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다. 글자화된 것이 다가 아니다고 말이다. 특히 역사를 논할 때 그렇다. 우리는 역사를 이야기할 때 이른바 문헌이라는 것을 인용한다. 그 몇자 안되는 글속에서 그 당시의 상황과 특정인의 성향 그리고 그 특정인의 판단을 모두 읽어내려 한다. 한마디로 넌센스이다. 그렇다면 지금 현시대에 살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면에서 모든 것을 파악하고 해독해 낼 수 있는가. 지금 한창 야기되는 대선후보들의 그 속살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특정 사안은 그 사안에 직접적으로 관여된 인물만이 제대로 아는 것이다. 그의 부모 그의 남편 아내 그의 자식들도 절대 그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하물며 제 3자들의 입장에서는 오죽할까. 기껏해야 언론에 나온 이야기와 시중에서 흘러다니는 찌라시수준의 말들을 듣고 그냥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당사자 본인이 아닌데 어떻게 알겠는가.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상도 그런데 지금부터 수백년 수천년 전의 상황을 어떻게 잘 알 수가 있겠는가. 밭에서 주은 빼다귀 하나로 뭘 얼마나 알 수가 있는가. 줄여 말하면 요즘 회자되는 <태종 이방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와 관련해 기술된 문헌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이다. 그러면 조선왕조실록은 무언가. 사관들이 왕의 행적을 따라다니며 기록한 문헌이다. 승정원일기는 임금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문헌이다. 물론 그 두가지 문헌에서 대략적인 왕의 행적을 알 수 있다. 주로 낮의 상황이다. 그런데 왕의 밤으로 들어가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그리고 사관들이 왕의 은밀한 구석까지 따라 다닐 수 없다. 서슬 시퍼런 경호시스템이 작동되기 때문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청와대 출입기자의 기사들을 모은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청와대 출입기자의 기사로 대통령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가. 대통령의 사생활을 어찌 알겠는가. 정사보다 야사가 더 피부에 와 닿는 것 아닌가. 히든 스토리가 대부분 정사보다는 야사에 묻어 있다. 왕도 마찬가지이다. 그때가 지금보다 보도 통제가 더 엄했을 것이다. 왕이 밤에 중전과 무슨 일을 했는지 중전의 처가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했는지를 본인과 당사자가 아니면 어떻게 알겠는가. 왕뿐만 아니라 권력세도가들의 은밀한 왕래를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는가. 왕의 그 속내를 일개 사관이 어떻게 잘 파악할 수 있었겠는가를 감안하면 그 문헌에 나와 있는 것으로 대략 추측을 할 뿐 단정적으로 말할 것은 전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과거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물론 최대한 문헌에 의거해서 유추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그 해석은 정말 제각각일 뿐이다. 유명한 역사학자가 주장하면 대부분에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 역사학자가 그 당시 생존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 역사유추에는 당시 시대상과 국제 정세 그리고 그 왕의 어린 시절 그리고 성장과정 그의 부모 그의 측근들 그의 여자들을 모두 소환해 다양한 각도에 들여다보고 내린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역사학자의 개인적인 사고방식도 무시못할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역사학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 그리고 그 역사학자의 정신세계도 역사적 추론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역사학자가 빙의돼 그 인물속으로 들어가 그의 정신세계속으로 침투해 그의 생각을 읽어내는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런데 그런 방식에도 역사학자의 체험과 정신상태가 또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과거 역사속의 인물을 파악해 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해 보시라 지금 당신을 몇백년 후의 역사학자가 어떻게 파악하겠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을 일기형식으로 낱낱히 기록해 놓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 변화무쌍한 정신세계를 어떻게 조그마한 공책에 기록해 놓을 수 있겠는가. 그냥 유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유추는 엄청난 허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이방원이라는 사람도 보는 시각에 따라 살인마도 되고 구국을 위한 참으로 어려운 결단을 한 영웅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 맞느냐는 오직 이방원만이 알 일일 것이다.
이방원이 살았던 그 시대상이 무엇보다 중요한 판단 요소이다. 이방원이 태어난 1367년 즈음은 중국에서는 대대적인 나라 교체가 이뤄지고 있었다. 1368년 그러니까 이방원이 태어난 다음해에 명나라가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장악한다. 명나라는 1368년 주원장이 난징에서 건국해 원나라를 북쪽으로 쫓아내고 중국의 독립을 달성했다. 농민에 의해 건국된 중국 한족의 사실상 마지막 통일국가이다. 명나라가 중국을 장악했지만 그 기운이 한반도까지 오는데는 시간이 상당히 필요했다. 당시 고려는 공민왕시절이었다. 원나라는 사실상 고려를 지배하고 있었다. 고려가 원나라의 속국이었다는 것이다. 한반도가 일본에만 식민지를 당한 것이 아니다. 고려시대에 당시 원의 막강한 힘에서 고려도 자유스러울 수가 없었다. 몽골족이 유럽도 손에 넣지 않았던가.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다. 일제 강점기보다 약 세배많은 100여 년동안 지배를 받는다. 아직도 몽골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전통주로 알고 있는 소주가 몽고에서 온 술이며,몽고군이 주둔하던 안동에서 그들을 대접하려 만든 것이 안동소주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제주도에 말이 많은 이유 등도 그렇다. 아직 확실한 고증이 끝난 것은 아니여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연구결과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렁탕,보라매,송골매에 궁중언어인 수라라는 말까지 그 시절의 흔적이라는 설도 있다. 아마도 한반도에서 왕의 정식 부인이 중국 공주였던 것은 고려시대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공민왕의 부인이 누구인가. 그 유명한 노국대장공주아니든가. 원나라 왕(황제) 순종의 손자의 딸이다. 서열상 상당한 위치이다. 중국 원나라 공주의 남편이 공민왕이니 즉 고려는 중국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다. 당시 원나라를 등에 업은 간신배들이 조정을 우지좌지하고 있었다. 원나라의 힘을 믿은 고관대작들은 온갖 폐악질을 일삼았다. 백성은 도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뜻있는 인물들은 도탄에 빠진 나라를 어떻게 일으켜 세울 것인가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시절이다. 그런 시절에 이방원은 나고 자랐다. 이방원은 주변에 인물들에게 나라가 나가야 할 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이었다. 이방원은 자신의 스승인 정몽주와 정도전에게서 개혁과 혁명의 당위성을 교육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정몽주는 혁명보다는 개혁을 우선시 하는 입장이고 정도전은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혁명을 해야한다는 입장이니 이방원은 개혁과 혁명의 개념이 모두 뇌리속에 있었을 것이다.
