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부(洪時溥)를 검열 로, 홍수보(洪秀輔)를 병조 참판 으로 삼았다. 모두 구전(口傳)이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판중추부사 김치인(金致仁)이 차자(箚子)를 올려 자신을 논열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차자의 대략에,
“신이 정이환(鄭履煥)의 소(疏)를 보니, 병술년 인삼(人蔘)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김귀주(金龜柱)의 소에서 이미 드러내 말하였는데, 병술년 당시의 제거(提擧)는 바로 신이었습니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신이 상세히 기억하지는 못합니다만, 옮겨 직숙하면서 초조하게 지내던 때였습니다.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耈)가 의관(醫官) 을 보내 신에게 말을 전달하기를, ‘성상께서 아직도 환후 중이시니 순전히 나삼(羅蔘)을 써야 효과를 볼 수 있을 텐데, 진어(進御)하는 탕제(湯劑)에 공삼(貢蔘)과 나삼을 섞어 쓴다고 하니, 어째서 순전히 나삼만 쓰지 않는 것이오?’ 하였습니다. 봉조하(奉朝賀) 홍봉한(洪鳳漢)이 영상(領相)으로서 마침 들어와 곁에 있다가 신에게 말하기를, ‘현재 나삼의 여분이 많지 않은바, 순전히 나삼만 쓰다가 모자라게 되면 그때 가서는 순전히 공삼만 써야 될 상황에 이를 것이니, 그렇게 되면 더더욱 답답하고 초조하지 않겠소?’ 하였습니다. 신은 보내 온 말씀도 실로 일리가 있다고 여겼지만, 영상 이 말씀하신 이런 염려도 없지 않아 다시 헤아려 보고 잘 처리하겠다는 뜻으로 의관 을 통해 회답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종척(宗戚)의 집안에서 동삼(童蔘)을 보내 왔기에 나삼하고 같이 순전히 탕제에 썼습니다.
그 당시 오고 간 사연은 이러한 데 불과하니, 신이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김귀주는 ‘신을 면대하여 말하였다’ 하고, 정이환은 ‘제거를 조종하였다’고 하니, 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 어쩌면 이렇게 다르단 말입니까. 신이 약을 맛보는 직임에 있으면서 남의 조종을 받는다면 그 죄가 어떠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속히 위벌(威罰)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지금은 경이 사사로운 것을 말할 때가 아니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국문(鞫問)하는 자리에 참석하라.”
하고, 이어 겸춘추 에게 전유(傳諭)하도록 명하였다.
부수찬 윤동만(尹東晚)의 상소를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 상소의 대략에,
“난역(亂逆)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어찌 홍봉한, 홍인한(洪麟漢), 정후겸(鄭厚謙)과 같은 자들이 있겠습니까. 헌신(憲臣)과 측근에서 모시는 신하들이 차례로 조사해 밝혔는데도 끝내 윤허하지 않으시니, 전하를 위해 안타까울 뿐입니다.
홍인한과 정후겸이 서로 작당하여 시종일관 위세를 부린 데 이르러서는 그 흉악한 정절(情節)을 성상께서 환히 알고 계시는 바입니다. 속히 밝은 명(命)을 내려 시원스레 왕법(王法)을 바로잡으소서.
영중추부사 김상복(金相福)은 정후겸에게 아첨하고 달라붙어서 일마다 그의 지시를 받았고, 지난겨울 대리 청정(代理聽政)을 시작할 때는 심상운(沈翔雲)을 꼬드겨 내어 어지러이 수작을 부렸습니다. 신은 김상복에게 우선 삭출(削出)하는 형전을 시행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 참판 원의손(元義孫)은 호남의 관찰사로 있으면서 장죄(贓罪)를 범한 것이 대각(臺閣)의 말과 같을 뿐 아니라, 정후겸에게 붙어서 남쪽의 재화를 실어나른 죄는 조엄(趙曮)보다도 큽니다. 신은 원의손을 한결같이 조엄의 전례대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사직 정환유(鄭煥猷)는 비굴하게 굴면서 종기라도 빨아 줄 듯이 정후겸에게 아첨하였고, 5000섬을 비축해 놓았다고 거짓으로 떠벌려 진휼(賑恤)을 잘한 명목으로 분수에 넘치는 은혜로운 자급(資級)을 받았으며, 거금(巨金)을 몰래 뇌물로 바쳐 장수의 천망(薦望)에 들려고 도모하였습니다. 신은 그의 자급을 깎고 변방 원지(遠地)에 찬배(竄配)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삭직(削職)한 죄인 심욱지(沈勖之)는 사람됨이 비루하고 사악합니다. 심상운을 징벌하는 것이 얼마나 큰 논의입니까. 그런데도 대사간 의 신분으로 멋대로 정계(停啓)하였으니, 속히 변방으로 추방하는 형률을 시행해야 합니다.
천극(荐棘)한 죄인 윤태연(尹泰淵)은 어두운 밤을 틈타 정후겸의 집에 드나들었으니, 당악(黨惡)한 죄에 대해 해당되는 형률을 시행하소서.
아, 저 김종정(金鍾正)은 윤태연 무리들의 배소를 옮기던 날 그들을 돌봐 주는 데 급급하여 도리어 가까운 곳에 배소를 정해 놓았으니, 그가 자기 당인(黨人)을 아낀 죄에 대해 속히 변방으로 추방하는 형률을 시행하는 것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 두 번째 상소의 대략에,
“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신진(新進)으로 갑작스레 홍문관 의 직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 역적들에 대한 성토가 한창인 때였는데, 역적을 성토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일의 경중에 대해서는 살필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삼사(三司)의 논의가 홍봉한에게 더욱 엄한 것을 보고는, 성상께서 하교하신 의친(議親)의 의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고인(古人)들이 죄를 성토하던 성심만을 망녕되이 본받았습니다. 성상의 앞에 이르자 인륜(人倫)으로 깨우쳐 주시니,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말을 못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속히 위벌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대죄(待罪)하지 말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윤동만은 이미 다시 소를 올리고 대죄하였으니, 원소(原疏)는 더 이상 논할 것 없다. 돌려주라.”
하였다.
[주D-001]이렇게 이렇게[如是如是] …… 것이겠습니까 : 홍봉한의 죄상을 논한 정이환(鄭履煥)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봉조하 가 아뢰기를, ‘저하께서 훗날 수은묘(垂恩墓)를 추숭(追崇)하지 않으신다면, 무신년(戊申年)의 도당들이 이를 빙자해 추대하려는 일을 벌이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아마도 이렇게[如是] 될 듯하니, 이렇게[如是] 될 때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하였다.……대개 그의 마음을 따져 보면 비록 후환을 염려하는 데서 나왔겠지만, 그 말을 논해 보면 실로 망발(妄發)인 것이다.” 하였다. 《正朝實錄 卽位年 三月二十七日》
[주D-002]의친(議親) : 팔의(八議)의 하나로, 임금의 단문 이상친(袒免以上親), 왕대비ㆍ대왕대비의 시마 이상친(緦麻以上親), 왕비의 소공 이상친(小功以上親), 세자빈의 대공 이상친(大功以上親)의 범죄자를 처벌할 때에 형(刑)의 감면을 의정(議定)하던 일이다. 여기서는 홍봉한이 정조의 외조부이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좌의정 정존겸(鄭存謙)이 상소하여 새로 제수된 의정의 직임을 사양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비답하기를,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지 못하매 목욕하고 토벌을 청하는 의리가 중하다지만, 지금이 어찌 경이 전례를 끌어다가 사양할 때이겠는가. 경의 평온하고 단아한 절조를 알고 경의 공평한 마음을 가상하게 여기고 있으니, 즉위한 초기에 선발한 뜻이 어찌 얄팍하다고 하겠는가. 공손히 침묵하고 있어야 할 때라서 내가 많은 말을 고할 수는 없다. 경은 나의 이러한 뜻을 이해하고 즉시 나와서 일을 보아 시국의 어려움을 널리 구제하라.” 하고, 이어 승지 에게, 전유하고 기필코 함께 와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주D-001]목욕하고 …… 의리 : 진성자(陳成子)가 간공(簡公)을 시해하자, 공자(孔子)가 목욕하고 애공(哀公)에게 조회하여 군주를 시해한 데 대해 토벌을 청한 데서 나온 말이다. 《論語 憲問》
총호사(總護使) 및 산릉도감 당상(山陵都監堂上) 을 여차(廬次)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총호사 김양택(金陽澤), 도감 당상 윤동섬(尹東暹), 예조 판서 정상순(鄭尙淳), 상지관(相地官) 김기량(金基良)ㆍ김전(金田)ㆍ이형윤(李衡允)ㆍ정여경(鄭餘慶)이 나왔다.
