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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길 그리고 하동 지리산 둘레길
오늘(2010. 10. 30.)은 경기 72회 친구들과 같이 하동 섬진강을 따라가는 토지길을 찾아가는 날. 약속된 7:30에 맞추어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주차장으로 들어가니 우리 동기 안살림꾼 허민 교수가 차 앞에서 친구들을 맞이한다. 그런데 우리를 태우고 남녘을 향해 달릴 버스의 차 넘버는 ‘경기 XX 7002’. 허허! 경기 72회 동문들이 타고 갈 버스라고 회장단이 차도 그에 맞춰 오라했나? 차량 앞유리 전광판에는 ‘72KG'가 반짝이고 있다. 운전사는 경기 72회가 타고 갈 차라며 ’72KG‘라고 입력한 모양이나, 이건 꼭 몸무게가 72kg 넘는 녀석들은 탈 자격이 없다는 것처럼 보인다. ㅎㅎ
남녘으로 막히는 찻길을 뚫으며 우리가 먼저 찾아간 곳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구례 청보리밥집. 밥도 밥이지만 이 집을 유난히 기억나게 하는 것은 작두콩과 넘버 없는 트럭. 우와 무슨 콩이 이렇게 큰가? 마당에 심어놓은 작두콩의 콩깍지는 정말 작두만 하다. 이렇게 콩이 크니 식단에 올라온 콩을 우리는 처음에 마늘을 까놓은 것으로 착각하였다.
식당 마당에 세워놓은 이 번호판도 없는 트럭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일제 시대 트럭이 타임머신을 타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것과 같은 트럭은 배기가스관을 운전석 머리 위로 높이 치솟아 세우고 있고, 차 앞에는 누구를 끌기 위해선지 쇠줄을 감고 있다. 지리산 깊은 산판에서 베어낸 임목을 도로까지 운반하는 산판 트럭이 모처럼 나들이 나왔나?
1:22경 화개장터에 도착하였다. 장터 앞 섬진강에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남도대교가 둥그런 아치를 그리고 있다. 좁은 강폭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와 경상도는 마주 보고 있지만, 그 동안 전라도와 경상도의 심정적 경계는 너무 떨어져 있었다. 아직도 선거를 하면 이 좁은 강물을 사이에 두고 양쪽의 표심(票心)은 확연히 달라지지 않는가? 그래서인가? 남도대교의 또 다른 이름은 ‘新 오작교’.
화개장터로 들어선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화개장터로 들어서며 내 입속에선 조영남의 화개장터가 우물거린다. 조영남의 노래로 인하여 더욱 유명해진 화개장터. 노래의 힘이 조그만 시골장터를 이렇게 키워놓았다.
장터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화개장터 3.1 운동 기념비’가 서 있다. 1919. 4. 11. 이강률, 임만규, 이정수 선생 등의 주도로 이 화개장터에선 ‘대한 독립 만세’가 섬진강으로 퍼져나갔다. 당연히 선생들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고...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유관순 열사가 시위를 주도하듯이 당시 전국의 장터에선 만세 소리가 한반도 상공을 퍼져나갔겠지. 단순히 장터 구경만 한다고 생각하였다가 이렇게 우리 민족의 기개를 알리는 기념비를 보는 것은 뜻하지 않는 기쁨.
장터에 들어서니 가게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실제 이 장터를 이용해야할 근처 동네 사람들보다는 우리와 같은 타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장터를 휘돌아보는 내 눈길 속에 색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쫀~득 쫀~득 터키 전통 아이스크림’ 태극기와 터키 국기가 그려진 뒤로는 콧수염을 기른 터키 남자가 쫀득쫀득한 아이스크림 한 번 먹어보라며 우리를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가 다문화 국가가 되어간다더니 이 시골 화개장터에서 터키인 노점상을 볼 줄은 생각 못했다. 나는 중동에서 쫀득쫀득한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어보던 기억이 새삼스러워 아이스크림 하나를 청해본다.
