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이 바랜 둔치 물억새
갑진년 한 해가 저물어 달랑 하루가 남은 세밑 월요일이다. 근래 며칠 메뚜기처럼 도서관을 옮겨 다니며 독서삼매에 빠져 보낸다. 어제는 교육단지 창원도서관에서 ‘궁궐의 고목나무’를 둘러봤다. 우리나라 임학계 권위자 박상진 박사가 친절한 가이드가 되어주었다. 그제는 북면 최윤덕도서관에서 정진홍이 쓴 ‘남자의 후반생’을 읽었는데 독자는 ‘남자생 후반에’라는 독후감을 남겼다.
주중에 새해를 맞이할 새롭게 한 주가 시작된 월요일은 대산 마을도서관으로 나갈 생각이다. 이른 시각 원이대로로 나가 창원역 앞에서 근교로 오가는 1번 마을버스는 탔다. 대산 산업단지 생산직 일터로 가는 이들은 출근이 종료되고 식당이나 찻집으로 가는 부녀들이 움직이는 시간대였다. 그들은 주로 동읍에서 내려 주남저수지를 지나면서 버스는 빈자리가 생겨 혼잡하지 않았다.
가술에 못 미친 장등에서 내렸는데 마을도서관 열람실 문이 9시 열려 아직 30여 분 여유가 있어서다. 이른 시각 영업을 시작한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받아 들고 인적이 드문 가술 거리를 지나 평생학습센터를 찾았다. 맞은편 현수막 게시대에는 주민 대상으로 개설될 평생학습 프로그램 수강생 모집 광고가 걸려 있었다. 여가에 문화를 누리는 지역민들이 늘었으면 싶은 생각이다.
마을도서관 열람실로 올라가자 사서와 센터장이 반갑게 맞았다. 월요일은 수요일과 금요일 주 3회 운영되는 한글 문해 강좌 할머니들과 같은 공간을 써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문해 강좌는 해를 넘겨 1월 중순까지 공부하고 방학에 듦과 동시 종료되어도 곧 학년도를 바꾸어 다시 개강 될 듯하다. 나는 지정석이 된 컴퓨터가 비치된 자리에 앉으니 할머니 두 분과 강사가 나타났다.
마을도서관에서 읽고 있는 책은 김탁환 쓴 ‘혜초’다. 작가는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의무 복무 연한에 해당할 중위로 전역 후 서울대로 진학한 특이한 이력이다. 진해에서 태어나 청년기 군 생활까지 마치고 우리 고장을 떠났다. 대학원에서 고전문학을 연구해 전업 작가의 길을 걷는 주목받는 작가로 나는 코로나 시대 격리 시절 메리스 감염병 파동을 그린 그의 ‘살아야겠다’를 읽었다.
소설 ‘혜초’는 신라인으로 인도에 머물며 남긴 ‘왕오천축국전’에 바탕으로 쓰였다. 1900년대 초 프랑스 탐험가가 둔황 석굴에서 발굴해 파리 국립박물관에 보관 중인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인도 풍물이 담긴 양피지 두루마리 형태 필사본이다. 이 사료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최초 기록으로 작가는 고려대 정수일 교수 번역을 참고하고 인도와 중동으로 몇 차례 취재를 다녀왔다.
아침나절 마을도서관에서 지난번 읽다가 접어둔 전 2권으로 된 ‘혜초’ 첫 번째 권을 마저 읽었다. 여행기라면 출발지에서 귀로로 완결됨이 일반적인데 왕오천축국전은 중인도에 해당하는 폐리사국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에 언기국에서 끝을 맺었다. 작가의 상상력은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 장수가 되어 인도로 진격한 고선지와 신라인 장사꾼 김란수를 등장시켜 머나먼 여정에 동행했다.
때가 되어 열람실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가자 노인대학에서 송년 잔치 봉사자들이 어르신들과 식사를 함께 드십사 권했는데 사양하고 평소 들린 식당에서 추어탕으로 때웠다. 식후 북가술에서 빗돌배기 감미로운 단감 체험 농장을 지난 들녘에서 죽동천 건넜다. 벼농사 뒷그루 당근 씨앗이 파종된 비닐하우스단지와 사계절 오이 농장을 지난 신성마을에서 강둑으로 올라 둑길을 걸었다.
드넓은 둔치에는 색이 바랜 물억새가 펼쳐졌다. 창원시민 식수원 여과수를 퍼 올리는 취수정을 바라보며 시조를 한 수 남겼다. “장끼가 쩌렁이고 까투리 알을 품던 / 곡강이 바라보인 신전리 강변 둔치 / 색 바랜 겨울 물억새 시나브로 야윈다 // 상수원 취수정이 사대강 삽질 막아 / 발길이 닿지 않은 검불에 몸을 숨긴 / 고라니 제 세상 만나 겅중겅중 뛰논다” ‘신전리 둔치’ 전문이다. 24.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