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개혁정책(1)
집권 초기
고종이 즉위하자 마자 불굴의 투지를 지닌 오만하고 개성이 강한 그는 왕의 교서 대신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라고 시작하는 공문을 전국에 발송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은 이경하(李景夏)를 신뢰하여 집권 직후 이경하를 포도대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자신의 측근이던 천희연, 하정일, 안필주, 장순규 등 세칭 천하장안으로 불리던 인사들을 배치하여 정보 탐지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고, 안기영 등을 신임하였다.
화서학파를 이룬 노론계열 인사 이항로 역시 대원군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항로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반대하다가, 철폐령 이후 대원군에 비판적인 입장으로 돌아섰고, 이항로의 제자 최익현은 민씨 척족과 손잡고 대원군 타도를 자임하게 된다.
자신의 집권을 도왔던 조성하와 조영하 역시 초기에는 신임하였으나 섭정을 겸하면서 조씨 일족을 요직에서 배제하여 소원해졌다.
이들 역시 민씨 척족과 손잡고 대원군 타도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또한 실학에 관심이 있었고, 노론 외에 노론 실학자와 남인, 소론과 300년간 정권에서 배제당한 북인계 인사들도 중용하여 거국내각을 구성하였다.
1863년 12월 김좌근과 안동김씨 척신들은 흥선대원군에게 대군에 준하는 예로써 가마를 타고 보국숭록대부 이상은 시생을 이하는 소인으로 칭한다 하여 대원군을 우대하되 현실정치에는 나서지 못하도록 제약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특혜를 거부하고 일반 정승들이 타는 사인교를 타겠다고 고집하여, 정권불간섭을 전제로 한 우대를 거절하였다.
이후 그의 사저는 왕이 출생한 곳으로서 궁궐로 불리게 됨에 따라 운현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남인, 북인 중용
사색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중용하였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일색이던 조정에 다른 노론계 인사들과 소론계 인사들을 배치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한 연회에서는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 궁궐의 기둥을 세워 산보다 더 높이 하겠다고 선언, 이 뒤로 남인계 인사인 류후조와 북인계 인사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남인과 북인을 등용하자 그의 지지세력이었던 이항로 등은 반발하였다.
또한 정도전에 대한 복권여론을 주도하고, 유종공종이라는 사액 현판을 내리기도 했다.
정몽주를 종주로 여기고 그 학통의 계승자를 자처하던 각지의 노론, 소론계 인사들은 처음의 노론, 소론인사 중용에 찬성하였으나, 남인, 북인도 중용하고 정도전에 대한 복권 의사를 피력하자 즉각 반발한다.
관제 정비와 정군분리
고종의 즉위 교서에서 밝힌 바 ‘모두 더불어 유신(維新)을 단행’해야 한다는 요구와 조대비가 형식상의 수렴청정을 하며 흥선대원군에게 힘을 실어주자, 그는 곧바로 개혁에 착수한다.
그는 곧 시경 문왕편의 고사를 언급하며 함여유신(咸與維新)을 선언한다.
우선 세도정치로 인해 약해진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고, 당쟁의 원인이며 국가 재정에 피해를 주던 서원도 47개소만 남겨 두고 대폭 정리하였다.
서원 정리는 착취로 고통 받던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당파(黨派)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으며,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키고, 조선 후기의 상설 기관이던 비변사를 완전 폐지하고 삼군부를 두어 군사 업무를 맡게 하여 정권과 군권을 분리하는 등 군제를 개혁하였다.
대원군이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키는 과정에서 안동 김씨 세력이 자연스럽게 퇴출당했다.
영의정 김좌근이 사직하고 판서를 역임한 김병기는 광주부유수로 좌천당했다.
김좌근의 후임으로는 조두순이 취임하였다
그러나 안동김씨 일가를 모두 퇴출시킨 것은 아니다.
대원군과 사돈 약속을 맺었다는 김병학, 김병국의 경우 안동 김씨들이 퇴출당하는 과정에서도 정승을 역임하는 등 그와의 밀월관계를 지속하였다.
의정부와 삼군부의 부활과 비변사의 유명무실화로 조선 중기 이후 군사와 행정기능이 한곳으로 집중된 것을 다시 분산시켰다.
제도 개혁
법치 질서의 재정비를 위해서도 노력하였고, 세도정치의 혁파와 탐관오리 일소에 노력하였으며, 지방 토호들의 백성에 대한 학대를 엄금하였다.
또한 《대전회통》, 《육전조례(六典條例)》 , 《삼반예식(三班禮式)》, 《양전편고》, 《오례편고(五禮便攷)》 및 《종부조례(宗府條例)》 등의 법전을 편수하여 정치 기강을 확립하고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완비하려 했으며, 의복제도를 개량하는 등 사치를 엄금하였다.
1867년(고종 4년)에는 폐단이 많았던 환곡제도를 개혁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여 국가 재정 확보와 민심 안정을 꾀했다.