○ 소녕원(昭寧園) 왼쪽 두 번째 언덕을 재차 간심(看審)하고 들어왔다.
○ 내가 이르기를,
“간심한 소견이 어떠한가?”
하니, 김양택이 아뢰기를,
“문외한의 안목으로 보아도 산세가 웅장하여 용과 범이 모두 이를 형국으로, 실로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하고, 정여경이 아뢰기를,
“묘혈(墓穴)의 형세가 귀하고 길한 상이며, 행룡(行龍)이 삼엄하여 24위(位)가 모두 흠이 없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아직 재혈(裁穴)하지 않았는가?”
하니, 김양택이 아뢰기를,
“3차 간심 때 완전히 정한 뒤 할 것입니다.”
하였다.
소녕원에 고유(告由)하는 것을 규례를 살펴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소녕원의 왼쪽 두 번째 언덕의 간심한 부분을 벌목할 때 으레 고유한다고 하니, 즉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규례를 살펴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라 감사 이보행(李普行), 내국 제조(內局提調) 서명선(徐命善), 상사(上使) 낙림군(樂林君) 이연(李埏), 호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을 여차에서 소견하였다.
○ 이보행이 하직 인사를 올리고, 이연이 복명(復命)하였다.
○ 서명선이 아뢰기를,
“신이 당초에 정후겸과 친하게 지냈던 것은 대대로 사귀어 온 정의(情誼)가 있었기 때문인데, 몇 해 전부터 관계를 끊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알고 지냈었으니, 이런 이유로 죄를 받게 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무사히 다녀왔는가?”
하니, 이연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상중이라 정신이 없어 길게 말하지 못하겠으니,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어제각(御製閣 규장각(奎章閣))의 터를 닦는 것은 거의 다 했는가?”
하니, 구윤옥이 아뢰기를,
“역사(役事)가 방대하여 아직 공사를 반도 못 했습니다.”
하였다.
[주D-001]지난해에…… 놓은 것 : 홍인한이 영조에게,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가 당파, 조정의 일, 이조 판서 와 병조 판서 등 세 가지 사안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三不必知]는 설을 제기한 데 대해, 행 부사직 이던 서명선이 홍인한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것을 말한다.
삭전(朔奠)을 대신 지내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삭전을 이미 친행하였으나 건강에 차도가 없으니, 오늘은 대신 올리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에 대해 하교하여 유시한 내용을 기주(記注)에 싣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이조 판서 가 아뢴 것은 고인(古人)에게도 부끄럽지 않다. 하물며 수립한 뒤로 정후겸과는 향기와 악취처럼 혹은 얼음과 숯처럼 서로 관계 맺지 않은 것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도 오히려 다시금 자신을 인책하니, 내가 이 때문에 가상하게 여긴다. 내 뜻은 이미 연석(筵席)에서 유시하였으니, 이 하교를 기주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산릉에 나아가는 대신(大臣) 이하에게 내일 하직 인사를 올리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산릉에 나아가는 대신 이하는 내일 하직 인사를 올리고,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과 행 부사직 김한기(金漢耆)도 일체 나아가라.”
하였다.
이일화(李一和)를 의금부로 하여금 대령시키고, 문씨(文氏)를 법대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부사(副使) 가 들어오지 않은 이유를 물어 보니, 유학(幼學) 이일화의 상소 때문인데 임오년의 일에 관계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의당 선조(先朝)의 유교(遺敎)대로 엄히 처벌해야 할 것이다. 우선 형조에 단단히 가둬 두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죄인 이일화를 의금부로 하여금 대령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문씨를 이미 안치(安置)하였으니, 그의 작호(爵號)를 빼앗는 것이 그 다음 일이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법전대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주D-001]문씨(文氏) : 영조의 후궁인 숙의(淑儀) 문씨를 말한다.
[주D-002]임오년의 일 : 영조 38년(1762) 5월에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인 일을 말한다.
김치현(金致顯)을 잡아 가두고, 격식을 갖추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김치현을 아무 이유 없이 배소로 보낼 수는 없다. 공제(公除)가 끝난 뒤 내가 한번 심문하려 하니 친국(親鞫)을 위해 잡아 가두고, 제반 거행은 모두 격식을 갖추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죄를 지은 신하 김약행(金若行)이 소를 올린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비답하기를,
“이광좌(李光佐), 최석항(崔錫恒), 조태억(趙泰億)에 대해서는 이미 선조(先朝)에서 정한 의리가 있는데 다시 무엇을 미적거리겠는가. 속히 추탈(追奪)하는 벌을 시행하라. 계묘년 과시(科試)의 방목(榜目)에 든 사람들은 모두 선조에서 등용한 신하인데다 선조께서 하교하신 것이 또 어떠하였는가. 이번에 네가 진달한 것은 너무도 기탄없이 군 것이었다. 판중추부사 김상철(金尙喆)의 일은 내가 목격한 것인데, 너는 어찌하여 이렇게 번거롭게 진달하는가. ‘역적에 편당(偏黨)하였다.[黨逆]’란 말은 극도로 날조한 것이다. 이런 풍조는 선대왕께서 일찍부터 통렬히 배척하시던 것이다. 아래 조목의 일은 이미 선천(先天)에 속한 일인데다, 더구나 숙조(肅朝)께서 병신년에 내리신 처분이 해와 별처럼 환하게 게시되어 있는데, 너는 어째서 이 문제에 대해 줄줄이 늘어놓는 것인가. 아, 요즘 상소가 날로 쌓여 분위기가 심상찮은데, 너처럼 황당한 잡배(雜輩)들이 다시금 제멋대로 날뛰는 습성을 부리고 있으니, 실로 놀랍고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번에 내리는 이 비답은 언로를 폐하지 않으려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니, 너는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주D-001]이광좌(李光佐), 최석항(崔錫恒), 조태억(趙泰億) : 경종(景宗) 당시 훗날의 영조인 연잉군(延礽君)의 세제(世弟) 책봉을 반대한 인물들이다.
[주D-002]계묘년 …… 사람들 : 소론(少論)이 신축년과 임인년에 노론(老論)을 역적으로 몰아 쫓아낸 후, 이를 경하하기 위해 경종 3년(1723)에 시행한 토역 정시(討逆庭試)에 합격한 사람들을 말한다.
[주D-003]병신년에 내리신 처분 : 숙종 42년(1716)에 이른바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대립에서 송시열이 옳다고 판정한 숙종의 처분을 말한다.
