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흉한 사건들이 끊이지 않아 뉴스 대하기가 겁난다. 사람을 해하는 방법이 갈수록 지능적이고 잔혹하여서 사람과 사람 사이엔 불신과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러나, 민심이 어떻게 어수선하든 그래도 이 세상에는 더 많은 좋은 사람들이 산다. 좋은 사람들이 하는 선한 일은 거개가 조용하게 이루어지는 탓에 없는 듯하지만, 없는 듯 있는 산소 같은 그 선행으로 세상은 살만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산소 같은 사람, 그래서 마음이 가고 마침내 그 언행을 따라 하고 싶은 사람을 나는 내 삶의 역할 모델(Role Model)로 삼기를 좋아한다. 그들에게서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어떤 점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내가 역할 모델 두기를 좋아하는 것은 내가 내 부족한 점을 알고 그것을 바꾸거나 보완하려는 나름의 노력인 셈이다.
내 삶에 역할 모델이 되는 인물은 유명한 사람일 수도 있고 남들의 눈엔 띄지 않는, 지극히 조용하게 사는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 모델의 일호는 내 어머니이다.
내 어머니는, 열아홉에 일찍 엄마를 잃은 삼 형제의 엄마가 되어 당신의 소생 육 남매, 그리고 오래전 사라호 태풍으로 부모를 잃은 먼 친척 남매까지 11남매를 아무 구별 없이 키우신 분이다. 어머니가 내 삶의 모델이 되는 이유는, 자라면서 서로 갈등을 만들 수 있는 소지를 지닌 자식들임에도 늘 구분 없이 대하여 서로 우애를 지키게 했고, 평생 그러하셨음에도 ‘나는 아무것도 한 것 없다.’며 겸손하시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겸손은, 다 허용해도 이것 하나만큼은 안 된다고 고집하며, 나도 남도 상처받기도 한, 자존심이라 믿은 나의 아집을 다스리는 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나의 역할 모델은 내 어머니처럼 오랜 세월 함께 살며 그 삶 속에서 받은 감동으로 인함도 있고, 갑자기 정해질 때도 있다. 그 사람은, 어느 날 내 눈에 들어온 친절한 웨이터일 수도 있고, 매주 지저분한 남의 쓰레기를 대신 치워주는 분일 수도 있다. 땀 흘리며 운동하는 젊은이일 수도 있고, 이제는 천국에다 소망을 둘 연세임에도 책을 들고 있는 어느 어르신일 수도 있다.
어느 날 한 모임에서 다들 높은 목소리로써 자신을 드러내려 하고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자 할 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귀 기울이며 미소로 응답해 주는 한 사람, 그도 내게 모델이 된다. 조용한 그 사람뿐 아니라 논리 정연하고 설득력 있는 말로써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사람, 그 사람도 때로는 모델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나 자신도 부러워하는, 내게는 취약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글을 쓰는 작가도 내 독자에게 좋은 글을 읽게 하고 싶다는 더 깊은 충동을 느끼게 하므로 역할 모델이 된다.
나이 들어서는 겉치레보다 온화한 표정으로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도 내게는 모델이 되고, 가끔 속을 드러내 보였을 때 귀 기울여 들어주고 들은 말은 간직해 줄 줄 아는 사람은 확실한 모델이 된다. 읽을 책과 쓰고 있는 작품이 있으면 혼자서도 시간을 잘 보내는 내게는 부족한 부분이므로 이렇게 한 발 더 다가가고 싶게 하는 따스함과 편안한 품을 둔 분은 내 역할 모델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어느 한 사람을 내 마음속에다 역할 모델로 삼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이 내 삶 한 부분의 모델이 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것은 다만 내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이렇듯, 내 눈과 마음에 들어온 사람 여럿을 삶의 역할 모델로 두고 있어도 실은 그들을 본보기 삼아 나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고착된 삶의 방식과 사고가 새롭게 바꾸려는 내 의지보다 늘 먼저 나서며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좋은 역할 모델들을 두고 있음에도 변화가 쉽지 않은 것은 모델 탓이 아니라 좋은 변화 앞에서도 선뜻 날 꺾지 못하는 아집 탓인 셈이다.
실은 내게 역할 모델이 되는 분들도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게 부족한 점이 있듯 그들에게도 다른 면의 부족함은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게 역할 모델이 된 사람은 그 사람이 가진, 내가 본받고 싶은 한 부분만이 모델이 되는 셈인데, 그것은 결국 이 세상에는 완전한 사람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부족한 사람들끼리 알게 모르게 서로 다른 사람의 역할 모델이 될 수 있음은?
내가 갖지 못한 좋은 점 지닌 사람을 눈여겨보고 따라 해 보노라면 어느 날부터 나도 조금씩 변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남을 좋게 보는 안목을 높여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또 어찌 아는가, 변화한 나도 누군가의 역할 모델이 될 수 있을지는?
세상은 그렇게 맑아지고 불신의 경계심 허물어 관계 또한 그렇게 회복될 것이다.
마침내, 믿고 살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91년 단편소설 <유산>으로 계간 <문학과 의식>을 통해 등단. 출판 : 장편소설<엘 콘도르> 외 5권, 소설집<매직> 외 2권, 산문집<춤추는 포크와 나이프> 외 1권, 영문 <EL CONDOR> 수상 : 한하운문학상, 한국크리스천문학상, 재외동포문학상, 미주동포문학상, 천강문학상, 직지문학상, 해외한국소설문학상, 계간 <시와 정신> 산문(소설) 해외문학상 *현재, 캐나다 한국일보, Lady Canada 웹사이트에 <김외숙의 문학카페>, <김외숙의 장편소설>, <김외숙의 문학 산책> 란을 두고 작품활동하고 있음.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 협회, 미주 문인협회, 미주 소설가 협회 회원. 메일 : jean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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