향리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였고, 조세횡령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근무연한에 따라 서리들을 입역(立役)하게 했다.
지방관직에 대한 매관매직을 금지하였고, 유명무실화된 암행어사를 다시 파견하여 지방관들의 비리행위를 조사하였고, 지방관의 근무성적을 평가하여 행정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반대세력의 억제를 방지하기 위해 수령의 구임(久任)을 강조하였고, 수령에 대한 고과(考課)를 엄격히 하고 수령 재임시의 부정을 살피기 위해 해유문기(解由文記)의 작성도 직접 보고받는 등 철저하게 실시했다.
5척 단신인 흥선대원군은 기강을 확립한다고 길게 늘어진 양반들의 도포 자락을 짧게 자르게 하였는데, 그 주된 이유는 도포 자락에 뇌물을 숨겨서 왕래한다고 해서였다.
긴 담뱃대도 대를 짧게 잘라 피우게 하였으며 긴 갓도 줄이는 등 의식 개혁운동을 시행하였다.
신복룡의 견해에 따르면, 대원군의 개혁정책은 우선 중화사상의 탈피와 이를 통한 자주 의지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둘째로 척신의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약해진 왕권의 강화이며, 셋째로 안민과 국제적 공존을 위한 쇄국 정책을 높이 평가하였다.
한편 이러한 개혁정책은 홍경래의 난과 1862년 진주민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의 환영을 받기도 했다.
경복궁 중건
흥선대원군은 1865년 경복궁 중건을 하기 시작했다.
경복궁의 중건은 헌종 때 수리할 것을 계획했으나 재정이 모자라 그만두었다.
대원군은 선왕의 뜻을 계승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간언을 듣지 않고 공사를 서둘렀는데,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고자 원납전을 강제 징수하였고, 대장군 이경하에게 감독을 맡기고 세금을 인상하였으며 결두세라는 특별 세금을 부과하고 장정들을 징집하여 매일 수만 명을 작업에 동원했다.
또한 춤꾼과 기녀를 모집하여 인부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열었다.
경복궁을 중건하던 3월에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나 경복궁 중건에 쓸 재목이 모두 타버리자 사람들이 놀라 공사를 중지하자고 건의하였으나 대원군은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더욱더 재목을 채집할 것을 요구하여 공사를 독촉하였다.
그리고 원납전이라는 강제 기부금을 백성들에게 징수하고 도성 4대문을 통과할 때 통행료인 문세를 받았다.
또한 다시 당백전, 원납전 등을 주조하여 공사비를 조달, 동원했다.
재목이 부족하자 또 각처의 무덤가에 있는 나무까지 벌채하고는 "이것은 국가의 성스러운 일이니 그대 집안 선대가 영험이 있다면 필시 즐겨하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하였다.
공사비는 8천만 냥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백성들의 부역에 신중을 기하고 관리와 일반 백성 및 종친(宗親)들에게 고루 원납전을 바치게 하였으므로 자진하여 부역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대원군도 이들을 위해 위로금도 지급하고 무동대(舞童隊)·농악대(農樂隊) 혹은 남사당패를 동원하여 격려·고무하여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큰 재목(材木)이 필요하여 능(陵)의 산림에서도 나무를 베어다 썼는데, 다음 해 음력 3월에 재목장에 큰 불이 나서 건축 작업 전체에 큰 지장을 초래하였다.
전각과 재목이 소실되자 흥선대원군은 대노하여 흥인군과 이경하를 투옥, 처형하려고 했으나 중신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당시 마감용 목재에 기름칠을 하는 창고에서 불이 나 800여 칸에 쌓아 둔 목재가 모두 타버려 공사가 중단될 처지에 놓였다.
공사를 시작한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벌목한 나무는 국유림에서 가져온 것이니 지금부터는 산 주인과 묘 주인의 허락 여부는 상관하지 말고 사유림에서 벌목하도록 하라! ”
그러나 이경하와 흥인군은 목재가 더 이상 나올 곳이 없다며 오히려 죄를 청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크게 화를 냈다.
경복궁 중건 사업을 위해 대원군은 무리수를 둔다.
막대한 자금 조달을 위해 원납전 징수, 매관매직, 거기에 당백전이라는 악성화폐까지 유통했다.
매관매직도 어려워지자 거리에 병사를 풀어서 토끼몰이하듯 사람을 잡아 원납전을 받고 놓아주었다.
또한 도성 4대문과 4소문에는 통행세를 거두어 도성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거두었다.
당시 고종이 거주할 만한 궁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경복궁은 없어진 궁전을 새로 완전히 지은 것이 아니다.
후일 서울역사박물관부지에서 북쪽으로 사직터널 앞까지 뻗어있던 경운궁을 일부 헐어서 옮겼다.