김약행을 종신토록 금고(禁錮)하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정당치 못한 길을 이용하고 비류(匪類)들과 결탁하는 일은 사대부들이 욕하고 조정이 배척하는 짓이다. 지금은 국정을 담당하는 초기이니, 풍속을 바로잡고 세속을 권면하고자 함에 있어서 의당 이런 무리들부터 우선적으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김약행과 같은 자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니, 놀랍고 통탄스러운 마음에 한번 처분을 하려고 했었다. 온갖 사람들이 모두 말할 수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의 소행으로 볼 때 어찌 감히 입을 열어 조정의 일에 대해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언로를 폐하지 않는다는 의리 때문에 원소(原疏)에 대해 비답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에 대해 너그러이 용서할 수는 없다. 김약행을 종신토록 금고하라.”
하였다.
친국(親鞫)을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비록 공제(公除) 전이기는 하지만 이는 선대왕까지 무함하는 대역 부도(大逆不道)이니, 전정(殿庭)에서 친히 국문하여 선대왕의 영전에 고하여야 할 것이다. 시원임 대신을 명초(命招)하고, 의금부의 당상 들은 패초(牌招)하고, 문사낭청(問事郎廳) 을 즉시 계하(啓下)하라. 나는 이일화를 미천한 놈이라 여겨 아침에 이미 하교하였고, 이덕사(李德師)는 사형에 처한 뒤에야 선대왕의 뜻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니, 즉시 거행하라.”
하였다.
궁성(宮城)의 호위는 그만두고 훈련대장 을 패초하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궁성의 호위를 이미 그만두도록 한만큼 갑진년의 예에 따라 연하(輦下)의 친병(親兵)을 갖추어야 하니, 협련군(挾輦軍) 100명을 대령하라. 삼영(三營)의 대장 이 궐문 밖에서 표하군(標下軍)만을 인솔하고 파수하는 것 역시 갑진년의 예대로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궁성의 호위는 이미 그만두도록 하였으니, 다만 내외에 입직하는 훈국(訓局), 금위영, 어영청의 군사들을 포장(布帳) 바깥쪽에 작문(作門)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장전(帳前)에는 금군 삼번(三番)이 시위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죄인을 대궐에 올릴 때 만약 서찰을 은밀히 전하거나 잡인을 만나 보는 일이 있으면 훈국은 으레 이를 금단하여야 할 것이다. 적간(摘奸)할 때 만약 혹시라도 발각되어 잡힌다면 훈련대장 에게 해당되는 형률을 시행할 것이다. 훈련대장 을 패초하여 전교를 듣게 하라.”
하였다.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친국을 행하였다. 영의정 김양택(金陽澤), 좌의정 정존겸(鄭存謙), 영중추부사 김상복(金相福), 판중추부사 이은(李溵), 판의금부사 정홍순(鄭弘淳), 지의금부사 이계(李溎), 동지의금부사 박상로(朴相老)ㆍ조준(趙㻐), 대사헌 박상덕(朴相德), 대사간 정이환(鄭履煥), 정언 송환억(宋煥億), 문사낭청 이병모(李秉模)ㆍ유의양(柳義養)ㆍ정민시(鄭民始)ㆍ김이정(金履正)ㆍ조상진(趙尙鎭)ㆍ심풍지(沈豐之)ㆍ서유방(徐有防)ㆍ이보온(李普溫), 형방 도사 장석관(張錫寬)ㆍ이두원(李斗源), 문서색 도사(文書色都事) 심희(沈禧)ㆍ이경열(李景說)이 나왔다.
○ 백포립(白布笠)과 포직령(布直領)을 갖추고 금상문에 나아가 어좌(御座)에 올랐다. 정홍순이 아뢰기를,
“어느 죄인을 올립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이덕사를 올리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의금부 당상 들은 모두가 선대왕의 신하들이건만, 이 흉적들을 보고도 어찌 이렇게 안일하게 시간을 끌고 있단 말인가. 의금부 당상 을 모두 삭직(削職)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조 판서 서명선이 판의금부사 가 되고, 행 부사직 서유린(徐有隣)과 대사간 정이환과 승지 김익(金)이 동지의금부사 가 되어, 우선 장전(帳前)에 입시하고 사은(謝恩)은 나중에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자리가 빈 승지 의 대임은 도청(都廳) 정민시(鄭民始)가 하되, 우선 입시하고 사은은 나중에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이덕사에게 신장(訊杖) 몇 도(度)를 언도하였는가?”
하니, 서명선이 아뢰기를,
“9도입니다.”
하였다. 서명선이 이덕사의 소매 속에 있던 소초(疏草)를 올리자, 하교하기를,
“이 소초는 너무나 흉악하고 참담하다.”
하였다. 죄인에게 대역(大逆)에 대한 지만(遲晚)을 받은 뒤 하교하기를,
“죄인 이덕사가 이미 대역 부도 무상(大逆不道誣上)에 대해 지만하였다. 예로부터 흉역(凶逆)이 어찌 한정이 있었겠는가마는, 오늘날의 이덕사 같은 자는 천고에 처음 있는 역적이라 하겠다. 내일 아침에 율문(律文)에 따라 서소문(西小門) 밖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하되, 백관(百官)은 규례대로 서립(序立)하여 조정의 신료들로 하여금 경계하고 두려워할 바를 알게 하라.”
하였다.
친국하는 처소를 내병조(內兵曹)로 옮겨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이렇게 비가 쏟아지니 배립(排立)한 군병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 친국하는 처소를 내병조로 옮겨 설치하라.”
하였다.
한광계(韓光綮), 조재한(趙載翰), 이만식(李萬軾)을 잡아 조처하였다.
○ 한광계 등이 국문한 자들의 공초(供招)에 나왔다.
문성국(文聖國)의 어미를 이번에 연좌하여 제주목(濟州牧)의 비(婢)로 삼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문성국의 어미를 이번에 연좌하라. 그는 장발(長髮)한 요승(妖僧)을 데리고 궁중에 드나들었으니, 죄악이 차고 넘쳐 도성에 둘 수 없다. 제주목의 비로 삼아 당일로 압송해 넘겨 주라.”
하였다.
승지 정문계(鄭文啓)를 체직하고, 오재소(吳載紹)로 대치하였다.
○ 하교하기를,
“동부승지 를 체직하고, 전망 단자(前望單子)에 올라 있는 오재소를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라.”
하였다.
4월 2일
조덕성(趙德成), 이미(李瀰), 심이지(沈履之)를 부총관 으로 삼았다.
○ 하교하기를,
“자리가 빈 총관 의 대임을 구전으로 차출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대전관(代奠官) 과 총관 의 직임을 체직하고, 일체 구전으로 차출하라.”
하였다.
훈련대장 구선복(具善復)을 파직하고, 장지항(張志恒)으로 대치하였다.
○ 하교하기를,
“훈련대장 구선복을 우선 파직하고, 그 대신 장지항을 훈련대장 으로 삼으라. 그리고 어영대장 의 망(望)을 즉시 의망해 들이라.”
하였다.
김한기(金漢耆)를 어영대장 으로 삼았다. 비천(備薦)이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좌포도대장 장지항을 체직하고, 이한응(李漢膺)으로 대치하였다.
○ 하교하기를,
“훈련대장 장지항이 겸임한 포도대장 직을 체직하고, 구전으로 의망해 들이라.”
하였다.
국장도감 당상(國葬都監堂上) 에 조명정(趙明鼎)을, 도청(都廳) 에 이병모(李秉模)를 차하(差下)하였다.
○ 본 도감이, 당상 정홍순(鄭弘淳)이 삭직되고 도청 정민시(鄭民始)가 승지 로 옮겨 제배되었기에 계청(啓請)하여 차하한 것이다.
문사낭청 에 이현영(李顯永)을 차하하였다.
○ 국청(鞫廳)이 계청하여 차하한 것이다.