장터에는 몇 개의 벽면을 세우고, 그 벽에 김동리 소설 ‘역마’의 몇 장면을 그려 넣었다. 어느 날 이 화개장터에 체장수 영감이 딸 계연을 데리고 주막에 나타나 주모 옥화에게 잠시 맡기고 떠난다. 그 사이 쌍계사에서 돌아온 옥화의 아들 성기와 계연의 사이에서는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벽면에는 이들의 만남의 장면을 이렇게 써놓았다.
옥화의 아들 성기가 절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 성기에게 옥화는 수건과 부채를 건넨다.
옥화에게 책을 들려주던 계연이 성기를 바라보았다.
성기는 아름다운 계연을 보며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계연의 머리를 빗어주던 옥화는 계연의 왼쪽 귓바퀴 위에 자신과 똑같은 사마귀가 있는 것을 놀란다. 오래 전 체장수가 화개장터에 와 주모와의 하룻밤 인연으로 옥화가 태어나고, 체장수는 또 떠돌아다니다가 어린 딸 계연을 낳고... 그러니까 성기가 사랑을 느끼던 계연은 이모였다는 얘기. 결국 바람처럼 떠나간 성기 아버지처럼 성기도 역마살에 길을 떠난다.
체장수와 계연이 떠난 후 성기는 옥화에게 엿판을 맞추어 달라고 한다. 성기는 두 사람이 떠난 곳과 다른 곳으로 떠난다. 성기는 발걸음을 옮길수록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어머니 옥화의 주막이 보이지 않을 때쯤에는 육자배기 가락을 흥얼거릴 만큼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렇게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사람들이 교차하는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김동리의 ‘역마’가 태어나고, 또 이 소설 역마를 민형기 작가가 청동조각으로 표현했다. 조각에선 떠나는 성기가 주변 중첩된 산등성이와 산자락에 안긴 화개장터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조영남의 화개장터 노래비 또한 당연하다는 듯이 장터 한가운데를 차지하며 서있고...
1:50경 이제 장터를 떠나 섬진강 강가로 내려선다. 강변을 따라 남쪽으로 난 토지길을 따라 가기위해서다. 작년에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인 섬진강을 끼고 만들어진 토지길 1코스는 섬진강 평사리 공원에서 출발하여 동정호~최참판댁~조씨고택~악양루를 돌아 다시 평사리 공원으로 나와 섬진강을 따라 화개장터까지 이어지는 18km의 길이고, 2코스는 화개장터에서 십리벚꽃길(혼례길)~차 시배지~쌍계석문바위~쌍계사~불일폭포~국사암까지의 13km의 길이다.
우리는 지금 평사리 공원을 향하여 토지길 2코스를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우리를 안내하러 나온 이는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들의 모임(국시모)의 사무처장 윤주옥씨. 국시모의 회원인 허명구가 유처장님을 특별히 모셔왔다.
단아한 몸매의 류처장은 작지만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토지길에 대해 설명하고 앞장서서 토지길로 들어선다. 토지길을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지금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우리 일행들 밖에 없다. 류처장은 이 길을 자기 나름대로 ‘버드나무와 대나무 사이로 보이는 섬진강’이라고 이름을 붙여봤단다. 아닌 게 아니라 처음에 섬진강 길을 걷는다고 할 때에는 머리 위로는 그냥 하늘을 이고 태양빛을 맞을 각오를 했는데, 우리는 강변의 자갈길을 걷기도 하지만 작은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간다.
토지길이라고 하지만 이렇다 할 설명은 없다. 이 길에 이야기가 없다면 우리가 보통 걷는 강가의 길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야기가 있는 길을 만들려면 아직도 할 일이 많겠다. 그런데 나무들이 푸르름으로 우리를 환영해주면 좋겠건만, 나무들은 머리는 그대로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지만 몸뚱아리의 푸른 빛은 파리해지며 가지에는 쓰레기까지 달고 있어, 모처럼 찾아온 우리 이방인들을 활짝 웃게는 만들지 못하고 있다.
