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댓글주서에는 "(고구려는)서쪽으로는 요수를 건너서 2천여리나 된다."나 된다고 했습니다. 요서 건너 2천리란 대략 어디까지인지는 다음 당태종의 조서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유주에서 요하까지 2천리 구간에는 당나라의 주와 현이 없다." 이 외에도 수양제 조서에도 고구려의 영역이 갈석, 발해등에도 미쳤다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남제가 장수왕을 영평이주의 지배권을 인정했단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릉하에 만불당 유적이 있는 등 북위의 세력도 있긴 있었지만 유주 이동에는 고구려의 세력이 훨씬 컸을 것입니다. 삼국의 경계가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얽히고 얽힌거 처럼 볼 수도 있겠죠
사랑해요 대한님. 위에서 말씀하신 답변은 두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첫째, 유주에서 요하까지 2천리 구간에 당의 주현이 없다고 해서 그 땅에 고구려의 주현이 설치되었다고 보는 것은 이분법적 논리입니다. 둘째, 수양제 조서에 고구려 영역이 갈석, 발해 등에 미쳤다는 기사는 영토 지배가 아니라 영향력 행사로 해석될 여지도 있습니다. 거란족 일부에 대해 조공을 받거나 간접 지배의 형태도 있고 단순히 내정간섭을 받진 않지만 외교적으로 고구려의 편에서는 형태를 갈석, 발해에 미쳤다라고 할 여지도 있습니다. 참고로 대릉하 지역은 북연이 북위에 의해 멸하기전 고구려에 망명하면서 대부분의 주요 인구가 고구려로 흡수되었
고 그 과정에서 요하 이서 지역은 완충지대로 북위와 직접 충돌하는 걸 피하려는 고구려에 의해 인구 공동화작업이 실시되었습니다. 왜 요하가 기준이 되냐면 대릉하보다 방어입지가 훨씬 좋은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완충지대의 범위가 커지고, 요하의 하계수심변화량(?) 폭도 커서 해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배후에는 천산산맥에 의한 방어선이 근거리에 있어 방어에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광개토태왕 때 숙군성을 점령, 통치했다 하더라도 북위의 동방 진출로 인해 충돌을 피하려는 고구려가 요하 이서로 통치 영역선을 후퇴했다고 생각합니다.
한단인님 제가 당태종의 조서를 언급한 이유는 요수 건너 2천리가 어디 까지의 범위 인지를 말하기 위해서지 주현 설치되었다고 말하려는 바는 아니었고 또한 고구려가 요수 건너 2천리를 직접지배한다고 생각도 안합니다 그리고 중요한건 주서와 통전, 그리고 수양제의 조서입니다 주서에는 고구려의 서계가 요수 건너 서쪽으로 2천리라 그랬고 통전에서도 고구려가 수에 이르러 동서 6천리로 점차 커졌다 하고 수양제 또한 조서에서 고구려의 세력이 강하다는 것을 발해, 갈석등을 언급하며 간접인정발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요하 이서, 유주 이동이 위에서 북위의 만불당을 언급했듯이 중원과 고구려 어느 특정 국가의 자지배를 받진 않았지만서도 여러 사례들로 보여질 때 유주이동~요하이서는 남중국은 물론 북중국, 통일왕조 조차 고구려의 영역 혹은 세력권으로 인정할 만큼 세력이 훨씬 강했다고 보는 것이죠
어떤 국수주의적 과대 영토 확장적 개념을 경계하기 위해 실질 지배 지역이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등의 이해적 구분도 나쁘지 않는 개념이나 고구려 당시 광태토 이후문자명왕때와 이후 고구려 말기까지 거란족을 부용세력으로 전쟁에서 함께 사용한 기록등을 볼때도 마냥 이 지역을 단순한 완충지대 정도의 빈공간만으로 가볍게 보는 시각도 무게 중심이 맞지 않는 부분으로 보입니다.- 물론 현재 요하 기준의 요동지역에 대한 좀더 많는 고고학적 성과가 나와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 현재 부족한 테아타 역시 이 요동부분에 한정된 상황이지만 앞으로 어떤 식의 더 광범위한 범위에서 발견 될 여지들은 많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는 서쪽 왕조의 역사를 바라 볼때 너무도 당연히 만리장성 안는 필히 그들 영역이고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은 마치 요하를 기점으로 끊없이 강약의 영향력을 미쳐왔다는 당연한 시각의 고정 관념적 투영을 반사적으로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들도 상당히 모순되는 시각입니다. 현재의 중공이 현대적 교통 체계나 통신을 가지고도 제대로 커버되지 않는 곳이 저 대륙의 땅덩어리입니다. 하물며 몇개의 중심축을 가지고 돌아 간다고 해도 서쪽내륙에 박혀있는 상황에서 북방의 기마민족의 활동성이나 다양성을 제대로 커버 했다면 정복왕조의 내륙인으로서의 식민지적 역사가 거의 수천년 반복되는 상황이 나오
지 않았을 것입니다. 명때에 와서 수천년 이어온 서쪽 내륙을 등지고 북경으로 옮겨 온 것도 그들 스스로의 행정적 부재의 한계를 누구보다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서를, 한 집을 보면 그 주거 집이 있고 그 사람이 나와서 기본 활동 할수 있는 마당이 있고 그 넘어 넓은 거리가 나오는 것과 같이 요서를 고구려의 마당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요동은 집 안이구요. 단순한 영향력 이상의 무게를 가지는게 고구려의 요서라고 봅니다.