당시 고려를 괴롭히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바로 왜구였다. 나라가 위태로우니 온갖 것들이 다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어온다. 대표적인 것이 왜구다. 당시 왜구들의 잦은 침입은 일본의 상황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은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 배경이 됐던 극심한 내전의 영향이다. 일본의 지방 영주들이 크게 남북으로 나뉘어 극심한 내전을 벌였는데 식량과 군량 등 병참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고려를 그 먹잇감으로 고른 것이다. 침입한 왜구들은 함선 5백여 척과 군사 만 명에 가까운 체계적 군사조직을 갖춘 정규군이나 다름 없었다. 왜구는 당시 고려가 정치 외교 경제적으로 대혼란을 겪고 있는 틈을 노렸다. 국내 상황으로 군사들을 집결시켜 방비를 할 형편이 안된다는 것을 왜구들은 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왜구들을 이성계가 이끄는 천 명의 고려군이 지금의 전북 남원일대에서 완전히 격멸했다. 이것을 황산대첩이라 부른다 . 이성계는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두고 고려 조정에서 입지를 다져나간다. 보수 수구세력인 최영은 고려의 수문하시중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고 개혁을 생각하는 이성계는 병권을 차지하였다. 군사력으로 조정을 누르니 권신의 횡포와 당파의 알력다툼이 다소 잠잠한 것같이 보였으나, 실상 신구 세력의 충돌과 보수와 개혁의 암투는 그칠 사이가 없었다. 이런 식민지말 상황을 타파하는 방법은 새 나라를 세우는 것밖에 대안이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도는 시기였다. 바로 이런 시기를 십대 이십대에 몸소 겪은 인물이 바로 이방원이었다. 이방원의 핏속에는 문인으로서의 뜨거운 가슴과 무인으로서의 욱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바람앞에 놓인 조국의 현실에 가슴 아파하고 분노에 떨었을 것이다. 이방원은 17살에 과거에 급제한다. 조정에서 직접 나랏일을 하면서 더욱 그런 심정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왜 이방원이 더 적극적으로 역성혁명을 주장했는지 위화도 회군이후 가장 강력하게 원나라 지배 시스템인 구시대의 청산을 부르짖은 것도 나름 이해되는 부분이다. 원나라에 부역한 친원파들의 척결 방법으로 역성혁명을 생각했을 가능성도 크다. 여기에는 이방원의 권력을 향한 욕심이 강했는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정도 위치이면 권력 욕심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풍전등화 앞에 놓인 나라의 구출이 한시가 급한데 점진적 개혁론으로 일관하고 노골적인 원나라 부역자들만을 제거하고 적당한 선에서 고려를 이어가자는 정몽주 등이 비록 자신의 스승이었지만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삼은 명분이 이방원에게는 있지 않았을까. 조선을 어렵사리 건국했지만 그후 벌어지는 세자책봉을 둘러싼 계비 강씨와의 갈등 그리고 사대부 국가 즉 신권 국가를 앞세운 정도전의 권력에의 욕심속에 이방원이 택한 강공법이 과연 무리수였다고 지적할 사항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성계가 모든 것을 교통정리했다면 굳이 이방원이 칼을 뺄 일도 칼에 피가 마르지 않는 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큰 아들 이방우가 너무 보수지향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이성계와 이방원과 생각을 같이했다면 왕자의 난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성계도 나이 들어 권좌에 올랐고 그 권좌를 수습하는 데 서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또한 이성계보다 더 구체적인 설계를 담당했던 정도전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현명한 선택을 못했을 수 있다. 역성혁명을 이끈 무리들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우유부단한 행보를 보이는 아버지 이성계에 대한 실망감이 매우 컸을 것이다. 마치 자신이 아버지 이성계가 하지못하는 일들은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이방원 뇌리에 깊게 박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와중에 머리 좋고 판단이 빠른 이방원의 선택지가 그다지 많지 않았음을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느낀다.
----------------------------------------------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겠다.
