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곁에 누울 수만 있다면> 곽 영 석
강변에 사는 주부들 중에 우울증을 앓는 분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후배 디자이너 B도 강변언덕 아파트에 산다.
여고를 졸업하고 작은 양품점을 하다가 맞춤옷 전문점을 30년 가까이 운영했으니 전문 디자이너 뺨칠 만치 명품을 만들어 팔고 있다. 그의 단골손님 중에는 일일드라마에 출연중인 탈랜트도 있고, 기업 CEO도 하나 둘이 아니다.
돈은 쓰고도 남을 만치 벌었지만, 자녀들이 유학을 떠나고는 어느 날부터인가 술을 가까이 하더니 알콜 중독으로 벌써 두 번이나 집중치료를 받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회사에 나가지 않고 강변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스타일 뎃상을 하거나 입김을 불어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며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10월 마지막 날.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40대 초반에 결별한 남편의 사진을 안고 울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그의 남편은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고 활짝 웃고 있다. 아이들과 강촌유원지에 주말 소풍을 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오라버니, 아이들이 떠나고 나니까 내 곁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요. 영상전화로 아침저녁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아이들이 공부한다고 짜증을 내고 ‘친구만나니 내가 전화할 때까지 전화 하지 말라’고 하니 전화하는 것도 겁이나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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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살 때인가? 여름이 시작되는 유월 초였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남편의 무덤 근처에 작은 움막을 짓고 울며 지내는 이 친구를 강제로 데리고 왔던 적이 있다.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철부지 두 아이들을 친정 부모에게 맡기고 석 달 가까이 이러고 있었으니 몰골이 사람이 아니었다.
“너 이 장마철에 무섭지도 않니?”
“오라버니 그이가 비를 맞고 있잖아요.”
친정집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달려가 데려오기를 세 네 번. 비가 오는 날이면 비닐이나 치마를 가지고 가서 무덤을 덮는 것이 그의 일이라 할 정도였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렇게 저 세상으로 떠난 남편을 사무치게 그리워할까?’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B의 일상을 살피다 보니 이해가 되었다.
월간지 ‘샘터’에서 펜팔로 만나 결혼에 골인한 이들 부부는 약수 동 비탈길 연립을 사서 시누이 둘과 살았다.
광장시장에서 원단장사를 하는 남편과 디자이너의 만남은 점포를 늘리면서 백화점 브랜드로 납품을 하면서 실력을 키웠다.
내 후배들 중에 참 건실하게 사는 구나 생각을 했었다.
30대 중반에는 고유상표를 등록하고 지방에 단골양품점을 36개나 확보했다며 자랑할 때가 있었다.
행복이 지나치면 하늘도 시기한다는 말이 맞을까?
사업체가 늘어나고 물량이 커지면서 부부사이가 점점 남남처럼 달라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나 보았다.
남편은 지방의 양품점을 돌며 수금도 하고 물건도 납품을 했는데 순천에 있는 P사와 거래하며 한 눈을 팔았던 모양이다. 바쁠 때는 대리기사를 채용해서 잠도 나눠 자면서 지방 주문 물품을 겨우 납기에 배달했다고 하니 의심의 마음을 가질 여유나 있었을까?
아내도 모르게 아이 둘이나 낳고 호적에 까지 올려놓았으니 남자의 객기에 놀란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봄비가 제법 굵어지는 어느 날.
B는 남편의 여자 친구가 낳은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할 무렵 가방과 학용품을 사들고 불시에 그 여자의 집을 방문을 했단다. 그런데 마침 자신의 남편과 여자 친구가 대낮에 사랑을 나누고 있더란다.
본처가 찾아 온 것도 모르고 열심히 살 절구를 찧고 있었으니 얼마나 기막힌 노릇이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제가 잘못한 거 같아요.
남자가 한 여자에게 매어 산다는 것도 비극이잖아요? 남자가 한두 번 일탈하는 것이 죄가 되나요? 내가 통 크게 용서할 줄도 모르고 왜 잔인하게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어요.”
“이 바보야, 여자라면 그 정도 질투는 할 줄 알아야지. 네가 천사냐?”
남동생의 비난에도 장례식장에서 마냥 울기만 하던 모습이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었다.
남편은 그날 놀란 나머지 한쪽 다리가 마비되는 증세로 1년 가까이 물리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통원치료를 받고 귀가하던 어느 날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그만 트럭에 치어 목숨을 잃었다.
그 후 B는 슬픔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반갑게 맞았다. 재혼을 하라는 권유도 늘 생각해 보겠다는 말로 피했다.
B의 소식은 소원할 쯤 되어서야 공원묘원이나 집에서 전화를 걸었다.
“오라버니, 제가 죽으면요. 내 몸을 다른 사람이 만지는 게 싫어요. 거친 삼베옷 말고 제가 입던 옷 중에 입혀서 그 이 옆에 묻어주었으면 좋겠어요.”
“술 마신 모양이구나. 샤워하고 어서 자라!”
“오라버니, 나 그 이한테 떳떳한 아내로 살았어요. 아이들도 잘 길렀고 바람도 안 피웠고-.”
평소 밝고 명랑해 절대 그렇게 자책할 사람이 아니라고 하던 사람들도 혀를 내두를 만치 지고지순한 마음이 주변 사람들을 아프게 했다.
진눈개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해서 압구정동에 나갔다가 예식장을 들러왔는데 땅거미가 지는 해거름에 전화가 왔다.
“오라버니, 용인이에요. 그 이 누워있는 곳에 왔는데 다리가 풀려서 못 내려가겠어요.”
자가용을 가지고 나온 친구를 설득해 묘원을 찾았더니 무덤에 하얀 비닐을 덮어놓고 자신은 우산을 쓰고 옆에 앉아 울고 있었다.
“맑은 날 다 놔두고 진눈개비가 내리는 이 궂은 날에 왜 묘원까지 왔어?”
“미국에 있는 큰애가 나도 모르게 결혼을 했나 봐요. 작은 머슴애는 이탈리아 애하고 동거 한 지 2년이나 됐대요. 제 존재감을 모르겠어요. 내가 왜 살아야 하는 지?”
친정 남동생이 미국에 갔다가 전한 뉴스라고 했다.
“오늘 그 소식을 듣고 남편의 어깨가 생각나더라고요. 그 이가 살아있었으면 어떻게 나를 위로 해 주었을까?”
며칠 뒤 근황이 궁금해 워커힐 집을 찾아갔다.
뜨거운 녹차 라테 한 잔을 마시다 보니 김 서린 창가에 B가 손가락 글씨로 씀직한 글씨가 있었다.
‘여보, 내가 당신 곁에 누울 수만 있다면-.’
외로움의 안개가 방안 가득히 창가에까지 번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