그런데 역시 대륙사를 보면 우리에게 혼돈을 주고 전문가 역시도 도리어 깊게 들어가면 개념 정리를 어렵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고구려 요서 지역의 북방민족이 내륙과 충돌하거나 들어가서 침투왕조니 정복왕조니 하며 역사를 세움으로서 현 중공과 우리의 역사 구분이나 영역적 부분에 기준점을 두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 당시 강성한 모용씨나 또는 북위등 마냥 대륙에서 현재도 그들이 말하는 한족적 개념으로 한족을 멸망시킨 북위등 선비족을 이분법적으로 말해 버리다면 그들은 상당한 협소한 영역적 또는 굴욕적 시각을 갖지 않을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적으로 우리가 이전의 고조선 당시부터
동이족 개념의 문화적 유사성이나 영향력등으로 확대해서 볼려고 하면 또한 대단히 확대되는 현상으로 갈수 밖에 없습니다. 요는 이 대륙사를 기본 그들 중심 역사를 보면서 동아시아적 역사로 일어나는 북방유목민족사를 보아야지 이들을 현 중공의 일방적 자기 역사만으로 우기는 시각은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봅니다.그리고 요서는 고구려의 대체적인 복속이나 영향력하에 활동하고 이후 그들이 강성해지면서 고구려에 영향을 주거나 서쪽왕조를 무너뜨리는 힘을 발휘했으며 서쪽 왕조에 비해 상당한 우위적 영역권이라 봅니다. 사실 현 시점에서 우리는 고구려사를 살찌우기 위해 거란이나 선비족에 대한 연구도 한층 강화 될
사랑해요 대한님. 본문을 보면 숙군성이 고구려에 의해 점령된 이후 계속 군현 지배형태를 띈 것인가 아닌가를 두고 언급했고 그에 대해서 대한님은 숙군성을 지배했다라는 언급을 함으로써 은시적으로 군현지배의 형태를 띈 것이라고 답변을 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대한님께서는 간접지배를 생각하고 말씀하셨으나 우선 간접지배인지 직접지배인지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하지 않으셨고 본문의 의도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셨기 때문에 제 지적이 틀리다고 할 순 없습니다.
저는 분명히 요서에서의 고구려와 중원의 세력을 삼국간의 경계를 예로 들며 얽히고 설켰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7세기 삼국의 경계는 명확치가 않습니다 제 요지는 중원이 요서에 영주를 설치했듯 고구려는 숙군성을 군현지배했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중원이 요서에 영주를 설치했지만서도 당이 나타나기 전까진 요서에서 고구려의 세력은 중원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하다고 봅니다 이미 관련 사료들은 거론했습니다
앞서 대한님께서는 만불당 석굴도 언급하셨습니다만 숙군성은 만불당 석굴유적보다 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문헌상에서도 대릉하 유역은 북위가 군현지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호구수까지 기록되어있죠. 따라서 숙군성 영역은 장수왕 말기에는 더이상 고구려의 '세력권'으로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한 상황이 변하게 되는 것은 고구려의 사주를 받거나 북위와 적대적 입장이었던 거란 계열의 유목민이 북위의 변경을 침입하면서 이 지역의 과밀적 인구밀도는 더욱 가속화되어 유목민의 세계로 변하고 부터죠. 제가 언급한 완충지대로서의 의미는 그러한 것을 의미합니다. 고구려와 북위는 그때를 기점으로 직접적인 영역을 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 생각하셔야 할 것은 군사적 함락이 곧 행정적 지배로 연결된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입니다. 숙군성은 후연의 수도인 용성과 지근거리라 친 고구려적 북연정권이 들어선 뒤에 이 지역을 고구려가 계속 지배하에 두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숙군성 점령 이후에 숙군성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북연정권 성립 후에 다시 돌려주었거나 소수 군병력만이 파병나왔을 개연성이 큽니다. 그리고 또 유념해두셔야 할 것은 근대적 영토 개념과 고대의 영역 개념을 혼동하시면 안된다는 겁니다. 삼국 영역이 개이빨 같다는 삼국사기의 언급은 상시로 전시상황을 겪는 시기의 고대 영역 개념의 한 표현일 뿐, 그것이 '국경선'의 의미는 아닙니다