양사(兩司)가 합계(合啓)하여 김상로(金尙魯) 등을 율문대로 처리하도록 청한 데 대해,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대사헌 박상덕(朴相德), 집의 이회수(李會遂), 부교리 이병모(李秉模), 정언 송환억(宋煥憶)이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양사가 합계하여 심상운(沈翔雲)을 국문하도록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합계하기를,
“심상운은 정후겸(鄭厚謙)에게 기생하면서 그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종전의 서찰 한 통은 지시하는 의미가 음흉하여 해를 넘기도록 쟁집(爭執)하였으나 성상께서는 아직도 주벌을 미루고 계십니다. 청컨대, 흑산도(黑山島)에 천극(荐棘)한 죄인 심상운에 대해 속히 엄하게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 내도록 하소서.”
하여, 비답하기를,
“우선 대정현(大靜縣)에 천극하라.”
하였다.
내병조(內兵曹)에 나아가 친국(親鞫)을 행하였다. 좌의정 정존겸(鄭存謙), 판의금부사 서명선(徐命善), 동지의금부사 서유린(徐有隣)ㆍ정이환(鄭履煥)ㆍ김익(金熤), 집의 이중복(李重馥), 장령 윤장렬(尹長烈)ㆍ윤재순(尹在醇), 지평 윤상동(尹尙東), 정언 송환신(宋煥信), 문사낭청 이병모(李秉模)ㆍ유의양(柳義養)ㆍ심유진(沈有鎭)ㆍ김이정(金履正)ㆍ이현영(李顯永)ㆍ심풍지(沈豐之)ㆍ서유방(徐有防)ㆍ이보온(李普溫), 형방 도사 장석관(張錫寬), 문서색 도사 심희(沈禧)가 나왔다.
○ 백포립(白布笠)과 포직령(布直領)을 갖추고 여(輿)를 타고 내병조로 나아가 어좌에 올랐다.
○ 죄인 조헌진(趙獻鎭)과 이일화(李一和)를 올려 대질(對質)시키자 조헌진이 말이 막혔다. 정존겸이 아뢰기를,
“조헌진의 거짓된 단서가 이미 드러났으니 형을 가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이동양(李東讓) 부자를 모두 잡아오라.”
하였다. 이병모가, 조헌진이 구두로 공초(供招)한 것을 써서 아뢰기를,
“공초의 내용 가운데 감히 아뢰지 못할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들이기만 하라.”
하였다. 서명선이 아뢰기를,
“조헌진은 이미 차수(次數)를 채웠습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1차 뒤에는 몇 도(度)를 쳤는가?”
하자, 서명선이 아뢰기를,
“7도입니다.”
하였다. 한광계(韓光綮)를 올리자, 형을 시행하여 장(杖)을 치도록 하였다. 죄인 이훈제(李勛濟)를 올렸다. 하교하기를,
“최재흥(崔載興)이 이미 죄인의 공초에서 나왔으니, 잡아오라.”
하였다. 조방진(趙方鎭)을 올려 이훈제와 대질시키고 이동양을 올려 조방진과 대질시킨 뒤,하교하기를,
“선대왕께서 빈소에 계시던 날 감히 ‘본심(本心)’이란 두 글자를 말하였으니, 대역 부도를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하교하기를,
“유성모(柳成模), 이동형(李東馨), 정우순(鄭宇淳)은 우선 금부에서 추고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금오 당상 을 일체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좌포도대장 이한응을 패초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금부 도사 를 태거(汰去)하라.”
하였다. 조재한(趙載翰)을 올리자, 하교하기를,
“죄인에게 형을 시행하되, 장(杖) 한 대에 죽지 않으면 나졸을 형추(刑推)할 것이니, 각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문목(問目)을 내어 공초를 받았다. 대간 들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조재한은 이덕사(李德師)와 이미 심보가 같고 게다가 적당의 와주(窩主)이니, 그를 지레 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은 형을 멈추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그렇겠다. 우선은 남간(南間)에 하옥하라.”
하였다. 조재한의 셋째 아들을 올려 장 13도를 쳤으나 불복(不服)하여, 하교하기를,
“우선 형을 멈추고 남간에 하옥하라.”
하였다. 여를 타고 대내로 돌아왔다.
친국은 하교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친국할 때 죄인을 대궐에 올리는 것은 하교를 기다려 거행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내일 조재한, 조방진, 조헌진, 한광계, 이훈제, 이동양, 이일화, 박상로(朴相老), 송익언(宋翼彦), 조운형(趙雲亨), 목조수(睦祖洙), 목종언(睦宗彦)은 궐문을 열거든 대궐에 올리고, 그 나머지 여러 죄수들은 우선 본부에 수감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동형, 정우순, 임성(任珹), 유한신(柳翰申)을 일체 대궐에 올리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4월 3일
내병조에 나아가 친국을 행하였다.
영의정 김양택(金陽澤), 영중추부사 김상복(金相福), 좌의정 정존겸(鄭存謙), 판중추부사 이은(李溵), 판의금부사 서명선(徐命善), 동지의금부사 정이환(鄭履煥)ㆍ김익(金熤), 집의 이중복(李重馥), 장령 윤장렬(尹長烈)ㆍ윤재순(尹在醇), 정언 송환억(宋煥憶), 지평 윤상동(尹尙東), 문사낭청 이병모(李秉模)ㆍ유의양(柳義養)ㆍ심유진(沈有鎭)ㆍ김이정(金履正)ㆍ이현영(李顯永)ㆍ심풍지(沈豐之)ㆍ서유방(徐有防)ㆍ이보온(李普溫), 형방 도사 장석관(張錫寬)ㆍ이두원(李斗源), 문서색 도사 심희(沈禧)ㆍ이경열(李景說)이 나왔다.
○ 백포립과 포직령을 갖추고 여를 타고 내병조로 나아가 어좌에 올랐다.
○ 한광계와 이동양(李東讓)을 올려 대질시키고, 한광계에게 형을 가하였다. 하교하기를,
“신획 도사(訊畫都事) 를 병조로 하여금 곤장 5도를 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홍국영(洪國榮)이 아뢰기를,
“비록 근례(近例)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도사 는 음관(蔭官) 인데 병조로 하여금 곤장을 치게 하는 것이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의당 용서하는 방도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비록 전례가 있기는 하지만 승지 가 아뢴 것이 일의 체모에 합당한 듯하니, 도사 에게 곤장을 치라는 명은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율관(律官) 은 병조로 하여금 곤장 20도를 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신장(訊杖) 획수의 고하(高下)로써 다스리는 사안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법이다. 그런데 율관 의 신분으로 오직 장전(帳前)의 위엄과 노기를 띤 정도만 살피면서 임의로 조절을 하였으니, 이 어찌 조사하는 도리이겠는가. 신장의 획수를 맡은 해당 율관 을 이름을 물어 보아 정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한신(柳翰申)을 올리고 유한신의 소본(疏本)을 들이자, 위엄스럽게 엄히 신문하였다. 목수중(睦秀中)과 조순진(趙純鎭)을 올렸다. 조순진을 목수중과 대질시키자, 조순진이 공술(供述)하기를,
“이 사람은 지난날 왕래하던 사람이 아닙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그렇다면 잘못 잡아온 것이다.”
하고, 하교하기를,
“목조수(睦祖洙)와 목수중은 특별히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조순진과 이동양을 박상로(朴相老)와 대질시켰다. 하교하기를,
“이동양이 다시 공초한 말을 들어 보니, 박상로가 한 흉언의 실상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명확하다.”