중국에서는 약 100년 동안 대제국으로 군림하던 원나라가 쇠퇴하고 대신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가 서서히 중국의 주인으로 자리잡으면서 고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말을 보내라, 처녀를 보내라 등등 주문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원래 고려 땅이었다가 몽골군이 침략하여 직할령으로 만들었던 철령위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였다. 군사력을 장악했던 최영은 이런 저런 회의를 거친뒤 요동을 정벌하기로 마음 먹는다. 최영은 왕과 비밀리에 만나서 논의한 후 각 도의 군병을 징발하여 명의 요동성을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우왕 14년(1388) 봄 3월에 드디어 요동정벌의 명령이 떨어졌다. 군사를 소집했다. 징병령이 내려지자 백성들은 안그래도 왜구의 침략때문에 힘든데 또다시 농사철을 잃게 되자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백성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군사령관 최영은 과감히 자신이 팔도도통사가 되어 요동 정벌을 주장하는 우왕과 더불어 평양으로 출진한다.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았다. 동원된 군사는 모두 38,800여 명이다.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우왕에게도 지금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좋지못하다면서 그 이유를 네가지를 들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과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을 나가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疫病)을 앓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왕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성계는 자신의 뜻이 받아드려지지 않자 사직을 결심한다. 하지만 이방원은 아버지를 말렸다. 당시 이방원의 나이는 22살이다. 이방원은 아버지인 이성계에게 섣불리 사직서를 낼 경우 최영에게 역으로 당할 수 있다면서 만일 사직할 경우 최영이 아버지가 왕명을 거역한다는 죄목을 씌울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차라리 군사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있다가 형편을 봐서 그때 판단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이방원의 말을 들은 이성계는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출병한다. 1388년 5월 이성계는 압록강 중간에 위치한 위화도에서 진주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때마침 큰 장마를 만나고 군사들이 곤란을 겪게 됐다. 이성계는 우왕에게 상소하여 정벌군의 회귀를 간청했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드디어 회군을 결심한다. 이 대목에서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의 계략이었는지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는지는 이성계 본인이 아니면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우왕을 폐위하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생각은 안한 것 같다. 그런 경우가 전무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회군을 해서 무인정치처럼 권력을 장악할 수는 있었겠지만 왕을 폐위하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위화도 회군은 그야말로 반역행위이다. 우왕과 최영입장에서도 그렇고 당시 사회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도 상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군대를 함부로 이동한다는 것은 대역죄임에 틀림없다. 하여튼 이성계는 대역죄를 지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우왕은 이성계의 회군소식을 듣고 경악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미 상황은 이성계쪽으로 기운 뒤였다. 그만큼 우왕은 민심과 군심을 잃었다. 우왕은 최영의 호위아래 개경으로 돌아갔지만 이성계에 의해 감금되고 만다.
장황하게 왜구침입과 원나라 몰락 그리고 명나라 등장 이어 생긴 명나라 요동정벌 계획 그리고 위화도 회군을 이야기한 것은 그만큼 당시 고려 상황이 최악의 상태였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이방원은 이 시기에 태어나 성년이 됐다. 이방원은 조정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절체절명의 상황 그리고 풍전등화의 고려를 궁궐에서 직접 몸으로 겪었다. 젊은 이방원의 마음속에 무엇이 꿈틀거리고 있었는지는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성계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우왕을 유배보내고 그의 아들인 어린 창왕을 왕으로 올렸지만 혁명세력들은 불만이 가득하다. 시중에는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인 우왕 그리고 그가 낳은 자식을 어찌 제대로 된 왕이라고 받들 것인가라는 주장이 거셌다. 우왕을 왕우가 아닌 신우라고 하고 창왕을 왕창이 아닌 신창이라고 불렀을까. 하지만 왕은 왕인데 내쫓으려고 하니 명분이 약했다. 이때 명분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이방원이다. 이방원은 창왕이 우왕의 자식이며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인데 어찌 충성을 다해 받들 수 있겠느냐며 창왕을 내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대학자들인 삼은 그러니까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등은 아무리 그래도 왕을 명분없이 내쫓을 수 없고 비록 신돈의 자식이라도 죄를 지은 것이 없는데 폐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이성계는 답답하다. 이방원은 더욱 답답하다. 자신의 스승들인 삼은 대학자들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특히 정몽주는 아주 단호하게 이방원을 꾸짖는다.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질책했다. 이른바 너 많이 컸다라는 비아냥을 섞은 말말이다. 20대 초반의 이방원이 참는데도 한도가 있었을 것이다.