언급하신 사료도 세력권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간접지배의 경계인지, 혹은 직접지배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두루뭉술한 것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그것이 근거사료가 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요서지역에 고구려의 독점적 우위를 언급하셨습니다만 그것 역시도 550년대에 북제가 북주 공격을 위한 사전작업의 일환으로 벌인 고구려 견제 겸 거란 원정을 하여 고구려의 요서 독점 지배가 항구 지속되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숙군성을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묻고 싶군요. 그럼 왜 북위에서 요서 경략에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 숙군성에 대한 압박이나 공격 기사가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합니까? 그리고 550년대 요서를 공격한 북제는 어째서 숙군성 공격을 하지 않았던 걸까요? 참 신기하군요. 반대로 님이 모델로 드신 낭비성이나 칠중성 같은 경우는 이후로도 전투 기사를 통해 계속 이름이 남는 것과 반대로 숙군성은 그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자꾸 고구려의 요서 '경영' 설을 주장하기 위해서 '내 말이 모순된다는 증거가 없으니(대한님의 관점에 한해서) 참이다' 라는 오류를 범하고 계신데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북위때는 달리 보면 고구려도 강성한 시기를 구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아시겠지만 북연와의 상황에서나 기타 몇번의 충돌 기회를 그들이 무모하게 도전 하지 않을 만큼 이미 북위의 침투왕조적 이중 구조에 비해 고구려는 대국화 정치적 기반화 되어 있었고 이후 고구려계가 진출하면서 고구려와의 친여성은 매우 높아지는 기록들이 나오죠. 그리고 고구려 말기 수에 선제 공격을 가하고 촉발된 대전에서 고구려가 이후 대군이 밀려 오는 상황에서는 요충지의 방어력이 강한 곳에 병력을 집결시키는 것이 더욱 전술적으로 타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요에 대한 개념에서 우리는 너무 인프라적 상황과 현재 부족한 고고학적 성과로 요하를 기준으로 두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 만리장성을-만리장성에 대한 시대적 규모에 대한 부분도 - 두고 그들의 그 아래에 거대한 땅에 상당한 행정력을 미친것처럼 각인되어 있구요. 요에 대해 그 기준을 두는 영정하, 난하. 요하등 현재 오늘날에 와서도 이 부분에 대해 정확한 수위나 규모 계절적 변화등 연구가 부족합니다. 물론 고대의 당시의 유추적 내용도 전무하구요.현대의 좀더 발달된 기술로서 이런 부분들도 관념적이지 않고 좀더 구체적이고 정밀한 연구들이 선행한다면 전체적으로 좋은 밑거름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의 북위 이후의 북조들에 대한 조양 공략 또한 본기에는 나와 있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모두 신하(혹은 타국)열전, 금석문에 단편적으로 나와 있기에 퍼즐 처럼 짜맞춰야 알 수 있죠. 왜 본기에 정식 기사로 기록 안되있고 기록들이 산재되어 있을까요? 더군다나 영주는 요충지로 중요한 것인데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북조 사관들이 유독 고구려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치스럽기에 기록하기 싫어서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네요. 또 하나의 이유는 고구려는 북조의 영주를 공격(대대적인 전면전은 아닌 약탈?)할 여건은 됐지만 북조는 주변 국가들 때문에 고구려의 숙군성을 공격할 여건이 되지 않았죠.
그리고 제가 낭비성과 칠중성을 거론한 이유는 그 성들의 위치가 통상적인 고구려, 신라의 경계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죠 (신라의 칠중성은 한참 동북부에 있는 반면 낭비성은서중부에 위치해있습니다.연개소문전 지도 참조)즉 영주와 숙군성도 이처럼 뒤죽박죽 되어 있을거란 생각에섭니다. 북주와 싸운 곳인 배산은 요서일 가능성도 큽니다. 그리고 숙군성은 고, 당전쟁 기간에 일시적으로 버렸을 가능성도 있죠 왜냐하면 방어하기 좋은 조건은 요하와 천산산맥등이니까요. 또 수양제의 조서는 근거가 불충분해 보일 수도 있지만 주서의 (고구려의) 서계는 요수 건너 2천리란 기록은 충분히 믿을 수 있는 기록이 됩니다.