하였다. 조헌진(趙獻鎭)과 이범제(李範濟)를 박상로와 대질시키자, 공초의 내용이 이동양의 공초와 같았다. 대신(大臣) 이하가 한목소리로 우러러 주달하기를,
“박상로의 극도로 흉악한 정상이 여지없이 탄로났으니, 극률(極律)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였다.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속히 사형을 시행하도록 우러러 청하였다. 서명선이 아뢰기를,
“신들은 이 흉언을 듣고 원통하여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신들이 의당 직접 그를 쳐야 합니다.”
하였다. 여러 승지 와 사관 , 문사낭청 , 시위한 여러 신들, 금오 당상 , 시위한 장사(將士)와 군병들이 각각 가지고 있는 물건으로 일시에 한꺼번에 쳤다. 하교하기를,
“이렇게 하면 지레 죽게 될까 염려된다.”
하고, 금지시켰다. 하교하기를,
“내 어찌 오늘날 이런 흉언을 들을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고, 이어 오열하며 눈물을 흘리자, 신하들도 눈물을 흘리며 차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러한 극역(極逆)은 급하게 정형(正刑)에 처할 수 없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백관과 도민(都民)들을 철물교(鐵物橋)에 대대적으로 모으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결안(結案)을 봉입한 뒤 속히 근각(根脚)을 들이는 것을 즉시 거행하라.” 하였다. 여를 타고 대내로 돌아왔다.
[주D-001]근각(根脚) : 죄를 범한 사람의 생년월일, 용모 및 그의 조상을 기록한 서류를 말한다.
친국을 우선 파하고, 정국(庭鞫)하는 처소는 내병조로 하도록 명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빈청(賓廳)이 진계(陳啓)하여 김상로(金尙魯) 등을 정죄(正罪)하도록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진계하기를,
“김상로는 세자궁을 위협하고 핍박하여 나라의 근본을 동요시켰으니, 그의 죄상을 말하자면 만 번 주륙하는 것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저 문씨(文氏)는 본래 후궁(後宮)으로서 세자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도록 도모하였으니, 죄가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만큼 그의 작호(爵號)를 거두고 사제(私第)에 안치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정후겸 모자의 극도로 흉악한 죄상에 대해 국법이 거행되지 않아 여론이 더욱 격분하고 있습니다. 홍인한(洪麟漢)은 정후겸과 결탁하여 현저하게 대리 청정하는 것을 저해하고 희롱하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의 죄악이 차고 넘치니, 우선 극변(極邊)으로 찬배하는 것은 단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속히 삼사(三司)의 청을 따라 주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죄에는 대소(大小)가 있고, 일에는 당부(當否)가 있는 법이다. 진계의 체모를 이루지 못했으니, 경들을 위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였다.
[주D-001]정후겸 모자 : 정후겸(鄭厚謙)은 영조의 아홉째 딸인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이다.
시원임 대신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스스로를 인책하면서 처분을 내려주기를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영의정 김양택(金陽澤), 판중추부사 한익모(韓翼謨)ㆍ이은(李溵), 좌의정 정존겸(鄭存謙)이다.
○ 연명 차자의 대략에,
“아, 죄에 대소가 있고 일에 경중이 있다는 것은, 신들이 아무리 우매하다 해도 어찌 이것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삼가 생각건대, 김상로는 극악한 대죄(大罪)를 지어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할 것을 도모한 것이 단안(斷案)이라면, 문씨의 죄도 바로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정후겸 모자와 홍인한의 일로 말하자면 종묘 사직의 대계(大計)를 저지한 것이니, 실로 이른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입니다.
신들이 징토(懲討)하는 데 급급하여 진계의 체모가 합당한지를 살필 겨를이 없었으니,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 이에 감히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니 처분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먼저 신들의 죄를 다스리시되, 신들이 청한 것에 대해서는 속히 윤허를 내려 따라 주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조금 전의 비지(批旨)가 어찌 경들을 깊이 비난하는 뜻에서 한 것이겠는가. 경들을 깨우쳐 주려고 그런 것이니, 이 또한 서로 간에 미더워지고자 하는 한 가지 일인 것이다. 현재 커다란 옥사가 한창 벌어져 국사(國事)가 해이해지고 있으니, 믿고 의지할 데라곤 경들뿐이다. 경들은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즉시 나와 일을 보라.”
하고, 이어 사관 을 보내어 시원임 대신에게 전유(傳諭)하도록 명하였다.
4월 4일
내병조(內兵曹)에 나아가 친국을 행하였다.
영중추부사 김상복(金相福), 좌의정 정존겸(鄭存謙), 판의금부사 서명선(徐命善), 동지의금부사 서유린(徐有隣)ㆍ정이환(鄭履煥)ㆍ김익(金熤), 대사헌 박상덕(朴相德), 집의 이회수(李會遂), 장령 윤장렬(尹長烈)ㆍ윤재순(尹在醇), 지평 윤상동(尹尙東), 정언 송환억(宋煥億), 문사낭청 이병모(李秉模)ㆍ유의양(柳義養)ㆍ심유진(沈有鎭)ㆍ김이정(金履正)ㆍ이현영(李顯永)ㆍ심풍지(沈豐之)ㆍ서유방(徐有防)ㆍ이보온(李普溫), 형방 도사 안정헌(安廷瓛)ㆍ장석관(張錫寬), 문서색 도사 윤행엄(尹行儼)ㆍ이경열(李景說)이 나왔다.
○ 백포립(白布笠)과 포직령(布直領)을 갖추고 여를 타고 내병조로 나아가 어좌에 올랐다.
○ 조운형(趙雲亨)을 올리자, 하교하기를,
“이 죄인은 달리 물을 것이 없다. 박상로의 흉언(凶言)에 동참한 것을 사실대로 불었으니, 이는 지만(遲晚)한다는 의미이다. 대신(大臣)은 문목(問目)을 내어 신장을 쳐 공초를 받으라.”
하였다. 이범제를 올리자, 하교하기를,
“조재한(趙載翰), 한광계(韓光綮), 조헌진(趙獻鎭), 목조환(睦祖煥)을 우선 대궐에 올리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이러한 때 호조를 명색만 매어 둘 수 없으니, 호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을 개차(改差)하고 전망 단자를 들이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호조 판서 의 전망 단자 가운데 전 판서 정홍순(鄭弘淳)에게 임명장을 주어 서용한 다음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라.”
하였다.
○ 이범제(李範濟)와 조운형에게 형을 시행하였다. 조헌진을 올리자, 하교하기를,
“이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야 할 자들이지만 아직 결안(結案)을 받지 못했으니, 비록 장(杖)을 쳐서 죽더라도 지레 먼저 사형에 처할 수는 없다. 이범제와 조헌진을 대질시키라.”
하였다. 송익언(宋翼彦)을 올리고, 이준배(李峻培)와 이동양(李東讓)을 제외하고 모두 대궐에 올리고, 목조환도 올렸다.
○ 하교하기를,
“목조환의 수갑을 풀어 준 당해 도사를 태거(汰去)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러한 때 관청에 수령과 변장이 없어서는 안 된다. 장계(狀啓)하여 파직된 자들의 대임을 구전으로 차출하라. 그리고 흥양 현감(興陽縣監) 이만식(李萬軾)을 특교(特敎)로 잡아오는 것은 일의 체모가 자별하니 우선 파출하고, 그의 대임도 구전으로 차출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죄인 송익언, 조회진(曺晦振), 정우순(鄭宇淳), 이동형(李東馨), 유성모(柳成模)는 특별히 방송하라.”