결국 창왕은 폐위된다. 창왕 다음으로 1389년에 왕이 된 공양왕은 온건개혁파 리더인 이색과 이성계의 대척점에 섰던 변안열을 최고위직에 임명하는 등 이성계의 혁명파에게 저항하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 개혁파는 현재 시스템으로 나라를 이끌면서 개혁을 하자는 입장인데 반해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는 역성혁명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자는 입장이었다.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물러나고 창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까지는 그래도 온건 개혁파와 혁명파의 갈등이 수면아래로 잠겼지만 창왕 폐위를 기점으로 서서히 물과 기름같은 관계가 되고 말았다. 이성계는 그래도 기다리는 모양새를 견지했지만 젊은 이방원은 참지를 못했다. 정도전은 옆에서 이방원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온건파 입장에서 볼 때는 꼬들린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정몽주는 하는 수없이 공양왕 옹립에는 이성계 정도전 같은 혁명파와 뜻을 같이했지만,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데는 단연코 반대했다. 나아가서 기회를 보아 역성혁명파를 제거하고자 했다. 정몽주 등 온건 개혁파들이 하루아침에 혁명파들에게 당한 것같이 알려졌지만 개혁파들도 그냥 있지 않았다. 친원파들도 은연중에 합세한다. 그들은 혁명파들을 향해 칼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이성계가 불의의 사고로 말에서 떨어져 병석에 눕게 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준 등 역성혁명파를 죽이려 했다. 당시 이성계 정도전 조준이 바로 혁명 삼인방으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런 계략을 이방원이 알아채고 이성계를 급히 개경으로 돌아오게 함에 따라 정몽주 등 개혁파들의 반격은 실패로 끝났다. 정보통인 이방원이 이런 사실을 몰랐겠는가. 저쪽에서 칼을 먼저 뺏으니 오히려 호기 즉 정몽주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어느 정도 명분도 있었다. 이성계를 죽이려는 자들을 미리 처형했다는 것 말이다. 마침 정몽주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병문환을 이유로 이성계를 찾아갔다 귀가하던 도중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 등의 습격을 받아 선죽교에서 죽는다. 정몽주가 자신이 죽을 것을 이미 알고 말을 꺼꾸로 타고 갔다는 것은 정몽주의 죽음을 애석해 하고 미화하는 시츄에이션이라고 판단된다. 정몽주는 항간에 떠도는 것처럼 앉아서 당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성계는 정몽주 피살사건을 듣고 이방원을 불러 크게 꾸짖는다. 경솔했다고 말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면 됐을텐데 조급했던 이방원을 나무란뒤 이방원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된다. 그때부터 이방원은 이성계의 핵심 멤버에서 비껴나게 된다. 이방원은 억울하다. 아버지를 여러번 위기에서 구하고 아버지의 판단에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 이방원으로서는 마음이 많이 괴로웠을 것이다. 명분만 쌓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이미 회복하기 어려운 아니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상황에 놓인 고려에 미련을 가진 개혁파들 사이에서 이방원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정몽주가 피살당하고 난 뒤 온건 개혁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색 등이 버텨보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1392년 7월 공양왕은 왕위를 이성계에게 넘긴다. 이씨조선이 탄생한 것이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자 마자 세자책봉에 들어갔다. 중국의 새나라 명나라는 조선에 대해 악감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명나라는 조선의 건립을 결코 원치 않았다. 그냥 고려라는 나라로 남아 자기들에게 원나라가 했던 것처럼 고분고분하게 섬기는 것을 희망했다. 그래서 태조의 등극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태조는 불안해진다. 나라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자기의 후계자를 만들어 놔야 한다는 강박감에 태조는 놓였다. 태조 이성계의 나이는 당시 58살이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늙은 축에 속한다. 이성계가 세자책봉을 서둘려야만 했던 이유가 많다. 이방원의 나이는 당시 26살 이었다. 당시에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는 아버지의 행동에 반기를 들고 집을 떠나 지방으로 들어간뒤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 둘째 아들 이방과가 실질적인 장자가 된다. 이방원은 자신이 아니면 그래도 형인 이방과가 세자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정몽주 살해사건이후 아버지와 다소 소원했지만 지금의 이성계가 있기까지 이방원의 역할이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다. 아니 개국 최고 공신임에 틀림없었다. 1392년(태조 1) 8월 세자 책봉이 거론됐을 때 이방원의 이름이 제일 먼저 오른 것은 사실이다. 배극렴 등이 왕비 한씨 소생의 정안군 이방원의 책립을 주장하였다. 이 때는 왕비 한씨는 이미 죽은 뒤였다. 계비 강씨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성계가 한낫 일개 지방 군인에서 최고위급 군인이 된 것은 사실 강씨의 후원의 힘이 컸다. 강씨는 막강한 친정을 배경으로 이성계가 중앙무대에서 활약하게 힘을 몰아 주었다. 계비 강씨는 이성계에게 눈물로 간청했을 것이다. 이제 나에게도 선물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 아니였겠는가. 자신이 낳은 왕자로 세자를 삼아달라고 것이었다. 이성계는 망설였다. 하지만 강씨는 정도전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놓았다. 정도전 입장에서도 다루기가 만만치 않은 이방원보다 어리고 연약한 이방석이 훨씬 편안 카드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정도전이 바랐던 새 나라는 임금이 주가 아닌 백성과 관료들이 주가 되는 나라였다.
이성계는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결심한다. 원칙적으로는 큰 아들 이방우가 세자가 돼야 하지만 지금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가버리지 않았는가. 지금 가서 그를 데리고 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계비 강씨가 낳은 왕자를 세자로 세워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이른바 자신이 왕이 되기 전에 이미 성인이 된 아들들을 내세우기 보다 아직 어린 왕자를 잘 교육시켜 새로운 왕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듯하다. 설마 이방원이 그런 난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다. 아들 이방원을 몰라도 한참 몰랐기 때문에 벌어진 패착이다. 결국 태조는 이방석으로 세자를 결정한다. 당시 이방석의 나이는 불과 열살이다. 이방원의 나이는 26살이다. 주변 대다수의 고위관료들이 태조의 의견에 따른다. 정도전과 배극렴, 조준 등이 핵심 찬성 세력이다.