대한님께서는 사료비판의 방법론을 숙지하신 다음에 사료를 검토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언급하셨던 사료는 중국측 사관들이 윗대로 부터 들어온 '카더라' 류의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기록한 것에 불과합니다. 즉, 당대 사건에 대한 1차 보고를 접하고 쓴게 아니라 편견이나 두루뭉술한 정보 전달로 인해 잘못알려진 정보 습득 같은 것이 후대 사가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첫번째요, 두번째는 사가 자신의 잘못된 기억이 사료에 실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관의 정직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2차사료를 신뢰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 라는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억과 역사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칠중성과 낭중성의 경우는 그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고구려와 신라는 국경을 접하고 공방전을 멈추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상황의 연출이 가능하지만 북조왕조들과 고구려는 거란을 완충지대삼아 충돌을 거의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북제가 550년대에 거란 원정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했었고 그럴 때 고구려가 숙군성을 직접지배하에 두고 있을 경우 그걸 냅뒀을때 거란원정을 한 것이 소용없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거라고 생각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말씀을 굳이 드려야 할거같군요. 일단 대한님은 사료 비판 방법에서 전제를 잘못하셨고 비교 대상에 대한 전제를 잘못하시는 두가지 오류를 범하셨습니다.
북제의 553년도 거란 원정은 돌궐 때문에 단기간에 그치지 않았나요? 거기에는 기록도 없지만 고구려의 압박도 한 몫했을거라고 생각드네요 거기에 숙군성의 역할이 중요했을지도 모를일이죠(사실 고구려의 요서에서의 활동기록은 대부분이 산재되어 있습니다 산재되어 있다는 것은 고의로 기록을 없애다가 실수로 남겼다는 것을 의미하는거겠죠) 게다가 상황으로 봤을 때 북제의 거란 원정은 무모한 감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실패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서 일부 지역에 북조는 영주를 설치하여 군현지배를 했는데 고구려가 이를 방관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요 고구려도 군현을 설치했음 했지 안했을리는 없습니다
영주에 비견될 만한 군현을 설치했을 가능성도 있지요 완충지대는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한 중간지점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북위라면 몰라도 고구려에게는 완충지대가 아닙니다 고구려는 지속적으로 공략한 반면 북위는 주변 요건이 안 되서 고구려에 항의 밖에 못하는 수준에 그쳤지만요 그래서 북조의 숙군성 공격 기록이 없을 가능성이 크단 겁니다
그리고 역사님. 완충지대의 의미를 혹시 모르시는 겁니까? 제가 댓글에서 고구려가 군현지배 포기를 했고 직접지배를 받는 일반민을 퇴각시켰다고 했으나 거란인 등의 부용세력으로 활용했다는 언급을 한 것이라면 간접지배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비슷한 의미인 셈입니다. 제가 본문에서 언급한 완충지대의 의미는 무인지대를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문맥의 의미를 분명히 파악하고 반론을 제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댓글에서 언제 역사님이 언급하시는 '고정 관념적 투영'적 사고를 언급했나요? 요서 지역을 무인지대로 지배흔적이 아예 없다라는 식으로 지레 짐작하신 건 아니신지? 오히려 그런 사고가 고정관념이라 생각됩니다만
오해 없으시길. 위글은 한단인님의 반론글 보다는 일반인들의 오해 수준을 말한것입니다.(.한단님의 ... 인구 공동화작업이 실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쪽 왕조도 북방민족을 그냥 미개하거냐 노략질적 부족으로,그리고 자신들이 통치 받은 경우에는 당연한 자기 역사로??,우리 역시도 단순한 북방의 고구려를 중심으로 주변 세력정도로만 언급하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북방 유목민족에 대한 특히 우리에게는 선비나 거란은 분명 깊게 연구 해볼 소재임에 환기 시킨 내용이었습니다.