하였다. 이회수가 아뢰기를,
“조재한은 실로 박상로(朴相老)의 와주(窩主)이니, 의당 대역률(大逆律)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그가 이미 ‘상을 무함했다.[誣上]’고 공술하였으니, 이렇게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조방진(趙方鎭), 조헌진, 조순진(趙純鎭)은 법대로 조율(照律)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준배가 이미 이덕사(李德師)의 흉소(凶疏)를 썼으니 심상하게 처리할 수 없다. 한 차례 형문(刑問)하고 극변(極邊)으로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유한신(柳翰申)이 이미 흉소를 올렸으니, 일이 드러난 뒤에 추거(推去)했다고 하여 너그럽게 용서할 수는 없다. 두 자(字) 석 자의 설에 이르러 흉역한 마음이 탄로났으니, 정국(庭鞫)할 때 다시 더 엄하게 형신한 뒤 공초를 받아 아뢰도록 하라.
이일화(李一和)와 이범제는 혹 직접 망측한 소(疏)를 올리기도 하고 부도(不道)한 설(說)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이범제는 이일화의 흉소를 창출하고 박상로의 부도한 짓에 동참하였으니, 두 가지 죄가 다 발각되었다고 하겠다. 정국할 때 각별히 엄하게 형신하여 기어이 자복을 받도록 하라.
조운형은 여러 흉적(凶賊)들이 이미 그의 집에 모여 부도한 말을 하기도 하고 흉소에 대해 논의하기도 하였으니, 동정률(同情律)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엄하게 형신을 받고도 줄곧 버티며 인정하지 않으니 더더욱 너무나 흉악하고 모질다. 정국할 때 지정률(知情律)로 엄히 형신하여 자복을 받으라.
이훈제(李勛濟)는 비록 소를 올리지는 않았지만, 소의 초본이 이미 그의 손에서 나왔는데도 줄곧 자복하지 않고 있으니, 다시 더 엄히 형신한 뒤에 보고하라.
목조환은 목조술(睦祖述)의 형으로, 예전의 작태를 고치지 않고 조운형의 집에 왕래한 사실에 대해 자백을 하였으니, 극변(極邊)에 안치하라.
유한경(兪漢敬)은 그가 해명한 것이 신빙성을 얻지 못했으니, 감률 정배(減律定配)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임성(任珹)은 변방 원지에 정배하라.”
하였다. 여를 타고 대내로 돌아왔다.
친국을 잠시 파하고 죄인을 잡아온 뒤 거행하며, 정국(庭鞫)하는 처소는 내병조에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압송해 가는 나졸(羅卒)들이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에 대해 신칙하였다.
○ 하교하기를,
“각도에 유배하는 것이 이렇게 많다 보면 압송해 가는 나졸들이 외읍(外邑)에 폐단을 끼치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만약 먹을 것을 토색질하거나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이 있으면, 해읍의 수령은 낱낱이 순영(巡營)에 보고하여 즉기지 정배(卽其地定配)한 뒤 장계로 아뢰도록 여러 도의 감사에게 하유(下諭)하라. 만약 이 하교가 내린 뒤에도 해도나 해읍에서 혹시라도 신경쓰지 않고 소홀하게 했다가 뒷날 암행어사 가 가서 이 일이 발각될 경우 해도 도신은 엄중하게 다스리겠다. 이런 내용으로 일체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한광계를 삼수부(三水府)에 안치하였다.
○ 하교하기를,
“한광계가 흉도들과 결탁하여 흉론(凶論)을 얽어낸 진상이 이미 여러 흉적들의 공초에서 드러났고 또 그의 소매 속 서찰에서도 나타났으니, 국법으로 논해 볼 때 어찌 신문(訊問)을 피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그의 공초와 여러 공초들을 참고하여 상세히 조사해 본 결과, 부화뇌동한 심증(心證)은 있지만 부화뇌동한 물증(物證)은 없으니, 공초 가운데 나온 말에 내포된 뜻으로 억측하여 단안을 내려서는 안 된다. 두 차례의 형신으로 그의 죄를 충분히 징계한 만큼 살펴 돌보아 주는 도리에 있어 의당 관대하게 용서하는 형전을 시행해야 할 것이니, 삼수부에 위리안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목조환 등을 안치하고 정배하는 것으로 아뢰었다.
○ 의금부가 아뢰기를,
“죄인 임성은 종성부(鍾城府)에 정배하고, 목조환은 경흥부(慶興府) 극변(極邊)에 안치하고, 유한경은 무산부(茂山府)에 감률 정배하도록 명하셨으니, 압송하겠습니다.”
하여, 모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준배에게 이미 한 차례 형신을 시행하였으니, 경흥부에 정배하기 위해 압송하겠습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그들은 백도(白徒)이니 형조에 내주어 배소로 출발하게 하라.” 하였다.
[주D-001]백도(白徒) : 과거에 합격한 일이 없거나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계(庭啓)하여 김상로(金尙魯)를 노적(孥籍)하고 문씨(文氏)를 처형하도록 속히 유음(兪音)을 내려 달라고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정존겸이다.
○ 비답하기를,
“김상로의 일은 특별히 경들의 청을 따르겠지만, 문씨의 목숨을 살려 준 것은 내게도 생각이 있어서이니, 경들은 그리 알라.”
하였다.
승정원이 의계(議啓)하여 정후겸(鄭厚謙) 모자에 대해 속히 왕법(王法)을 바로잡도록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승지 서호수(徐浩修), 홍국영(洪國榮), 오재소(吳載紹), 김하재(金夏材), 김상무(金相戊), 정민시(鄭民始)이다.
○ 비답하기를,
“이 또한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 나중에 경들이 입시할 때 한번 유시할 것이다.”
하였다.
정언 송환억(宋煥億)이 진계(陳啓)하여 구윤명(具允明) 등을 원지(遠地)에 찬배하도록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진계하기를,
“능은군(綾恩君) 구윤명, 전 판서 구윤옥(具允鈺), 원지에 찬배한 죄인 구상(具庠), 행 부사직 구익(具㢞) 등은 정후겸에게 아첨하며 빌붙어 음모와 비계(祕計)에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구상은 겉으로 청론(淸論)을 가장하여 한두 명의 사류(士類)를 속였습니다. 모두 원지에 찬배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구상이 한두 명의 사류를 속였다고 하는 것은 과연 어떤 사류를 말하는가? 만약 구상에게 농락당했다면 그를 사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수치스럽다. 구윤명과 구익의 일은 비록 징계하여 다스리고 성토해야 되겠지만, 일필(一筆)로 단안을 내리는 것은 청명한 조정의 충후한 기풍에 흠이 된다. 구윤옥이 정후겸과 절교한 데 대해서는 이미 하교가 있었으니, 이것으로 억지로 죄안(罪案)을 꾸며서는 안 된다. 이는 매우 지나친 것이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4월 5일
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 및 조상식(朝上食)을 행하였다.
○의주(儀註)대로 예를 행하였다.
약원의 입진(入診)을 여차(廬次)에서 행하였다. 제조 서명선(徐命善), 부제조 홍국영(洪國榮)이 나왔다.
○ 일차(日次)에 입진을 청한 것이다.
○ 의관 방태여(方泰輿) 등이 체후를 진찰하고는 아뢰기를,
“좌우의 맥후(脈候)가 고르니, 전보다 조금 좋아졌습니다.”
하였다.
진어(進御)하는 육군자탕(六君子湯)을 지금은 잠시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왕대비전이 드실 삼향산(蔘香散)을 내일부터 5첩씩 10첩을 일차(日次)에 지어 들이도록 명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영의정 김양택(金陽澤)이 봉심하는 일로 밖에 있게 된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약원 제조 를 체직해 달라고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비답하기를,
“내국(內局)에 이미 두 제조 가 있으니, 경은 안심하고 일을 마치라.”
하고, 이어 겸춘추 에게 전유하도록 명하였다.
빈전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 의주대로 예를 행하였다.
이병정(李秉鼎)을 대사간 으로 삼았다.
