는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일본 수군의 배들보다 상당히 크고 튼튼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작고 가벼운 배들을 가지고 빠른 속도로 접근해 백병전을 펼치는 일본 수군의 전술을 판단했을 때 이순신의 두 배의 병력이 있어야 승산이 있다는 판단을 했다.
구키 요시타카는 조선 수군들 포의 사정거리와 정확도가 엄청나며 비격진천뢰, 천자총통, 피령전과 같은 여러 다양한 무기들이 존재하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거북선이라는 뚜껑 덮여있는 배가 돌격대 역할을 하면서 사령관인 이순신 장군이 신출귀몰한 전술을 펼치는 점도 높이 사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수군 전력의 충원을 두배로 요청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부산 쪽에 정박하고 있는 70척의 전함과 별개로 나고야에서 70척의 배를 부산 쪽으로 충원해줬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당시 용인전투에서 1600명으로 조선군 6만명을 박살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까지 추가로 구키 요시타카에 보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오사카 앞바다에 있는 아와지 섬의 지배자로 원래 해적 집안이었으나 임진왜란 발발 시 조선에 출병해 육전에서 공을 세우고 있었다.
140척의 함대와 구키 요시타카에 와키자카 야스하루까지 준비됐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용인 전투에 큰 공을 세우고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택까지 받으면서 거칠 것이 없었다. 기고만장한채 전투에 투입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단독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부산에 모였던 일본의 함대들은 정비를 끝낸 뒤 조선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 소식을 들은 선조가 이순신에게 출정 명령을 내리면서 7월 6일, 3차 출정이 시작됐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를 여수로 불러 작전 회의를 한 뒤 출정을 했고 노량에서 원균을 만났다.
그렇게 조선의 연합함대 60여척이 모여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7월 7일 당포에서 저녁을 보내던 중 근처 목동에게 견내량 위쪽 거제도 북쪽 바다에 왜군 함대 70여척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7월 8일 한산도 근처로 이동하던 조선 수군은 견내량 근처에서 왜군 함대 70여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와키자카 함대도 이순신 함대를 발견했고 뒤에서 진을 치고 있던 구키 요시타카와 참모장 가토 요시아키 부대의 합류를 기다리지 않고 공격을 시작했다. 선봉 와키자카는 직접 이순신을 잡아 공을 세우겠다는 생각에 눈이 멀어 있었다.
견내량에서 전투를 펼치기에 견내량 바다는 굉장히 폭이 좁고 암초가 많았다. 왜선보다 크고 움직임이 둔한 판옥선으로는 진을 치기 쉽지 않은 지형이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은 더 넓은 바다인 한산도 근처까지 이들을 유인하기로 했다.
왜군들을 유인하기 전 서쪽 통영 근처 바다에 이억기 부대를 매복시켰고 동쪽 화도 근처에는 원균의 부대를 매복시켰다. 그리고 와키자카를 유인하기 위해 본인이 직접 정예부대인 30여척을 몰고 견내량 근처로 다가갔다.
견내량 근처에 도달해 광양 현감 어영담에게 5척 판옥선을 주고 와키자카를 직접 유인하게 명령을 내렸다. 어영담이 5척의 판옥선을 몰고 일본 수군 근처에 다가가 포를 쏘자 일본 수군은 조총을 쏘면서 조선 수군을 향해 돌격해왔다.
거만한 와키자카는 빠른 속도로 돌격해왔고 이순신 장군은 그대로 후퇴를 시작했다. 견내량을 빠져나오자마자 매복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와키자카는 견내량을 지나도 매복이 없는 것을 알고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뒤도 안돌아보고 이순신의 부대를 향해 돌격을 했지만 이순신의 정예병은 그 어느 수군보다도 훈련이 잘되어 있었다.
후퇴하면서도 전열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한산도 근처까지 내려왔을 때는 일본 수군은 어느새 18킬로 정도를 쉬지 않고 내려온 상태가 되어 있었다.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보다 훨씬 남쪽에서 밑으로 유인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본 수군의 겨우 절반 정도의 거리만 이동한 상태였고 일본 수군은 선봉과 후미의 간격의 거의 2킬로 가까이 차이가 있었다.
조선 수군은 얼마나 많은 훈련을 했는지 유인작전에서도 서로 간격이 벌어지지 않았고 왜군이 한산도 근처에 들어오자 징을 치면서 그 유명한 학익진을 전개하게 된다. 일렬로 공격하다가 학익진을 펼치는 것은 익숙한 전법이었지만 당시 후퇴하다가 학익진을 펼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해전에 익숙했던 와키자카도 전혀 예상을 못해 당황했고 그 와중에 거북선 2척이 돌격을 하면서 일본 수군의 진을 깨부셨다. 학익진을 펼친 판옥선은 서로 30~50미터 간격으로 서서 포를 장전해 뱃머리 부근에 있는 포와 좌측에 있는 포를 번갈아가면서 발사해 함선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격군들이 노를 저어 제자리에서 배를 틀어가면서 앞열, 좌열에서 포를 반복해서 쏘기 시작했다. 포를 재장전하는 동안 배의 방향을 틀어 쉬지 않고 공격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이런 학익진도 가운데를 끊어내면 백병전 전개로 전세역전이 가능했기 때문에 와키자카는 더 빠른 속도로 돌격을 했지만 잘 훈련된 조선 수군들이 맨 앞에 있는 배부터 차례로 격파시키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그 사이에 뒤에 있던 이억기부대와 원균 부대가 뒤에서 학익진으로 둘러싸고 포를 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본 수군은 통제를 잃고 말았다.
다들 도망가기에 바빴고 와키자카 함대 73척 중 59척은 포에 격침되어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한 척에 200명 정도 탑승한 안택선도 30척 정도 격침되어 한산도에서만 8~9000명의 왜군이 수장되고 말았다.
나머지 살아남은 왜군 중 상당 수는 근처 한산도로 도망쳤다. 와키자카도 부상을 입고 겨우 목숨만 건져 한산도에 들어 갔으나 당시 한산도는 무인도였다. 식량이 없던 왜군들은 배고픔에 몸부림치다가 자살을 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고 와키자카는 미역을 먹으면서 겨우 10일간을 버텼다.
이순신은 한산도 주변에 조선 수군을 배치해 왜군들이 굶어죽거나 지쳐 수군 근처로 오면 수급을 베어버렸다. 원균이 다른 곳에서 출몰했다는 일본 수군을 잡기 위해 명을 듣지 않고 포위 푼 사이에 겨우 한산도를 탈출한 와키자카는 이 패배 이후 겸손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으며 살아갈 정도로 인생이 변하게 됐고 이는 후세까지 이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산도 대첩 패배 이후 수륙병진 정책을 포기했고 조선 수군과의 교전을 완전히 금하라 명령 내렸다. 또한 일본의 수군들은 공포감에 빠져 이후 많은 해전에서 조선 수군에 압도적으로 패배를 당했고 이순신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