첫댓글 주서에는 "(고구려는)서쪽으로는 요수를 건너서 2천여리나 된다."나 된다고 했습니다. 요서 건너 2천리란 대략 어디까지인지는 다음 당태종의 조서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유주에서 요하까지 2천리 구간에는 당나라의 주와 현이 없다." 이 외에도 수양제 조서에도 고구려의 영역이 갈석, 발해등에도 미쳤다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남제가 장수왕을 영평이주의 지배권을 인정했단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릉하에 만불당 유적이 있는 등 북위의 세력도 있긴 있었지만 유주 이동에는 고구려의 세력이 훨씬 컸을 것입니다. 삼국의 경계가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얽히고 얽힌거 처럼 볼 수도 있겠죠
즉 숙군성은 지속적으로 지배했을 가능성이 크단 겁니다
사랑해요 대한님. 위에서 말씀하신 답변은 두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첫째, 유주에서 요하까지 2천리 구간에 당의 주현이 없다고 해서 그 땅에 고구려의 주현이 설치되었다고 보는 것은 이분법적 논리입니다. 둘째, 수양제 조서에 고구려 영역이 갈석, 발해 등에 미쳤다는 기사는 영토 지배가 아니라 영향력 행사로 해석될 여지도 있습니다. 거란족 일부에 대해 조공을 받거나 간접 지배의 형태도 있고 단순히 내정간섭을 받진 않지만 외교적으로 고구려의 편에서는 형태를 갈석, 발해에 미쳤다라고 할 여지도 있습니다. 참고로 대릉하 지역은 북연이 북위에 의해 멸하기전 고구려에 망명하면서 대부분의 주요 인구가 고구려로 흡수되었
고 그 과정에서 요하 이서 지역은 완충지대로 북위와 직접 충돌하는 걸 피하려는 고구려에 의해 인구 공동화작업이 실시되었습니다. 왜 요하가 기준이 되냐면 대릉하보다 방어입지가 훨씬 좋은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완충지대의 범위가 커지고, 요하의 하계수심변화량(?) 폭도 커서 해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배후에는 천산산맥에 의한 방어선이 근거리에 있어 방어에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광개토태왕 때 숙군성을 점령, 통치했다 하더라도 북위의 동방 진출로 인해 충돌을 피하려는 고구려가 요하 이서로 통치 영역선을 후퇴했다고 생각합니다.
한단인님 제가 당태종의 조서를 언급한 이유는 요수 건너 2천리가 어디 까지의 범위 인지를 말하기 위해서지 주현 설치되었다고 말하려는 바는 아니었고 또한 고구려가 요수 건너 2천리를 직접지배한다고 생각도 안합니다 그리고 중요한건 주서와 통전, 그리고 수양제의 조서입니다 주서에는 고구려의 서계가 요수 건너 서쪽으로 2천리라 그랬고 통전에서도 고구려가 수에 이르러 동서 6천리로 점차 커졌다 하고 수양제 또한 조서에서 고구려의 세력이 강하다는 것을 발해, 갈석등을 언급하며 간접인정발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요하 이서, 유주 이동이 위에서 북위의 만불당을 언급했듯이 중원과 고구려 어느 특정 국가의 자지배를 받진 않았지만서도 여러 사례들로 보여질 때 유주이동~요하이서는 남중국은 물론 북중국, 통일왕조 조차 고구려의 영역 혹은 세력권으로 인정할 만큼 세력이 훨씬 강했다고 보는 것이죠
어떤 국수주의적 과대 영토 확장적 개념을 경계하기 위해 실질 지배 지역이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등의 이해적 구분도 나쁘지 않는 개념이나 고구려 당시 광태토 이후문자명왕때와 이후 고구려 말기까지 거란족을 부용세력으로 전쟁에서 함께 사용한 기록등을 볼때도 마냥 이 지역을 단순한 완충지대 정도의 빈공간만으로 가볍게 보는 시각도 무게 중심이 맞지 않는 부분으로 보입니다.- 물론 현재 요하 기준의 요동지역에 대한 좀더 많는 고고학적 성과가 나와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 현재 부족한 테아타 역시 이 요동부분에 한정된 상황이지만 앞으로 어떤 식의 더 광범위한 범위에서 발견 될 여지들은 많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는 서쪽 왕조의 역사를 바라 볼때 너무도 당연히 만리장성 안는 필히 그들 영역이고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은 마치 요하를 기점으로 끊없이 강약의 영향력을 미쳐왔다는 당연한 시각의 고정 관념적 투영을 반사적으로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들도 상당히 모순되는 시각입니다. 현재의 중공이 현대적 교통 체계나 통신을 가지고도 제대로 커버되지 않는 곳이 저 대륙의 땅덩어리입니다. 하물며 몇개의 중심축을 가지고 돌아 간다고 해도 서쪽내륙에 박혀있는 상황에서 북방의 기마민족의 활동성이나 다양성을 제대로 커버 했다면 정복왕조의 내륙인으로서의 식민지적 역사가 거의 수천년 반복되는 상황이 나오
지 않았을 것입니다. 명때에 와서 수천년 이어온 서쪽 내륙을 등지고 북경으로 옮겨 온 것도 그들 스스로의 행정적 부재의 한계를 누구보다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서를, 한 집을 보면 그 주거 집이 있고 그 사람이 나와서 기본 활동 할수 있는 마당이 있고 그 넘어 넓은 거리가 나오는 것과 같이 요서를 고구려의 마당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요동은 집 안이구요. 단순한 영향력 이상의 무게를 가지는게 고구려의 요서라고 봅니다.