○ 하교하기를,
“일시적인 격려에 지나지 않겠지만, 봉산 군수(鳳山郡守) 이병정을 오늘 상당(相當)한 자리에 의망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봉산 군수 이병정을 대사간 으로 삼을 것이니, 역마를 타고 올라오게 하라. 그리고 자리가 비게 된 수령의 대임을 구전으로 차출하라.”
하였다.
해주 판관(海州判官) 조재리(趙載履)를 개차하였다.
○ 조재리가 양자로 나가 연좌를 면했기 때문에 대신들이 계청하여 개차한 것이다.
이철운(李喆運)을 봉산 군수 로, 정화순(鄭華淳)을 해주 판관 으로, 홍선보(洪宣輔)를 임피 현령(臨陂縣令) 으로 삼았다. 모두 구전이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김이안(金履安)을 강서 현령(江西縣令) 으로 삼았다.
○ 하교하기를,
“자리가 빈 강서 현령 의 대임을 구전으로 의망해 들이라.”
하였다.
내병조에 나아가 친국을 행하였다.
○ 하교하기를,
“죄인 조운형(趙雲亨)이 흉도들과 결탁한 죄상은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할 뿐 아니라, 이범제(李範濟)의 흉소와 박상로(朴相老)의 흉언이 이미 그의 집에서 모였을 때 나왔으니, 그가 어찌 동정률(同情律)을 요행으로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러 공초를 참고해 보면 그 흉언을 들은 것은 다음날이므로, 사전에 흉소에 대해 물어 본 일로 사형을 시행해서는 안 되니, 사형을 감해 정배하라.
이훈제(李勛濟)는 본래 속임을 당한데다 정적(情跡) 또한 용서할 만한 단서가 있으니, 정배하라.
조헌진(趙獻鎭)은 비록 함께 연좌되긴 하였지만 박상로의 흉언을 함께 들은 것뿐이고, 박상로의 부도한 말에 대해서는 그의 아비가 이미 함께 연좌된 사람인데 법에 자식이 아비를 고발할 수는 없다. 그러니 본율(本律)에 따라 정배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유한신(柳翰申)이 소를 올린 한 가지 일은 그에게 단안(斷案)이 될 뿐 아니라, 두 자 석 자의 설은 소장에 쓰기도 하고 공초의 내용 가운데 나오기도 하였다. 유한신도 오장육부(五臟六腑)가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글로 쓰고 입으로 낼 수 있단 말인가. 그 정상(情狀)을 따져 볼 때 너무도 흉악하다. 본건 이외에 이 한 가지만으로도 해당되는 율이 따로 있으니, 두 가지 죄상이 모두 드러나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마는, 다시 더 엄히 형신하여 기어이 자복을 받도록 하라.
이범제는, 박상로의 흉언에 대해 이천해(李天海)와 신치운(申致雲)이 말하지 않은 것을 그가 이미 함께 들었고, 이일화의 소에 이르러서는 또한 그가 선창한 것인 만큼 아무리 살려 주려고 해도 도저히 참작하여 용서할 방도가 없다. 다시 더 엄히 형신하여 기어이 자복을 받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연좌된 죄인 조헌진은 배소로 출발시키지 말고 그대로 가둬 두고 형을 가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국옥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김치현(金致顯)은 본율에 의거해 배소로 출발시키라.”
하였다.
[주D-001]그의 아비 : 조재한(趙載翰)을 말한다.
정국을 잠시 파하고, 이범제는 내일 본부에서 추국을 하라고 명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어영대장 에게 실제 병이 있다고 하기에, 산릉(山陵)에 나아가라는 하교는 보류하고, 총융사가 겸하여 살피라는 하교도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이재(李縡)의 손녀가 연좌된 데 대해, 정배(定配)로 고쳐 부표(付標)하도록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예로부터 10대(代)에 걸쳐 용서해 주는 법이 있어 왔다. 듣건대, 고(故) 중신(重臣) 이재의 손녀가 김상로의 며느리로서 연좌되어 비(婢)로 된다고 하니, 왕법(王法)을 굽힐 수는 없지만 현인(賢人)의 후손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으니, 비로 삼는 것을 정배로 고쳐 부표하여 들이라.”
하였다.
빈전에 나아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 의주대로 예를 행하였다.
의금부가 박상로 등에 연좌해야 할 사람들을 정배하고 적몰(籍沒)하고 저택(瀦澤)할 일로 아뢰었다.
○ 의금부가 아뢰기를,
“대역 부도 죄인 박상로에 연좌해야 할 사람들은 한결같이 본부에서 보고한 성책(成冊)에 따라 율문에 의거해 배소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방금 우포도청의 보고를 듣건대, 연좌하여 교형(絞刑)에 처한 죄인 지수(芝壽)에게 2살 난 딸이 또 있어 방금 잡아와서 구류(拘留)해 두었다고 합니다. 해부(該部)에서 성책에서 누락시켰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지수의 2살 난 딸을 무산부(茂山府)에 정배하기 위해 압송하고, 해부의 관원은 잡아다 신문하여 엄히 조처하겠습니다.
사형에 처한 죄인 조재한(趙載翰)에 연좌해야 할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 아들인 혜진(惠鎭), 임통(任通), 계룡(繼龍)은 모두 나이가 차지 않아 교형이 면제되었으니, 혜진은 부령부(富寧府)에 노(奴)로 삼고, 임통은 해남현(海南縣)에 노로 삼고, 계룡은 진도군(珍島郡)에 노로 삼겠습니다. 형 재득(載得)은 경흥부(慶興府)에 노로 삼고, 아우 재전(載田)은 온성부(穩城府)에 노로 삼고, 재천(載天)은 종성부(鍾城府)에 노로 삼고, 재칙(載則)은 무산부에 노로 삼고, 재욱(載旭)은 경원부(慶源府)에 노로 삼겠습니다. 처 단혜(丹惠)는 제주목에 비(婢)로 삼고, 첩 명희(明喜)는 회령부(會寧府)에 비로 삼고, 신섬(新暹)은 진도군에 비로 삼겠습니다. 딸 덕순(德順)은 제주목(濟州牧)에 비로 삼고, 하관(何寬)은 종성부에 비로 삼겠습니다. 며느리 순애(順愛)는 강진현(康津縣)에 비로 삼겠습니다. 조카 노(潞)는 진해(鎭海) 남현(南縣)에 안치하고, 온진(溫鎭)은 영암군(靈巖郡)에 안치하고, 연진(衍鎭)은 웅천현(熊川縣)에 안치하고, 평진(平鎭)은 기장현(機張縣)에 안치하고, 상특(尙特)은 장기현(長鬐縣)에 안치하겠습니다. 손자 이희(二熙)는 강진현에 노로 삼겠습니다.
조운형은 갑산부(甲山府)에, 이훈제는 웅천현에 정배하고, 조헌진은 정의현(旌義縣)에 연좌하여 노로 삼도록 하였으니, 각각 배소로 압송하겠습니다.
죄인 김치현(金致顯)은 본율에 따라 배소로 출발하도록 명하셨으니, 이전대로 배소인 흑산도(黑山島)에 연좌하여 노로 삼기 위해 압송하겠습니다.
무상 부도 죄인 이일화와 유한신 등은 이미 자복하여 정형(正刑)에 처해졌으니, 그의 부모, 처첩, 자녀, 조손(祖孫), 형제자매, 자식의 처첩, 백부와 숙부, 형제의 자식들의 나이와 성명, 생존 여부와 거주지를 한성부로 하여금 장적(帳籍)에서 조사해 내도록 하고, 또 오부(五部) 및 각 해도에 분부하여 연좌해야 할 사람들을 성책하여 첩보(牒報)를 올린 뒤 율문대로 거행하게 하고, 적몰하고 저택하며 읍호(邑號)를 강등하고 수령을 파출하는 등의 일은 각 해사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여, 모두 윤허하였다.