이방원의 입장은 어땠을까. 자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형가운데 누군가가 세자가 될 것으로 굳게 믿었다. 하지만 인사발령은 그게 아니였다. 자신의 형제들은 완전히 물을 먹은 것이다. 물도 이런 물이 없다. 이방원과 계비 강씨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서로 건너고 말았다. 이방원은 서서히 칼을 갈기 시작한다. 계비 강씨는 오래 살지 못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지 2년만인 1396년 계비 강씨는 사망하고만다.
사실 이방원과 정도전은 제자와 스승같은 사이었다. 이성계의 심복이었던 정도전을 이방원은 삼촌이라며 따랐다. 그리고 존경했다. 이성계도 이방원이 정도전같은 대학자로 성장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조선이 건국되고 정도전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만 가는 반면 이방원의 입지는 점점 위축되어 갔다. 세자책봉이후 둘의 관계는 더욱 악화 일로를 걷는다. 대표적인 것이 사병(私兵/ 개인이 거느린 병사들)문제와 국정 운영의 주도권이었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은 재상이 최고 실권자가 되는, 이른바 신권(臣權/ 신하들이 권력 핵심이 되어야한다는 생각) 중심의 왕정을 이상적인 정치 체제로 여겼다. 지금으로 치면 입헌군주제이다. 왕은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재상이 국정을 총괄하는 시스템 말이다. 정도전은 이를 위해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을 혁파하고, 중앙 정부가 병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왕족들을 무력화하겠다는 뜻으로,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에게 엄청난 위기의식을 안겨 줬다.
둘 사이의 결정적이 사건이 터진다. 정도전은 때마침 불거진 요동 정벌론을 사병 혁파 및 병권 집중의 명분으로 삼았다. 명나라는 1396년 조선에서 보낸 공식 외교 문서에 중국을 모욕하는 무례한 구절이 있다며, 그 작성자인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에 태조와 정도전이 명나라와 정면 대결하기로 하면서 요동 정벌론이 대두됐다.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왕족이 거느린 사병까지 훈련을 받도록 했다. 이번 기회에 사병을 국가의 군 지휘 체계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였다. 정도전의 흑심을 모를 리 없는 이방원이었다. 부하장수들이 끌려가 태형을 받는 상황에 이르자 이방원은 드디어 중대결심을 하게 된다.
세자 책봉에서 밀려난 데다 사병 문제까지 불거지자 방원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사병까지 내놓고 정도전의 실권 장악을 허용하든지 아니면 거사를 도모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사병을 내놓고 백기를 들더라도 정도전 일파에게 언제 제거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중에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등이 병중인 태조가 위독하다고 속여 한씨 소생 왕자들을 한꺼번에 궁중으로 불러 모은 뒤 이들을 모두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말까지 돌았다.
마침내 이방원은 칼을 뽑는다. 1398년 8월 25일 그의 처남 민무구, 민무질, 그리고 심복 이숙번, 조준, 하륜, 이거이, 박포 등과 함께 정도전 일파의 음모를 미리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등을 습격해 살해했다. 또 세자 방석을 폐위시켜 귀양 보내는 길에 죽였다. 방석의 형인 방번도 이때 죽였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방원의 난 그리고 무인년에 일어났다 해서 무인정사라고도 부른다.
당시 병중이던 태조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방원을 불러 혈육을 무참히 죽이다니 천륜도 모르느냐며 진노했다. 1396년 강씨가 병으로 죽은 뒤 태조는 강씨가 낳은 방번과 방석 두 형제를 극진히 아꼈다. 게다가 그의 최측근인 정도전마저 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에 태조는 상심하여 왕위를 내놓고 정치에서 물러난다. 태조 나이 64살이었다.
이방원이 정도전 일파와 방석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자 하륜, 이거이 등은 방원을 세자로 내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이방원은 서두르지 않았다. 이복 동생들을 죽이고 나서 곧 바로 왕위에 오르면 마치 권력이 탐이나 동생들과 나라의 기둥이라는 정도전을 죽였다는 말이 나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방원이 누군가. 그정도 수가 낮은 인물이 결코 아니다. 당시 그의 나이 32살이었다.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명분을 쌓기 위해 이방원은 또 한 번 참았다. 대신 둘째 형인 방과가 세자에 책봉돼 태조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르니 그가 2대 정종이다. 정종은 1399년 3월 한양의 터가 좋지 않아 여러 사건들이 일어난다며 조정을 다시 개경으로 옮기고, 8월에는 권세가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하급 관리가 상급 관리를 방문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드는 등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피를 부르는 혁명은 또 다를 피를 부르고 있었다.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 등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며 정도전 일파를 견제하고 제거하는 데 힘을 보탰던 박포가 논공행상에서 일등공신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이방원의 바로 위 형인 방간을 꼬들렸다. 이방간에게 방원의 눈치를 보니 다음 제거 상대는 바로 당신이라며 이방원을 제거하자고 부추겼다. 이방간과 이방원은 어릴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방간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이성계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바로 아래 동생 이방원을 시기했다. 어릴 때 싸움도 많이 했다. 동생에 대한 컴플렉스가 상당했다. 그리고 당시 왕인 정종은 적자가 없었다.