윤처장은 지난 여름 큰 비가 내렸을 때 몸집을 잔뜩 불린 섬진강물이 쓰레기를 같이 몰고 와 이 나무들의 푸르름을 뺏어가며 쓰레기를 걸어주고 갔다는 것이다. 이 여름 섬진강엔 그렇게 큰 비가 왔었나?
섬진강(蟾津江) - 두꺼비 나루의 강? 왜 강 이름에 두꺼비를 썼을까? 고려 우왕 11년(1385) 섬진강 하구에 왜구가 침입했을 대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 쪽으로 피해 갔다는 전설이 있어 섬진강이라고 하였단다.
섬진강 하니 수달이 생각난다. 원래 계획은 구례에서 섬진강 길을 걸어 수달을 관찰할 수 있는 곳까지 가기로 하였는데, 가는 길을 모두 포장해놓아 윤처장은 이리로 변경하였단다. 올봄에 남원 인월에서 함양 벽송사까지의 지리산 둘레길을 걸을 때에도 생각보다 많이 포장된 마을의 길에 좀 실망하였었지. 농민들의 농사 편의를 위해서는 포장된 농로가 좋겠지만, 그래도 포장되지 않고 풀꽃이 맞이하는 시골길을 예상한 나에게는 좀 실망이었었지.
재첩도 생각나는군. 그 유명한 섬진강 재첩은 원래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섬진강 하구에서 많이 나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섬진강 상류에 댐을 만들어 하구까지 내려가는 물의 양이 줄어드는 바람에 어민들은 좀 더 상류 쪽에 재첩을 뿌려 거두고 있다고 한다. 윤처장도 역류하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밀고 들어올 때가 많아 환경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고 걱정을 한다.
섬진강 하면 또 생각나는 시인 김용택. 순창농고를 졸업하고 모교인 덕치초등학교에서 평생을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섬진강을 사랑하였던 김용택 시인.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 1’을 읊조리며 강을 따라 나아가보자.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기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환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3:40경 검두리까지 왔다. 여기서 더 전진하면 악양면 경계를 넘어 평사리 공원이 나오고 거기서 강변길을 나와 악양벌을 따라 지리산쪽으로 들어가면 ‘토지’의 최참판댁이 나온다. 우리는 원래 평사리 공원까지 갈 예정이었으나 윤처장은 우리를 멈추게 한다. 오늘 우리가 하룻밤 머무를 천은사의 저녁 공양시간이 5시라 그 시간을 맞춰야 한단다. 아쉽구나. 욕심 같아서는 최참판댁까지 방문하여 ‘토지’의 분위기에 빠져들고 싶었는데...
천은사로 들어왔다. 천은사(泉隱寺) - 샘이 숨어버린 절이라니? 절 이름 치고는 특이하다. 당연히 무슨 사연이 있겠지? 천은사는 원래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덕운 스님이 창건하였는데,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찬 샘이 있어 원래 감로사(甘露寺)라 하였단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절을 다시 복원하는데, 이 샘에 큰 구렁이가 자꾸 나타나 구렁이를 잡아 죽였다나? 그랬더니 샘이 더 이상 솟아나지 않아 샘이 숨어버렸다고 하여 천은사라고 했다고... 그런데 이렇게 구렁이를 죽이고부터 원인 모를 불이 나고 재앙이 계속되니, 사람들은 절을 지키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수군수군. 이를 들은 조선의 명필 이광사가 일주문 현판의 글씨를 물이 흐르듯이 써서 걸었더니 그 뒤로 이런 재앙은 그쳤다는 것.