4월 6일
빈전에 나아가 조전 및 조상식을 행하였다.
○ 의주대로 예를 행하였다.
판의금부사 서명선(徐命善)을 체차하고, 조중회(趙重晦)로 대치하였다.
○ 하교하기를,
“판의금부사 가 현재 내의원 의 직임을 띠고 있으니 체차하고, 그 대임을 구전으로 비의(備擬)하여 추국(推鞫)에 참석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판의금부사 는 조중회가 맡도록 하되, 우선 좌기(坐起)에 나아간 뒤 사은(謝恩)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상철(金尙喆)이 상소하여 정세(情勢)를 진달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상소의 대략에,
“신이 지난겨울 고관(考官)에 임명되었을 때에 과차(科次)하여 가지고 들어간 시권(試券)이 단지 다섯 장(張)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앙품(仰稟)하자 확대하여 15인을 취하라는 명이 내려, 부득이하게 낙방된 시권 10여 장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문장의 솜씨나 편(篇)의 동이(同異) 여부는 미처 검사해 보지 못하였는데, 시일이 오래 지난 뒤에 자신의 죄상을 밝힌 서유녕(徐有寧)의 상소가 나왔습니다. 이에 세 사람의 시권을 찾아 와 그때서야 비로소 구절구절 비교해 보니, 끝 부분의 의논이 같은 경우도 있고 원편(原篇) 가운데 간간이 같은 구절도 있었습니다. 신이 이 세 편에 대해 즉시 상차(上箚)하여 뽑아내도록 청한 것이 어찌 그 글이 뇌동(雷同)하였기 때문일 뿐이겠습니까. 당시에 ‘과장(科場)을 엄숙히 하고 시비를 명백히 가리라’는 뜻으로 비지를 내리기까지 하셨으니, 두 가지 사안을 극진하게 하교하신 것은 실로 신의 충성스런 본심을 통촉하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가령 신을 논한 자가 신에게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고 책했다면 신은 마땅히 부끄러워하면서 받아들이기에 겨를이 없을 터인데, 지금 도리어 사정(私情)을 썼다고 몰아붙이고 중법(重法)으로 단죄하고 있으니, 아, 이는 너무 심한 것입니다. 명관(命官)이 된 자가 털끝만큼이라도 부정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대로 덮어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속히 실상을 조사하도록 명하여 엄하게 처분을 내리시고, 신의 중추부 의 직함을 체차하고 신에게 함께 오라 하신 명을 거두어 주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죄인을 잡아 대의(大義)가 더욱 밝아졌기에 선왕(先王)의 영전에 고하고 온 나라 사람들이 듣도록 유시하고자 하는데, 경이 참석하지 않으니 무언가 빠진 듯이 허전하다. 서계(書啓)에 대한 비지(批旨)와 돈유(敦諭)를 전달한 것으로 나의 뜻을 다 알렸다. 김약행(金若行)이 말을 만들어 날조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남김없이 알고 있는데 경은 무엇을 개의하며, 내가 무슨 많은 말을 하겠는가. 두 자(字) 운운한 데 대해서는 말이 지극히 패려하니 실로 통탄스럽다. 경은 나의 은근(慇懃)한 뜻을 체득하여 다시는 소를 올리지 말고 즉시 조정에 나오도록 하라.”
하고, 이어 함께 오도록 한 사관 에게 전유하라고 명하였다.
[주D-001]판중추부사 …… 상소 : 영조 51년 겨울의 경과(慶科)에서 최수원(崔守元), 조영의(趙榮毅), 조우규(趙羽逵) 3인이 추탈(追奪)된 죄인인 최석항(崔錫恒)과 조태억(趙泰億)의 후손으로서 급제하였는데, 이때 시관이 김상철, 서유녕, 이복원(李福源)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영조실록》 51년 12월 16일에서 21일까지의 기사 참조.
[주D-002]서유녕(徐有寧)의 상소 : 《영조실록》 51년 12월 19일 조에 보인다.
승지 를 보내어 소녕원(昭寧園)에 나아가 봉심하게 하였다.
○ 하교하기를,
“좌승지 는 소녕원에 달려가 봉심한 뒤, 산릉(山陵) 자리로 점지하여 표시해 둔 곳에 역사를 시작할지의 여부와 지사(地師)들의 산론(山論)에 대해 총호사에게 상세히 문의하여 즉시 돌아와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흥정당(興政堂)을 편전(便殿)으로, 흥정문(興政門)을 남문(南門)으로, 현모문(顯謨門)을 합문(閤門)으로 할 것이니, 정원은 그리 알라고 명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빈전에 나아가 석상식에 겸하여 고유(告由)를 행하고, 이어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 의주대로 예를 행하였다.
○ 승지 홍국영(洪國榮)이 어제(御製) 고유문(告由文)을 봉독(奉讀)하기를,
“아, 죄인인 소자(小子)가 공경히 예전의 분부를 받들어 공제(公除) 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천토(天討)를 행하여 죄인을 잡았습니다.
이덕사(李德師), 이일화(李一和), 유한신(柳翰申)은 차례로 상소를 올리면서 흉역(凶逆)스런 말을 해 대어 우리의 대의(大義)를 무너뜨리고 선왕을 모함하였습니다. 박상로(朴相老)는 흉도들을 모아 흉역스런 상소에 대해 모의하는 날 능란하게 수작을 부린 자로, 그의 불측하고 부도함은 이천해(李天海), 신치운(申致雲)과 속속들이 같으니, 감히 다 말씀드려 우리 인자하신 선령(先靈)께 근심을 끼쳐 드릴 수가 없습니다. 조재한(趙載翰)은 화(禍)를 끼치려는 마음을 품고 스스로 와주가 되어 박상로의 흉언에 화응하고 여러 흉적들의 흉소를 주도하였으며, 귀신과 물여우 같은 놈들과 결탁하여 조정을 넘보았는데, 반복하여 신문하고 나서야 그 정절(情節)이 다 드러났습니다. 비록 훈척(勳戚)이라는 이유로 곡진하게 용서해 주고야 싶지만 왕법은 어찌하겠습니까. 이범제(李範濟)와 이동양(李東讓)은 본래 올빼미 같은 무리들로, 조재한과 박상로의 무리에게 붙어 흉소를 수창(首唱)하고 흉언을 귀 기울여 들었으니, 일을 얽어 낸 정상을 모두 자복하였습니다.
아, 소자가 상중에 있으면서 상복 차림으로 죄수를 신문한 것은 우리 선왕의 뜻을 밝히고 우리 선왕의 의리를 천명하여 우리 선왕의 영령을 위로해 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여러 흉적들의 죄상을 바루어, 이덕사와 박상로는 대역 부도(大逆不道)로 사형에 처하고, 이일화, 유한신, 조재한은 무상 부도(誣上不道)로 사형에 처하고, 이범제와 이동양은 모두 지정(知情)으로 복주(伏誅)되거나 형장(刑杖) 아래서 물고가 났으며, 그 나머지 관련된 자들도 차례차례 조사하였습니다.
아, 선왕의 유의(遺意)를 받들어 선왕의 죄인을 토죄하였으니, 이제 소자는 선왕의 뜻과 사업을 저버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상전(常奠)을 통해 고유하는 의식을 치릅니다.”
하였다.
본부에 추국을 설치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추국을 잠시 파하라고 명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4월 7일
빈전에 나아가 조전(朝奠)을 행하였다.
○ 의주대로 예를 행하였다.
황해 감사 이갑(李)을 파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