그런데 역시 대륙사를 보면 우리에게 혼돈을 주고 전문가 역시도 도리어 깊게 들어가면 개념 정리를 어렵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고구려 요서 지역의 북방민족이 내륙과 충돌하거나 들어가서 침투왕조니 정복왕조니 하며 역사를 세움으로서 현 중공과 우리의 역사 구분이나 영역적 부분에 기준점을 두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 당시 강성한 모용씨나 또는 북위등 마냥 대륙에서 현재도 그들이 말하는 한족적 개념으로 한족을 멸망시킨 북위등 선비족을 이분법적으로 말해 버리다면 그들은 상당한 협소한 영역적 또는 굴욕적 시각을 갖지 않을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적으로 우리가 이전의 고조선 당시부터
동이족 개념의 문화적 유사성이나 영향력등으로 확대해서 볼려고 하면 또한 대단히 확대되는 현상으로 갈수 밖에 없습니다. 요는 이 대륙사를 기본 그들 중심 역사를 보면서 동아시아적 역사로 일어나는 북방유목민족사를 보아야지 이들을 현 중공의 일방적 자기 역사만으로 우기는 시각은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봅니다.그리고 요서는 고구려의 대체적인 복속이나 영향력하에 활동하고 이후 그들이 강성해지면서 고구려에 영향을 주거나 서쪽왕조를 무너뜨리는 힘을 발휘했으며 서쪽 왕조에 비해 상당한 우위적 영역권이라 봅니다. 사실 현 시점에서 우리는 고구려사를 살찌우기 위해 거란이나 선비족에 대한 연구도 한층 강화 될
고조선 시대에 동이란 것은 화북과 산동에 거주하는 이민족들을 지칭하는 것 아니던가요?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 지역을 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한나라 이후로 알고 있습니다. 고조선 시대의 동이가 후대의 동이와 갔다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요?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사랑해요 대한님. 본문을 보면 숙군성이 고구려에 의해 점령된 이후 계속 군현 지배형태를 띈 것인가 아닌가를 두고 언급했고 그에 대해서 대한님은 숙군성을 지배했다라는 언급을 함으로써 은시적으로 군현지배의 형태를 띈 것이라고 답변을 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대한님께서는 간접지배를 생각하고 말씀하셨으나 우선 간접지배인지 직접지배인지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하지 않으셨고 본문의 의도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셨기 때문에 제 지적이 틀리다고 할 순 없습니다.
저는 분명히 요서에서의 고구려와 중원의 세력을 삼국간의 경계를 예로 들며 얽히고 설켰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7세기 삼국의 경계는 명확치가 않습니다 제 요지는 중원이 요서에 영주를 설치했듯 고구려는 숙군성을 군현지배했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중원이 요서에 영주를 설치했지만서도 당이 나타나기 전까진 요서에서 고구려의 세력은 중원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하다고 봅니다 이미 관련 사료들은 거론했습니다
앞서 대한님께서는 만불당 석굴도 언급하셨습니다만 숙군성은 만불당 석굴유적보다 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문헌상에서도 대릉하 유역은 북위가 군현지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호구수까지 기록되어있죠. 따라서 숙군성 영역은 장수왕 말기에는 더이상 고구려의 '세력권'으로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한 상황이 변하게 되는 것은 고구려의 사주를 받거나 북위와 적대적 입장이었던 거란 계열의 유목민이 북위의 변경을 침입하면서 이 지역의 과밀적 인구밀도는 더욱 가속화되어 유목민의 세계로 변하고 부터죠. 제가 언급한 완충지대로서의 의미는 그러한 것을 의미합니다. 고구려와 북위는 그때를 기점으로 직접적인 영역을 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 생각하셔야 할 것은 군사적 함락이 곧 행정적 지배로 연결된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입니다. 숙군성은 후연의 수도인 용성과 지근거리라 친 고구려적 북연정권이 들어선 뒤에 이 지역을 고구려가 계속 지배하에 두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숙군성 점령 이후에 숙군성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북연정권 성립 후에 다시 돌려주었거나 소수 군병력만이 파병나왔을 개연성이 큽니다. 그리고 또 유념해두셔야 할 것은 근대적 영토 개념과 고대의 영역 개념을 혼동하시면 안된다는 겁니다. 삼국 영역이 개이빨 같다는 삼국사기의 언급은 상시로 전시상황을 겪는 시기의 고대 영역 개념의 한 표현일 뿐, 그것이 '국경선'의 의미는 아닙니다
언급하신 사료도 세력권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간접지배의 경계인지, 혹은 직접지배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두루뭉술한 것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그것이 근거사료가 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요서지역에 고구려의 독점적 우위를 언급하셨습니다만 그것 역시도 550년대에 북제가 북주 공격을 위한 사전작업의 일환으로 벌인 고구려 견제 겸 거란 원정을 하여 고구려의 요서 독점 지배가 항구 지속되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5세기의 고구려의 숙군성과 북위의 영주를 7세기의 고구려의 낭비성과 신라의 칠중성 처럼 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언급한 사료들은 분명 요서에서의 고구려의 우월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정을 했으면 했지 부정은 안했습니다.