이런 얘기를 들으며 일주문의 현판을 올려다보니 과연 현판의 글씨는 물이 흐르듯 하고, 더군다나 보통 가로로 쓰인 현판과 달리 세로로 쓰여 있는 것이 물이 쏟아질 듯하여 불의 재앙을 막을 것 같다. 왜 있잖은가? 관악산의 화기가 한양을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숭례문의 현판 글씨를 세로로 썼다고. 이광사도 그걸 생각하고 세로로 썼나? 원교가 개인적으로는 나주괘서 사건에 연루되어 부인은 자결하고, 본인은 23년의 긴 유배생활 끝에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쳤지만, 유배생활의 외로움과 고난을 붓글씨로 이겨내 동국진체를 완성하였지. 그런 원교의 글씨를 직접 눈으로 대하니 다른 절의 현판을 볼 때와는 감회가 다르다.
일주문을 지나 전진하니 앞에 나타나는 다리. 이제 이 다리를 건너면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리라. 그런데 다리 위에는 전각을 얹혀 놓았다. 전각 위의 현판은 수홍루(垂虹樓). 무지개가 드리워진 누각이라... 비가 오면 이곳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드리워지나? 가만히 보니 다리 아랫부분은 무지개 모양으로 아치를 그리고 있다. 수홍루는 이를 보고 지은 이름인 듯. 수홍루 앞으로는 저수지가 늦가을의 정취를 물에 담아내고 있다.
경내로 들어가니 주전(主殿)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대웅전이 아니라 극락보전. 천은사는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주불(主佛)로 모시고 있구나. 어느 한 전각에 붙여놓은 벽보에는 ‘지리산의 꿈’이 ‘내 딸들아 아들들아 나를 생명 평화의 놀이터로 삼아다오’라고 외치고 있다. 지리산에 길을 놓고, 댐을 쌓는 등 지리산을 인간 이익의 잣대로 개발하려는 인간들에게 호소하는 ‘지리산의 꿈’.
오늘 우리가 하룻밤 묵을 방장선원으로 들어가는 대문은 성적문(惺寂門). 이 문을 들어서면 그저 고요히 고요히 참선 수행만 하라는 얘기인가? 자격 없는 우리들이 이 문을 들어서니 죄송해서 어떡하지? 방에 짐을 놓고 식당으로 간다. 오래간만에 절밥을 먹어본다. 기둥에 붙여놓은 공양게송.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당연히 상 위에 놓이는 음식에서 육류를 찾겠다는 망상은 버려야겠지. 식사 공양도 수행의 하나라고 하는 지라, 나는 평소와 달리 밥알 한 톨이라도 남기지 않으려고 식반을 샅샅이 훑는다.
저녁 공양을 일찍 하니 밤이 길다. 절에서 고성방가를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절 문을 나간들 이 지리산 계곡에서 무얼 찾으리오. 우리는 방에 들어가 저녁 공양 전에 회장단이 장만해온 안주와 술을 펼친다. 나는 전에 놀러갔다가 1박 하며 옆에서 나는 코 고는 소리, 이 가는 소리, 그리고 내 몸을 더듬는 손에 잠을 거의 못 잔 안 좋은 추억이 있어, 이번에는 빨리 마시고 떨어지자고 작정하고 내 위로 술을 쏟아 붓는다.
눈을 뜨니 새벽 6시. 간밤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성공이구나. 그런데 나를 쳐다보는 친구들의 눈초리가 이상하다. 내 주위의 녀석들이 잠을 못 잤단다. 왜?? 궁금해 하는 나에에 털어놓는 이야기. 이런! 일단 빨리 마시고 뻗자는 나의 전략은 일단 성공했으나, 천당을 지나쳐버렸다. 내가 자면서 몇 번을 오바이트 했단다. 내 뒤치다꺼리 하느라고 고생한 민이, 영식이, 지생이. 친구들아! 미안해서 어쩐다냐. 이번에는 내가 민폐를 끼쳤으니...