이방간은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 정종 다음에 자신이 왕을 맡아야 한다고 말이다. 결국 이방간은 이방원을 제거하기로 한다. 1400년 정월, 방간은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켰고, 두 형제가 이끄는 군사들은 개경 한복판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하지만 일차 왕자의 난에서 동생을 둘이나 죽인 이방원으로서는 이번에 또 형을 죽일 경우 엄청난 비판에 직면할 것이고 판단했다. 중과부적으로 이방간의 난은 수포로 돌아갔다. 측근들은 방간을 처형하자고 했지만 이방원은 지방으로 귀양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박포는 유배지에서 처형당했다. 이것을 제 2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이방원이 일으킨 것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이방원이 권력 탈취를 위해 일으킨 것이라고 잘못알고 있는 듯하다. 이방원은 두번의 난를 처리하면서 그래도 자신은 살인마가 아닌 정당한 이유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인물들을 처형했다는 것을 나타냈고 동복 형제들에 대해서는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는 확고한 의지도 표현한 사건이 된 것이다.
두번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의 반대파가 거의 제거됐다. 이제 실질적인 이방원 체제에 돌입했다. 물론 형인 정종이 있었지만 권력의 핵심은 이방원이었다. 이방원은 1400년 2월에 방원은 세자로 책봉됐다. 이후 정종은 분란의 불씨가 됐던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리하여 정무는 의정부가 군정은 삼군부가 담당하는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서 정무와 군정을 분리시켜 버렸다. 이런 조치가 바로 이방원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다. 정종은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동생 이방원이의 눈치를 봐야하는 임금이 얼마나 힘든 자리겠는가. 정종은 권력에도 미련이 없었다. 왕자의 난을 바라보면서 권력에 대해 회한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정종의 왕비인 정안왕후도 이방원에게 권좌를 넘기라고 건의한다. 정종은 1400년 11월에 세자인 이방원에게 권좌를 물려준다. 이방원이 조선의 제 3대 왕이 된 것이다. 그의 나이 34살이다.
태종(재위 1400~1418) 이방원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고려말 그리고 조선초 그러니까 여말선초에서 그 누구보다 강하게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이방원이 왕이 됐다. 그때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미뤄 짐작이 된다. 고려말 원나라의 멸망과 명나라의 탄생, 왜구들의 침략, 명나라의 간섭, 요동정벌 계획, 위화도 회군, 우왕 제거, 창왕, 공양왕 제거, 정몽주 제거,조선의 건국, 아버지 이성계의 태조 등극, 세자책봉으로 위태로운 시절, 계비 강씨와의 갈등, 정도전과 대립, 사병혁파를 빌미로 한 이방원 제거 음모, 제 1차 왕자의 난, 동생인 방번 방석 제거,가장 버거운 상대인 정도전 제거, 박포의 난으로 형 방간 귀양, 세자 책봉, 그리고 왕에 등극...정말로 파란만장한 세월이었다.
이방원은 생각할 것이다. 아버지 이성계가 깔끔하게 정리를 해줬다면 이런 엄청난 일을 하지 않아도 됐던 것인데. 아버지가 과감하게 판단했다면 정몽주 등을 살해하지 않아도 됐을텐데. 형 가운데 누군가를 세자책봉했다면 왕자난 같은 일은 없었을텐데. 정도전을 너무 감싸지 않았다면 살육만은 하지 않았을텐데. 아버지가 해야할 일을 자신이 처리했다고 이방원을 생각할 것이다. 그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을 수는 없지만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끔히 정리하고 조선을 건국했으면 자신은 그냥 좋아하는 매사냥이나 하면서 왕자의 지위를 누리며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고 운이 되면 왕도 한 번 해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방원은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방원에게는 측근 중의 측근이자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가 있었으니 바로 그의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이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에게 계비 강씨가 있었다면 태종 이방원에게는 원경왕후 민씨가 도사리고 있었다. 강씨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진다고 할 수 없다. 강씨가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었다면 민씨는 더 험한 파고를 이기고 이방원을 왕위에 올렸다.
민씨는 고려의 대표적 권문세족의 딸로 태어난다. 민씨는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인 민씨는 1382년 18살의 나이로 이방원과 혼인한다. 당시 이방원의 나이는 두살 적은 16살이다. 이방원은 결혼한 그 이듬해에 과거에 급제한다. 부인의 내조가 뒷받침이 된 것은 물론이다. 그후 이방원이 왕자에서 국왕이 되기까지 부인의 조력이 절대적이었다. 원경왕후 민씨의 조력이 없었다면 결코 이뤄낼 수 없는 일이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조선 건국 초기에 정도전의 사병혁파를 빌미로 발생한 제1차 왕자의 난의 배후에는 원경왕후 민씨가 버티고 있었다. 명문가의 집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았던 민씨는 정치적 식견이 뛰어나 정도전의 음모를 사전에 감지하여 이방원에게 위급한 상황을 전한 일등 공신이다. 그리고 친정인 여흥 민씨 가문을 통해 병사와 무기를 조달해 주었기에 정도전 일파를 꺾을 수 있었다.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그녀는 재차 친정의 힘을 동원하여 이방원의 승리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하지만 부인의 권한이 나날이 높아가는 것을 이방원이 좌시하지는 않았다. 내조를 받은 것은 받은 것이지만 이방원에게 가장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은 계비 강씨의 횡포였다.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계비 강씨의 치맛바람에 조정이 얼마나 정도를 가지 못했던가를 생각하면 부인인 민씨의 행동이 마냥 고마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방원의 뇌리에는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제 확립이라는 두가지 목표만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방원이 원래부터 여색을 즐겼는지는 모르지만 민씨와 11명의 후궁사이에서 모두 8남 13녀를 두었다. 민씨와의 사이에서는 4남 4녀를 거느렸다. 민씨는 많은 후궁들로 인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민씨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친정 동생들의 비명횡사였다.