만일 고구려가 숙군성을 지속적으로 지배하였다면 수, 당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숙군성 부터 공략할 가능성이 큰데 그런 기록은 전무합니다.(이 간단한 것을 지금에서야 생각났다니...;;)
숙군성을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묻고 싶군요. 그럼 왜 북위에서 요서 경략에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 숙군성에 대한 압박이나 공격 기사가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합니까? 그리고 550년대 요서를 공격한 북제는 어째서 숙군성 공격을 하지 않았던 걸까요? 참 신기하군요. 반대로 님이 모델로 드신 낭비성이나 칠중성 같은 경우는 이후로도 전투 기사를 통해 계속 이름이 남는 것과 반대로 숙군성은 그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자꾸 고구려의 요서 '경영' 설을 주장하기 위해서 '내 말이 모순된다는 증거가 없으니(대한님의 관점에 한해서) 참이다' 라는 오류를 범하고 계신데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북위때는 달리 보면 고구려도 강성한 시기를 구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아시겠지만 북연와의 상황에서나 기타 몇번의 충돌 기회를 그들이 무모하게 도전 하지 않을 만큼 이미 북위의 침투왕조적 이중 구조에 비해 고구려는 대국화 정치적 기반화 되어 있었고 이후 고구려계가 진출하면서 고구려와의 친여성은 매우 높아지는 기록들이 나오죠. 그리고 고구려 말기 수에 선제 공격을 가하고 촉발된 대전에서 고구려가 이후 대군이 밀려 오는 상황에서는 요충지의 방어력이 강한 곳에 병력을 집결시키는 것이 더욱 전술적으로 타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요에 대한 개념에서 우리는 너무 인프라적 상황과 현재 부족한 고고학적 성과로 요하를 기준으로 두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 만리장성을-만리장성에 대한 시대적 규모에 대한 부분도 - 두고 그들의 그 아래에 거대한 땅에 상당한 행정력을 미친것처럼 각인되어 있구요. 요에 대해 그 기준을 두는 영정하, 난하. 요하등 현재 오늘날에 와서도 이 부분에 대해 정확한 수위나 규모 계절적 변화등 연구가 부족합니다. 물론 고대의 당시의 유추적 내용도 전무하구요.현대의 좀더 발달된 기술로서 이런 부분들도 관념적이지 않고 좀더 구체적이고 정밀한 연구들이 선행한다면 전체적으로 좋은 밑거름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의 북위 이후의 북조들에 대한 조양 공략 또한 본기에는 나와 있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모두 신하(혹은 타국)열전, 금석문에 단편적으로 나와 있기에 퍼즐 처럼 짜맞춰야 알 수 있죠. 왜 본기에 정식 기사로 기록 안되있고 기록들이 산재되어 있을까요? 더군다나 영주는 요충지로 중요한 것인데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북조 사관들이 유독 고구려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치스럽기에 기록하기 싫어서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네요. 또 하나의 이유는 고구려는 북조의 영주를 공격(대대적인 전면전은 아닌 약탈?)할 여건은 됐지만 북조는 주변 국가들 때문에 고구려의 숙군성을 공격할 여건이 되지 않았죠.
그리고 제가 낭비성과 칠중성을 거론한 이유는 그 성들의 위치가 통상적인 고구려, 신라의 경계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죠 (신라의 칠중성은 한참 동북부에 있는 반면 낭비성은서중부에 위치해있습니다.연개소문전 지도 참조)즉 영주와 숙군성도 이처럼 뒤죽박죽 되어 있을거란 생각에섭니다. 북주와 싸운 곳인 배산은 요서일 가능성도 큽니다. 그리고 숙군성은 고, 당전쟁 기간에 일시적으로 버렸을 가능성도 있죠 왜냐하면 방어하기 좋은 조건은 요하와 천산산맥등이니까요. 또 수양제의 조서는 근거가 불충분해 보일 수도 있지만 주서의 (고구려의) 서계는 요수 건너 2천리란 기록은 충분히 믿을 수 있는 기록이 됩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요수에서 서쪽으로 2천리는 요수에서 유주이동이란 소리가 됩니다.