새로 지은 건물과 옮긴 건물의 비율은 정확하지 않지만 상당수의 건물이 옮겨졌다.
양반 세금부과 및 국방력 정비
경복궁 중건으로 소모된 재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호포제를 실시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였다.
종래는 상민들에게만 부과하였으나 양반에게까지 확대해서 징수한 것이다.
이로 인해 양반들의 불평불만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양반들의 반발에 꺾이지 않고, 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1호당 2냥씩을 균일세로 부담케 하여 그 실시를 강행했다.
양반과 상민을 가릴 것 없이 군포를 징수하자는 주장은 흥선대원군 집권 이전 1600년대부터 노론 실학파나 일부 남인 계열이 주장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양반의 존엄을 해친다는 반대 때문에 묵살당하였고, 흥선대원군은 200여 년 만에 이를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대원군은 김기두(金箕斗)와 강윤(姜潤)에게 지시하여 군용품으로 포군(砲軍)용 철모·목탄증기갑함(木炭蒸汽甲艦)·수뢰포(水雷砲) 등의 군사무기를 개발, 제조하게 했다.
그리고 서양 군대의 총탄을 막기 위해 솜으로 제조한 배갑(背甲)을 제조하였다.
그러나 무겁고 두꺼운 배갑은 쉽게 벗을 수 없어 조선병사에게 불리한 점으로 작용하였다.
1860년대 말 대원군은 학우조비선(鶴羽造飛船)이라는 이름으로 비행선을 개발하게 하였다.
서양의 열기구를 목격한 그는 배에 열기구 비슷한 것을 연결, 열기구에는 학과 기러기, 두루미의 깃털을 붙이기로 하고, 군기감에 명하여 학우조비선을 개발했다.
학우조비선은 학과 두루미의 깃털을 모아 아교로 연결하여 배에 붙인 것으로, 배가 포탄에 맞더라도 물에 가라앉지 않게 할 목적으로 개발하였다.
그러나 배가 물에 닿으면서 아교가 모두 녹아 조비선 개발은 실패하고 말았다.
삼군부 육성
그는 삼군부를 부활시킴과 동시에 자신의 친위군으로 양성하였다.
삼군부의 무장을 발탁할 때는 척족 출신을 완전히 배제하고 무과 출신의 전문 군인과 종친, 대원군이 신뢰하는 무장 등이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전문 무장을 양성했다.
무반을 차별하는 오랜 관행에 도전이라도 하듯 대원군은 무부(武夫), 진짜 군인들을 우대하고 중용했다.
이때 보인 군인들에 대한 각별한 예우는 후일 별기군 창설후 멸시당하던 구식 군인들에게 대원군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는 정치와 군사를 분리시킨 뒤 군사력 육성에도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소수의 권력 독점을 배제하고, 행정과 군사를 분리해 국가 행정 기구의 조직력과 기능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 대원군의 구상이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삼군부를 자신의 친위군대로 양성하여 대원군 자신과 왕실을 호위하게 했다.
토지 개혁
사상적으로 중농적 실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흥선대원군은 위민정치의 부흥을 위해서는 문란한 삼정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위민정치의 구체적 실현으로써 그는 문란한 삼정을 바로잡고 안정을 꾀하는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토지대장에 올라 있지 않은 땅을 찾아내고 지역 토호와 유지들의 토지 겸병을 금지하였는가 하면, 토지조사를 통해 부분적으로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전정을 바로잡고자 했다.
지방 수령과 토호의 농간이 가장 심했던 환곡제는 사창제로 개혁하여 환곡을 합리적으로 운영하도록 하였다.
또한 감찰의 목적에서 타락한 도장(導掌)·궁차(宮差) 등의 파견을 금지하고, 신설 궁방에 토지 지급을 폐지하여 궁방전을 억제하였다.
서원 철폐
대원군은 붕당의 근거지로 오랫동안 면세의 특권을 누리며 온갖 폐단을 일삼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여 정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명나라 만력제의 사당인 만동묘를 철폐하였는데,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의 반발을 샀다.
대원군은 서원 철폐와 관련하여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서원 철폐의 강한 의지를 내비치었다.
병인박해
1864년 4월 4일(고종 1년 음력 2월 28일)에 아라사에서 사람 몇 명이 두만강 얼음을 타고 함경도로 내려와 통상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오자 거절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권》 흥선대원군은 국경을 맞댄 아라사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해 불란서 천주교 선교사들과 접촉해 아라사를 막아준다면 천주교 선교를 인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그러나 일이 틀어졌는지 천주교 신자를 모두 잡아들여 사형에 처한다.
이 사건이 병인박해다.
이에 관해 김병학, 김병국 형제가 흥선대원군을 압박해 흥선대원군을 정치적으로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학설이 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은 외세의 침략적 접근을 막기 위하여 강경한 통상거부 정책을 단행하였다.
그는 외국의 통상 요구에 불응하였고 양화 교역을 엄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