민씨는 4명의 남동생들을 뒀다. 민씨의 동생들 그러니까 이방원의 처남들의 권세도 날로 높아졌다. 대단한 누나를 둔 동생들이자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니 그 세도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민제와 누나인 민씨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치니 주변에서 좋은 눈으로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위가 높아지면 조금 더 겸손해야 목숨을 유지하는 법인데 말이다. 궁에 들어가 종친에게 무례할 뿐 아니라 종친간에 이간을 꾀하고 있다는 말이 이방원에게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외척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은 이방원입장에서 민씨 형제의 행동은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민씨도 이방원이 왕이 되고 나서 후궁편력에 열중하고 자신에게 쌀쌀맞게 대하는 것에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데 자신의 동생들에대해 싫은 소리를 하니 분노가 폭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야말로 짐작이다. 태종과 왕후가 독대하고 있는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를 어찌 알겠는가. 감히 사관도 그런 자리에는 끼지 못하는 것 아닌가.
1406년 8월, 태종은 느닷없이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나섰다. 당시 세자인 양녕대군은 어머니인 민씨와 외삼촌들인 민씨 형제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도 태종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일은 결코 아니였다. 외척들의 발호를 미리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왕의 선위 발언에 놀란 백관과 종친 들이 펄쩍 뛰며 명을 거두라 아뢰었다. 선위는 불가하다는 반대 상소도 빗발쳤다. 그러자 태종은 며칠 만에 못 이기는 척 선위하겠다는 명을 철회했다. 신하들의 충성심을 떠보기 위한 계략일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태종의 이 선위 파동으로 화를 입게 된 이들이 있었다. 바로 민무구, 민무질 형제이자 이방원의 처남이자 세자의 외삼촌들이었다. 태종이 선위를 하겠다고 했을 때 이들은 내심으로 좋아하면서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는데, 이런 분위기를 태종이 왜 몰랐겠는가. 이방원은 외척들을 제거해야 앞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데 걸림돌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장인인 민제가 1409년에 홧병으로 죽자 서서히 칼을 움켜 잡는다. 드디어 1410년 태종은 종친과 관료들의 강력한 주청에 따라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했다. 얼마 뒤 민무휼·민무회가 누나인 원경왕후가 병환으로 눕게 되자 문안차 입궐하였다가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두 형의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 태종의 귀에 들어가 결국 두형의 뒤를 밟게 된다. 이로서 고려 이래 최고의 명문가였던 민씨 일가는 몰락하고 말았다. 후세인들이 처남들을 제거한 것은 너무 심한 처사라고 판단하지만 이방원 입장에서는 후환을 미리 제거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한 듯 했다. 이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원경왕후 민씨도 이방원의 심정을 충분히 파악했어야만 했다. 내가 누군데 내가 이방원에게 어떻게 했는데 라는 자존심을 내세웠다가 일족이 멸하는 비극을 겪게 된다. 남편이 외척의 발호를 몹시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동생들을 궁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조치했어야 했다. 남편인 이방원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만 신경을 쓴 나머지 그 뒤에 벌어질 시나리오에 대한 충분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불평만 늘어놓다가 일을 아주 그르치고 말았다.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잘 기억했어야 하는데 하지만 지금의 시각에서 보니 그런 것이고 당시에는 민씨 일가가 기고만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이 된다.
태종은 1418년에 왕위를 충녕대군에게 넘긴다. 그가 세종대왕이다. 아버지 태조는 64살에 왕위를 넘겼지만 태종은 52살에 왕위를 아들에게 넘긴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했던 말이 지금도 인구에 회자한다. "내가 모든 것을 다 떠안고 갈테니 세자는 부디 성군이 되라는 말과 성군이 되라 그러면 내가 사람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나는 괴물이 되고 만다"고 하는 두가지 버젼이 있다. 이방원이 그동안 나라를 지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다는 이름으로 거의 18명정도의 고위 관료들을 살해했다. 그 중에는 이복동생인 두 명의 왕자와 정도전이 포함돼 있다. 처남들도 들어있다. 이방원은 생각했을 것이다. 이 모든 살인마 같은 행위들은 굳건한 왕위와 조선의 미래를 위해 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앞으로의 역사는 그렇게 평하지 않을 수도 있다. 좋다. 부정적 평가를 내려도 좋다. 나를 살인마라고 킬방원이라고 해도 좋다. 다 내가 다 안고 간다. 세자 너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않도록 내가 모두 가지고 간다. 후세에는 제발 그런 일이 없도록 말이다. 그러니 제발 너는 성군이 돼 달라는 눈물어린 당부가 있었다.