대한님께서는 사료비판의 방법론을 숙지하신 다음에 사료를 검토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언급하셨던 사료는 중국측 사관들이 윗대로 부터 들어온 '카더라' 류의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기록한 것에 불과합니다. 즉, 당대 사건에 대한 1차 보고를 접하고 쓴게 아니라 편견이나 두루뭉술한 정보 전달로 인해 잘못알려진 정보 습득 같은 것이 후대 사가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첫번째요, 두번째는 사가 자신의 잘못된 기억이 사료에 실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관의 정직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2차사료를 신뢰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 라는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억과 역사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칠중성과 낭중성의 경우는 그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고구려와 신라는 국경을 접하고 공방전을 멈추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상황의 연출이 가능하지만 북조왕조들과 고구려는 거란을 완충지대삼아 충돌을 거의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북제가 550년대에 거란 원정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했었고 그럴 때 고구려가 숙군성을 직접지배하에 두고 있을 경우 그걸 냅뒀을때 거란원정을 한 것이 소용없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거라고 생각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말씀을 굳이 드려야 할거같군요. 일단 대한님은 사료 비판 방법에서 전제를 잘못하셨고 비교 대상에 대한 전제를 잘못하시는 두가지 오류를 범하셨습니다.
북제의 553년도 거란 원정은 돌궐 때문에 단기간에 그치지 않았나요? 거기에는 기록도 없지만 고구려의 압박도 한 몫했을거라고 생각드네요 거기에 숙군성의 역할이 중요했을지도 모를일이죠(사실 고구려의 요서에서의 활동기록은 대부분이 산재되어 있습니다 산재되어 있다는 것은 고의로 기록을 없애다가 실수로 남겼다는 것을 의미하는거겠죠) 게다가 상황으로 봤을 때 북제의 거란 원정은 무모한 감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실패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서 일부 지역에 북조는 영주를 설치하여 군현지배를 했는데 고구려가 이를 방관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요 고구려도 군현을 설치했음 했지 안했을리는 없습니다
영주에 비견될 만한 군현을 설치했을 가능성도 있지요 완충지대는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한 중간지점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북위라면 몰라도 고구려에게는 완충지대가 아닙니다 고구려는 지속적으로 공략한 반면 북위는 주변 요건이 안 되서 고구려에 항의 밖에 못하는 수준에 그쳤지만요 그래서 북조의 숙군성 공격 기록이 없을 가능성이 크단 겁니다
그리고 역사님. 완충지대의 의미를 혹시 모르시는 겁니까? 제가 댓글에서 고구려가 군현지배 포기를 했고 직접지배를 받는 일반민을 퇴각시켰다고 했으나 거란인 등의 부용세력으로 활용했다는 언급을 한 것이라면 간접지배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비슷한 의미인 셈입니다. 제가 본문에서 언급한 완충지대의 의미는 무인지대를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문맥의 의미를 분명히 파악하고 반론을 제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댓글에서 언제 역사님이 언급하시는 '고정 관념적 투영'적 사고를 언급했나요? 요서 지역을 무인지대로 지배흔적이 아예 없다라는 식으로 지레 짐작하신 건 아니신지? 오히려 그런 사고가 고정관념이라 생각됩니다만
오해 없으시길. 위글은 한단인님의 반론글 보다는 일반인들의 오해 수준을 말한것입니다.(.한단님의 ... 인구 공동화작업이 실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쪽 왕조도 북방민족을 그냥 미개하거냐 노략질적 부족으로,그리고 자신들이 통치 받은 경우에는 당연한 자기 역사로??,우리 역시도 단순한 북방의 고구려를 중심으로 주변 세력정도로만 언급하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북방 유목민족에 대한 특히 우리에게는 선비나 거란은 분명 깊게 연구 해볼 소재임에 환기 시킨 내용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깊어 진다면 고구려의 대외관계나 위치,통치 방식등에 많은 소득이, 나아가 우리 고구려사를 지키기 위한 완전한 우리 소유 개념으로 현실적으로 갈수 없다고 해도 최소한 역사의 완충지 역할을 해 줄것으로 보입니다.북방 유목민족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