어젯밤에 그렇게 난리를 친 덕분에 나는 절 주변 숲속 산책도 포기해야 했고, ‘주지 스님과의 차 한 잔’ 시간에도 그냥 이불 속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나마 아침 공양이나 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 후유~~ 목탁을 너무 두드리면 극락 가는 것이 아니라, 목탁이 깨진다더니...
어제 강을 따라 걸었으니 오늘은 지리산 숲속으로 들어가야겠지. 우리는 차를 타고 하동으로 이동한다. 다시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는 버스 저 위에선 노고단의 늙은 할미가 말없이 우리의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하동군 적량면 서리의 칠보정사 옆 임도에서 길을 걷기 시작한다. 지리산 둘레길이라고 하지만 이쪽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길. 우리는 편백나무 숲을 따라 난 임도를 따라 올라간다. 윤처장은 편백나무 숲에서는 때로는 말없이 걸어보는 것도 좋은 거라며, 우리에게 침묵 걷기를 적극 권장한다. 그 때문인가? 숲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들의 말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숲은 우리들이 울리는 발소리 외에는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침묵 속에 걸어서인가? 이제 주위의 사물들은 그저 말없이 스쳐지나가는 의미 없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 하나 나에게 의미를 던져주고 간다.
내 발치에서 계속 나를 맞이하는 보라색꽃. 윤처장은 꽃향유라 한다. 그런데 녀석은 꽃의 반쪽을 잘라낸 듯이 꽃을 한쪽 면으로만 피운다. 마치 누군가를 찾으려고 한쪽으로만 얼굴을 향하고 있는 듯이...이름에 ‘향유’를 넣은 것으로 보아 꽃향기가 무척 진할 것 같은데, 녀석들을 좀 더 가까이에서 카메라에 담기 위해 다가가는 나에게 녀석들은 별 냄새를 비치지 않는다. 녀석들은 사람을 가려서 향기를 품는가?
길을 걸으며 야생화에만 눈길을 주고 있으니, 발밑으로 풍뎅이 비슷한 녀석이 걸어간다. 등껍질이 유난히도 광택이 나는 녀석을 향해서도 내 몸을 굽히니 녀석은 황급히 조그만 돌들 사이로 지 머리를 박는다. 녀석아! 니 머리만 숨기면 다 숨긴 것 같더라냐. 녀석의 이름은 무엇일까? 내 어릴 때에는 장수하늘소, 장수풍뎅이 등의 곤충들을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녀석들 보기가 어렵던 차에 이 녀석을 보니 반갑다.
임도는 산허리를 타고 돌아 내려가는데, 그동안 외길만 걸어오다가 여기서 칠성봉 가는 길과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갈라진다. 우리는 잠시 망설였으나 시간상으로 볼 때 내려가야겠지. 칠성봉? 저 봉우리도 칠성신앙과 관련이 있는 봉우리인가? 12:13경 임도가 끝이 나는 곳은 하동군 청암면 명호리. 계곡길을 따라 올라온 경기 7002 버스가 반가운 모습을 대기시켜 놓고 있다. 이쪽은 정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지 이렇게 임도를 타고 오는 동안 우리 일행들 외에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윤처장님이 보증한 대로 오늘 정말 한적한 지리산길을 걸었구나.
버스는 우리들을 태우고 다시 전라도로 넘어가 화엄사 들어가는 계곡 초입의 식당으로 데려간다. 식당 간판은 ‘차 · 도자기와 함께 하는 자연음식, 가락원’. 가락원에서의 자연음식으로 이번 섬진강 · 지리산 1박2일 여행도 끝이 보인다. 이제 서울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차에 오르면서 우리는 허명구와 윤주옥 사무처장과 아쉬운 작별 인사. 가락원의 난쟁이 황토 장승도 씨익 웃으며 잘 가라 한다. 차가 고속도로를 따라 서울로 오르며 2010년 10월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흘러가고, 나는 속으로 이용의 10월의 마지막 밤을 흥얼거리며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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