하지만 외척에 대한 혐오감은 그가 왕에서 물러나 상왕자리에 있는 동안에도 계속된다. 외척에 대해 노이로제가 걸린 모양새이다. 아들 세종의 장인은 심온이다.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냈으며, 조선왕조 개국 후에도 판통례문사, 좌부대언, 좌군동지총제 등을 역임했다. 1408년 딸이 충녕대군의 비가 되었다. 태종의 선위로 세종이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었다. 하지만 아들 세종의 처갓집에 대해 날카로운 시선을 계속 보내고 있었다. 사건은 1418년 심온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 일어난다. 병조참판과 그의 동생인 도총제가 금위의 군사를 분속시켰다. 군대 조직을 개편한 것이다. 당시 군최고 사령관인 상왕 태종에게는 보고하지 않았다. 조직 직제상 보고는 당연한 것이다. 태종은 이것을 문제 삼았다. 어찌보면 책임을 물어 처형할 것은 아니였다. 그리고 심온은 명나라게 가 있어 변명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방원은 이것을 아들 세종의 시대의 걸림돌이 될 수가 있는 외척발호의 제거 기회로 삼았다. 심온의 동생인 심정이 상왕인 이방원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에 불만을 토로한 것이 알려진 것이 직접적인 화근이 됐다. 심정과 관련자들이 처형됐고 심온도 주모자로 지목하여 사약을 받았다. 심온이 임금의 장인으로서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결과였다.
태종은 세종만큼은 어진 성군으로서 정사에만 집중하기를 바랐다. 자신이 행한 그 숱한 피비릿내를 아들 세종은 맡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세종의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되면 자신이 나서서 처리했다. 우유부단한 일처리로 느릿느릿하다 시기를 놓친 아버지 이성계에 비하면 너무 극한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고 갈테니 그저 성군이 되라고 한 말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이방원은 자신이 세종을 대신해 폐세자 양녕대군의 지지 세력을 정리하고, 외척 제거에도 직접 나선 것이다. 그가 왕위에서 내려왔지만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조선 사회 내부의 걸림돌들뿐만 아니라 조선의 안정과 발전을 방해하는 대외 세력에 대해서도 군사력을 동원해 직접 제압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종 재위 초기에 행해진 대마도 정벌 등의 군사 작전은 상왕인 태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태종은 상왕이 되고 난 뒤에도 아들 세종이 성군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에 대해 곰곰히 챙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왕의 경우 자손이 번창해야 한다면서 세종에게 빈과 후궁들을 더 들이도록 권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자신의 부인과의 불화로 당한 그 심적 고통을 아들에게 주기싫어 세종의 장인 심온을 처형한 뒤 그의 딸인 소헌왕후를 폐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권유는 받아드리지 않았다. 아들에 대한 배려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방원이 막가는 사람은 아니다라는 것을 남기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방원은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4년만인 1422년 56살의 나이로 별세했다. 아마도 그때부터 제대로 된 세종의 임기가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방원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다. 죽인 고관대작들만도 무려 18명이 넘는다. 동생들도 처남들도 아들의 장인도 처형했다. 이방원의 칼은 평생 피가 마르지 않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역사에서 그를 살인마 또는 킬방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그의 아들 세종에게 한 행위를 보면 결코 그의 살인행위는 단순한 칼싸움의 결과가 아니고 뭔가 의미가 있는 칼 휘두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생각대로 왕위를 굳건히 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 놓겠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처형당한 인물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하지만 그는 명분없게 살해하지는 않았다. 뭔가 명분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단지 그들이 인간 이방원을 몰라도 대단히 몰랐던 상황을 감안할 때 너무나 가혹한 결과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태종은 왕위에 올라 대외적으로 새로 등장한 명나라와 친분을 갖는 그야말로 친명 노선을 분명히 했다. 명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이뤄냈다. 그는 자신이 창업 군주라는 자부심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형인 정종이 개경으로 옮긴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겼다. 창덕궁을 새로 지어 경복궁과 함께 이궁의 양권체제를 만들었다. 강력한 왕권통치를 이룬 것이다. 한양의 물줄기를 제대로 잡는 청계천 공사를 해냈다. 서적을 인쇄하는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신문고도 만들었다. 토지 조세제도를 정비했고 산업을 장려했으며 노비제도를 정비하고 교육과 과거제도로 정비했다. 백성들을 힘들게 하지 않기위해 힘을 썼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그가 왕의 자리만 탐했다면 해내지 못할 수도 있는 정책을 많이 내놓은 것도 태종의 치적이다. 뭐니 뭐니해도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성군이라고 평가받는 세종대왕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 태종 이방원의 가장 큰 치적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피를 부른 역사는 아들대를 건너뛰어 손자때 다시 등장한다. 바로 수양대군인 세조이다. 세조는 할아버지의 피묻은 역사를 되풀이 했다. 지하에 있는 이방원입장에서 가장 가슴아픈 대목일 수도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많다. 승자가 독식하는 것이 역사라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양이 적은 문헌을 통해서만 그 사람의 행적을 추적할 뿐이다. 이방원이 자신의 입신영달을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을 해했다면 그는 살인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할 수없이 피를 봐야했다면 또 다른 평가가 가능하다. 물론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고 바로 당사자인 그 아니면 그 어느 누가 알겠는가. 인간 이방원의 마음을. 하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지 600년이 됐다. 우리의 입장에서 이방원이 살인마이기를 바라는가 난세의 영웅이기를 바라는가. 그것은 오로지 개개인의 판단의 몫이다.
2021년 12월 24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